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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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테라 인코그니타

작가 : 강인욱 

출판사 : 창비

읽은날 : 2021/04/15 - 2021/05/04


믿고 보는 강인욱 교수님의 고고학 책...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의 한국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민족들과 문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부에 써있는 우리나라 과거 역사는 처음 알게 된 내용들이 많았다.

고조선 시대때 상투를 틀었다는 내용처럼...

과거의 유물, 유적, 책등을 통해 알게된 과거의 역사는 모두가 한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때로는 모순되는 내용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잘 맞지 않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역사가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유물만 뽑아다가 마음대로 윤색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대의 시각을 가진 우리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역사를 이용해 자기 민족을 고양하거나 다른 민족을 무시하는 건 절대 없어야겠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p5 서구 열강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그 지역의 보물과 역사를 빼앗아 자국의 박물관에 가져다놓았고, 약탈한 문화재의 수를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로 삼았습니다. 세계 4대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의 침략이 가장 일찍 시작된 곳에서 4대 문명이 비롯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p13 미지의 땅, 미개척 영역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테라 인코그니타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저서 지리학교정에서 처음 사용했다.

p22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p26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 그리고 종교를 꼽았다

p38 이러한 유사과학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의 논의가 나온 데에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p52 서양의 중세를 초토화시킨 페스트도 사실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사람들이 설치류로부터 옮았고 그것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p53 홍산문화는 양쯔강 유역의 량주 문화와 함께 약 5000-6000년 전 동아시아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문명으로 꼽힌다. 홍산문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거대한 제단과 고도로 정제된 옥기를 만들어냈다

p55 홍산문화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을 포기하고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p56 홍산문화의 제사를 담당했던 신관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옥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관상용이 아니라 옥에 담긴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p61 지구온난화로 영구동결대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 또다른 변수다. 자칫하면 얼음이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무덤이 드러나고 철새나 북극권의 동물들이 시신의 세균을 옮기는 숙주가 될 수 있다

p67 인간 역사에서 보이는 식인 풍습의 대부분은 적에 대한 증오심 표출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의 육신 일부를 자기에게 체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p74 흉노와 훈족은 비단 몽골,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저 멀리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등 유라시아 전역에서 다들 관심이 많다

p77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들은 공통적으로 화려한 보석을 박아 넣은 황금과 강력한 마구, 철제 무기를 갖고 있었다

p82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전체 유목민의 구성은 현지인들로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가장 첨단의 군사와 문화를 선도하던 선우와 그들을 보좌하던 세력은 부계를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95 약 2700년 전 남한에서 쌀농사를 짓던 청동기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쌀농사에 유리한 규슈로 이동하면서 일본에 한반도계 청동기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야요이문화라고 부른다

p109 사양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사를 동원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동이족에 대한 혼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p113 동이족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불쌍한 광대들의 손발을 자른 공자의 행동에서 공자가 동이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한다

p122 기자조선은 실제 역사라기보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사대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는 신화에 가까웠다

p129 이러한 상상은 완전히 허구에 기초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가지를 치면서 과장되고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면서 확대된다

p148 문맥상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은 고조선의 풍습을 따랐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p156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룬 옥저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p159 초원에 성터를 건설한 것은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의 발로였다

p161 흉노의 성터에서 극동 지역의 옥저인들이 사용했던 토기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꽤 많은 만주와 한반도 사람이 그 지역으로 건너갔던 것 같다

p164 온돌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관련성을 밝히는 명명백백한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p169 최근 다양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중국 만리장성 일대의 유목문화와 그 사람들이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내려온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p176 적석목곽분은 4세기경 신라가 국력을 키우는 과정에 불현듯 등장해 약 200여년간 만들어지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p189 아틀란티스를 찾는 노력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게, 지중해 탐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진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p194 기원전 1274년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벌인 세계 최초의 대륙간 전쟁인 카데시 전투 역시 전차문화가 전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p207 여러 매체에서 언급되는 1947년에 버드는 북극이 아니라 남극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음모론자들은 단순한 팩트체크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여전히 지구공동설의 유력한 증거로 사용한다

p211 2000년 전부터 부여계의 사람들은 이곳에 살며 추운 겨울을 견디는 온돌을 만들고, 주변의 호전적인 말갈 세력을 막아내는 성터를 건설했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세상 어디보다 비옥한 흑토지대에서 잡곡을 키우며 그들만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p220 고대 귀족과 왕들은 자신들이 태양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평민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특이한 머리 형태를 고집했다

p222 흉노의 영향을 받아 왕족들이 편두를 하는 나라들에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금관이나 금동관을 쓴다는 점이다

p227 샤먼의 관도 그런 노력이 표현된 의식도구다. 샤먼의 관은 요즘말로 하면 신의 뜻을 받기 위한 일종의 와이파이 같은 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요소로는 나무나 사슴뿐 이미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p236 신화로만 전해지던 상웅국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가루다강의 은빛 성채라는 뜻의 궁륭은성이라 불리는 이 유적은 해발 4400미터의 산 정상에 약 10만 제곱미터 넓이에 120여기의 대형 건물을 세운, 글자 그대로 하늘에 지은 도시였다

p250 스키타이 문화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중국 만리장성 일대로 이어지는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일군 문화를 통칭한다

p258 유목미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때에 반드시 적의 무덤을 파괴하고 도굴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정복해야 할 도시나 요새가 없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조상들의 무덤을 파괴했던 것이다

p262 약 200년이 지난 뒤에 고고학자들이 다시 마야의 유적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글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스페인이 마야와 관련된 유적과 책들을 철저하게 파괴했기 대문이다. 마야 문명 당시에는 수천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의 달력과 책들은 현재 고작 세권(또는 네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p266 구밀료프는 두번째 수용소 생활을 겪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인 아흐마토바가 변절을 하고 스탈린과 당에 대한 찬양시를 쓴 덕분이었다. 이 일로 아흐마토바는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도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p273 1990년이 되어서야 그는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크노로조프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직접 초청한 국빈급 방문이었다

p274 처음에는 복잡한 상형문자로 시작해 점차 변해갔을 것이라는 문자의 보편성이 마야의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발상 말이다

p284 만약 당시 서양인의 관심이 실크로드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아마 고구려의 고분이 도굴되고 신라의 석굴암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p289 둔황 막고굴에는 워너 일행이 떼어낸 벽화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서양인들이 실크로드 유물을 약탈한 대표적인 예로 전시되고 있다

p296 제국주의 고고학의 폐해는 그들이 성격 파탄자거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연구 경향이 결국 수천만명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p309 가야에서 발견되는 판갑과 마구는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p311 나라들이 서로 정복하여 통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도 만들었다

p314 흥산문화는 약 5500-5000년 전 지금의 네이멍구 츠펑시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문화다

p330 유목민이 만든 돌궐제국은 그들만의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한자와 함께 썼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p348 트로이의 황금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거의 무학에 가까웠지만 부도덕한 군수사업으로 부자가 된 뒤 고고학자로 전환해 자신의 신분을 극적으로 바꾼 사람이다

p352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참신하고 재미있어 보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은 대부분 자신들이 침략했거나 국력이 떨어지는 나라들이다

p358 나는 고고학을 현재라는 렌즈를 끼워서 과거를 바라보는 카메라에 비유하곤 한다. 객관적인 과거를 지향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땅의 모든 역사가 놀랍도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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