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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세계의 소멸과도 같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에게는 단지, 한 타자者의 소멸에 불과하다. 하루에도 수억명이 죽어나가고, 수억명이 태어나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수억명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억명의 세계가 생성된다. 하지만, 나머지 수십억의 사람들은 사라진 수억명의 사람을 서서히 잊어갈 뿐이다.
때로는 한 인간의 죽음이, 실제로 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타인에게 전래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가 남긴 모든 기록은 전파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했던 민족의 역사와 기록들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한 세계의 죽음이었다. 한 문화의 사멸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 의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고 한다. 곧 그가 나와 한 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고,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기에 합당한 분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몸 안에 새긴 고서高書이자, 흘러간 세월들이 빚고있는 한 세계의 마지막 사람들이다.
'예술' 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도 있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으며, 해석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즐겁고 아름다운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되기 짝이없는 삶은 특히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간들에게 특히 더 괴로운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삶의 고됨을 잊고 살아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
예술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각종 과학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접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진 듯 보인다. 댓글을 통해 수초에 한번씩 서로서로 수많은 소통을 하고, 구만리 떨어져 있는 곳의 기인들이 펼쳐내는 화려한 기예를 감상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들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도 있고, 수많은 기술들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세계가 그만큼 좁아졌다.
하지만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너무나 넓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놀라운 기예를 갖춘 예술가를 평생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장터에 뛰어난 예술가가 나타나 노름을 놀면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내던지고 그 판으로 달려갔다. 사당패가 신묘한 묘기에 농삿일의 고됨을 잊었고, 무용가의 화려한 춤사위에 가뭄 걱정을 떨쳐보냈다. 명창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다. 그렇게 삶의 일부이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인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어렵다.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경탄받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수준의 기예로는 택도 없다. 아주아주 특출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십수년, 나아가 수십년에 가까운, 아니 평생에 가까운 정진이 필요하다. 재능을 타고 나기도 힘들었지만, 예술을 접하기도 힘들었고, 기예를 지닌 예인을 만나기도 힘들었으며, 특출난 기예를 가진 수준 높은 예인을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었으니, 당시의 예인들은 가히 로또수준의 인연을 만나야만 가능했을터다.
그렇게 인연의 고리가 닿고 닿아 맥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 예술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일부 의식있는 예인들이 보존을 위해 발품을 팔고 주머니를 털어 지역 협회를 만들고 예인들을 모아 정기적인 발표회를 열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도 쉽지만은 않았다. 예인은 천한 신분이었다. 특히 여성 예인들은 대부분 기생이거나 무당이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며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적절히 소화되지 못했고, 경제발전 중심의 상공업 발전정책으로 인해 복지와 문화는 뒤켠으로 밀려났다. 그 시기를 넘기니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돈이 되는' 예술만 살아남기에 이르렀다. 오래된 것은 돈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들은 가장 글로벌한 시대인 오늘엔, 확실히 배척받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전통 예술은 간신히 명맥만 이어지고 있을 뿐. 진짜 노름마치들은 자신의 기예를 오롯하게 전수해줄 후학도 길러내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저자인 진옥섭은 전통무대의 기획과 연출을 하며 직접 만나온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예를 능란하게 서술한다.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노름마치들의 춤사위와 소리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감칠맛 나는 글맛이 오감을 만족시킨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 인간의 삶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고고한 역사의 흐름에 의해 속절없이 휩쓸려간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쳤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때를 잘못 만나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춤사위 한 번 떨치지 못했던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시시 때때로 어깃장을 놓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삶과 종교가 하나가 되고, 고통과 눈물을 핏속에 녹여내어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것은 이미 '즐겁고 아름다운' 경지를 가뿐히 넘어선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을 빼앗고, 눈과 귀를 홀리고, 결국엔 그 혼마저 쥐고 흔드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 노름마치.
과학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더욱 약해졌다.
이제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애써 산 하나를 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다. 입을 열 필요도 없이 환히 빛나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손가락을 바삐 놀리면 어떤 대화도 가능하다. 빨래나 설거지도 간단하다. 네모난 통 안에 쑤셔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요리는 또 어떠한가. 굳이 재료를 사러 시장에 갈 필요도 없다. 어제 수확한 채소를 오늘 집에서 받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목에서 쓴 물을 쏟아내도록, 허리와 관절이 부서지도록 노력하여 '돈'도 되지 않는 기예에 인생을 바칠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갈 것이다. 노름마치에 이르는 길은, 그 끝에 부도, 명예도 없는 고난의 길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감동적이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노름마치' 라는 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잊혀지는 것이 구슬프다.
이 책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래된 것들을 붙들고, 사라지 않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한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