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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 음악평론가 최은규가 고른 불멸의 클래식 명곡들
최은규 지음 / 메이트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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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 최은규

 : 메이트북스

읽은기간 : 2025/01/05 -2025/01/13


최은규님은 저녁 8시에 클래식 FM을 진행하는 진행자다. 

이 방송은 클래식 실황을 녹음해서 들려준다. 덕분에 세계 여런 곳의 공연을 편하게 들을 수 있다. 

들어본 곡이 많지 않다보니 아는 곡들이 많지는 않지만 유명한 연주팀의 연주를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자주 방송을 듣는다.

최은규님이 클래식 명곡을 소개해주는 책이라 안심하고 구입해서 읽었다. 

악기별로, 장르별로 구분되어 명곡들을 설명해주니 이해하기도 쉽고 유투브가 연결이 되어 있어 샘플이나 완곡을 들어볼 수도 있다. 

클래식은 읽는 것뿐만 아니라 들으며 감상을 해야 그 이해가 깊어진다. 

아직은 음악을 듣는 수준이지만, 향후 연주자별로도 그 차이를 느끼고 골라듣는 귀가 됐으면 좋겠다. 좋은 책을 연초부터 읽어서 좋다. 


p36 바흐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완성한 것은 1720년의 일이다. 그 시절 쾨텐 궁정에서 일하던 바흐는 특히 기악곡을 많이 작곡했다. 쾨텐 궁정은 신교도인 칼뱅파에 속해 있었으믈 교회 칸타타를 작곡한 의무가 없었을 분 아니라 영주 레오폴트공이 기악곡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콜트 공은 궁정악장인 바흐가 기악곡을 많이 작곡하기를 바랐고 바흐는 그 기대에 부응해 여러 기악곡들을 작곡했는데, 그중에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비롯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p59 초기(1790-1802)의 음악이 고전적인 절제와 우아함을 보여준다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이후의 중기(1802-1812) 작품들은 강한 활력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베토벤이 완전한 침묵 속에서 작곡활동을 한 후기(1812-1827) 작품들은 마치 자아를 내려놓은 듯 초월적인 분위기가 감돌며 현대음악을 방불케 하는 실험적인 면도 보여준다.

p71 쇼팽의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의 연인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E단조는 이러한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인해 더욱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p80 장필리프 라모는 생애 전반 50년간은 오르가니스트로 살다가 후반 30년은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고, 작곡가라는 창조자와 이론가라는 학자의 길을 병행했다

p148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1악장의 제1주제와 제2주제의 음악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클라리넷 주자가 연주하는 제1주제는 A음에 기반을 둔 A장조이지만 제2주제는 A장조의 완전5도 위의 E장조다. 그리고 선율의 성격도 다르다. 마치 성격이 다른 2명의 등장인물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p187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부분은 단연 도입부의 클라리넷 연주일 것이다. 음을 끌어올리는 클라리넷 연주는 마치 사이렌 소리 같이 들리기도 하는데, 이런 연주법을 글리산도라 한다.

p203 독주 기악곡의 전주곡을 들어보면 마치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울 때 지겹도록 연흡하던 음계나 연습곡처럼 일정한 패턴의 선율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성악가들이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전에 음계로 발성연습을 하듯 연주자들도 먼저 음계를 연주하면서 손가락을 푸는 경우가 많다.

p224 도입부의 나른한 플루트 솔로와 환상적인 하프 연주, 약음기를 낀 부드러운 현악의 음색은 귓가를 스치는 미풍처럼 감각적이다. 게다가 크로탈이라 불리는 작은 심벌즈의 오묘한 소리는 말리르메가 쓴 시어의 느낌을 지극히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니 누구라도 이 곡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인상주의 음악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은 이 곡은 그 이전의 어떤 음악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p235 신드바드의 모험을 비롯한 아라비안나이트의 여러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의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이 곡은 재미난 이야기를 풍성하고 화려한 오케스트라 소리로 표현한 특별한 곡이기 때문이다.

p257 바그너처럼 슈트라우스 역시 음악을 표현의 예술로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전통적인 교향곡의 형식을 과감히 깰 용기가 있었다. 형식의 제약이 많은 교향곡보다는 음악과 시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결합시킨 교향시에 더 끌렸던 슈트라우스는 청년 시절부터 문학적인 표제를 붙인 교향시들을 작곡했고, 그중에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나 레나우의 시 돈 후안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도 있다.

p264 슈트라우스는 이 교향시에서 인간을 B장조로, 자연을 C장조로 나타냄으로써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듯하다.

p270 대위법은 2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함께 연주하더라도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데, 그 주된 방법이 특정 지점의 음표 대 음표를 잘 맞추는 것이므로 ‘점 대 점’ 이라는 뜻의 대위법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p295 런던으로 건너가 하이든은 런던 청중을 위해 12곡의 훌륭한 교향곡들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하이든이 발표한 12곡의 교향곡들은 런던 교향곡 혹은 잘로몬 교향곡으로 불리며 하이든 후기 교향곡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p302 1788년, 32세의 모차르트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3부작인 교향곡 제 39번, 교향곡 제 40번, 교향곡 제 41번을 단숨에 완성해냈다. 이 세 작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작품들 가운데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신이 통치하는 성역”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주피터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 제41번은 신들의 왕으로 통하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장대한 규모의 작품이며, 베토벤 이전에 작곡된 교향곡들 가운데 최대 규모의 교향곡이다.

p306 사라반드는 J.S. 바흐의 춤 모음곡의 느린 악장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악이기도 한데, 바흐를 존경했던 모차르트는 바흐의 모음곡 속에 나오는 사라반드를 그의 마지막 교향곡 느린 악장에 넣어서 존경심을 표하려 했던 것 같다.

p336 마르크겐은 소년 브람스에게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을 가르쳤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에 대한 숭배를 가르쳤다. 너그러운 성품의 마르크겐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브람스의 사정을 알고 레슨비를 받지 않고 지도했을 뿐 아니라 브람스 가족이 매우 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었으니 브람스의 인생 최대의 은인이라 할 만하다.

p349 베를리오즈가 남긴 글을 보면, 한 젊은 음악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심한 절망에 빠져서 아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복용량이 너무 적어서 죽음에 이르지는 못하고 기괴한 환상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p358 어디서나 안정을 찾지 못했던 말러는 그 자신을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즉, “오스트리아 사람 중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인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요, 세계에서는 유태인이므로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p370 연주자가 이를 연주하기 위해 추운 무대 뒤의 계단을 올라 합창석으로 가는 도중 온도 차이로 인해 악기의 상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p375 그러나 1악장의 결론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반음계로 계속 추락하듯이 연주되는 이런 부분을 말러의 작품에선 흔히 추락 모티브라고 하는데, 이 교향곡뿐 아니라 말러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사용된다.

p412 이 곡은 이후에도 1828년 3월 26일에 열린 공개연주회에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는데, 이 공연은 슈베르트의 곡만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 매우 특별한 음악회였다. 이로써 슈베르트는 그의 피아노 3중주 제2번으로 대중적 명성과 함께 경제적인 소득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작곡가로서 성공하려던 순간 슈베르트의 건강은 급격이 악화되어 그해 가을에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p436 보로딘의 현악 4중주 제2번이 탄생한 1881년은 보로딘이 아내와 처음 만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보로딘은 사랑스런 멜로디를 가득 담은 이 현악 4중주를 아내와의 약혼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선물로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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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8 - 차이콥스키, 겨울날의 찬란한 감성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8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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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클래식 8

 : 민은기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06/07 -2024/06/12


민은기 교수님의 8번째 클래식 강좌..

이번에는 러시아 작곡가다. 차이콥스키가 메인이긴 하지만 러시아 5인조도 나오고 뒷부분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러시아 연주자들 이야기도 나온다. 

차이콥스키의 예민한 모습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여, 천재 작곡가들은 사실 살기는 쉽지 않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의 삶도 어려웠고, 주변의 혹평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고, 자기를 널리 알려준 루빈시타인의 잔소리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길래 만드는 음악마다 혹평을 받았을까? 의외로 프라하나 미국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유독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혹평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차이콥스키..

감정폭발적인 그 음악이 나도 참 좋다.. 작곡가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들으면 음악도 더 아는 것 같다. 

재미있다.. 


p24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랫동안 불러온 민요가 아니라, 함경북도 출신 나운규 감독이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작곡한 노래에요. 일제 식민지였던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때부터 민족의 노래가 된 거죠

p40 1848년 6월에 프라하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메타나는 혁명 세력에 적극 가담했어요. 국민의용군 행진곡 등을 작곡하면서 선봉에 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강압적인 반동정치로 인해 스메타나는 음악 활동을 제한받았고 결국 1856년 스웨덴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p62 글린카는 골수 민족주의자예요. “음악을 만드는 것은 민중이고, 예술가들은 그것을 편곡할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민중의 창조력을 강조했던 인물이지요. 글린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오페라였어요. 차르를 위한 삶 또는 이반 수사니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1836년에 초연됩니다.

p109 19세기가 되면서 음악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악가는 집안의 하인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반면에 순수 애호가로서 음악을 즐기는 건 교양인의 덕목으로 높이 평가했어요.

p121 차이콥스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루빈시테인은 이때부터 삶을 다할때까지 차이콥스키 작품의 초연 지휘와 연주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습니다.

p128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작곡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뛰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소나타 혹은 교향곡처럼 기존의 형식과 구조를 잘 알고 이를 바탕으로 곡을 설계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거죠.

p140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군요. 차이콥스키의 완벽주의가 느껴져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록 초연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후 점점 인기를 얻었어요. 막강한 소수 5인도 이 곡을 좋아해서 모임 때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를 들었다고 해요.

p156 정식 극장이 아닌 음악원 무대에 올린 것이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차이콥스키와 생상스, 그리고 그 공연을 지휘한 니콜라이 루빈시테인 말고는 관객 중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던 공연이었다고 해요. 무대를 기획한 세 사람만 즐겼던 거죠.

p163 이런 차이콥스키의 태도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차이콥스키는 특히 작곡가 빌헬림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았죠. 차이콥스키는 바그너가 오페라를 교향곡처럼 다루었듯이, 발레음악을 고향곡처럼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발레 음악에 도입하기도 했죠

p199 오네긴은 다른 오페라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다르죠?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여길 뿐 아니라 주변을 불행에 빠뜨리는 비극적 인물이잖아요.

p205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차이콥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에요. 완성도도 높고 바이올린의 고난도 기교가 많이 필요한 곡이지요.

p227 차이콥스키는 현악 합주곡을 딱 한 작품 남겼는데 그게 바로 1880년 9월부터 두 달에 걸쳐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 Op48이에요. 슬럼프 기간에 작곡된 음악 중에서는 이 곡이 가장 유명해요. 총 4악장 중에서 1악장은 모차르트 풍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죠.

p259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교향곡 5번은 기악곡이지만 곡 자체가 무척이나 드라마틱해요. 극적인 템포 변화와 계속되는 반전으로 청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힘이 있죠. 교향곡 5번은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p287 실력이 있어도 교향곡과 오페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이 두 장르에서 모두 최고였던 작곡가는 아주 드물어요. 거의 모차르트가 유일할 거에요. 차이콥스키가 모차르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는 거 기억하시나요? 아마도 차이콥스키 역시 모차르트처럼 교향곡과 오페라 두 장르 모두에서 성공하고 싶었을 겁니다.

p295 푸시킨의 원작은 오페라보다 더 심하답니다. 원작에서 게르만은 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박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리자를 이용하는 인문이에요. 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엘레츠키 공작도 나오지 ㅇ낳고요. 차이콥스키는 이 냉소적이고 진지한 푸시킨의 소설을 그래도 꽤 로맨틱하게 바꾼 거에요.

p313 아직까지도 메크 부인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차이콥스키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소문으로 자식들까지 곤란을 겪자, 메크 부인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 보는 사람들이 많죠.

p343 4악장 시작 부분에 나오는 화음은 바그너 강의 때 배웠던 트리스탄 코드와 유사해요. 트리스탄 코드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대표적인 불협화음을 말해요. 보통 불협화음이 사용되면 이후에는 협화음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트리스탄 코드는 그런 해결을 해주질 않아요.

p352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어봐서 알겠지만 그의 음악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클래식을 모르더라도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요동치게 만드맂요. 그게 바로 차이콥스키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거에요.

p362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유럽 음악 양식에도 정통하게 돼요. 만약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 실력 있는 솜씨로 막강한 소수의 작품들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주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곡들이 서유럽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거에요.

p388 다행히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파리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으로 만든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연달아 흥행하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러시아뿐 아니라 20세기 클래식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떠오르게 돼요

p407 염려한 것처럼 스탈린의 문화 정책으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수모를 겪게 돼요. 일례로 1936년 공연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얽인 일화는 쇼스타코비치에겐 큰 상처를 남겼죠. 스탈린이 이 공연을 관람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곧 정부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대한 혹평이 실렸어요. 불순한 서사도 모자라 음악이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이유에서였죠

p415 하차투리안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소련군을 찬양하는 곡이나 행진곡 등을 주로 만들어요. 특히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발표한 교향곡 2번은 프로크피예프의 교향곡 5번 Op100,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과 더불어 전쟁 중 작곡된 소련의 대표적인 교향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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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평전 - 음악, 사랑, 자유에 바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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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차르트 평전

 : 이채훈

 : 혜다

읽은기간 : 2024/03/05 -2024/04/15


보통 이런 유명 작곡가 평전은 외국인이 쓴 번역된 책들이 많은데 특이하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다. 더구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방송국PD다.

책이 벽돌책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다보니 읽는데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것 치고는 책은 괘 술술 넘어간다. 

방송국 PD답게 책의 짜임새가 꽤 탄탄하다. 

레퍼런스가 많지만 어느정도 취사선택을 해서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이 약간 아쉽다. 내가 모차르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더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아쉬움은 별로 없었을텐데... 알고 있는 지식이 짧은 내 탓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일생을 책으로 배운다는 건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꼭 해볼만한 작업이다. 

천재라고 해서 머리속에서 막 악상을 끄집어 낸 건 아니다.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고, 하이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점점 발전시켜 나갔다. 음악이 세련되어지고 깊이가 있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책은 여러번 읽고 다른 평전도 읽어가면서 더 배워야 한다. 

이런 천재와 천재의 음악을 모르고 죽는다는 건 인생에서 의미가 없다. 


p16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p17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소니는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 소수의 일류 작곡가,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p27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

p33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의 음악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1762년 3월 4일 작곡한 알레그로 B플렛 장조 K3, 5월 11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4, 7월 5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5등 하나하나가 이전 작품보다 뛰어나다.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정을 보는 듯하다

p35 이렇게 어렵게 완성된 네크롤로그는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1798년 프란츠 자버 니메첵은 이를 자신이 쓴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에 통째로 인용했고 이 내용은 오늘날 거의 모든 모차르트 전기에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네크롤로그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p38 그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기를 싫어한 반면, 마음으로 음악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는 몇 시간이고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음악을 사랑한ㄷ”고 거짓말로라도 설득해야 그의 연주를 청해 들을 수 있었다

p45 그는 1790년 형에게 황제 지위를 이어받은 뒤 모차르트를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 절대 권력자들은 모차르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모차르트 인생에 굴절을 일으키고 생존 조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p68 조지3세는 미국독립전쟁 내내 식민지 민중에게 폭군, 압제자 소리를 들었고,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으며 온갖 기행을 저지른 왕이다. 그의 독특한 행로를 묘사한 조지왕의 광기라는 코미디 영화도 있다. 왕은 훗날 요제프 하이든을 런던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p79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는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난네를에게 세상이 덧없음과 어려서 죽는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그 시절, 부모들은 비참하게 고생하며 살기보다 일찍 죽는게 낫다며 자위하곤 했다. 난네를은 10월 21일 종부성사까지 받았지만, 카롤리네 공비가 보내준 의사 토마스 ㅅ퓨벵케가 처방한 약을 먹고 2주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p92 레오폴트는 올뮈츠 주임신부인 포트 슈타츠키 백작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볼프강이 천연두에 걸린 듯하니 제발 선처를 부탁합니다” 천만다행, 백작은 모차르트 가족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친절을 베푼 것이다.

p95 레오폴트 씨는 자식 교육을 참 잘했더군됴요. 특히 아들은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활기 넘치면서도 예의가 바른, 한번 보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였어요. 잘 자라면 정말 뛰어난 음악가가 될 겁니다. 하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음악 교사로 나폴리와 베네치아, 드레스덴과 빈 궁정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p104 이 오페라가 일으킨 소동은 큰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 모라츠트 가족에게 친절하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사건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 레오폴트가 빈 궁정음악가들과 충돌하고 탄원서까지 제출함으로써 궁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본 게 분명하다.

p122 바이올린 신동으로 꼽히던 이 소년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고 키도 똑같았다. 두 소년은 만나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또래 어린이와 사귀며 어울려 놀 기회가 없었다. 린리도 마찬가지였다. 음악 신동으로 화려하게 살았지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빼앗긴 두 소년의 우정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p123 토마스 린리는 20여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극음악 세익스피어 찬가, 오라토리오 모세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8월 5일 보트사고로 갑가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p145 11월 23일과 24일 밀라노에서 연주된 K.113은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중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곡이다 .그때까지 잘츠부르크 궁정 악단에는 클라리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클라리넷의 음색을 좋아했다.

p150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는 미사 중 크레도 다음에 대주교가 복음서의 한 대목을 읽으면 오케스트라가 교회 소나타를 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위해 작곡한 교회 소나타는 모두 열일곱 곡으로 교향곡을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p156 루치오 실라가 공연되는 동안 모차르트는 라우치니에게 부탁받은 모테트 F장조 기뻐하라, 환호하라 K165를 작곡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가운데 레퀴엠 D단조, 대미사 C단조, 아베 베룸 코르푸스와 함께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p169 모차르트의 이 G단조 교향곡은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모차르트의 반항심이 자유를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만나서 빚어낸 절규가 아닐까? 음악학자 헤르만 아베르트는 이 곡을 그동안 모차르트 안에서 몇번씩 불타오르던 정열적이고 염세적인 기분이 가장 격하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p176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는 어린이가 치기엔 너무 쉽지만 전문 피아니스트가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어색하게 연주하면 바로 표시가 날 뿐 아니라, 모차르트 특유의 단순한 진행을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의미다

p201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루바토 기법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네테가 연주할 때 놓치는 것은, 아다지오의 루바토에서도 왼손은 템포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주할 때 왼손이 오른손을 엉거주춤 따라가선 안돼요. 모차르트는 오른손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때도 왼손은 정확하게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원칙은 루바토 기법에 대한 쇼팽의 소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p204 모차르트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썼으나 고상한 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p219 포글러는 만하임에서 공연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루치오 실라를 혹평해서 모차르트를 화나게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평범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건방지게 구는 사람을 혐오했고, 그런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경멸을 드러내고 직설적으로 비판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곤 했다

p233 공작이 들어와 음악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 해프닝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 사람들의 음악 취향과 언어에 거부감이 있던 모차르트는 이 일로 프랑스 혐오가 더 깊어졌다

p251 모차르트는 매우 품성이 착하고, 쉽게 사람들을 믿습니다. 커리어를 만드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죠. 이곳에서 인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약삭빠르고, 주도면밀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그의 재능 절반이면 충분하지만, 처세술은 지금보다 두 배가 필요해요

p264 265 놀라운 것은, E플렛 장조로 된 곡인데 비올라 솔로 파트가 D장조로 기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올라를 반음 높게 조율해서 D장조로 연주하면 결국 E플렛 장조가 된다. 비올라의 음색은 은은하고 내성적이지만 이렇게 현을 팽팽하게 조율하면 더 선명하고 밝은 음색을 얻을 수 있다. 선율과 화음 뿐 아니라 음색까지 창조재 낸 모차르트의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p270 졸리만처럼 사후에 잔인하게 모욕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몽군주 요제프 2세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1796년 그가 사망할 때는 황제 프란츠 2세가 지배하는 반동의 시대였다. 황제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공개 선언하기 위해 졸리만의 시신을 이용했다. 조각가 프란츠 탈러가 박제한 그의 시신은 희귀한 중남미 짐승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전시됐다. 유족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1848년 빈의 폭격으로 박물관이 불팠을 때 이 수치스런 인종차별의 증거도 사라졌다.

p308 신분사회를 비판한 그의 오페라는 황제의 계몽 정치와 잘 어울렸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황제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위협받은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황제의 푸들 정도로 여기며 미워했다. 요제프 2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못했지만, 1790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빈의 귀족들은 일제히 모차르트에게 등을 돌린다.

p313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IQ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기도를 하니 머릿속의 핏덩어리가 사라졌고” “천사가 자기를 도왔다”고 횡설수설했다. 돈 캠벨은 미국 전역은 물론 일본과 한국까지 찾아와 모차르트 효과에 대해 강연을 하고 책을 팔았다. 모차르트를 팔아서 잇속을 챙긴 사기나 다름없었다.

p320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를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준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의 반응은 까칠했다.

p351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았지만 음악사에서 가장 미움받은 여자”가 됐다.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콘스탄체를 인색하게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가난에 책임이 있고, 남편의 장례를 엉망으로 치러서 시신이 실종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p363 빈에서 쓴 첫 피아노 협주곡(F장도 K 413, A장조 K414, C장도 K415)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곡들은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게, 매우 화려해서 귀로 듣기에 즐겁지만, 그렇다고 공허하지 않게 작곡했어요. 전문가만 만족할 만한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아마추어들도 이유를 모르면서 좋아할 곡입니다”

p368 왜 모차르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그의 위대한 재능과 다정다감한 성품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죠. 엄청나게 후회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레아 징어의 소설 벌거벗은 삶에는 “결혼한 뒤에도 모차르트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콘스탄체가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연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이야기다

p377 하이든에게 바친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곡 중 두 번째 곡 D단조 K421의 메뉴엣이다. 영국의 음악사가 빈센트 노벨로는 1829년 잘츠부르크에서 콘스탄체를 만난 뒤 이렇게 써다. “그녀는 자기가 첫아이를 낳으며 진통을 할 때 모차르트가 D단조 사중주곡을 쓰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특히 메뉴엣을 우리에게 노래까지 해주며, 이 대목이 바로 진통을 들으며 쓴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절규하는 메뉴엣의 주제는 고통스런 출산의 비명, 아니, 아내 콘스탄체의 고통을 함께 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이었다. 부드럽고 맑은 중간 부분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다

p384 11월 4일 화요일, 린츠 극장에서 예약 연주회가 열렸다. “교향곡을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새 교향곡을 써야 해요.” 닷새 만에 완성한 교향곡 C장조 린츠 K425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마다 늘 언급되는 바로 그 곡이다

p414 잘츠부르크에서 빈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9시까지 작곡을 하고, 오후 1시까지 레슨을 했다. 식사 초대가 없는 날은 오후 2-3시경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작곡을 더 했다. 저녁에는 연주를 하거나 밤 9시까지 작곡을 했고, 급한 일거리가 생기면 새벽 1시까지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은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p418 모차르트의 연주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리히터가 한탄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열심히 땀흘려 연습해도 쩔쩔매는데, 당신은 애들 노래를 연주하듯 쉽게 하는군요!” 모차르트가 답했다. “저도 열심히 연습을 했지요. 더 연습을 않아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모차르트가 누구보다 부지런히 연습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p421 피아노 파트를 미처 쓰지 못했고, 리허설을 할 시간도 없었기 대문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파트만 써주고 피아노는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했다. 요제프 2세가 어리둥절해서 “자네 파트 악보는 어디 있는가?” 묻자 모차르트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p427 난네를은 조넨부르크 남작과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801년 남편이 사망한 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p431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겪는 침묵과 죽음의 시련은 바로 이 프리메이슨 입문 의례를 묘사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권력자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로 늘 죽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프리메이슨 의례는 모든 사라미 죽는다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덧없는 욕망과 집착으 버리고 순수한 자아를 찾는 방편이었다.

p434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추적한 캐서린 톰슨은 열두 살 모차르트가 빈을 방문했을 때 메스머 박사를 통해 프리메이슨을 처음 접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프리메이슨 회원인 메스머 박사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p443 모차르트는 그해 1월 14일 사중주곡 C장도 K465를 완성한 직후 “나는 현악사중주곡 쓰는 법을 하이든에게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모차르트는 공들여 쓴 이 곡들에 대해 선배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고, 하이든은 익히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이든은 러시아 사중주곡을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양식으로 작곡했다.

p448 모차르트 음악은 하이든과 비교해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1786년 빈을 방문하고 있던 디터스도르프는 황제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하이든 음악은 한 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반면 모차르트 음악은 여러 번 들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디터스도르프는 화답했다. “제 의견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p452 레오폴트는 이날 연주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을까? 비밀은 아름다운 안단테에 있다. 피아노 독주자가 연주하는 둘째 주제 마무리 대목의 왼손 파트가 아버지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 왼손 파트와 똑같았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이 아름다운 안단테를 아버지에게 바치며 그의 작품 중 한 대목을 인용하여 오마주를 표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p463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을 간직하는 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존업성이라는 사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인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도 모차르트는 자유와 평등의 꿈을 잃지 않았고, 이에 따르는 대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p467 초견연주와 짝을 이루는 것이 즉흥연주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청중의 갈채에 즉흥연주로 보답하곤 했다. 덴마크 배우 요아힘 다니엘 프라이저는 1787년 1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자그마한 인간, 위대한 거장은 두 번의 즉흥연주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했다. 가장 어려운 패시지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멋진 연주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p478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기에 피가로의 결혼을 승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절대군주였기에 이토록 파격적인 결정이 가능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빈 궁정의 수많은 귀족 중 단 한사람도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p486 베토벤은 피아니스트 존 크라머가 연주한 이 곡을 듣고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음악학자들이 “베토벤의 협주곡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이 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지적한다

p487 오페라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피아노 협주곡은 대중들의 취향보다 자기 내면의 충동에 따라 작곡하게 됐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로서는 3-4년 동안이나 빈 청중의 비위를 맞췄으니 오래 참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496 스페인 작곡가 마르틴 이 솔레르는 러시아로 가는 길에 빈에 들러서 희귀한 일을 공연했는데, 1786년 11월 7일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이듬해 봄 시즌까지 무려 78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귀한 일이 오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을 압도한 것이다.

p508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는 여전히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차별받는 도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와 같은 도시가 바로 프라하였던 것이다.

p514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다소 구식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직접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연주한 반면, 베토벤은 소나타 월광의 피날레나 소나타 열정에서 보듯 피아노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법을 구사했다. 피아노 음악은 빠르게 발전했고, 열네 살이라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세대 차를 의미했다.

p526 빈에 도착한 뒤 거의 매일 저를 진료해줘요. 이렇게 충실했던 바리자니가 1787년 9월 3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 앨범에 짧은 글을 남겼다. “그대의 친구를 잊지 말아주오. 세상의 즐거움인 그대를 두 차례 치료해서 더 살 수 있게 해드린 것은 저의 자랑이자 행복이지요” 모차르트는 바리자니의 글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9월 3일, 내 목숨을 구해 준 이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바리자니가 오래 살았다면

모차르트도 좀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p534 19세기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한 챕터를 할애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예찬했다. 돈 조반니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사랑의 천재이자 실존의 영웅이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여주인공들은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사랑과 실존을 직면했을 뿐이다.

p538 이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의 세계에 공포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기사장이 돈 조반니를 심판하려고 등장하는 순간 트럼본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모차르트는 이 트럼본을 합창석 높은 곳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빈에서는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다.

p548 그는 소탈했고, 때로 광대처럼 행동했기에 외모나 행동에서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에로틱한 것에서, 비극적인 것에서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진정한 위대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모차르트는 위대성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은 그 시대에도, 그 자신에게도 감춰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너무나 비밀스럽게 위대했기 대문에 그의 시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자신은 더 몰랐다”

p551 그는 제국이 잠자고 있을 때 황제는 깨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면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과 사제들의 기득권을 축소했기 대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 불만 세력을 잘 다독이지 못했다. 개혁 과정에서 대중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특히 장례 제도 개혁처럼 전통과 관습을 거스르는 조치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p565 그 해 여름 작곡한 마지막 세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기악곡 중 최고 걸작이다. 세상을 초월한 듯 행복으로 빛나는 39번 E플렛장조, 아름다움과 슬픔의 고귀한 결정체인 40번 G단조, 당당하고 위엄 있는 41번 C장조 주피터. 이 세 곡을 삼형제별처럼 나란히 빛나며 교향곡의 역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룬다.

p568 모차르트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그 법칙들을 완성하려 했지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의 독창적 어법과 개성 있는 예술이 그 시대의 기준이자 특징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모차르트는 한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서 있었기에 베토벤보다 더 먼 미래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p571 야상곡 창시자로 유명한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존 필드는 한 연주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건 악마 아니면 훔멜이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훔멜은 전성기 때 베토벤과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협주곡 여덟 곡과 소나타 열 곡 등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해서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낡은 음악가로 취급된다.

p584 모차르트는 이 노력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도움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796년, 콘스탄체는 라이프치히에 레퀴엠 악보를 갖고 와서 공연했다. 이때 라이프치히의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에게 후한 사례를 했고,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는 모차르트 전집 출판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p587 왕은 모차르트의 솔직한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일해 보시지 않겠소? 그대 말대로 악단이 개선되는지 한번 보고 싶소. 1년에 3,000탈러를 드리겠소. 모차르트는 제가 모시고 있는 황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말에 감동한 왕은 한참 침묵한 뒤 덧붙였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시오. 나중에라도 약속은 지키겠소. 왕은 이 일화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했고, 모차르트 사후 베를린에 온 콘스탄체에게도 말해 주었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전남편도 똑같이 말했다.

p598 그는 이 악기 소리를 듣자마자 매혹되어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아, 우리에게도 클라리넷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빛난느 효과를 아버지는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을 표현하는 클라리넷은 그 후 모차르트가 따뜻한 감정을 노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오중주곡은 균형잡힌 선율, 기품있는 형식, 우수에 찬 달콤한 울림이 가득한 주옥같은 작품이다.

p605 오페라의 주제는 여자는 정조 관념이 없다가 아니라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피와 살로 된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재조명되었다.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난 후에야 현실의 사랑이 시작되며, 끊임없이 나누고 존중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결혼 생황레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613 모차르트는 황후 마리아 루이사가 자기에게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해 여름, 황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여자는 다 그래를 혼자 관람했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그녀에겐 두 편 모두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황후는 모차르트처럼 자유사상가이자 제멋대로인 음악가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p624 그가 영국에 갔다면 어쩌면 이듬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연 기획자 요한 페터 잘로몬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은 하이든은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내와 별거중이라서 홀가분하게 영국행을 결단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늘 콘스탄체와 의논했고, 그녀의 반대에 부딪쳐서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p633 모차르트는 춤곡을 판매하고 받은 영수증 위에 이렇게 썼다. “내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 큰 돈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일이다”

p647 모차르트는 아내 없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보고 싶다는 말뿐이다. “내 유일한 소망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당신 곁에 있는 거야. 이토록 오랜 시간 당신만을 그리워하며 지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p660 오페라를 준비할 때 늘 그러했듯 마술피리도 초연 이틀 전에야 완성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과로로 앓았던 게 분명하지만 마술피리 초연 무렵에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p669 카를은 그날 아버지의 오페라를 처음 보았다. “카를은 오페라에 가는 걸 아주 즐거워했어요. 참 멋지게 생긴 아이지!” 콘스탄체가 바덴에서 요양할 때 늘 그녀를 따라갔던 카를은 이제 일곱 살이 지나 학교에 가야 했기에 모차르트와 함께 빈에 남았다. 카를은 마술피리 작곡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새잡이 파파게노의 아리아 정도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를에게 이날 오페라 관람은 평생 추억이 됐을 것이다.

p672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자전적 오페라로 인식됐다. 첫 장면, 괴물에게 쫓기는 타미노의 모습부터 모차르트의 힘든 처지를 뜻하는 걸로 보였다. 벨기에의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어린이로 돌아갔다고 보았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겨뤄야 했다. 그에겐 어린 시절이 없었다. 서른다섯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할 즈음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모차르트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로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p673 타미노처럼 고고한 것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자, 고귀한 인간성의 이상으로 넘치는 자였다. 동시에 그는 (파파게노처럼) 유쾌하고 천진한 젊은이, 세속적인 향락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젊은이였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타미노, 음식과 와인과 사랑만 있으면 만족하는 파파게노, 두 사람을 합치면 모차르트가 된다는 것이다.

p687 1791년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쓴 과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7월 하순(날짜 미상) <레퀴엠> 의뢰받음, <황제 티토의 자비> 작곡 및 프라하 여행. 9월 17일 프라하에서 빈으로 귀환, 9월 30일로 예정된 마술피리 초연에 집중 10월 중순(날짜 미상) 안톤 슈타틀러를 위한 클라리넷 협주곡 완성 10월 중순(날짜 미상) <레퀴엠> 본격 착수 11월 중순(날짜 미상) 프리메이슨 칸타타 작곡 위해 <레퀴엠> 잠시 중다 12월 5일 <레퀴엠>,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 작곡하고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

p693 집에 도착한 그는 차가운 물수건을 달라고 하더니 모차르트의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얹었어요. 하지만 열은 떵저지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사망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있었어요. 레퀴엠의 팀파니 음률을 입으로 웅얼거린 게 형부의 마지막 동작이었어요.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p696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쥐스마이어가 쓰기에 버거운 대목들을 아픈 몸으로 직접 썼다. 지금도 레뮈엠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만 듣는 사람이 적지 않다.

p706 콘스탄체와 카를 토마스의 증언을 보면 모차르트 유족들은 독살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p723 영국 사람들은 독일 출신인 헨델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히 모셨다. 이 나라에서는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통탄할 일이다. 우리 스치스런 역사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여! 그대가 아끼던 찌르레기가 죽었을 때 그대는 셋집 정원에 묘비를 세워주고 직접 애도의 시를 쓰셨지요. 그대가 새를 추모하듯 누군가 당신을 추모할 날은 언제일까요?

p727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슬픔의 흔적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슬픈 대목은 일정한 희망의 빛을 담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성의 단서가 된다

p734 모차르트는 한때 큰 도시의 궁정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가족은 죽은 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 페터 수도원,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멀리 파리의 생 의스타슈 성당에 잠들어 있다. 콘스탄체의 묘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시아버지 레오폴트의 묘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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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 나의 하루를 그림과 클래식으로 위로받는 마법 같은 시간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안인모 지음 / 지식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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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 안인모

 : 지식서재

읽은기간 : 2024/03/28 -2024/04/01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피아니스트 안인모님의 책...

이번에는 음악과 그림의 콜라보다. 

제목을 봤을때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제목은 책 안의 한 꼭지를 뽑아낸 것이었다.

책에는 다양한 미술관의 그림들과 쇼팽을 비롯한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이 실려있다.

저자는 그림을 보며 자신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내용을 표현하고, 이후 그 그림에 어울리는 음악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림은 근대 이후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고, 음악도 비슷한 시절의 음악을 엮어 마치 음악과 그림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었다. 

음악이 주는 힘이 있어서인지,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그림에 더 멋져 보인다. 

촛불이나 무드등 아래에서 책에서 소개한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한 잔 하며 그림을 감상하며 글을 읽어야 제맛이 날 것같다.

괜한 허세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걸 어쩌랴.. 

분위기 잡고 싶은 책이다.. 여자꼬실때 아는 체 하기 좋은 책이다.. 

역시 책이란 허세가 좀 섞여야 더 잘 읽히는 것 같다.. 속물같아서 미안하다. 


p13 클래식을 공부하다 보면 당대의 철학을 접하게 되고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동시대를 살며 서로가 주고받은 영향들이 문화와 예술의 큰 흐름이었지요.

p28 아주 엄격하게 이 반복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죠. 위 성부의 선율에 어떠한 변화가 있더라도 베이스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정해진 화성 진행을 반복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p47 하마터면 변호사가 될 뻔했고, 피아니스트를 선택했지만 그 꿈이 좌절되자 작곡가로 살아가는 슈만. 슈만의 꿈은 좌절된 게 아니라, 키워진 것이에요.

p80 피카소를 찍은 사진들을 보면, 당당한 표정과 근육질의 다부진 몸에서 열정적인 스페인 기질이 우러나요. 스무 살의 자화상 <나, 피카소>에서도 그는 한껏 힘준 강력한 눈빛으로 선전 포고를 합니다.

p88 파리의 여느 카페에서 연주되는 뻔한 음악도 아니에요. 드뷔시는 피아노의 해머가 피아노 줄을 때려서 내는 소리를 너무나 싫어했어요. 그래서 피아노 소리에서 해머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음악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드뷔시가 지향한 음악, 그 음색과 음향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눈앞에서 그림을 펼치는 마법을 부려요.

p95 너무나 놀라운 건, 슈베르트가 특히 아팠던 말년에 작곡한 곡들이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주옥 같은 명곡이라는 점이에요.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아프레지오네 소타나,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 그리고 현악 5중주와 가곡집 백조의 노래까지.

p109 밤의 음악 녹턴을 들으며, 밤의 그림을 봅니다. 덴마크 화가 페테르 일스테드의 촛불에 책 읽는 여인. 그녀는 독특하게 앉아 있어요. 벽에 붙은 테이블과 마주 앉은 것도 아니고, 벽에 기댄 의자와도 어긋난 방향으로 앉아있어요. 초에서 나오는 불빛을 좀 더 잘 받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녀의 주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니까요

p122 불현듯, 공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가 와닿습니다. 특히 소리 내는 일을 하는 음악가는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민폐일 수밖에 없어요. 붓을 든 그녀가 오른팔로 캔버스에 매달린 걸 보면, 피아노 소리가 조용히 집중해야 하는 작업을 방해한 걸까요? 그리고 보니 화가의 표정이 힘들어 보여요. 피아니스트는 연습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한 공간을 공유할 뿐, 그 외 것들은 서로 공감하지 못합니다.

p156 프리앙의 그림 연인과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모두 그들이 30대가 되기 전의 작품이에요. 20대의 열렬했던 사랑,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단했던 그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사랑도 상황도 바뀌기 마련이니, 처음의 그 사랑을 그대로 끝까지 지켜내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죠

p167 포레는 이 곡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중후하고 아름답게 녹여냅니다. 마치 하소연할 곳이 없어 악보에 잉크로 구구절절 외치는 듯해요. 포레가 자신의 슬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엘레지는 그의 낭만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마지막 작품이에요. 포레는 자신의 감정을 악보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자신답지 않다고 느끼고, 이후엔 음악에 감정 표현을 절제합니다.

p174 그대를 사항해나 알레라이데가 사랑 앞에서 찬진난만한 스물다섯 청년 베토벤의 노래였다면, 멀리 있는 연인에게는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중년 베토벤의 노래잡이에요. 그래서 더 아프답니다.

p183 60살이 된 브람스는 클라라를 만난 지 40년이 되자 6개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해서 그녀에게 헌정합니다. 그중 두 번째 곡 인터메조(간주곡)에서 브람스의 가슴 아픈 사랑이 들려옵니다. 그의 마음속 이야기를 읊조리듯 담아낸 이 곡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생애 마지막 연서였어요. 악보를 전해 받은 74세의 클라라는 브람스가 평생을 담아온 사랑을 오롯이 느껴요. 브람스의 사랑이 오선지 위 검정 잉크가 퍼지듯이 사방에 울립니다.

p190 상드는 쇼팽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어요. 들라크루아는 장례식에 참석해, 쇼팽의 친구 세 명과 함께 관을 운구합니다. 쇼팽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임종을 맞는 순간에 곁을 지킨 것도 들라크루아였어요. 이후 들라크루아는 상드와 우정을 유지하며, 죽기 직전까지 편지 왕애를 이어나가요. 결과적으로 둘의 편지 속에 언급된 쇼팽 이야기는 쇼팽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었지요

p197 아무것도 모른 채 시동생과 사랑에 빠진 프란체스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어요. 게다가 파울로는 프란체스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가련한 그녀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둘의 사람은 깊어집니다. 그들은 신랑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요. 이 위험한 만남은 결국 형 조반니에게 발각돼요. 조반니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죽여버려요. 용납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한 두 영혼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곧장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p199 귀차르디는 귀족, 베토벤은 평민이었어요. 게다가 그녀는 어느 백작과 약혼한 상태였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는 데다 미래가 불투명한 음악가였죠. 고통이 없는 사랑이 있을까요? 이 사랑도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귀차르디의 사랑으로 행복을 찾아가던 베토벤은 그녀를 향한 사랑과 격정을 피아노 소나타 14번에 녹여냅니다. 그리고 이 곡을 그녀에게 헌정해요

p235 건반 위의 슈퍼스타 리스트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위로하는 로맨티스트 리스트가 작곡한 이 곡에는 왕년의 그가 보여주던 화려한 기교는 들리지 않아요.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로 보듬고, 진한 울림으로 다독이기 위해, 리스트는 시를 쓰듯 음표를 써 내려가요. 한 줄 한 줄 여백이 느껴지는 이 곡에는 공작부인에 대한 리스트의 사랑과 신뢰가 가득합니다.

p240 둘의 만남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 70세의 클라라가 자신의 은퇴 무대에서 연주한 곡은 바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어요.

p256 라흐마니노프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우울증을 치료해 준 달 박사, 언제나 곁을 지켜준 아내 나탈리아, 라흐마니노프는 이 노래를 N에게 헌정해요. N이 누구인지는 라흐마니노프 본인만이 알지요. 니콜라이 달 박사아 나탈리아, 혹은 그들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어요. 아마도 라흐마니노프가 마음 깊이 고아뭐할만큼, 도움을 준 사람일 거에요. 눈먼 소녀의 그림을 보며 노래를 들으니 N이 라흐마니노프의 손을 잡아주었듯,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p271 저녁 퇴근길의 차디찬 공기를 맞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들어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아름다운 저녁입니다. 이 곡은 프랑스 시인 부르제의 시에 드뷔시가 선율을 붙인 노래에요. 드뷔시는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빛을 그려냅니다. 음표에 말이죠. 그는 특정 순간의 기분과 느낌, 정취, 또는 시를 읽고 떠오르는 장면을 음악으로 담아내요. 그러니까 이 곡은 해가 지고 저녁이 시작되는 그 시점의 풍경을 전해요

p282 도시무도회와 부지발 무도회에 등장하는 발라동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에요 르누아르뿐 아니라, 드가, 로트레크, 모딜리아니 등 당대 웬만한 프랑스 화가들의 캔버스엔 그녀가 그려져 있지요. 그녀의 예쁜 얼굴은 다양한 붓끝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화가의 모델 일을 하며 그들의 애인 역할도 하던 다른 모델들과 달리, 발라동은 모델 일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화가가 되어 직접 그림을 그려요

p309 음악에 대한 사티의 관념은 다소 독특했어요. 대부분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이 주목받길 바랐지만, 사티는 그 반대였어요. 사티는 주목받는 음악이 아닌, 공간속에서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음악을 추구합니다.

p310 짐노페디는 사티의 대표 가구 음악이에요. 짐노페디는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청년들이 나체로 추던 춤이에요. 아마도 사티는 우연히 이 낯선 단어를 접하고 그 생소함에 이끌려 제목으로 사용한 것 같아요. 3개의 짐노페디 중 1번은 다양한 미디어에 등장해 유명해졌어요.

p337 스탈린이 죽고 4년 후, 51세가 된 쇼스타코비치는 사랑하는 아들 막심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이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해요. 막심은 자신의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연주회에서 이 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합니다. 특히 이 곡의 2악장 안단테는 낛을 놓고 듣게 되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요. 전체적으로 여운이 느껴지는 간결미와 느린 템포의 조화로움이 지친 영혼을 달래줍니다.

p364 온 사방이 꽃이고, 나무이고, 생명체입니다. 화관 속에 누운 듯한 그녀만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아요. 투명한 냇물에 누운 그녀는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요. 그녀의 눈에 하늘은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과 그속에 자리한 그녀의 차디찬 육체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p366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바흐에요. 바흐는 마르첼로가 오보에로 새긴 깊은 슬픔에 감동해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해요. 이렇듯 바흐의 손에 의해 마르첼로의 협주곡으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마르첼로의 이름도 주목받게 됩니다.

p374 물이 내게 준 것은 칼로의 그 유명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녀의 모든 희로애락을 잘 보여주는 진정한 자화상이에요. 얼굴 없는 자화상이면서, 그녀의 삶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자서전이죠.

p381 그녀의 생애 마지막 그림이 된 수박 그림. 칼로는 빨간 과육에 대문자로 마지막 메시지를 써요. 인생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 1954년 멕시코 코요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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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찾아서 - 비르투오소의 면모들 거장이 만난 거장 4
알프레드 코르토 지음, 이세진 옮김 / 포노(PHONO)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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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팽을 찾아서

 : 알프레드 코르토

 : 포노

읽은기간 : 2024/03/15 -2024/03/31


올해는 책이 잘 안넘어간다. 아마 간신히 100권정도 읽을것 같다. 

개론서보다는 각론으로 들어가는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쇼팽의 전기라고 해야하나? 쇼팽을 흠모하는 프랑스 피아니스트가 쓴 쇼팽에 대한 모든것이다. 

교육자로서의 모습, 연주자로서의 모습, 인간적인 삶의 모습 등 쇼팽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했다. 

그동안 내가 알던 쇼팽이 아니어서 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여성스럽고 민감하고, 남에게 자기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물건도 부수고 화도 잘 내는 마초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외모만 봐서는 잘 모를 일이다. 

유명했던 한 사람을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좋다. 

역시 각론으로 들어가야 더 재미있다. 즐겁게 읽었다. 


p27 유명한 폴란드 작곡가가 4분의 3 입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과 중세의 성이 보이는 낭만적인 배경, 인물은 오른손에 자신의 작품 악보를(기발한 가정인지 화가의 상징적 의도를 읽어낸 것인지) 둘둘 말아 쥐고 있다. 당시에 쇼팽은 영광의 정점에 있었고-익명의 카탈로그 작성자는 여기서 상업적 의도가 명백한 생리학적 세부사항을 짚고 간다- “몇 년 후 그의 목숨을 앗아갈 병은 아직 징후를 드러내지 않았다.

p39 쇼팽이 죽기 1년 전, 정확히는 1848년 8월 18일에 칼더하우스에서 폰타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농담 반 불평 반으로 평생 두 가지는 안타깝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커다란 코와 말을 잘 안 듣는 네 번째 손가락”

p50 내 세대는 쇼팽의 마지막 제자라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력을 쌓으려 했거나 실제로 그렇게 했던 피아니스트나 피아노 선생들을 적잖이 알 것이다. 그중 몇몇은 실제로 어쩌다 한 번 쇼팽에게 오디션이나 대수롭지 않은 추천사를 받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p55 쇼팽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매우 중요시했고 클레멘티의 전주곡과 연습곡을 병행시켰다. 본인도 이런 곡들오 피아노를 배우고 실력을 쌓았던 만큼, 기초 수업을 보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p58 마티아스는 어떤 제자가 정신 못차리고 화음을 이상하게 쳤다고 쇼팽이 의자를 부숴버리는 모습까지 봤다고 한다. 연주의 디테일을 놓치거나 귀에 거슬리는 음을 내면 스승은 불같이 화를 낸다. 자기 머리를 쥐어뜯거나, 악보에 지시사항이나 운지법을 표기하는 연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예사였다.

p87 어쩌면 나쁠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잖아? 오직 결과만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려줄 수 있어, 베토벤의 서신에도 거의 동일한 진술이 있지 않았던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

p115 1846년부터, 그러니까 환상 폴로네즈와 뱃노래를 발표한 이 해 이후로 쇼팽은 작품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의 1846년 이후 작품은 야상곡 두 편(작품 62), 마주르카 세 편(작품 63), 왈츠 세 편(작품 64)이 전부다

p133 내가 보기에 들라크루아는 쇼팽의 프랑스인 측근 중에서 그의 타고난 이상주의를 가장 제대로 본 사람, 그를 가장 지적으로 아껴주었던 사람이다. 들라크루아는 그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가장 확실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p161 상당한 금전적 수익에도 불구하고(두 번의 연주회로 5천 굴덴을 거둬들였다) 바르샤바 가제트와 폴라느 통신은 물론, 폴란드 국영신물까지 찬사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프랑스 아가씨가 무대에 올라와 그에게 월계관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더없이 강조하는 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연주회 초청을 죄다 거절했다.

p191 멘델스존은 아헨에서 쇼팽이 힐러와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고,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최고는 쇼팽입니다.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와도 같은 충격을 줍니다.”

p197 1835년의 리스트는 경이로운 비르투오소의 전형이었던 반면, 쇼팽은 시인과도 같은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리스트는 흡사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기막힌 연주를 뽐내지만 쇼팽은 반대로 청중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 내면의 소리르 듣는 데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기복을 타긴 하지만 영감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면 피아노 건반에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노래를 끌어냅니다.

p209 그는 단순히 재주가 뛰어난 비르추오소, 건반의 대가가 아니므로 그는 단순히 이름난 에술가가 아니므로, 그날의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쇼팽이었다.

p213 이 기사는 쇼팽을 슈베르트와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예리한 지적을 남긴다 “우리가 슈베르트를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쇼팽과 천성이 흡사한 인물이 달리 없기 대문이다. 슈베르트가 성악을 위해서 한 일을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했다”

p231 그의 편지를 보면, 대중앞에 서기 싫은 마음보다 경제적 필요가 압도적이었던 모양이다.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고 내가 해낼 힘만 있다면 해야지.

p258 세련미를 추구하는 댄디즘,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이 소년에게서 조짐을 보이고 ㅇㅆ었다. 쇼팽의 경우는 교만하고 과시적인 멋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p263 이 선생이 모차르트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열렬히 찬양했기 때문에(특히 바흐는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그리 인기 있는 음악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팽도 그 영향으로 고전파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훗날 완벽한 선을 표현하는 자랑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p266 한편에는 기적 같은 천재성, 거의 초자연적인 재능이 있다. 그는 아무런 기초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음악만이 지니는 특권, 다시 말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조합된 소리들이 지니는 감동의 힘을 단박에 통찰했다.

p276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확신했다. 자기는 객지 생활을 하다가 홀로 죽을 운명이라고, 자기 주위에는 자기가 어떻게 되는 관심도 없고 자기에게도 별 의미없는 외국인들뿐일 거라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을 사귀겠지만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없을 거라고.

p283 쇼팽의 훌륭한 자질을 늘 너그럽게 평가했던 리스트도 쇼팽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수없이 다채로운 뉘앙스로 뭉친 사람이었다. 그 뉘앙스들은 서로 상충하기도 하고 서로를 은폐하기도 했기 때문에 하눈에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리스트는 슬라브 사람들에게 대체로 이런 기질이 있다고 했다

p286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 스승의 분노 발작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스승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이유로 성질을 내다가 결국은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가구나 물건을 박살내는 것으로 끝을 내곤 했다.

p290 쇼팽은 어떤 도덕적 의무나 삶의 규범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믿음은 그의 양육 환경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어차피 선험적인 신념에 바탕을 둔 믿음이었기에, 이 믿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그의 불같은 분노 아니면 차가운 경멸을 살 수 밖에 없었다

p296 쇼팽은 그렇게나 무대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선연주회에는 선뜻 출연할 만큼 너그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작곡가로서의 수입이 문제될 때는 양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쓴 편지들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p299 그에게 두 사람은 그냥 우연히 알게 된 지인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슈만이 자기에게 헌정한 작품-불멸의 크라이슬리라아-의 악보를 펼쳐보지도 않고 피아노 위에 몇 달간 방치했다. 이 최초의 숭배자의 열광적인 찬사에서 그가 얻은 바를 생각해본다면 쇼팽의 배은망덕이 각별히 더 무례하게 느껴진다

p305 포토츠카 백작부인은 하이네의 로렐라이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여성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렸다. 만약 그녀가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쇼팽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면, 그 감정은 작곡가의 마지막 순간에 상징적으로 거룩한 것이 되었으리라

p314 카라조프스키는 그 책에서 콘스탄챠가 쇼팽에게 불러일으킨 연정을 언급하면서 바르샤바 음악원 재학생들 가운데 그녀를 흠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쇼팽의 마음을 거절한 셈이 되어 얻게 된 불멸의 이름에 아무 관심이 없었는지 “어쨋거나 소팽은 나의 요세프만큼 훌륭한 남편은 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p326 쇼팽은 육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는지 도덕적 혐오감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육체의 상스러운 짓거리”를 극구 거부했다. 반면에 상드는 바로 그런 행위의 “천사같은 신성함”을 찬양하고 “천국에서만 이름을 갖는 그 행위”에 거룩한 순수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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