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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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세계의 소멸과도 같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에게는 단지, 한 타자者의 소멸에 불과하다. 하루에도 수억명이 죽어나가고, 수억명이 태어나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수억명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억명의 세계가 생성된다. 하지만, 나머지 수십억의 사람들은 사라진 수억명의 사람을 서서히 잊어갈 뿐이다.

 때로는 한 인간의 죽음이, 실제로 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타인에게 전래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가 남긴 모든 기록은 전파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했던 민족의 역사와 기록들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한 세계의 죽음이었다. 한 문화의 사멸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 의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고 한다. 곧 그가 나와 한 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고,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기에 합당한 분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몸 안에 새긴 고서高書이자, 흘러간 세월들이 빚고있는 한 세계의 마지막 사람들이다. 

 '예술' 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도 있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으며, 해석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즐겁고 아름다운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되기 짝이없는 삶은 특히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간들에게 특히 더 괴로운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삶의 고됨을 잊고 살아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 

 예술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각종 과학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접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진 듯 보인다. 댓글을 통해 수초에 한번씩 서로서로 수많은 소통을 하고, 구만리 떨어져 있는 곳의 기인들이 펼쳐내는 화려한 기예를 감상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들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도 있고, 수많은 기술들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세계가 그만큼 좁아졌다. 

 하지만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너무나 넓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놀라운 기예를 갖춘 예술가를 평생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장터에 뛰어난 예술가가 나타나 노름을 놀면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내던지고 그 판으로 달려갔다. 사당패가 신묘한 묘기에 농삿일의 고됨을 잊었고, 무용가의 화려한 춤사위에 가뭄 걱정을 떨쳐보냈다. 명창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다. 그렇게 삶의 일부이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인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어렵다.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경탄받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수준의 기예로는 택도 없다. 아주아주 특출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십수년, 나아가 수십년에 가까운, 아니 평생에 가까운 정진이 필요하다. 재능을 타고 나기도 힘들었지만, 예술을 접하기도 힘들었고, 기예를 지닌 예인을 만나기도 힘들었으며, 특출난 기예를 가진 수준 높은 예인을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었으니, 당시의 예인들은 가히 로또수준의 인연을 만나야만 가능했을터다.

 그렇게 인연의 고리가 닿고 닿아 맥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 예술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일부 의식있는 예인들이 보존을 위해 발품을 팔고 주머니를 털어 지역 협회를 만들고 예인들을 모아 정기적인 발표회를 열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도 쉽지만은 않았다. 예인은 천한 신분이었다. 특히 여성 예인들은 대부분 기생이거나 무당이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며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적절히 소화되지 못했고, 경제발전 중심의 상공업 발전정책으로 인해 복지와 문화는 뒤켠으로 밀려났다. 그 시기를 넘기니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돈이 되는' 예술만 살아남기에 이르렀다. 오래된 것은 돈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들은 가장 글로벌한 시대인 오늘엔, 확실히 배척받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전통 예술은 간신히 명맥만 이어지고 있을 뿐. 진짜 노름마치들은 자신의 기예를 오롯하게 전수해줄 후학도 길러내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저자인 진옥섭은 전통무대의 기획과 연출을 하며 직접 만나온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예를 능란하게 서술한다.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노름마치들의 춤사위와 소리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감칠맛 나는 글맛이 오감을 만족시킨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 인간의 삶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고고한 역사의 흐름에 의해 속절없이 휩쓸려간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쳤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때를 잘못 만나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춤사위 한 번 떨치지 못했던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시시 때때로 어깃장을 놓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삶과 종교가 하나가 되고, 고통과 눈물을 핏속에 녹여내어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것은 이미 '즐겁고 아름다운' 경지를 가뿐히 넘어선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을 빼앗고, 눈과 귀를 홀리고, 결국엔 그 혼마저 쥐고 흔드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 노름마치.


과학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더욱 약해졌다.

이제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애써 산 하나를 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다. 입을 열 필요도 없이 환히 빛나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손가락을 바삐 놀리면 어떤 대화도 가능하다. 빨래나 설거지도 간단하다. 네모난 통 안에 쑤셔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요리는 또 어떠한가. 굳이 재료를 사러 시장에 갈 필요도 없다. 어제 수확한 채소를 오늘 집에서 받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목에서 쓴 물을 쏟아내도록, 허리와 관절이 부서지도록 노력하여 '돈'도 되지 않는 기예에 인생을 바칠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갈 것이다. 노름마치에 이르는 길은, 그 끝에 부도, 명예도 없는 고난의 길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감동적이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노름마치' 라는 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잊혀지는 것이 구슬프다.

이 책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래된 것들을 붙들고, 사라지 않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한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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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브라이언 아자렐로, 리 베르메호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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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만난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는 '생명'은 수개월동안 세포 분열을 반복하며 인간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태아의 뇌가 만들어지고 각종 신경 줄기들이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데, 눈目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흡사 뇌가 더듬이처럼 길게 뻗어나오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한다. 눈은 어찌보면 몸 밖으로 돌출된 뇌의 일부분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눈은 뇌 - 정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기관이다.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점은 잘 보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 처럼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 뇌 안에 저장되는 능력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본 순간,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여러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렉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넌 인간이 아니야." 

루터의 눈 앞에 나타난 이 강철의 남자; 맨 오브 스틸 이자 빅 블루 스카우트, 블러, 그리고 포 투머로우(미래의 사나이)인 슈퍼맨은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에 불과하다. 루터에게 슈퍼맨이란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의 앞에서 모든 인간의 모든 과학과 능력은 인간의 개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간인 루터에게 슈퍼맨은 거대한 악몽, 그 자체이다. 

 

 이 작품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시각의 다름' 을 표현한 곳에 있다.

루터의 눈에 슈퍼맨은 정의의 수호자나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거대한 악당이고 악마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슈퍼맨의 가장 큰 숙적이자 빌런('히어로'의 상대개념으로 흔히 '악당'으로 번역된다.) 으로 알려져 있는 루터이지만, 루터가 왜 슈퍼맨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는지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코믹스의 양대 산맥, 마블과 DC에는 각각 '간판 캐릭터'라 불리우는 캐릭터들이 있다. 수십년간 수백명의 작가들을 통해 에피소드가 쌓이고, 재해석이 거듭되며 인격이 형성되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작은 만화 출판사를 차근차근 대기업으로 성장시켜준 '1등 직원' 들. 특히 DC의 '슈퍼맨' 은 그 자체가 미국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적인 철학들이 쌓인 미국의 아이콘이랄 수 있다. 

 슈퍼맨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神이고, 완벽한 존재이다. 렉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태풍에 의지가 있다고 해봐. 그 다음 그 힘에 천 배를 곱해 봐. " 

 그가 우리편이라 다행이라는 브루스 웨인에게 루터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변하면? 만에 하나... 오늘이라도 갑자기 우리를 내려다보며 더 이상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내일 불현듯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어쩌지? '뭐하러 지구를 지키고 있나? 그냥 손가락 딱 튕기고 지배하면 되는데?' 그 땐 우린 어쩌지? 우리가 가진 건, 우리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건 결국 그의... 말뿐이잖나."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맡고 있는 역할 역시 이와 비슷하지않은가? 

소비에트가 무너진 이후 홀로 승승장구해 온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다. 그 어느 국가이든 미국의 눈 밖에 나면 손가락 딱 튕기듯 제거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손에 잘려나갔다. 렉스 루터의 눈에 비친 슈퍼맨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사람들 눈에 비친 미국과 같을 터다. 


 렉스는 [인간의 미래]를 위해 슈퍼맨은 불필요한 요소라고, 초인이란 인류의 앞길을 막을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슈퍼맨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강력한 힘과 그 앞에서 아무리 용을 쓰고 노력을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임에 자괴하고 자조한다. 슈퍼맨의 힘에 대한 강력한 질투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루터에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분노가 더해진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아집과 내가 뛰어넘을 수 없다면, 없애서라도 능가하겠다는 욕망의 화신인 것이다. 

 루터는 인류를 위해, 인류의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모든 인간이 숭배하는 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슈퍼맨을 숭배하는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는 길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한다. 인류가 [미래의 사나이]라 부르는 신-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모든 인생을 걸기로 결정한다. 


그는 냉혹하고 과감하게 슈퍼맨과 맞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태풍에 맞서고, 신에 맞선 유일한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본다. 

눈이란 외골격으로 돌출된 뇌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있다. 

누군가에게 루터는 사악한 빌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 루터는 인류를 외계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줄 히어로일 것이다. 


브라이언 아자렐로는 이렇듯 다른 시각에서 히어로와 빌런을 바라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유난히 음영이 짙은 마스크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리 베르메호는 찰떡 궁합을 선보인다. 

그야말로 최고의 이야기와, 최고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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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서유요원전 대당편 10 만화 서유요원전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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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서유기로 잘 알려져있는  [대당삼장취경시화] 를 각색한 '거장'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서유요원전 - 대당편] 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시리즈물의 경우 완결편이 나오지 않으면 리뷰를 잘 안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 2011년에 첫권의 리뷰를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발매 초기부터 상당한 기대작이었고, 햇수로 3년동안 꾸준하게 구입해서 감상한 몇 안되는 콜렉션이기도 하다. 사실 5~7권쯤엔 지나치게 스토리를 질질 끄는 듯한 면이 있어서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10권까지 다 읽고 나니 대당편의 매조지를 위한 호흡 늘리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작가가 10권이라는 방대한 스토리 안에서 자유롭게 독자들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작품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행히 작품의 후반에는 한국판 발매 속도도 빨라서 지루함은 쉽게 사라졌다. 솔직히 8권쯤에선 '아 이제 그만 읽을까.' 싶기도 했지만, 10권을 읽은 지금은  "서역편 언제나오나요???" 의 심정이다.

 

 [서유요원전]의 주제의식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악마인가, 천사인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이 공존한다. 수많은 철인哲人 들은 예로부터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하다' 와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하다' , 혹은 '인간은 백짓장과 같고 자라면서 주변환경에 의해 선과 악이 변화한다'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견을 활발히 나누었다. 그 모든 의견은 어쨌든 인간에게 선한면과 악한면이 모두 보여지기에 나온 것이다. 

 갓난 아이 였던 손오공이 화과산에서 원숭이들에게 납치당했다가 인연을 얻어 산골 작은 마을에서 성장하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끔찍한 참변을 목도했다가, 결국은 '무지기' 라는 신에게 선택되어 겪게되는 이 대서사는 실제 역사와 전설을 넘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서유요원전]의 주제의식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장면. 부처안에 사마...사마 안에 부처...

 

 

 

 

 이 거대한 대서사극을 보는 내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떠오르기도 했고, 단테의 [신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도 떠올랐다. [서유요원전]에는 오공이 걷는 지옥도圖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었으며, 그런 시대에 태어나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악귀같은 형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 길고 긴 여정은 끊임없는 시험이 반복되는 미답의 공간을 헤매이는 구원을 향한 여정과도 같고, 빨리 끝나기만을 소망하는 지옥의 여정과도 같으며, 영혼의 고향을 찾아 헤매이는 여정과도 같았다.

 [서유요원전]은 주인공 손오공이 자신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끊임없이 지옥도道로 향하는 '제천대성' 이자 '무지기' 의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자, 탐욕스럽고 사악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엾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들과 얽히고 설키는 은원의 이야기이다. 손오공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장면들도 재미있지만, 각기 사연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에 의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손오공을 제천대성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던 제천대성의 수족과도 같았던 '통비공'을 비롯, 손오공과 살을 맞대며 정情을 알려주었던 '용아녀', 복수와 집념의 화신인 '금각', '은각' 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애증의 관계였던 '홍해아' 와 '황포'. 이 큰 이야기에서 손오공의 여정과 대척점을 이루며 균형을 맞춰가는 '혜안 행자' 와 손오공과 이어질 듯,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묘한 인연의 '현장' 은 물론, 중간 중간 등장하는 '황풍대왕' 과 '나타태자', '칠선고' 에 '팔계' 와 '손이랑', '일승금'. 그리고 [서역편] 과의 연결점이 되어줄 '나찰녀' 까지. 모두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대변하는 듯 또렷한 욕망을 가지고 손오공과 은원을 쌓는다. 

 그렇다. 손오공이 받는 거대한 시험은 결국 언제나 '사람들' 이었다. 자아와의 싸움이자, 타자와의 싸움. 무엇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누구를 이겨야 진짜 이긴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야 하고,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한다. 손오공이 맞닥뜨린 지옥같은 여정에서, 머리에 씌워진 관과 그 무엇보다 강한 봉은 굴레이자 방향타였다. 손오공에게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는 현장을 만날 수도 없었고, 그 뒤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과 해소는 같은 곳에 있다. 마치 사마와 부처가 함께 있는 것 처럼, 굴레와 키도 같은 곳에 있었고, 고통과 해소도 같은 곳에 있었으며, 지옥과 극락은 물론 삶과 죽음도 같은 곳에 있었다. 깨달음을 향해 천축으로 향하는 현장과, 구원을 위해 현장의 발자욱을 쫓는 오공. 동행할 듯 동행할 듯 동행하지 못하는 오공과 현장의 엇갈리는 인연은 마치 어긋나는 연인들을 보는 것 처럼 애틋하기까지 하다.  

 

 또한 [서유요원전]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총 열권의 '대당편' 중 한권에 수록되어 있던 저자와의 대담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정말 강한, 그래서 매우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는 '용아녀-용화' 와 말미를 장식하는 '나찰녀' 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들이다. 용아녀가 보다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면, 나찰녀는 제천대성의 능력을 쓰는 손오공마저 압도할만한 강력한 힘을 가진 중성적인 마성을 자랑한다. 그 뿐 아니라, 여인들의 모성애를 다룬 '나타 태자' 와 그 어미인 '지용부인' 그리고 나타태자를 돌보는 요괴 '음도녀' 의 에피소드, '연리지'를 모티프로 한 듯 보이는 '부상부인'과 '동군' 의 애틋한 사연도 빼놓을 수 없고, 영원한 순정의 테마인 '보디가드' - 충직한 '석방상' 의 '백화수' 를 향한 순애보도 인상적이다. 사랑愛이 증오憎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줄 '일승금' 의 애완동물(?) 사랑도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 역시 마지막에야 엄청난 떡밥을 던져주는 나찰녀. 

누구지?? 누가 등장하는거지??(혹시 베지터가 등장하는건 아니겠지?ㅋㅋ)

 

 [대당편] 의 완결편은, 역시나 대가의 '대단원' 답게 한 권 만으로도 대단히 완성도 높은 한 단원의 마무리를 감상할 수 있다. 10권에 달하는 시간동안 은혜로, 또는 원수로 쌓여온 인연들이 차근차근 정리된다. 비록 1부격이긴 하지만, 최근엔 이렇듯 1권부터 10권을 관통하는 뚜렷한 주제의식, 통일성 있는 스토리 텔링, 일관성 있게 완성도 높은 작화로 완결되는 장편 명작은 쉽게 만나보기 힘들다. 성장해가는 손오공의 외모부터 대사와 행동까지 디테일하게 지켜볼 수 있다.  

 
 일본 망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재적인 몇명의 작가들이 시대별로 명멸하며 '왕국' 의 위세를 이어왔다. 우리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망가의 신 '데츠카 오사무' 에서부터 '드래곤 볼'의 아버지 '토리야마 아키라' 에 '슬램덩크' 와 '배가본드' 의 '이노우에 다케히코' 까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 마다 그에 뒤지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뛰어난 작가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서유요원전] 의 모로호시 다이지로 역시 그 천재성에 비해 국내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개성 강한 그림체와 일본의 전통적인 색채가 짙은 매니악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인데, 다행히 [서유요원전] 을 필두로 다양한 출판사에서 여러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유요원전] 은 가장 긴 장편으로, 단연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대가다운 스토리 텔링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종의 '자아 찾기 여행' 이자 '진리를 추구하는 여행' 이며 '영웅 서사물' 이기도 한 현장과 손오공의 여정은 이제부터 [서역편] 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터다. 무지기의 끊임없는 유혹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쓰는 손오공. 그 여정에 끝엔 무엇이 있으며, 그 곳에서 손오공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는 - '조금'은 뻔하고도 추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나아갈 테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그것이 아니다. 그 여정 '중' 에, 손오공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야기들을 쌓아갈지. 그리고 그렇게 얽히고 설키는 인연들 속에서 손오공은 어떤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역시 장편은 쌓아놓고 읽는게 제맛. 1권은 장기 대여중.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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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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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성性적인 기호嗜好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이성에 대한 '매력포인트' 라고 하기엔 보다 농밀하고, 보다 관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어딘가, 혹은 무언가 가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성적인 기호' 야말로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 섹스가 단순히 본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섹스가 단순히 본능에 의한 행위라면 그 대상의 생식력과도 무관한 단순한 '기호' 라는 것이 필요할 리도 없을 것이다. 이 '성적인 기호'는 대부분 '최초의 기억'이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겨난다. 여성의 가슴이나 힙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번식과 관련되었기에 종족의 유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손이나 발, 손가락과 발가락, 손톱, 복사뼈, 발목, 아킬레스건 등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개개인의 기호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성의 목젖이나 잘록한 발목, 종아리, 얇은 손목, 가슴털 등에 섹시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성별이 다름으로 인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가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페티시즘Fetishism'  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 이와 같이 조금은 '특별한' 성적 기호는 한때는 일종의 정신질환적인 집착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욕들 중 하나라는 것이 통설로 적용되고 있다. 인간은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간에 정도가 심하면 일종의 도착증세를 보이게 된다. 페티시즘 역시 마찬가지이다. 손이나 발, 손톱이나 털, 제복이나 스타킹, 레깅스, 타이즈, 속옷 정도라면 그나마 평범한 축이고, 때로 페티시즘은 특정 체위나 행위(목을 조른다거나 묶는 등 사디즘이나 마조히즘과 결합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대변이나 소변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든, 정도가 어떻든간에, 이러한 성적인 기호가 사회가 용납하는 정도를  벗어나는 것들이 대상이 되면 당사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성적인 욕구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파트너와 공유되어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최소 구성원인 가족을 만드는 가장 상징적인 소통수단인 섹스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구에 심각하게 도착증세를 보이게 된다면 당연히 그 결과는 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개인적인 부분인 동시에, 사회적인 부분일 수 밖에 없다.    

 

 험버트는 '님펫' 이라는 존재를 갈구한다. 님펫이 아니면 성적인 욕구는 해갈되지 않는다.  

험버트가 님펫이라고 명명한 이 존재는 간단히 말해, 육체는 미성년이지만 정신은 성인인 독특한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아이'들을 일컫는다. 험버트가 갖고있는 이 님펫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은 어렸을때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어린시절 겪었던 첫사랑의 감정과 첫 성경험의 쾌락이 합쳐진 결과로써 그 당시 사랑했던 소녀의 나이, 피부, 헤어컬러, 미묘한 뉘앙스, 분위기등이 깊이 각인된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부분은 험버트에게 각인된 성적인 대상이 반드시 '미성년' 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성년자는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대상 1순위에 꼽히는 계층이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때문에 인류라는 종족의 생물학적인 지상과제는 '다음세대를 키워내는 것' 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범죄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너댓배로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인 미국에서는 그 수위가 훨씬 높다. 특히 미성년자와 갖는 성관계는 무조건 처벌대상이 된다. 험버트는 자신의 이러한 성적인 '각인' 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고, 성인 여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며 심지어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본능적인 욕구와 연결된 심리적 각인은 쉬이 없앨 수 없었다. 험버트는 가능한 미성년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 부근에서 거주하며 그 안에서 님펫들을 찾아 눈으로 보고, 혼자 상상하며 욕구를 해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험버트는 운명과도 같이 '돌로레스 헤이즈' 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타고난 님펫. '롤-리-타'. 험버트는 욕구의 발현인지, 꿈같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리며 아슬아슬한 운명의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주석이 본편만큼 많은 문학동네판 롤리타는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우연히 문학동네 편집자들로부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체를 한글로 옮겨내는 데에 대한 어려움을 충분히 들었더랬고, 커뮤니티를 통해 여러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충분히 기다렸기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은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훌륭한 번역서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긴 서사시를 엮어내며 비슷한 구조의 문장이 거의 단 한 줄도 없을 정도로 모든 문장들을 공들였다고 한다. 새로운 방식의 묘사, 새로운 방식의 풍자, 수많은 단어들을 비틀고 꼬아 말장난을 하고, 수많은 실존 인물들과 문학작품들을 인용하고 차용하며 풍자하고, 심지어 문장의 구조와 문법까지 마치 레고 조각처럼 부수었다 조합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문학동네판 롤리타는 그런 부분들까지도 한국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는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출간되었을 당시에도 문학계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었고, 심한 평가를 받으며 심지어 법정까지 가서 판금조치(1955)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2심에서 그 판결이 뒤집히며 1958년 드디어 뉴욕에서 처음으로 발매되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작품은 충분히 '포르노그래피' 라고 읽힐 만 하다. 만약 누군가 줄거리만 다이제스트로 뽑은 축양본을 낸다면, 엄청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포르노가 맞을 것이다. 사실 작품안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없지만, 엄청난 문장력과 아이디어들로 점철된 관능적인 은유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소아성애자의 욕망에 대한 포르노가 아니라, 사회가 용납할 수 없고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커다란 욕망을 안고 태어난 불운한 한 남자의 처절한 서사시이다. 험버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보지만 님펫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제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나마 그는 분별력 있는 성인이었고, 충분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기에 해볼 수 있는 수단이 많았고, 또 그 모든 수단을 충분히 활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가능했다.

 성적인 욕구와 사랑(에로스)이라는 감정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다. 성적인 욕구가 식으면 남녀간에 사랑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사랑' 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는 것이라면 성적인 욕구는 그 '함께 있고 싶다' 에 포함되는 것이다. 신이 흙으로 '몸' 을 빚은 순간부터 그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험버트는 하필이면, 운이 없게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미성년자에게 그런 욕구를 갖게 된 것이고, 또 하필이면 롤리타를 만나게 된 것이리라.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하면서도 온갖 고뇌와 고충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게 된다. 연애란 그런 것 아니던가.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연인에 대한 수많은 의심과 오해와 갈등, 서로의 현재에 대한 직시와 미래에 대한 고민, 서로가 서로를 알기 전의 과거들에 대한 수많은 의문과 추측들, 거기에 험버트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는 자의식까지 결합되며, 그야말로 어마무지하게 고난스러운 연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까짓 사랑, 안하고 만다!! 했으면 좋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욕망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험버트는 어쩔 수 없이 이 고생스럽고 고단하고 유난스러운 관계를 1초라도 더 길게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롤리타를 제어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고, 비위를 맞춰 '한 번 해볼' 구석을 찾아 안달복달 하는 모습은 같은 남자로서 안타깝고도 웃긴 모습들이다. 그 와중에도 법의 테두리에 걸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범죄자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롤리타라는 소녀 역시 쉬이 보아 넘길 꼬맹이가 아니다. 

그녀는 내가 읽어본 모든 소설들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요부妖婦중의 요부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갖고 놀' 줄 안다. 아마 롤리타는 험버트를 처음 만난 그 순간, '이 아저씨는 나한테 빠졌어' 라고 느꼈으리라.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면 롤리타의 무시무시함을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남자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방법은 물론 섹스를 무기로 이용할 줄 알았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빠르게 체득해 낼 수 있었으리라. 호락호락해 보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름답고 강하고 위험한 롤리타.  

 

 결국 이 작품은 욕망에 허우적대는 가련한 한 중년 남자의 고되기 짝이 없는 연애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어렵고 복잡하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30대 중반을 코앞에 둔 나도 이것 한가지는 확언할 수 있다.

사랑은 가장 폭력적인 감정이다. 위험한 감정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연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하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수많은 그들은 그녀들을 위해 검을 빼들고 총을 빼들었다. 심장을 바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폭행하는 일은 현대에서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돌로레스 헤이즈 -; 롤 - 리 - 타'

그 이름은 험버트에게 있어 쾌락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여신의 이름이었다.

그렇다. 어쩌면 욕망이란 쾌락과 두려움이 공존해야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험버트가 님펫이란 존재에 집착하게 된 최초의 기억에도 쾌락과 두려움은 공존했었으니.  

 

 

 

ps. 롤리타의 엄마 --> 험버트 --> 롤리타  사이의 묘한 일방적인 삼각관계도 꽤나 재미있는 그림이다. 롤리타의 엄마가 험버트에게 보내는 욕망의 시선과, '엄마' 로서 '여자' 로서 발휘하는 자제력과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보내는 욕망의 시선과, '범죄' 로서 발휘하는 자제력과 '남자' 로서 취하는 행동들이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대조된다. 무엇보다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욕망에 관한' 남녀의 시각과 정서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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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팔이 소녀 말로센 시리즈 3
다니엘 페낙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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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런 작품일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피에 나와있듯, 코믹 - 스릴러 - 판타지라길래, 쑥쑥 잘 읽히겠거니, 하며 헬스장에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읽을 책으로 찜해둔 터였다. 계획대로 헬스장에 들고가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가볍게 펴들었는데, 잠깐 사이에 땀을 뚝뚝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을 좀 더 읽기 위해 워밍업으로는 꽤 과한 30분동안 페달을 돌렸고, 그 뒤로부터는 헬스장에 갈때마다 고정 싸이클을 꼭 30분 이상씩 하게 되었다.(집에 가지고 가서 읽을 생각은 안했다. 사실 내겐 그 시간이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라서.) 

 

 끔찍하게 난자당한 샹프롱 교도소의 소장 생티베르의 시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혼식날 천국같은 교도소에서 천사같은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 클라라와 그의 오빠 뱅자맹 말로센, 그리고 그의 연인 쥘리와 그의 사랑스러운 가족들, 그리고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여러 사람들이 폭풍같은 연쇄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작품은 평이한 소재와 신선한 아이디어들, 평범한 서사와 유려한 묘사들이 모두 적재적소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인 다니엘 페냑의 문장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문장마다 위트와 유머가 송알송알 박혀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뱅자맹 말로센의 가족 구성원들이 참 재미있다. 장르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지력을 지닌 꼬마가 등장해 이야기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체의 정서를 절묘하게 컨트롤 해 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종군기자 출신의 연인 쥘리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미스테리 스릴러는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뱅자맹 말로센을 이야기 초반부터 배재시키는 대담함도 놀랍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자보 여왕' 이다. 그녀가 바로 타이틀의 주인공인 '산문팔이 소녀' 이다. 

 

 이 작품은 장르소설의 관점으로만 보아도 대단히 잘 짜여진 수준높은 이야기이다. 여러 복선과 트릭을 심어 독자의 뒷발을 잡아채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코와 입을 막고, 개성강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마음을 잡아끌고, 손을 잡아당기고, 반전에 반전으로 독자들을 와락 껴안았다, 확 밀쳐낸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인 '상업적인 소설' 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 에 대한 주제가 작품 전반을 묵직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각종 SNS가 범람하는 요즘에는 '온라인 인격, 사이버 인격' 이라는 것이 발현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실제 만나보면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활발하고 넉살좋기도 하고, 파괴적이고 인신공격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실제 만나보면 착하고 온순한 사람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나 역시 내가 올리는 글들을 봐도 '이게 내가 썼나?' 싶은 것들이 많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어조로 글을 쓰고, 잰체, 난체하는 글을 쓴다던지, 실제 만나면 결코 못 건넬법한 오글거리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평소에 컴플렉스가 많아 조금 내성적이고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항상 자신감에 차있고, 아는게 많고, 매사에 쿨한 사람들이 좋았고, 닮고 싶어했다. 인터넷 공간 안에서 닉네임의 뒤에 숨어 내가 원하는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생활 공간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직장 상사 앞에서는 얌전한 부하직원이어야 하고, 한편, 이런 업무 저런 업무들이 잔뜩 몰려들때엔 무능한 사원을 연기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인사평가가 달린 프로젝트 앞에서는 자신만만한 연기를 해야하고, 맘에 드는 소개팅녀 앞에서는 뭔가 있는 든든한 남자를 연기해야 한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찾아내 비집고 앉은 의자 위에서는 잠자는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하고, 명절 즈음에는 회사일이 잔뜩 쌓인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한다. 그런 모든 연기들이 어쩌면 모두 각자의 본질일수도 있다. 

 소설이란, 그런 것 아닐까?

작가라는 한 사람이 익힌 모든 삶의 경험과 교훈들,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순간마다 했던 수많은 연기들, 사회의 통념과 정해진 윤리관 안에서 밀어넣고, 숨겨놓고, 밀봉하고, 상상했던 그 모든 일들.

 

 뱅자맹 말로센은 좋은 오빠이자,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였다.

그 모든게 어쩌면 다 다른 탈과 연기였을 수도 있고, 다 뱅자맹이 가지고 있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소설'을 만드는 일을 했고, 다른 작가인 척 연기를 했으며, 결국 정말로 다른 사람의 장기를 몸 안에 넣기도 했다니. 본질을 찾는 과정을 참으로 멀고도 험하고, 복잡했고, 다난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간 자리는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로 연기하는 바로 그 자리였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친구를 발견한다.

자기 과거를 발견하고, 자기 현재를 발견하며, 자기 미래를 발견한다.

인류의 역사를 발견하고, 지구의 역사를 발견하고, 인류의 미래를 발견한다. 

'산문팔이 소녀' 자보여왕이 책에 빠져든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작품'들' 안에서 한 작가의 삶 전체를 느껴냈다.

 

 사실, 딱히, 내가 꼭 '나' 일 필요는 없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싶다.

연인에게는 영원히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어도 좋고, 자식들에게는 영원히 이 자리에 서 있는 버팀목이어도 좋고, 가끔은 쿨하고 시크한 척 해도 좋고, 소심하게 삐진 척 해도 좋고, 부모님 앞에서는 언제나 재롱떨고 귀염떠는 아이인 척 해도 좋고, 힘들고 지칠땐 병약하고 허약한 척 해도 좋다. 사회가 용인하는 범주를 벗어나거나 도덕적, 법적 기준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연기를 해도 된다. 

타인과 사회에 맞춰 각기 다른 자신을 연기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장 '나 다운 것' 이란 것은 연기하고 또 연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은 최악의 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p.81

 

"사랑이 죽고 나면 인생은 끝없는 고통뿐이야."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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