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은 베토벤을 만나라 - 클래식 음악을 시작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안우성 지음 / 유노라이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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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에 한번은 베토벤을 만나라

 : 안우성

 : 유노라이프

읽은기간 : 2025/05/02 -2025/05/05


베토벤.. 이름만으로도 나를 압도하는 대단한 양반. 

그러나 곁에 두고 싶지는 않은 사람. 그냥 음악만 듣고 싶은 사람. 

성질머리 안좋고, 괴팍하고, 오만하고, 여자 밝히는(?) 그러나 음악은 기가 막히게 만드는 사람..

내게는 베토벤이 그런 사람이다. 

베토벤의 일생에 대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하고, 유명한 음악에 대한 해설이라고 하기에는 밋밋하고, 베토벤의 해석이라고 하기에는 특별한 게 별로 없어보이는 책이다. 

저자의 베토벤 찬가가 이 책을 가장 잘 정의내리는 것 같다. 

챕터마나 베토벤의 유명한 음악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QR코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줘서 베토벤의 유명한 음악을 게속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내게는 어려운 베토벤이다. 집에 베토벤 전집이 있는데 역시 어렵다.. 

베토벤은 빈약한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높고 힘들다. 그래도 듣는 재미가 있다. 



p26 그럼에도 연주자들은 기꺼이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노력의 시간이 몸에 배어 온몸의 근육이 기억할 때까지, 무의식중에도 자동으로 연주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연습한다.

p35 평소보다 잘 돌아가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고작 잔기침 때문에 무대 뒤 대기실에서 세상이라도 잃은 듯 펑펑 목 놓아 우는 연주자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p50 1808년 3월 긴 세월이 지나 베노베은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에 참석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되고 난 뒤,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존경을 담아 입을 맞추었다. 이후 베토벤은 하이든을 헨델, 바흐, 글루크, 모차르트와 동등한 반열의 거장으로 존경했고 자신은 그 옆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는 미천한 존재라 말하며 스스로를 낮췄다.

p69 베토벤의 음악이 항상 아름다운 시점이나 고차원적인 이상을 담고 있을 것만 같지만, 모든 작품이 꼭 고상하지는 않다. 개중엔 유치한 일상을 ㄷㅏㅁ은 작품도 있고 순간의 독특한 발상에서 착안된 위트있는 작품도 있다. 바로 베토벤이 스물 다섯 살에서 스물여덟 살 사이에 작곡한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가 대표적이다.

p103 나를 붙는 것은 예술, 오직 예술뿐이었다. 나의 예술적인 재능을 모두 드러내기 전에는 죽음이 천천히 다가왔으면 좋겠다. 죽음이여, 올테면 와 보라. 나는 용감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이 유서를 기점으로 베토벤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던 난청을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로 다시금 창작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p111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의 음악 인생에 있어 첫 번째 후원자로 베토벤이 예술에 필요한 기본 소양을 쌓을 수 있도록 격려해 준 인물이다. 또 베토벤이 음악의 메카 빈에서 하이든이라는 거장의 곁에서 체계적인 음악을 배워 훗날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 베토벤의 인생과 음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인물인 셈이다.

p119 이 시기 탄생한 열정엔 베토벤이 두 여인 사이에서 가졌을 열정과 혼란의 복잡한 마음이 녹아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를테면 다른 피아노 소나타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격정적인 악상이 펼쳐지는 1악장과 3악장은 분명 도도하고 관능미가 넘쳤던 요제피네에 의한 악상일 것이고, 그에 반해 서정적이고 침울한 분위기의 2악장은 차분한 성격의 테레제를 떠올리며 작곡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p141 미친 관객이 미친 프로를 만든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 줄 라주모프스키 백작과 악보 속 예술을 밖으로 끌어내 훌륭히 연주해 줄 연주자가 있었기에 18세기 전통의 한계를 넘어선 한 단계 진보한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다.

p152 이 네 음으로 이뤄진 주제는 1악장만이 아니라, 전체 악장에 등장하며 통일성 또한 훌륭히 이뤄내고 있다. 베토벤은 마치 블록을 쌓아 나가듯 경이로운 건축기법과도 같은 작곡 기법으로 30분 길이의 대 교향곡을 완성한 것이다.

p161 정말 재밌는 사실은 두통이 있어 병원을 찾을 때도, 감기에 걸려 병원을 찾으 ㄹ때도, 의사들의 처방엔 거의 항상, 열 번중 아홉 번은 꼭 산책이 들어가 있었다. 정말 산책에 진심이 나라다.

p163 전능하신 신이시여, 숲속에 나는 행복합니다. 이곳에선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업합니까? 그러곤 “나의 귀는 이곳에선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라고 베토벤은 고백한다. 괴팍한 사람이라 낙인찍힌 자의 모멸감, 날개를 꺾인 가장 높이 날던 새의 수치심은 적어도 이 숲속에서만큼은 베토벤을 괴롭히지 못했다.

p181 음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매료되는 것이다. 사랑과 음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매료된다는 것이다.

p201 1815년부터 베토벤이 쉰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작곡된 음악을 베토벤의 후기 음악으로 분류하는데, 그 서막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 바로 함머클라비어다. 흔히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로 비창, 월광, 열정을 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p210 1819년 작곡에 착수해 4년 뒤인 1823년에 완성되었다. 이 시긴 베토벤 인생 말년이자 음악적 원숙기로, 베토벤의 심오한 예술성이 고르란히 녹아 있는 곡이다. 그 당시에는 높은 난이도 때문에 잘 연주되지 않다가, 20세기 후반에 관심을 받았고, 지금은 매우 활발히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p235 두 번째 편이의 첫머리에 “월요일 저녁 7월 6일”이란 구절이 있는데, 베토벤이 7월 6일이 월요일이었던 해에 여행을 떠났으며 또 동시에 여인들과 교류를 가졌던 해를 단서로 추적한 바, 마침내 1812년이었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이런 단서들의 조합으로 음악학자들은 이 편지의 주인공으로 한 여인을 지목했다. 바로 안토니오 브렌타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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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식 - 눈과 귀로 느끼는 음악가들의 이야기
김호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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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클래식

 : 김호정

 : 중앙Books

읽은기간 : 2025/03/28 -2025/03/31


나처럼 막귀는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좋은 연주자와 평범한 연주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음정대로 치면 잘치는 연주자일뿐..

평론가들이 연주자들을 평할 때도 들으면서 그런갑다 하는거지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는 평론가들이 말하는 그 잘하는 포인트를 알려준다. 

임윤찬의 연주가 왜 좋은지, 백건우의 연주는 왜 깊이가 있는지, 손열음의 연주는 다른 연주자와 무엇인 다른지를 비교해서 알려주니 더 잘 캐치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 귀가 열려서 훌륭한 연주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단지 음정에 맞게 힘차게 연주하는 연주자만 대단한 연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한국 연주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다 보니 더 애정이 간다. 내가 좋아하는 손열음님이나 백건우님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한 연주자도 설명해주니 책읽는 재미가 있었다.

한번 잡으면 계속 읽게 된다. 

올해의 책으로 충분히 꼽을만한 책이다. 

좋았다. 


p5 음악가들이 인간의 감정과 신념을 음악으로 코딩한다면, 저는 디코딩하는 작업을 해본 겁니다. 예를 들어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왜 이렇게 좋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 본 사람들과 이렇게 소통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습니다.

p16 이 차이가 오직 속도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고, 바로 무게 때문입니다. 백건우의 프레스토는 단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건반의 바닥까지 긁어내려 갈 정도로 묵직하면서 빠릅니다. 근육질의 전력질주죠.

p22 나는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음악이 뭔지, 피아노가 뭔지 모르고 그냥 쳤어. 한마디로 엉터리지. 어려운 곡을 쳤다 해서 최연소다, 최초다 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이제 가서 이제 공부 시작해야 하는데 한국에서의 경험이 너무 안 좋아서 오히려 피아노하고 거리를 두게 되더라고. 음악은 끌리는데 악기가 두려운 거라.

p28 손열음의 연주 영상을 보면 입으로 뭔가를 중얼중얼거립니다. 주문 거는 거 아니고요. 손으로 치고 있는 음의 계이름을 입으로 부르는 겁니다.

p35 초등학교 시험 때 ‘이것만 맞았으면 네가 1등인데 아쉽지도 않니?’하는 엄마에게 (1등 한) 그 아이는 원래 공부 무지 잘하는 애야. 나랑은 달라라며 도리어 엄마에게 무안을 주었으며, 콩쿠르에서 나보다 총점이 1점 낮게 발표된 친구와 공동 1등이 되었는데오 친한 친구와 상을 나누었다며 오히려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들었던 나였다.

p44 사실 음악은 음악가 자신의 바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재능을 가장 잘 알아보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말을 참고할 만합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본 후 그가 하는 말. “생기 대로 친다”는 명언입니다. 음악가가 가진 성격, 사고 방식, 말투가 음악에 어떻게든 묻어나옵니다.

p50 중요한 점은 재미입니다. 낯선 곡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임윤찬 돌풍의 진원지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듣는 아름다움, 감상하는 기쁨을 넘어서 특별한 재미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p56 임윤찬의 화음은 균형이 다릅니다. 한 음만 깨끗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도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다가 내성이라고 부르는, 화음 안쪽의 음표들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보통은 잘 들리지 않던 것들입니다.

p73 위험 감수자인 임윤찬이 만약 절대 틀리지 말자고 마음먹었다면 안전하게 그렇게 칠 수 있었을 겁니다. 가장 먼 지점의 음이 약간씩 늦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새끼손가락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그때 건반을 누르면 되죠. 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임윤찬의 음악이 아니겠죠.

p79 제대로 된 음악가라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일매일 산을 넘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물 살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즘 그가 넘는 산은 쇼팽의 연습곡 전곡(27곡)입니다.

p83 임윤찬이 7번 연습곡을 설명해 주기 위해 악보를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손가락 번호 같은 기술적인 것은 거의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악보는 깨끗한 편이었죠. 대신 마치 시의 한 구절 같은 글귀들이 악보 곳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꿈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이 사라지는 것, 슬픔을 체념하고 얼어붙은 마음, 왈칵 쏟아지는 눈물, 점을 하나 딱 찍는 느낌

p91 한 주 전 레슨 때 선생님이 ‘이런 이미지인 것 같다’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제가 적고서 다음 레슨 때 그렇게 쳤더니 선생님께서 막 웃으시더라구요. 그건 지난주의 생각인데 왜 그거를 그렇게 연습하냐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요. 상상력은 매번 다른 거죠. 그럼에도 전체적인 에튀드마다 이미지는 있는 것 같아요.

p97 항상 20세기 초중반 피아니스들의 에튀드를 더 좋아하더군요. 녹음 기술이 막 시작했을 때의 연주자들이죠. 그때의 피아니스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넣고, 되게 자유로웠다고 생각해요. 깎아놓은 듯한 완벽한 음악에는 매력을 못느껴요? AI가 만든 자연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p107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러 나왔는데 난데없이 피아노 조율이라도 하듯 뚱땅거리며 건반의 소리를 내본 장면입니다. 이래도 되나 싶은데요. 말씀드렸듯 지금보다 자유로웠던 그 시대에 종종 있던 일이었습니다.

p118 다음 음악에는 정경화만이 구사하는 독특한 리듬이 나오는데요. 브람스의 협주곡 3악장입니다. 정경화는 시작 부분 첫마디의 16분음표 3개를 한 덩어리처럼 몰아붙여 연주하곤 합니다.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최근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같이 타오르고 물러서지 않는 정경화식 독특한 리듬입니다.

p140 진은숙의 작품은 왜 인기가 많을까요? 어떤 점이 그 음악의 매력이며, 왜 베를린, 뉴욕, LA,런던 같은 곳에서 그에게 새 작품을 위촉하고, 자꾸만 연주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 들어보는 소리 때문입니다. 진은숙은 독자적 판타지를 위해 수없이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악기에서 새로운 소리가 납니다.

p157 고음을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고음에서 어떤 색깔을 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조수미는 뭐니뭐니 해도 플루트입니다. 가벼운 금빛의 이 악기와 똑 닮은 소리를 냅니다.

p162 로마로 온 지 4개월 만에 편지로 이별 통보를 받은 조수미는 독한 마음으로 음악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조수미는 자신의 책을 비롯해 곳곳에서 K군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한다. ‘그와 사랑하면서 나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폭발적이고 섬세한지 배웠고, 그와 이별하면서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와의 사랑은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p172 연주자 변경이야 흔한 일이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다. 메켈레와 유자 왕은 공인된 연인 사이였는데 최근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교제 시절, 이들은 각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올렸다.

p178 음악 재능은 음 높이에 대한 정확한 감각 같은 것과 연관되곤 하죠. 하지만 진짜 재능은 애정, 또 몰입하는 힘일 것입니다. 김정아의 스승인 첼리스트 이강호 또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p183 엄마가 바깥에서 방문을 잠그고 아들,딸의 연습을 시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잘파(Z+알파) 세대 음악 영재들은 공부도 잘하고, 축구 팀에서도 활약한다.

p192 호로비츠의 조용한 노래가 더욱 매력적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시그니처는 아무래도 콘서트홀의 지붕을 날려버릴 것 같은 충격적인 사운드와 꽉 찬 화음 같은 것이겠지만요. 사실 호로비츠의 진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순간은 이런 조용한 노래들에서 나오고는 합니다. 이후의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호로비츠만큼 못할 것이라는 공포증을 남긴, 슈만의 어린이 정경중 트로이메라이는 꼭 들어봐야 합니다.

p202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해설이 그의 인기를 한층 높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땅에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훈련받은 젊은 지휘자의 첫 무대를 경험했습니다” 미국의 자존심을 우뚝 세워준 음악인인 거죠.

p209 벨리 셀즈는 번스타인이 치욕적인 전향서를 쓰고 무대에 다시 설수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또 정치 상황이 바뀌어도 늘 존재했던 위협때문에 번스타인이 작곡가로서 재능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봤다.

p213 사람들은 칼라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성을 수집하는 남자에게 기꺼이 수집당했던 디바. 그리고 열일곱 살 많은 오나시스에 대해서는 이렇게 수군댑니다. 칼라스의 명성과 젊을 모두 빨아들이고 떠난, 삐뚤어진 율리시즈라고요.

p235 그는 자신의 장례식이 밝은 분위기에서 치러지길 원했다. 식이 시작될 때 이탈리아 모데나의 휘장을 들고 들어온 이들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축구팀 유벤투스의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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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 음악평론가 최은규가 고른 불멸의 클래식 명곡들
최은규 지음 / 메이트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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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으면서 익히는 클래식 명곡

 : 최은규

 : 메이트북스

읽은기간 : 2025/01/05 -2025/01/13


최은규님은 저녁 8시에 클래식 FM을 진행하는 진행자다. 

이 방송은 클래식 실황을 녹음해서 들려준다. 덕분에 세계 여런 곳의 공연을 편하게 들을 수 있다. 

들어본 곡이 많지 않다보니 아는 곡들이 많지는 않지만 유명한 연주팀의 연주를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자주 방송을 듣는다.

최은규님이 클래식 명곡을 소개해주는 책이라 안심하고 구입해서 읽었다. 

악기별로, 장르별로 구분되어 명곡들을 설명해주니 이해하기도 쉽고 유투브가 연결이 되어 있어 샘플이나 완곡을 들어볼 수도 있다. 

클래식은 읽는 것뿐만 아니라 들으며 감상을 해야 그 이해가 깊어진다. 

아직은 음악을 듣는 수준이지만, 향후 연주자별로도 그 차이를 느끼고 골라듣는 귀가 됐으면 좋겠다. 좋은 책을 연초부터 읽어서 좋다. 


p36 바흐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완성한 것은 1720년의 일이다. 그 시절 쾨텐 궁정에서 일하던 바흐는 특히 기악곡을 많이 작곡했다. 쾨텐 궁정은 신교도인 칼뱅파에 속해 있었으믈 교회 칸타타를 작곡한 의무가 없었을 분 아니라 영주 레오폴트공이 기악곡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콜트 공은 궁정악장인 바흐가 기악곡을 많이 작곡하기를 바랐고 바흐는 그 기대에 부응해 여러 기악곡들을 작곡했는데, 그중에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비롯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p59 초기(1790-1802)의 음악이 고전적인 절제와 우아함을 보여준다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이후의 중기(1802-1812) 작품들은 강한 활력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베토벤이 완전한 침묵 속에서 작곡활동을 한 후기(1812-1827) 작품들은 마치 자아를 내려놓은 듯 초월적인 분위기가 감돌며 현대음악을 방불케 하는 실험적인 면도 보여준다.

p71 쇼팽의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의 연인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E단조는 이러한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인해 더욱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p80 장필리프 라모는 생애 전반 50년간은 오르가니스트로 살다가 후반 30년은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고, 작곡가라는 창조자와 이론가라는 학자의 길을 병행했다

p148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1악장의 제1주제와 제2주제의 음악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클라리넷 주자가 연주하는 제1주제는 A음에 기반을 둔 A장조이지만 제2주제는 A장조의 완전5도 위의 E장조다. 그리고 선율의 성격도 다르다. 마치 성격이 다른 2명의 등장인물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p187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부분은 단연 도입부의 클라리넷 연주일 것이다. 음을 끌어올리는 클라리넷 연주는 마치 사이렌 소리 같이 들리기도 하는데, 이런 연주법을 글리산도라 한다.

p203 독주 기악곡의 전주곡을 들어보면 마치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울 때 지겹도록 연흡하던 음계나 연습곡처럼 일정한 패턴의 선율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성악가들이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전에 음계로 발성연습을 하듯 연주자들도 먼저 음계를 연주하면서 손가락을 푸는 경우가 많다.

p224 도입부의 나른한 플루트 솔로와 환상적인 하프 연주, 약음기를 낀 부드러운 현악의 음색은 귓가를 스치는 미풍처럼 감각적이다. 게다가 크로탈이라 불리는 작은 심벌즈의 오묘한 소리는 말리르메가 쓴 시어의 느낌을 지극히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니 누구라도 이 곡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인상주의 음악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은 이 곡은 그 이전의 어떤 음악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p235 신드바드의 모험을 비롯한 아라비안나이트의 여러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의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이 곡은 재미난 이야기를 풍성하고 화려한 오케스트라 소리로 표현한 특별한 곡이기 때문이다.

p257 바그너처럼 슈트라우스 역시 음악을 표현의 예술로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전통적인 교향곡의 형식을 과감히 깰 용기가 있었다. 형식의 제약이 많은 교향곡보다는 음악과 시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결합시킨 교향시에 더 끌렸던 슈트라우스는 청년 시절부터 문학적인 표제를 붙인 교향시들을 작곡했고, 그중에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나 레나우의 시 돈 후안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도 있다.

p264 슈트라우스는 이 교향시에서 인간을 B장조로, 자연을 C장조로 나타냄으로써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듯하다.

p270 대위법은 2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함께 연주하더라도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데, 그 주된 방법이 특정 지점의 음표 대 음표를 잘 맞추는 것이므로 ‘점 대 점’ 이라는 뜻의 대위법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p295 런던으로 건너가 하이든은 런던 청중을 위해 12곡의 훌륭한 교향곡들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하이든이 발표한 12곡의 교향곡들은 런던 교향곡 혹은 잘로몬 교향곡으로 불리며 하이든 후기 교향곡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p302 1788년, 32세의 모차르트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3부작인 교향곡 제 39번, 교향곡 제 40번, 교향곡 제 41번을 단숨에 완성해냈다. 이 세 작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작품들 가운데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신이 통치하는 성역”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주피터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 제41번은 신들의 왕으로 통하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장대한 규모의 작품이며, 베토벤 이전에 작곡된 교향곡들 가운데 최대 규모의 교향곡이다.

p306 사라반드는 J.S. 바흐의 춤 모음곡의 느린 악장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악이기도 한데, 바흐를 존경했던 모차르트는 바흐의 모음곡 속에 나오는 사라반드를 그의 마지막 교향곡 느린 악장에 넣어서 존경심을 표하려 했던 것 같다.

p336 마르크겐은 소년 브람스에게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을 가르쳤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에 대한 숭배를 가르쳤다. 너그러운 성품의 마르크겐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브람스의 사정을 알고 레슨비를 받지 않고 지도했을 뿐 아니라 브람스 가족이 매우 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었으니 브람스의 인생 최대의 은인이라 할 만하다.

p349 베를리오즈가 남긴 글을 보면, 한 젊은 음악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심한 절망에 빠져서 아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복용량이 너무 적어서 죽음에 이르지는 못하고 기괴한 환상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p358 어디서나 안정을 찾지 못했던 말러는 그 자신을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즉, “오스트리아 사람 중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인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요, 세계에서는 유태인이므로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p370 연주자가 이를 연주하기 위해 추운 무대 뒤의 계단을 올라 합창석으로 가는 도중 온도 차이로 인해 악기의 상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p375 그러나 1악장의 결론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반음계로 계속 추락하듯이 연주되는 이런 부분을 말러의 작품에선 흔히 추락 모티브라고 하는데, 이 교향곡뿐 아니라 말러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사용된다.

p412 이 곡은 이후에도 1828년 3월 26일에 열린 공개연주회에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는데, 이 공연은 슈베르트의 곡만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 매우 특별한 음악회였다. 이로써 슈베르트는 그의 피아노 3중주 제2번으로 대중적 명성과 함께 경제적인 소득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작곡가로서 성공하려던 순간 슈베르트의 건강은 급격이 악화되어 그해 가을에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p436 보로딘의 현악 4중주 제2번이 탄생한 1881년은 보로딘이 아내와 처음 만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보로딘은 사랑스런 멜로디를 가득 담은 이 현악 4중주를 아내와의 약혼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선물로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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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8 - 차이콥스키, 겨울날의 찬란한 감성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8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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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클래식 8

 : 민은기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06/07 -2024/06/12


민은기 교수님의 8번째 클래식 강좌..

이번에는 러시아 작곡가다. 차이콥스키가 메인이긴 하지만 러시아 5인조도 나오고 뒷부분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러시아 연주자들 이야기도 나온다. 

차이콥스키의 예민한 모습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여, 천재 작곡가들은 사실 살기는 쉽지 않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의 삶도 어려웠고, 주변의 혹평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고, 자기를 널리 알려준 루빈시타인의 잔소리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길래 만드는 음악마다 혹평을 받았을까? 의외로 프라하나 미국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유독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혹평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차이콥스키..

감정폭발적인 그 음악이 나도 참 좋다.. 작곡가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들으면 음악도 더 아는 것 같다. 

재미있다.. 


p24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랫동안 불러온 민요가 아니라, 함경북도 출신 나운규 감독이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작곡한 노래에요. 일제 식민지였던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때부터 민족의 노래가 된 거죠

p40 1848년 6월에 프라하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메타나는 혁명 세력에 적극 가담했어요. 국민의용군 행진곡 등을 작곡하면서 선봉에 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강압적인 반동정치로 인해 스메타나는 음악 활동을 제한받았고 결국 1856년 스웨덴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p62 글린카는 골수 민족주의자예요. “음악을 만드는 것은 민중이고, 예술가들은 그것을 편곡할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민중의 창조력을 강조했던 인물이지요. 글린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오페라였어요. 차르를 위한 삶 또는 이반 수사니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1836년에 초연됩니다.

p109 19세기가 되면서 음악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악가는 집안의 하인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반면에 순수 애호가로서 음악을 즐기는 건 교양인의 덕목으로 높이 평가했어요.

p121 차이콥스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루빈시테인은 이때부터 삶을 다할때까지 차이콥스키 작품의 초연 지휘와 연주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습니다.

p128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작곡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뛰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소나타 혹은 교향곡처럼 기존의 형식과 구조를 잘 알고 이를 바탕으로 곡을 설계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거죠.

p140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군요. 차이콥스키의 완벽주의가 느껴져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록 초연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후 점점 인기를 얻었어요. 막강한 소수 5인도 이 곡을 좋아해서 모임 때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를 들었다고 해요.

p156 정식 극장이 아닌 음악원 무대에 올린 것이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차이콥스키와 생상스, 그리고 그 공연을 지휘한 니콜라이 루빈시테인 말고는 관객 중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던 공연이었다고 해요. 무대를 기획한 세 사람만 즐겼던 거죠.

p163 이런 차이콥스키의 태도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차이콥스키는 특히 작곡가 빌헬림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았죠. 차이콥스키는 바그너가 오페라를 교향곡처럼 다루었듯이, 발레음악을 고향곡처럼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발레 음악에 도입하기도 했죠

p199 오네긴은 다른 오페라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다르죠?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여길 뿐 아니라 주변을 불행에 빠뜨리는 비극적 인물이잖아요.

p205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차이콥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에요. 완성도도 높고 바이올린의 고난도 기교가 많이 필요한 곡이지요.

p227 차이콥스키는 현악 합주곡을 딱 한 작품 남겼는데 그게 바로 1880년 9월부터 두 달에 걸쳐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 Op48이에요. 슬럼프 기간에 작곡된 음악 중에서는 이 곡이 가장 유명해요. 총 4악장 중에서 1악장은 모차르트 풍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죠.

p259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교향곡 5번은 기악곡이지만 곡 자체가 무척이나 드라마틱해요. 극적인 템포 변화와 계속되는 반전으로 청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힘이 있죠. 교향곡 5번은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p287 실력이 있어도 교향곡과 오페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이 두 장르에서 모두 최고였던 작곡가는 아주 드물어요. 거의 모차르트가 유일할 거에요. 차이콥스키가 모차르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는 거 기억하시나요? 아마도 차이콥스키 역시 모차르트처럼 교향곡과 오페라 두 장르 모두에서 성공하고 싶었을 겁니다.

p295 푸시킨의 원작은 오페라보다 더 심하답니다. 원작에서 게르만은 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박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리자를 이용하는 인문이에요. 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엘레츠키 공작도 나오지 ㅇ낳고요. 차이콥스키는 이 냉소적이고 진지한 푸시킨의 소설을 그래도 꽤 로맨틱하게 바꾼 거에요.

p313 아직까지도 메크 부인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차이콥스키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소문으로 자식들까지 곤란을 겪자, 메크 부인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 보는 사람들이 많죠.

p343 4악장 시작 부분에 나오는 화음은 바그너 강의 때 배웠던 트리스탄 코드와 유사해요. 트리스탄 코드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대표적인 불협화음을 말해요. 보통 불협화음이 사용되면 이후에는 협화음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트리스탄 코드는 그런 해결을 해주질 않아요.

p352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어봐서 알겠지만 그의 음악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클래식을 모르더라도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요동치게 만드맂요. 그게 바로 차이콥스키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거에요.

p362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유럽 음악 양식에도 정통하게 돼요. 만약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 실력 있는 솜씨로 막강한 소수의 작품들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주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곡들이 서유럽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거에요.

p388 다행히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파리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으로 만든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연달아 흥행하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러시아뿐 아니라 20세기 클래식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떠오르게 돼요

p407 염려한 것처럼 스탈린의 문화 정책으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수모를 겪게 돼요. 일례로 1936년 공연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얽인 일화는 쇼스타코비치에겐 큰 상처를 남겼죠. 스탈린이 이 공연을 관람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곧 정부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대한 혹평이 실렸어요. 불순한 서사도 모자라 음악이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이유에서였죠

p415 하차투리안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소련군을 찬양하는 곡이나 행진곡 등을 주로 만들어요. 특히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발표한 교향곡 2번은 프로크피예프의 교향곡 5번 Op100,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과 더불어 전쟁 중 작곡된 소련의 대표적인 교향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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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평전 - 음악, 사랑, 자유에 바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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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차르트 평전

 : 이채훈

 : 혜다

읽은기간 : 2024/03/05 -2024/04/15


보통 이런 유명 작곡가 평전은 외국인이 쓴 번역된 책들이 많은데 특이하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다. 더구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방송국PD다.

책이 벽돌책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다보니 읽는데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것 치고는 책은 괘 술술 넘어간다. 

방송국 PD답게 책의 짜임새가 꽤 탄탄하다. 

레퍼런스가 많지만 어느정도 취사선택을 해서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이 약간 아쉽다. 내가 모차르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더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아쉬움은 별로 없었을텐데... 알고 있는 지식이 짧은 내 탓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일생을 책으로 배운다는 건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꼭 해볼만한 작업이다. 

천재라고 해서 머리속에서 막 악상을 끄집어 낸 건 아니다.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고, 하이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점점 발전시켜 나갔다. 음악이 세련되어지고 깊이가 있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책은 여러번 읽고 다른 평전도 읽어가면서 더 배워야 한다. 

이런 천재와 천재의 음악을 모르고 죽는다는 건 인생에서 의미가 없다. 


p16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p17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소니는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 소수의 일류 작곡가,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p27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

p33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의 음악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1762년 3월 4일 작곡한 알레그로 B플렛 장조 K3, 5월 11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4, 7월 5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5등 하나하나가 이전 작품보다 뛰어나다.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정을 보는 듯하다

p35 이렇게 어렵게 완성된 네크롤로그는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1798년 프란츠 자버 니메첵은 이를 자신이 쓴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에 통째로 인용했고 이 내용은 오늘날 거의 모든 모차르트 전기에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네크롤로그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p38 그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기를 싫어한 반면, 마음으로 음악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는 몇 시간이고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음악을 사랑한ㄷ”고 거짓말로라도 설득해야 그의 연주를 청해 들을 수 있었다

p45 그는 1790년 형에게 황제 지위를 이어받은 뒤 모차르트를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 절대 권력자들은 모차르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모차르트 인생에 굴절을 일으키고 생존 조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p68 조지3세는 미국독립전쟁 내내 식민지 민중에게 폭군, 압제자 소리를 들었고,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으며 온갖 기행을 저지른 왕이다. 그의 독특한 행로를 묘사한 조지왕의 광기라는 코미디 영화도 있다. 왕은 훗날 요제프 하이든을 런던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p79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는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난네를에게 세상이 덧없음과 어려서 죽는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그 시절, 부모들은 비참하게 고생하며 살기보다 일찍 죽는게 낫다며 자위하곤 했다. 난네를은 10월 21일 종부성사까지 받았지만, 카롤리네 공비가 보내준 의사 토마스 ㅅ퓨벵케가 처방한 약을 먹고 2주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p92 레오폴트는 올뮈츠 주임신부인 포트 슈타츠키 백작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볼프강이 천연두에 걸린 듯하니 제발 선처를 부탁합니다” 천만다행, 백작은 모차르트 가족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친절을 베푼 것이다.

p95 레오폴트 씨는 자식 교육을 참 잘했더군됴요. 특히 아들은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활기 넘치면서도 예의가 바른, 한번 보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였어요. 잘 자라면 정말 뛰어난 음악가가 될 겁니다. 하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음악 교사로 나폴리와 베네치아, 드레스덴과 빈 궁정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p104 이 오페라가 일으킨 소동은 큰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 모라츠트 가족에게 친절하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사건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 레오폴트가 빈 궁정음악가들과 충돌하고 탄원서까지 제출함으로써 궁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본 게 분명하다.

p122 바이올린 신동으로 꼽히던 이 소년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고 키도 똑같았다. 두 소년은 만나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또래 어린이와 사귀며 어울려 놀 기회가 없었다. 린리도 마찬가지였다. 음악 신동으로 화려하게 살았지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빼앗긴 두 소년의 우정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p123 토마스 린리는 20여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극음악 세익스피어 찬가, 오라토리오 모세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8월 5일 보트사고로 갑가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p145 11월 23일과 24일 밀라노에서 연주된 K.113은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중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곡이다 .그때까지 잘츠부르크 궁정 악단에는 클라리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클라리넷의 음색을 좋아했다.

p150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는 미사 중 크레도 다음에 대주교가 복음서의 한 대목을 읽으면 오케스트라가 교회 소나타를 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위해 작곡한 교회 소나타는 모두 열일곱 곡으로 교향곡을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p156 루치오 실라가 공연되는 동안 모차르트는 라우치니에게 부탁받은 모테트 F장조 기뻐하라, 환호하라 K165를 작곡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가운데 레퀴엠 D단조, 대미사 C단조, 아베 베룸 코르푸스와 함께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p169 모차르트의 이 G단조 교향곡은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모차르트의 반항심이 자유를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만나서 빚어낸 절규가 아닐까? 음악학자 헤르만 아베르트는 이 곡을 그동안 모차르트 안에서 몇번씩 불타오르던 정열적이고 염세적인 기분이 가장 격하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p176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는 어린이가 치기엔 너무 쉽지만 전문 피아니스트가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어색하게 연주하면 바로 표시가 날 뿐 아니라, 모차르트 특유의 단순한 진행을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의미다

p201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루바토 기법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네테가 연주할 때 놓치는 것은, 아다지오의 루바토에서도 왼손은 템포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주할 때 왼손이 오른손을 엉거주춤 따라가선 안돼요. 모차르트는 오른손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때도 왼손은 정확하게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원칙은 루바토 기법에 대한 쇼팽의 소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p204 모차르트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썼으나 고상한 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p219 포글러는 만하임에서 공연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루치오 실라를 혹평해서 모차르트를 화나게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평범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건방지게 구는 사람을 혐오했고, 그런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경멸을 드러내고 직설적으로 비판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곤 했다

p233 공작이 들어와 음악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 해프닝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 사람들의 음악 취향과 언어에 거부감이 있던 모차르트는 이 일로 프랑스 혐오가 더 깊어졌다

p251 모차르트는 매우 품성이 착하고, 쉽게 사람들을 믿습니다. 커리어를 만드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죠. 이곳에서 인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약삭빠르고, 주도면밀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그의 재능 절반이면 충분하지만, 처세술은 지금보다 두 배가 필요해요

p264 265 놀라운 것은, E플렛 장조로 된 곡인데 비올라 솔로 파트가 D장조로 기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올라를 반음 높게 조율해서 D장조로 연주하면 결국 E플렛 장조가 된다. 비올라의 음색은 은은하고 내성적이지만 이렇게 현을 팽팽하게 조율하면 더 선명하고 밝은 음색을 얻을 수 있다. 선율과 화음 뿐 아니라 음색까지 창조재 낸 모차르트의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p270 졸리만처럼 사후에 잔인하게 모욕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몽군주 요제프 2세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1796년 그가 사망할 때는 황제 프란츠 2세가 지배하는 반동의 시대였다. 황제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공개 선언하기 위해 졸리만의 시신을 이용했다. 조각가 프란츠 탈러가 박제한 그의 시신은 희귀한 중남미 짐승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전시됐다. 유족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1848년 빈의 폭격으로 박물관이 불팠을 때 이 수치스런 인종차별의 증거도 사라졌다.

p308 신분사회를 비판한 그의 오페라는 황제의 계몽 정치와 잘 어울렸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황제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위협받은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황제의 푸들 정도로 여기며 미워했다. 요제프 2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못했지만, 1790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빈의 귀족들은 일제히 모차르트에게 등을 돌린다.

p313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IQ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기도를 하니 머릿속의 핏덩어리가 사라졌고” “천사가 자기를 도왔다”고 횡설수설했다. 돈 캠벨은 미국 전역은 물론 일본과 한국까지 찾아와 모차르트 효과에 대해 강연을 하고 책을 팔았다. 모차르트를 팔아서 잇속을 챙긴 사기나 다름없었다.

p320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를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준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의 반응은 까칠했다.

p351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았지만 음악사에서 가장 미움받은 여자”가 됐다.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콘스탄체를 인색하게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가난에 책임이 있고, 남편의 장례를 엉망으로 치러서 시신이 실종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p363 빈에서 쓴 첫 피아노 협주곡(F장도 K 413, A장조 K414, C장도 K415)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곡들은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게, 매우 화려해서 귀로 듣기에 즐겁지만, 그렇다고 공허하지 않게 작곡했어요. 전문가만 만족할 만한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아마추어들도 이유를 모르면서 좋아할 곡입니다”

p368 왜 모차르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그의 위대한 재능과 다정다감한 성품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죠. 엄청나게 후회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레아 징어의 소설 벌거벗은 삶에는 “결혼한 뒤에도 모차르트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콘스탄체가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연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이야기다

p377 하이든에게 바친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곡 중 두 번째 곡 D단조 K421의 메뉴엣이다. 영국의 음악사가 빈센트 노벨로는 1829년 잘츠부르크에서 콘스탄체를 만난 뒤 이렇게 써다. “그녀는 자기가 첫아이를 낳으며 진통을 할 때 모차르트가 D단조 사중주곡을 쓰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특히 메뉴엣을 우리에게 노래까지 해주며, 이 대목이 바로 진통을 들으며 쓴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절규하는 메뉴엣의 주제는 고통스런 출산의 비명, 아니, 아내 콘스탄체의 고통을 함께 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이었다. 부드럽고 맑은 중간 부분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다

p384 11월 4일 화요일, 린츠 극장에서 예약 연주회가 열렸다. “교향곡을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새 교향곡을 써야 해요.” 닷새 만에 완성한 교향곡 C장조 린츠 K425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마다 늘 언급되는 바로 그 곡이다

p414 잘츠부르크에서 빈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9시까지 작곡을 하고, 오후 1시까지 레슨을 했다. 식사 초대가 없는 날은 오후 2-3시경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작곡을 더 했다. 저녁에는 연주를 하거나 밤 9시까지 작곡을 했고, 급한 일거리가 생기면 새벽 1시까지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은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p418 모차르트의 연주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리히터가 한탄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열심히 땀흘려 연습해도 쩔쩔매는데, 당신은 애들 노래를 연주하듯 쉽게 하는군요!” 모차르트가 답했다. “저도 열심히 연습을 했지요. 더 연습을 않아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모차르트가 누구보다 부지런히 연습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p421 피아노 파트를 미처 쓰지 못했고, 리허설을 할 시간도 없었기 대문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파트만 써주고 피아노는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했다. 요제프 2세가 어리둥절해서 “자네 파트 악보는 어디 있는가?” 묻자 모차르트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p427 난네를은 조넨부르크 남작과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801년 남편이 사망한 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p431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겪는 침묵과 죽음의 시련은 바로 이 프리메이슨 입문 의례를 묘사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권력자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로 늘 죽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프리메이슨 의례는 모든 사라미 죽는다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덧없는 욕망과 집착으 버리고 순수한 자아를 찾는 방편이었다.

p434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추적한 캐서린 톰슨은 열두 살 모차르트가 빈을 방문했을 때 메스머 박사를 통해 프리메이슨을 처음 접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프리메이슨 회원인 메스머 박사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p443 모차르트는 그해 1월 14일 사중주곡 C장도 K465를 완성한 직후 “나는 현악사중주곡 쓰는 법을 하이든에게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모차르트는 공들여 쓴 이 곡들에 대해 선배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고, 하이든은 익히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이든은 러시아 사중주곡을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양식으로 작곡했다.

p448 모차르트 음악은 하이든과 비교해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1786년 빈을 방문하고 있던 디터스도르프는 황제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하이든 음악은 한 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반면 모차르트 음악은 여러 번 들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디터스도르프는 화답했다. “제 의견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p452 레오폴트는 이날 연주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을까? 비밀은 아름다운 안단테에 있다. 피아노 독주자가 연주하는 둘째 주제 마무리 대목의 왼손 파트가 아버지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 왼손 파트와 똑같았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이 아름다운 안단테를 아버지에게 바치며 그의 작품 중 한 대목을 인용하여 오마주를 표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p463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을 간직하는 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존업성이라는 사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인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도 모차르트는 자유와 평등의 꿈을 잃지 않았고, 이에 따르는 대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p467 초견연주와 짝을 이루는 것이 즉흥연주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청중의 갈채에 즉흥연주로 보답하곤 했다. 덴마크 배우 요아힘 다니엘 프라이저는 1787년 1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자그마한 인간, 위대한 거장은 두 번의 즉흥연주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했다. 가장 어려운 패시지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멋진 연주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p478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기에 피가로의 결혼을 승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절대군주였기에 이토록 파격적인 결정이 가능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빈 궁정의 수많은 귀족 중 단 한사람도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p486 베토벤은 피아니스트 존 크라머가 연주한 이 곡을 듣고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음악학자들이 “베토벤의 협주곡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이 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지적한다

p487 오페라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피아노 협주곡은 대중들의 취향보다 자기 내면의 충동에 따라 작곡하게 됐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로서는 3-4년 동안이나 빈 청중의 비위를 맞췄으니 오래 참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496 스페인 작곡가 마르틴 이 솔레르는 러시아로 가는 길에 빈에 들러서 희귀한 일을 공연했는데, 1786년 11월 7일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이듬해 봄 시즌까지 무려 78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귀한 일이 오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을 압도한 것이다.

p508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는 여전히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차별받는 도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와 같은 도시가 바로 프라하였던 것이다.

p514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다소 구식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직접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연주한 반면, 베토벤은 소나타 월광의 피날레나 소나타 열정에서 보듯 피아노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법을 구사했다. 피아노 음악은 빠르게 발전했고, 열네 살이라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세대 차를 의미했다.

p526 빈에 도착한 뒤 거의 매일 저를 진료해줘요. 이렇게 충실했던 바리자니가 1787년 9월 3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 앨범에 짧은 글을 남겼다. “그대의 친구를 잊지 말아주오. 세상의 즐거움인 그대를 두 차례 치료해서 더 살 수 있게 해드린 것은 저의 자랑이자 행복이지요” 모차르트는 바리자니의 글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9월 3일, 내 목숨을 구해 준 이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바리자니가 오래 살았다면

모차르트도 좀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p534 19세기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한 챕터를 할애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예찬했다. 돈 조반니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사랑의 천재이자 실존의 영웅이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여주인공들은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사랑과 실존을 직면했을 뿐이다.

p538 이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의 세계에 공포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기사장이 돈 조반니를 심판하려고 등장하는 순간 트럼본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모차르트는 이 트럼본을 합창석 높은 곳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빈에서는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다.

p548 그는 소탈했고, 때로 광대처럼 행동했기에 외모나 행동에서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에로틱한 것에서, 비극적인 것에서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진정한 위대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모차르트는 위대성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은 그 시대에도, 그 자신에게도 감춰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너무나 비밀스럽게 위대했기 대문에 그의 시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자신은 더 몰랐다”

p551 그는 제국이 잠자고 있을 때 황제는 깨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면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과 사제들의 기득권을 축소했기 대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 불만 세력을 잘 다독이지 못했다. 개혁 과정에서 대중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특히 장례 제도 개혁처럼 전통과 관습을 거스르는 조치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p565 그 해 여름 작곡한 마지막 세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기악곡 중 최고 걸작이다. 세상을 초월한 듯 행복으로 빛나는 39번 E플렛장조, 아름다움과 슬픔의 고귀한 결정체인 40번 G단조, 당당하고 위엄 있는 41번 C장조 주피터. 이 세 곡을 삼형제별처럼 나란히 빛나며 교향곡의 역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룬다.

p568 모차르트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그 법칙들을 완성하려 했지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의 독창적 어법과 개성 있는 예술이 그 시대의 기준이자 특징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모차르트는 한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서 있었기에 베토벤보다 더 먼 미래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p571 야상곡 창시자로 유명한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존 필드는 한 연주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건 악마 아니면 훔멜이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훔멜은 전성기 때 베토벤과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협주곡 여덟 곡과 소나타 열 곡 등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해서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낡은 음악가로 취급된다.

p584 모차르트는 이 노력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도움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796년, 콘스탄체는 라이프치히에 레퀴엠 악보를 갖고 와서 공연했다. 이때 라이프치히의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에게 후한 사례를 했고,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는 모차르트 전집 출판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p587 왕은 모차르트의 솔직한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일해 보시지 않겠소? 그대 말대로 악단이 개선되는지 한번 보고 싶소. 1년에 3,000탈러를 드리겠소. 모차르트는 제가 모시고 있는 황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말에 감동한 왕은 한참 침묵한 뒤 덧붙였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시오. 나중에라도 약속은 지키겠소. 왕은 이 일화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했고, 모차르트 사후 베를린에 온 콘스탄체에게도 말해 주었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전남편도 똑같이 말했다.

p598 그는 이 악기 소리를 듣자마자 매혹되어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아, 우리에게도 클라리넷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빛난느 효과를 아버지는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을 표현하는 클라리넷은 그 후 모차르트가 따뜻한 감정을 노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오중주곡은 균형잡힌 선율, 기품있는 형식, 우수에 찬 달콤한 울림이 가득한 주옥같은 작품이다.

p605 오페라의 주제는 여자는 정조 관념이 없다가 아니라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피와 살로 된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재조명되었다.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난 후에야 현실의 사랑이 시작되며, 끊임없이 나누고 존중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결혼 생황레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613 모차르트는 황후 마리아 루이사가 자기에게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해 여름, 황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여자는 다 그래를 혼자 관람했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그녀에겐 두 편 모두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황후는 모차르트처럼 자유사상가이자 제멋대로인 음악가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p624 그가 영국에 갔다면 어쩌면 이듬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연 기획자 요한 페터 잘로몬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은 하이든은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내와 별거중이라서 홀가분하게 영국행을 결단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늘 콘스탄체와 의논했고, 그녀의 반대에 부딪쳐서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p633 모차르트는 춤곡을 판매하고 받은 영수증 위에 이렇게 썼다. “내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 큰 돈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일이다”

p647 모차르트는 아내 없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보고 싶다는 말뿐이다. “내 유일한 소망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당신 곁에 있는 거야. 이토록 오랜 시간 당신만을 그리워하며 지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p660 오페라를 준비할 때 늘 그러했듯 마술피리도 초연 이틀 전에야 완성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과로로 앓았던 게 분명하지만 마술피리 초연 무렵에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p669 카를은 그날 아버지의 오페라를 처음 보았다. “카를은 오페라에 가는 걸 아주 즐거워했어요. 참 멋지게 생긴 아이지!” 콘스탄체가 바덴에서 요양할 때 늘 그녀를 따라갔던 카를은 이제 일곱 살이 지나 학교에 가야 했기에 모차르트와 함께 빈에 남았다. 카를은 마술피리 작곡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새잡이 파파게노의 아리아 정도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를에게 이날 오페라 관람은 평생 추억이 됐을 것이다.

p672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자전적 오페라로 인식됐다. 첫 장면, 괴물에게 쫓기는 타미노의 모습부터 모차르트의 힘든 처지를 뜻하는 걸로 보였다. 벨기에의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어린이로 돌아갔다고 보았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겨뤄야 했다. 그에겐 어린 시절이 없었다. 서른다섯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할 즈음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모차르트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로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p673 타미노처럼 고고한 것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자, 고귀한 인간성의 이상으로 넘치는 자였다. 동시에 그는 (파파게노처럼) 유쾌하고 천진한 젊은이, 세속적인 향락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젊은이였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타미노, 음식과 와인과 사랑만 있으면 만족하는 파파게노, 두 사람을 합치면 모차르트가 된다는 것이다.

p687 1791년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쓴 과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7월 하순(날짜 미상) <레퀴엠> 의뢰받음, <황제 티토의 자비> 작곡 및 프라하 여행. 9월 17일 프라하에서 빈으로 귀환, 9월 30일로 예정된 마술피리 초연에 집중 10월 중순(날짜 미상) 안톤 슈타틀러를 위한 클라리넷 협주곡 완성 10월 중순(날짜 미상) <레퀴엠> 본격 착수 11월 중순(날짜 미상) 프리메이슨 칸타타 작곡 위해 <레퀴엠> 잠시 중다 12월 5일 <레퀴엠>,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 작곡하고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

p693 집에 도착한 그는 차가운 물수건을 달라고 하더니 모차르트의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얹었어요. 하지만 열은 떵저지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사망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있었어요. 레퀴엠의 팀파니 음률을 입으로 웅얼거린 게 형부의 마지막 동작이었어요.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p696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쥐스마이어가 쓰기에 버거운 대목들을 아픈 몸으로 직접 썼다. 지금도 레뮈엠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만 듣는 사람이 적지 않다.

p706 콘스탄체와 카를 토마스의 증언을 보면 모차르트 유족들은 독살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p723 영국 사람들은 독일 출신인 헨델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히 모셨다. 이 나라에서는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통탄할 일이다. 우리 스치스런 역사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여! 그대가 아끼던 찌르레기가 죽었을 때 그대는 셋집 정원에 묘비를 세워주고 직접 애도의 시를 쓰셨지요. 그대가 새를 추모하듯 누군가 당신을 추모할 날은 언제일까요?

p727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슬픔의 흔적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슬픈 대목은 일정한 희망의 빛을 담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성의 단서가 된다

p734 모차르트는 한때 큰 도시의 궁정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가족은 죽은 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 페터 수도원,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멀리 파리의 생 의스타슈 성당에 잠들어 있다. 콘스탄체의 묘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시아버지 레오폴트의 묘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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