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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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갈까요?"
그는 이미 주도권을잃은 상태였다.
"나는 이곳에 묵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그 말을 끝낼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난 여기 묵고 있어요."라고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조금 흔들고서 정신을 차렸다. "2층 203호, 계단 오른쪽이에요.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밀고 들어오세요." - P29

"내가 방금 본 바에 따르면, 퇴짜 맞은 사람은 당신인데요."

그는 그녀가 방금 자기를 혼자 두고 간 여자와 있었던 일을 언급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끝나지만, 분노는 오래가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 이렇게 매듭지었다. "반면에 당신은 혼자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녀는 씁쓸한 시선으로 그를 감쌌다. 그리고 말했다.

"내 나이가 되면 모든 여자는 혼자예요."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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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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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 P358



고야스 씨는 날로 커져가는 아내의 배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자신들 사이에 태어날 아이를 상상했다. 과연 어떤 아이가 이 세상에 와줄까? 그리고 그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어떤 자아를 지니고, 어떤 꿈을 품을까?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380

그건 그에게 싹튼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자, 지금껏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망설임과 울분이 사라지고 거의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모든 야심을, 혹은 몽상과도 닮은 희망을 접고, 지방 소도시의 중견 양조회사 4대 경영자로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P380

세 사람의 이름 밑에는 각자의 생몰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의 몰년은 같다. 소에다 씨 말대로 그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떴다. 한 사람은 길에서 트럭에 치여, 한 사람은 불어난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서. 그리고 홀로 남겨진 고야스 씨의 몰년은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작년이다. 나는 묘비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429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 P449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 P568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나아가니까. - P636

짐작컨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 P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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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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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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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어쨌든 나는 중년 커플을 바라보면서, 내가 스물다섯의 젊은 남자와 있는 이유는 내 또래 남자의 주름진 얼굴, 나자신의 늙은 얼굴을 내내 앞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A의 얼굴 앞에서는 내 얼굴도 그처럼 젊었다. 남자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알고 있었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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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3 소설 보다
김지연.이주혜.전하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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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 P63

시인은 노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의외로 죽어가는 자들을 상대하는 일에 적성이 있음을 깨달았고 - P70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

이제 겨우 아줌마에 무감해졌건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더니. 숙희는 삶이 제공하는 이 끝없는 개념적 공격에 좀 억울하고 피곤한 마음이 들었다. 인류의 반이 필히 경험하는 것인데도 왜 이토록 힘겹고 외로운 싸움으로 느껴지는 것인지. 두 달 전 마흔아홉 살이 된 숙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줌마‘라는 단어와 치열한 내적, 외적 다툼을 벌여오다가 이제 겨우 ‘정착‘이랄까 ‘평화‘랄까 그 비슷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우연찮게 면전에서 아줌마라 불리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말은 쉽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 P117

칠십대면 칠십대 여성이라 하고, 팔십대면 그냥 팔십대 여성이라 지칭하면 될 것이지, 그도 아니면 서양식으로 이름을 부르든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에게나 할머니라고 대충 불리고 싶진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숙희 어린이‘와 비슷한 어감으로 ‘숙희 할머니‘하고 자신을 부르며 제멋대로 친근한 척 이래라저래라 선을 넘어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 P126

그는 보고 있기 즐거운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살이 조금 찐 듯했지만 찬영은 여전히 젊은이의 몸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문지방에 서서 상체를 반쯤 벽에 기댄 채 찬영의 몸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아름답다 느꼈던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 곤란함이 되어 곁에 남았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예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에너지가 딸린다는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 취급을 받게 되는 건 상상만 해도 싫었지만, 젊은 남자들이 점점 더 어린애처럼 보이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뭐가 되었든 무언가에서 또다시 멀어지고 있다는 이 생생한 느낌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든 것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이 생경함. 그것만큼은 새롭다고 숙희는 자조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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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3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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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 조맹희. 혼자가 아닌 적이 있었나."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돌아와 몸을 눕히게 되는 침대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중력처럼 혼자 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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