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8월
구판절판


물론 선의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생에게 손을 대는 열성적인 선생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남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체벌이 열성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것은 세속적인 권위에 의해 지탱되는 단지 비굴한 폭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28쪽

정보라는 것은 참 묘해서, 들어오는 정보의 어디까지가 필요하고 어디서부터가 필요하지 않은지를 생각해보면, 점점 경계선이 불분명해진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전부 필요없는것 같고, 반대로 일단 정보가 부족하다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안해지게 된다. -46쪽

사람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감퇴하는 것이 비단 성적인 능력만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능력'도 감퇴한다. 이는 확실하다. 예컨대 젊었을 적에는 나도 제법 빈번히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좌절해서 눈앞에 깜깜해지거나, 누군가가 던진 한 마디에 가슴을 찔려 발밑의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꽤 심각했던 나날이었다-130쪽

왜 나이를 먹으면 상처받는 능력이 떨어지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또 그것이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마음이 편안한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처받는 일이 적은 쪽이 편안하다. 지금은 누군가한테 아무리 심한 말을 듣더라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 배반당해도, 믿고 빌려준 돈을 못 받더라도, 어느 날 아침 펼쳐든 신문에 하루키는 벼룩의 똥만큼도 재능이 없다는 기사가 실려있더라도 그렇게 상처받지 않는다. 물론 마조히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기분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런일로 낙담하거나 며칠이고 끙끙 앓으며 고민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쩔수 없지 뭐 다 그런거잖아 하고 생각하고 그걸로 잊어버린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잊으려고 애를 써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130쪽

결국 이것은 어쩔 수 없지 뭐 다 그런거야 하고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다시 말해, 몇 번이나 그런 비슷한 일을 경험해왔고, 그 결과 무슨 일이 생겨도 뭐야, 또 지난번과 똑같은 일이잖아? 하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젠 매사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강인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한 감수성이 닳아버렸다는 의미이다. 즉 뻔뻔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나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보잘것없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일종의 순진한 감수성을 간직한 채 내가 속한 직업적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소방수가 레이온 셔츠를 입고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31쪽

그렇지만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다지 상처받지 않게 된 것은 나라는 인간이 뻔뻔스러워진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고 인식했고 나는 그 이후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절실히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131쪽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에서 주인공 올비 싱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자면, 인생은 호러블한것과 미저러블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예를 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그리고 음...미저러블 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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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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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이공 거리의 여자들, 미개간지에 있는 백인 금누지의 여자들을 살펴봤다. 그중에는 매우 아름답고, 피부가 눈부시게 흰 여자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미개간지의 여자들은 특히 그랬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가꾸기만 했다. 그녀들은 유럽을 위해서, 연인을 위해서, 이탈리아에서 부낼 바캉스를 위해서, 3년마다 돌아오는 여섯 달 동안의 긴 휴가를 위해서 자신을 가꾸었다. 친지들에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 퍽이나 색다른 식민지의 생활, 원주만들의 봉사, 거의 맹종하는 완벽한 하인들, 열대식물, 무도회, 길을 잃을 만큼 으리으리한 흰색 별장들, 변두리 근무지에서 일하는 관리들 소유의 별장들에 대해 이야기 할수 있는 휴가를 위해서 자신을 가꾸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기다렸다. 그녀들은 아무 일이 없는데도 몸치장을 했다. 그리고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봤다. 별장의 그늘 속에서 그녀들은 훗날을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소설처럼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들의 긴 옷걸이는 이미 드레스로, 철따라 구입해 모아넣은 드레스로 그득했다. -27쪽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다리는 나날의 무료함을 더해 줄 뿐이었다. 어떤 여자들은 미쳐 버리기도 했다. 어떤 여자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하녀 때문에 버림을 받기도 했다. 차였던 것이다. 이 말은 그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어, 한바탕 법석이 일어나는 소리가 났고 남자가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여자들은 자살했다.
그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에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27쪽

그녀가 검은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다. 차 문이 다시 닫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나른함이, 일종의 피로가 갑자기 온몸에 퍼진다. 강 위의 불빛이 흐려지면서 보일 듯 말 듯 하다. 가볍게 귀가 먹먹해지고, 사방에 안개가 퍼진다. 나는 더 이상 원주민용 버스로 여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리무진이 나를 학교로 데려가고 기숙사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나는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서 아쉬워하게 될것이다.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포기한 모든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쟁취한 모든 것을. 그리고 그 버스, 나와 늘상 우스갯소리를 하던 버스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후추 담배를 씹어 대던 할머니들, 짐 선반 위의 어린애들, 사덱의 우리 식구들, 그 식구들의 혐오, 그들의 놀라운 침묵, 그 모든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43쪽

그가 말했다. 그는 파리에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그 감탄할 만한 파라지앤들 결혼식 난장판 맘소사. ...2년 동안 지속해 왔던 그 희한한 생활,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진력이 빠졌다고 했다. 그녀는 백만장자다운 부유함을 드러내는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죽었고 그는 외아들이라고 햇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겠소. 아버지는 10년 전부터 마약 때문에 강변에서 휴양하며 일을 안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마약 흡연자 수용소에 들어간 후로는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소. 그녀는 짐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사덱의 근무지에 사는 어린 백인 창녀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게 된다. -44쪽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일, 똑같은 연민, 똑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같은 미신이었다. -84쪽

한번은 그가 학교 핲에 오지 않았다. 운전기사 혼자 검은 승용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 기사는 작은 주인님이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사덱에 갔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운전기사인 자기는 사이공에 남아서 나를 학교에도 데려다 주고 기숙사에도 데려다 주라는 분부를 받았다고 했다. 그 작은 주인님은 며칠 수 돌아왔다. 여전히 검은 승용차 뒤편에 앉아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불안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바로 거기서, 학교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면서 그는 울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더 우래 사실 것 같아. 그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계속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도 이런 걸 이해하시겠지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아버지 역시, 적어도 한번쯤은 저처럼 이런 열정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으실 테지요.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는 아버지에게 빌었다. 그러니 저의 이런 열정을, 이런 광기를, 백인 소녀에 대한 이런 미칠 듯한 사랑을 가질 기회를 단 한 번만 허락해 주세요. 그는 아버지에게 요구했다. -99쪽

그녀를 프랑스로 돌려보내기 전에 그녀를 사랑할 시간을 주세요.1년만 더. 더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버지는, 차라리 네가 죽는 걸 보는 편이 낫다고 거듭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항아리에 담긴 차가운 물로 함께 목욕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사랑은 아직고 죽고 싶을 만큼 열렬했고, 그것은 이제 위로할 길 없는 희열이었다. -99쪽

그녀가 운 것도 배가 첫번째 작별의 고동을 울렸을 때였다. 배의 트랩이 올려지고 예인선이 배를 끌어당겨서, 배가 육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그때였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이었고, 또 이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작은 오빠의 눈에 띄지않게 그녀는 괴로워했다. 그들 사이의 습관대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의 큰 승용차가 거기 있었다. 길고 검은 승용차. -131쪽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년느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133쪽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이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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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8-01-0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영화로 봤는데 님께서는 지금 책으로 보시는군요 ^^
이러니 제가 엄청 나이든 사람으로 여겨지는데요? ^^

LAYLA 2008-01-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거 슬쩍 보고 책을 읽었어요. 근데 책이랑 영화랑은 좀 다르던데요? 영화에선 키크고 멋진 중국인 남자였는데 책에선 작고 마르다고 묘사되어 있어서 좀 헷갈렷어요. 영화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ㅋ
 
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절판


자네는 이런 고급 여관의 좋은 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아무래도 요리가 아닐까요?
물론 요리도 요리지만 여기처럼 제대로 된 여관은 도착해서 돌아갈 때까지 '이건 아니다' 싶은 게 하나도 없는 법이라네.
아니다 싶은거요?
그래, 아주 사소한 것. 그러니까 차가 미지근하다든가 뭔가 서두른다든가. 대놓고 불평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신경쓰이는거, 그런 것이 전혀 없는게 이런 여관이네. 일류라고 평가받는 곳은 전통 여관이든 호텔이든 모두 다 그렇지.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는 거라네-29쪽

"그럼 이제부터 내 생각을 얘기할 테니까 바보 같은 옂라고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아야코는 먼저 그렇게 못을 박았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을 참고 시케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아"아야코가 말했다.
"그래?" 이번에는 시게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시게타는 좋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말야"
"하지만 중상위권은 되지않아?"
"그러니까 잠깐 내 얘기부터 들어줘"
"알았어 들을게 하지만 관계없는 얘기는..."
"관계가 있어. 나는 가고 싶은 대학이 있어. 물론 지금 성적으로는 어렵지. 그래서 요즘 좀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런데?"
"그러니까 앞으로 여름방학이 제일 중요한 시기잖아? 그런 중요한 시기에 남자 친구와 놀러다니면 되겠어? 나 바보같은 여자지?"
다시 아야코가 얼굴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시게타는 어쩔수 없이 대답했다
"뭐 그다지 영리한 여자의 변명처럼 들리진 않네"
"변명이 아냐"
"요컨대 나하고는 사귀지 않겠다는 얘기지?"
"바로 그거야. 뭐랄까, 바로 그 점에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야. 시게타와 사귀고 싶어. 단지 지금은 사귀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37쪽

"점점 더 바보 같은 여자가 되어가네"
"그렇지? 그래서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처음에는 장난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야코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뭐랄까, 그 원하는 학교라는데 아야코를 꼭 보내고 싶어졌다.
"그럼 나와 안 사귀고 공부하면 꼭 그 대학에 합격할 수 있어?" 시게타가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 아야코가 대답한다
"약속해. 약속해 주면 나와 안 사귀어도 돼"-38쪽

이듬해, 아야코는 원하는 학교에 멋지게 합격했다. 그런데 시게타는 이상하게도 아야코의 쾌거를 솔직히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은 이름도 모르는 전문대에나 가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야코에 대한 마음은 여전했고 이제 떳떳하게 애인이 될 수 있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그러나 시게타는 "나를 바보 같은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마"라고 전제한 후 "내가 떳떳하게 너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래?"라고말해버렸다. 아야코는 당황하더니 시게타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제대로 사귀어 보지 못한 주제에 이별만큼은 확실하게 했다. -39쪽

고등학교 졸업한 후, 몇 년 만에 아야코와 재회한 곳은 시부야의 뒷골목이었다. ..은색 페라리가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좁은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시게타 아냐?"
페라리의 차 높이가 낮아서인지, 아야코가 신고 있던 하이힐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비탈길 밑에서 올려다봐서 인지, 차 옆에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야코의 키가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때 '빵빵'하고 경적이 울리더니, 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아야코를 불렀다.
"빨리 안가면 늦어!"
아야코는 돌아보지도 않고 시게타를 보며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 친구야?"
"말도 안돼 동아리 선배야"
"그래도 괜찮은 친구 같은데"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괜찮은?"
아야코가 얼굴을 더 찡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주제에 페라리나 몰고 다니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대학생이면 같은 은색이라도 히비야선 전철을 타야 하는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야코를 따라 시게타도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18쪽

행복한 순간만을 이어붙인다고 해서 행복한건 아냐-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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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5
토머스 모어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6년 7월
구판절판


현재 도둑이 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결국 도둑이 될 수 밖에 없는 부랑자들이나 빈둥거리는 하인들까지도그런 일거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들을 제대로 시행하기 전까지는 도둑들을 상대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자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정의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사회의 기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겉치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그들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방치해두었고 또 구조적으로 어릴 적부터 타락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성인이 되면 어릴 적부터 저지를 수 밖에 없게 운명지어진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당신들은 그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은 도둑들을 만들어내고선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있는 것입니다. -56쪽

어떤 물품이든 절대 모자랄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필요 이상의 물품을 쌓아두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 결핍의 공포가 없는데 탐욕을 부리는 동물은 없습니다. -127쪽

유토피아인들은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그토록 많은데, 별에 비해 그 빛도 미미한 조그마한 돌조각에 매혹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들보다 질 좋은 양털 옷을 입었다고 해서 더 잘났다고 바보처럼 으스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잘 만든 양털 옷이라 해도 본래의 양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잘 만든 양털 옷이라 해도 본래의 양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양털은 양털일 뿐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전 세계에서 금과 같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질을,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 인간보다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정신적인 능력이 한 줌의 납덩이나 나무토막보다 못하고, 바보인 데다 비도덕적이기까지 한 자가, 우연한 기회에 엄청난 금동전을 갖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량하고현명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이나 법을 이용한 속임수를 통해 금동전이 갑작스럽게 그 존재조차 미미했던 하인의 손으로 넘어가면, 주인은 마치 화폐에 새긴 조각처럼 돈에 딸려 들어가 자기 하인의 하인이 되고 맙니-144쪽

하지만 유토피아인들이 가장 어이없어 하고 혐오하는 것은 부자에게 빚을 졌거나, 그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 한 푼도 거저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숭배하는 바보스러운 태도입니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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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11-3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래서 고전이 훌륭한 것이로군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진리가 있네요. 근데 다들 아는 사실인데, 공감만 할 뿐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네요. 더 천박해질뿐이고...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절판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존왕> 5막 2장-16쪽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교양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가 가난했을 때 품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35쪽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37쪽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느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1쪽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내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힘을 통해 승리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1쪽

하느님이 이 사람들의 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아울러,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이웃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나로서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쪽

훨씬 순수한 진리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진리라는 개울의 발원지를 찾아 상류로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간 적이 없는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성서와 헌법의 옆에 서서 경외와 겸손을 보이며 그 물을 마신다.그러나 이 호수나 저 연못으로 졸졸 흘러드는 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원을 향한 순례를 계속한다.-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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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11-23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했을 때 품었던 생각을 왜 부자가 되면 실천하지 않는지... 가난해야만 사람이 순수한 것 같아요. 예수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가봐요.

LAYLA 2007-11-2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끗한 부는 아름답다는 말을 문국현 후보가 하던데 정말 그런 사람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
뭔가 제가 느낄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