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브라이언 아자렐로, 리 베르메호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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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만난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는 '생명'은 수개월동안 세포 분열을 반복하며 인간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태아의 뇌가 만들어지고 각종 신경 줄기들이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데, 눈目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흡사 뇌가 더듬이처럼 길게 뻗어나오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한다. 눈은 어찌보면 몸 밖으로 돌출된 뇌의 일부분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눈은 뇌 - 정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기관이다.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점은 잘 보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 처럼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 뇌 안에 저장되는 능력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본 순간,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여러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렉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넌 인간이 아니야." 

루터의 눈 앞에 나타난 이 강철의 남자; 맨 오브 스틸 이자 빅 블루 스카우트, 블러, 그리고 포 투머로우(미래의 사나이)인 슈퍼맨은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에 불과하다. 루터에게 슈퍼맨이란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의 앞에서 모든 인간의 모든 과학과 능력은 인간의 개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간인 루터에게 슈퍼맨은 거대한 악몽, 그 자체이다. 

 

 이 작품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시각의 다름' 을 표현한 곳에 있다.

루터의 눈에 슈퍼맨은 정의의 수호자나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거대한 악당이고 악마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슈퍼맨의 가장 큰 숙적이자 빌런('히어로'의 상대개념으로 흔히 '악당'으로 번역된다.) 으로 알려져 있는 루터이지만, 루터가 왜 슈퍼맨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는지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코믹스의 양대 산맥, 마블과 DC에는 각각 '간판 캐릭터'라 불리우는 캐릭터들이 있다. 수십년간 수백명의 작가들을 통해 에피소드가 쌓이고, 재해석이 거듭되며 인격이 형성되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작은 만화 출판사를 차근차근 대기업으로 성장시켜준 '1등 직원' 들. 특히 DC의 '슈퍼맨' 은 그 자체가 미국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적인 철학들이 쌓인 미국의 아이콘이랄 수 있다. 

 슈퍼맨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神이고, 완벽한 존재이다. 렉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태풍에 의지가 있다고 해봐. 그 다음 그 힘에 천 배를 곱해 봐. " 

 그가 우리편이라 다행이라는 브루스 웨인에게 루터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변하면? 만에 하나... 오늘이라도 갑자기 우리를 내려다보며 더 이상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내일 불현듯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어쩌지? '뭐하러 지구를 지키고 있나? 그냥 손가락 딱 튕기고 지배하면 되는데?' 그 땐 우린 어쩌지? 우리가 가진 건, 우리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건 결국 그의... 말뿐이잖나."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맡고 있는 역할 역시 이와 비슷하지않은가? 

소비에트가 무너진 이후 홀로 승승장구해 온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다. 그 어느 국가이든 미국의 눈 밖에 나면 손가락 딱 튕기듯 제거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손에 잘려나갔다. 렉스 루터의 눈에 비친 슈퍼맨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사람들 눈에 비친 미국과 같을 터다. 


 렉스는 [인간의 미래]를 위해 슈퍼맨은 불필요한 요소라고, 초인이란 인류의 앞길을 막을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슈퍼맨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강력한 힘과 그 앞에서 아무리 용을 쓰고 노력을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임에 자괴하고 자조한다. 슈퍼맨의 힘에 대한 강력한 질투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루터에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분노가 더해진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아집과 내가 뛰어넘을 수 없다면, 없애서라도 능가하겠다는 욕망의 화신인 것이다. 

 루터는 인류를 위해, 인류의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모든 인간이 숭배하는 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슈퍼맨을 숭배하는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는 길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한다. 인류가 [미래의 사나이]라 부르는 신-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모든 인생을 걸기로 결정한다. 


그는 냉혹하고 과감하게 슈퍼맨과 맞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태풍에 맞서고, 신에 맞선 유일한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본다. 

눈이란 외골격으로 돌출된 뇌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있다. 

누군가에게 루터는 사악한 빌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 루터는 인류를 외계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줄 히어로일 것이다. 


브라이언 아자렐로는 이렇듯 다른 시각에서 히어로와 빌런을 바라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유난히 음영이 짙은 마스크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리 베르메호는 찰떡 궁합을 선보인다. 

그야말로 최고의 이야기와, 최고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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