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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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에서 파업을 하거나 대투쟁이 벌어질 때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부수는 것이 작업시작을 알리는 종이었는데, 그래서 이 종을 부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각 도시마다 있었다고 한다. 시계적 시간에 노동자들을 동조하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들의 집요한 노력은 공장이라는 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산업혁명기였다. 산업혁명은 새로운 정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르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을 공장의 시계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에 맞추어내고자 했던 다양한 종류의 시간 규율, 학생들의 일상을 시계와 시간표에 맞추어내려는 시도는 신체적 리듬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적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53쪽

소수자의 역사에서 좀 더 근본적인 난점은 다수자의 악덕에 대한 고발이 소수자의 미덕의 증명이 될 순 없으며, 피해와 억압의 부정적 역사가 소수자의 긍정적 잠재력을 보증해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레비나스의 생각처럼 고통 받는 타자의 고발이 그 고통 받는 얼굴을 직시하는 양심의 호응을 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머문다면 일종의 '고통과 양심의 공모관계'로 귀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즉 그것은 의도와 무관하게 고통 받는 자는 계속 고통받는 자로서 지속되게 만들 것이고 역으로 양심적인 자로서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양심 이상으로 밀고 나가기 어렵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루가 적절하게 필요로 하는 지점에서 관계가 안주하게 되지 않을까?-88쪽

맑스주의에서 진보라는 말만큼 실재적 힘을 갖는 개념이 또 있을까? 맑스주의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막론하고 자신이 진보적임을 믿으며, 그래서 '진보'라는 말 아래 쉽게 하나의 자리에 선다고 믿는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가르고 어떤 행동이 적절한가 아닌가, 어떤 생각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가를 때, 진보라는 개념은 과학 이상으로 빈번하게 잣대로 등장한다. 진보적인가 반종적인가? 진보인가 퇴보인가? 혹은 진보할 것인가 정체되고 말 것인가? 등등. 이러한 진보의 개념이 사회나 역사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사회나 역사 전체의 발전을 정의하게 되는 총체적 개념이 되었음은 따로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의 개념이 단지 맑스주의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굳이 로스토같은, 이미 거의 잊힌 근대화론자의 낡은 이름은 그만둔다고 해도, 그런 진보의 개념을 사회.역사적 개념으로까지 확장하여 적극 사용한 사람들이 19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이었음은 지적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헤겔이나 콩트, 스펜서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위해 진보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했고, 그런 진보의 개념으로 -107쪽

역사를 총체화하려고 했다. 진화의 개념이 다윈 이전에 이미 그런 관념을 통해 산출된 것이며, 사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진화'개념을 생각한 다윈조차 그런 통념과의 타협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이른바 '사회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귀착된 바 있음을 상기해두는것도 좋을 것이다. -107쪽

가령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죽으면 죽었지 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리고 토지에 대한 소유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결국 사라져 마땅한 무지와 몰이해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사적 문화 속에서 살았던 유목민족이 경작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고 토지 소유의 관념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노동'이란 대가(임금)을 얻기 위해 타인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인데, 그들로서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면서 대가를 바라는 것은 더없이 부도덕하고 치욕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디언'들의 무지를 깨주기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 정부 관리는 '노동'의 신성함과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한 강연을 반복했다. 그런데 흔히 '에스키모'라 불리는 이누이트족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강사가 "시간은 금이다"라고 말하자 통역자는 당황에서 멈칫하다가 이렇게 통역했다. "시계는 비싸다" 이유는 그런 종류의 추상적인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19쪽

1991년 암스덴(A.Amsden)이라는 스웨덴의 학자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경제학자(american-trained korean economists)라는 말을 줄여 atke라고 지칭하면서, 이런 집단이 한국에서 급속히 늘어나는 현상이 한국의 경제 모델에 잠재적 위협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예언대로 일까? 몇 년 뒤 한국은 이른바 IMF사태라고 불리는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미국의 <경제문헌저널>에 따르면 1987년-1995년 사이 미국 내 경제학과 박사학위 취득자 가운데 9.7%이상이 즉 8040명 가운데 776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미국 경제학 박사의 10퍼센트가 한국 학자라는 것이다. 경제 학자만이 아니다. 2002년에 이어 2003년에도 미국 내에서 박사학위 쥐득자를 가장 많이 낸 대학은 버클리 대학이었고 2위는 서울대학교였다고 한다. 또 1997~2006년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 누계에서는 여전히 서울대 출신이 3,420명으로 미국 이외 대학 가운데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대학 출신자를 합한 전체 집계에서도 서울대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의 4298명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미국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 들어와 관료가-503쪽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 틀림없다. 배운 것은 물론이고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미국적인 사람들, 미국의 상류사회를 꿈꾸며 공부하고 미국적 가치 척도가 몸에 밴 사람들, 이들이 지금 한국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 정부의 통상관료들 대부분은 통상장관 김현종처럼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거나 하던 사람들이다. 정부 관료들, 특히 경제 관계 계통의 관료들은 모두 ATKE라고 불리는 미국식 경제학자들이다. 행정고시로 관료가 된 사람들 역시 한결같이 정부가 돈을 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미국식 기술관료로 교육시킨다. 이런 기술관료들이 미국적 가치관과 미국적 사고방식, 미국적 이론으로 무장한 관료가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한국을 위해서 일한다고 굳게 믿고 일할 때조차 미국적 가치에 따라 미국이란 방향을 목표로 삼아 미국식으로 일할 것이라고 믿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미국적인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밴 아메리카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이념을 내세우든 말든 간에 말이다. -504쪽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겐 어떤 이념도 없고, 오직 능력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만이 있다고 믿으며, 바로 그것이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 성공의 기반을 제공할 것라고 믿는 것 같다. 정말 그럴까? 가령 조성환 교수는 실용주의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서 문제를 착안하고 그 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념적인 목적 없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 그러나 목적없는 실용주의, 아니 이념 없는 실용주의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예컨데 흔히 이용되는 덩사오핑의 고양이 얘기에서도, 목적없는 실용주의란 있을 수 없다. 덩샤오핑의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덩샤오핑의 실용적 선택은 근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부의 모든 정책을 끌고 나간 이념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해가고 있는 하나의 이념인 것이다. 평등, 자유, 공정성 등은 이념이 될 수 있지만 시장.경제발전.근대화,돈벌이, 투기 등은 이념이 될 수 없다는 말일까? 그거라면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국은 돈벌이로 귀착되는 그런 단어들이 '이념'이라는 -523쪽

말에서 느껴지는 품위나 고상함과는 정반대로 너무 천박하고 처절한 욕망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념'이라고 부르기엔 부적절하다는 뜻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상한 이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놓고 남들 앞에 내세우기엔 너무 남세스러운 그런 욕망이 이념의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삶이나 정부의 정책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 말은 틀렸다. 그걸 이념이라고 감히 명명하진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용적 '하결책'이나 정책, 조치들의 목적이 되고 있다면 실제로는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목적 없는 실용성만큼이나 이념 없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념을 감춘 실용주의나, 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념 없다고 잡아떼는 실용주의가 있을 뿐이다. -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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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절판


돈이 없어서 좋은 점은 돈을 벌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일단 부자가 되고 나면 오히려 자신에 대한 불만만 많아질 것 같아요.-67쪽

다른이의 삶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간단한 방법은, 그가 좋아하는 음악 밴드 세 개를 파악하는 일이다.-148쪽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냉장고에 커드 치즈를 다시 집어넣으며 이사벨이 말했다.
"침대로 끌어들이기 전에 서로에 대해 좀더 친밀해질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
"이를테면?"
"음, 질투를 갖게 된다든가 맹세하는 것, 솔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거나 토하기, 코 후비기, 발톱 깎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
"왜? 당신 발에 뭐가 있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보았다.
"그게 아냐"
"그러면?"
"발톱을 깎는다는 것은 아주 사적인 일이잖아. 발톱이 발가락 위에 놓여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일단 깎이고 나면 쓰레기가 되잖아. 그 순간 사적인 것이 되는 거지. 그냥 누군가의 머리칼을 보는 것과 욕실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발톱 깎는 일이 섹스보다 더 친밀한 행위라고?"
"앞에서 태연히 발톱을 깎아도 민망하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섹스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이사벨은 사적인 자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의 정의를 환기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미묘했지만 분명 중요한 말이었다. 이사벨이 열거한 것들은 현대 전기 작품과는 분명 일치하진 않지만, 그 적나라한 기준에 견주어보면 아주 훌륭한 -156쪽

것이었다. 그 적나라한 기준에 견주어보면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격리된 삶은 과연 어떤 기반 위에 서 있을까?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폭로됐을 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얼마나 상처를 주는가와 연관된 문제일 것이다. 발톱 깎는 것은 사적인 행위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행위며, 지켜보는 사람에게 이해심이 요구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화장이나 몸단장을 하지 않은 채로 아침 식탁에 나타나도 된다는 믿음 같은 것이다.
따라서 친밀해지는 것은 유혹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거친다. 친밀함을 보인다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비호의적인 판단-사랑할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이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혹이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 또는 가장 매ㅗㄱ적인 정장차림을 보여주는 것 속에서 발견된다면, 친밀함은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 또는 가장 덜 멋진 발톱 속에서 발견된다. 복잡한 과정이다. -157쪽

아이들에게 비밀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들이 낯선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고, 그들이 행동하고 느낀 것들을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에는 비정상적이고 부끄러운 행동처럼 보였던 것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임을 깨닫게 되며 비밀을 훌훌 털어버린다는 것을 상항할 수 있다.-164쪽

책은 여행하지 못한 이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장소-그곳과 여행지는 일치하지 않는다-를 계속 떠올리게 할 뿐이다.-233쪽

이사벨은 플로 할머니의 외향적 성격이나 지성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상냥하고 친절한 것에만 중점을 두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낯선 누군가를 알고자 할 때 어떤 것에 초점을 두는지 살펴보면 그의 보헤미안적 혹은 자유 성향을 밝혀낼 수 있다.-279쪽

인간 속성을 전기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중요도 순으로 정리한 아래 목록을 살펴보자
1) 비범한 동기가 평범한 결과로 (의자에 앉기, 아이 출산)
2) 평범한 동기가 비범한 결과로 (살인, 복권당첨)
3) 평범한 동기가 평범한 결과로 (감자칩 먹기, 우표사기)-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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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2-1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왠지 맛있을 것 같은 책입니다.(웃음)

LAYLA 2010-02-17 16:34   좋아요 0 | URL
사실 좀 지루했어요 ^^; 뭐. 질렸다고 싫어하는 분들 많던데 전 그래도 아직 알랭드보통 좋아합니다.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구판절판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게 보이는 존재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수많은 시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4쪽

"미학적으로 볼 때 인간 유형은 매우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항상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32쪽

친교란 얄팍한 노력이다.
"....본질적으로 소통 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부분을 피상적인 자아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친구란 결국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
이상이 아니다.-150쪽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지적인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들이 친절하고 신실하기만 하다면, 그들이 지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적인 대화를 할 때에도 프로스트가 우선시한 것은, 개인적인 지적 관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성을 쏟는 것이었다.-167쪽

프로스트는 한번은 친교를 독서에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두 가지 활동 모두 타자와의 교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독서에 결정적인 우위가 있다고 덧붙였다.

독서에서 친교는 갑자기 그 본래적인 순수성을 회복한다. 책에는 거짓 상냥함이 없다. 우리가 이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에서는, 초대를 거절하면 소중한 우정이 앞으로 잘못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는친구의 정당하지 않지만 회피할 수 없는 예민한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위선적인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책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솔직해질 수 있는가? 독서할 때는 적어도 우리가 원할 때만 책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고 지루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으며 필요할 때 대화를 중단할 수도 있다. -173쪽

프루스트는 "우정을 경멸하는 자가.....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런 경멸하는 자들이 우정이라는 유대관계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길 회피하는데, 이것은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화라는 무계획적이고 두서없고 궁극적으로는 피상적인 매체의 처분에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문에 답하기보다 질문을 하는 입장에 있다고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친교를 남들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에 대해 배우는 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들은 남들의 예민한 감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는 거짓으로 상냥해하고, 늙어가는 전직 고급창녀의 용모를 장미와 같이 아름답다고 해석하며, 의도는 좋지만 시시한 시집에 대해 관대한 평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전투적으로 진리와 애정을 동시에 추구하기보다는 분별 있게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두가지 목적을 분할하여, 국화와 소설을, 로르 아이망과 오데트 드 크레시를, 보내는 편지와 -180쪽

쓸 필요는 있지만 숨겨두는 편지를 현명하게 분리시킨다.-181쪽

세련된 귀족의 이미지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위험스럽게도 단순한 것일 뿐이다. 세계에는 ㅁ루론 우수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씨를 기초로 편리하게 그들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낙관이다. 속물은 이것이 터무니없는 낙관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구성원들 모두가 특정한 성질을 모여주는 완벽한 계급의 존재를 믿는다. 일부 귀족들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게르망트 부부의 잘난 특질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미덕이나 교양처럼 예측이 불가능하게 분배된 어떤 것을 골라내고자 할 때 쓰기에 '귀족'이라는 범주는 너무나 조잡한 그물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게르망트 공작에게 품었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마도 전기공이나 요리사 또는 법률가라는 예상 밖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프루스트가 결국 인식하게 된 것은 이런 예측불허였다.-211쪽

프루스트는 알베르틴을 어떤 특정한 그림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키운 후에 드레스덴을 방문하는 한 학생에 비유한다. 반면에 공작부인은 어떠한 소망이나 지식도 없이 여행하고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당혹과 지루함과 피로감밖에 경험하지 않는 부유한 여행객과 같다. 이것은 물리적 소유가 단지 이해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원할 때 바로 드레스덴에 갈 수 있거나 카탈로그를 보고 나서 바로 옷을 살 수 있다는 게 부자의 좋은 점이라 할 지라도 그들은 재산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렇게 빨리 충족시키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드레스덴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그곳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탈 수 있고, 옷을 보자마자 그것을 옷장 속에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덜 혜택받은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은 겉으로는 못마땅한 일이지만, 셀 수 없이 막대한 이득을 준다. 사람들이 드레스덴의 그림들, 모자들, 실내복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시간이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알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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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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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젊음 자체의 아름다움 이외에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25쪽

내가 왜 당신과 결혼했는지 알아요?
당신 동생 도리스보다 먼저 결혼하고 싶어서였지.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그녀에게 이상한 감정의 기류가 몰려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인 그 순간에도 그것이 그녀의 동정심을 일깨웠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 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96쪽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97쪽

처음에 그녀는 그가 단지 그녀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막상 그들이 실제로 출발할 때도, 아니, 그후에 그들이 강을 벗어나 국토를 횡단하는 길을 떠나기 위해 가마에 오를 때까지도 그가 특유의 작은 웃음을 떠뜨리면서 그녀는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죽기를 바라다니 그가 그럴 리 없었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사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난 지금, 그가 보여줬던 수많은 애정 표현이 그녀에게 새로새록 다가왔다. 프랑스 식 표현대로 말하자면 그의 하루 날씨가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고 사랑을 멈출 수 있을까?-125쪽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제가 도와드리죠"
"제 은밀한 슬픔에 함락되신 건가요? 제 옆얼굴을 보시고 제 코가 그리 길지 않다고 부디 말씀해 주세요"
그는 생각에 잠겨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파란 눈 속에 심술궂고 비꼬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강가에 서 있는 나무가 수면에 그림자를 비추듯이 그 속에는 온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키티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했다.-155쪽

"여기 온 게 겨우 몇 주 전인데, 마치 한평생이 흐른 것 같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잠시 그녀는 이런 저런 생각에 방황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영혼이 불멸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 질문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 그들이 월터를 관에 넣기 전에 씻길 때, 그를 봤어요. 그는 아주 젊어 보이더군요.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죠. 당신이 나를 처음 산책에 데리고 나갔을 때 우리가 봤던 거지를 기억하세요? 내가 겁에 질렸던 건 그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금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그저 죽은 동물이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월터도 마찬가지로 멈춰 버린 기계와 너무나 흡사했죠. 그게 너무나 두려워요. 그것이 단지 기계일 뿐이라면 그 모든 고통과 가슴의 상처와 불행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264쪽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282쪽

"그곳의 시원한 바다 소리오 드넓은 파란 하늘 아래 여자 애가 태어난다면 좋겠어요"
"성별에 대해서 벌써 마음을 정한 게냐?"
그가 살짝 웃음기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제 자신이 싫어요. 하지만 제겐 기회란 게 전혀 없었어요. 내 딸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에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하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아버지가 경직되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는 그런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이 자기 딸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거 한 가지만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저는 바보였고 사악했고 가증스러웠어요. 그리고 끔찍한 형벌을 당했죠. 결단코 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제 딸을 보호하겠어요. 나는 그 애가 거침없고 솔직하기를 바라요. 그 애가 스스로 주인으로서 독립된 인격체이길 바라고 자유로운 남자처럼 인생을 살면서 저보다 더 나은 삶을 -328쪽

살기를 바라요"-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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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10-02-0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모옴! 이 작가가 e인가 o인가 하는 발음이 잘 안되서 그게 컴플렉스였데요. 그래서 고심 끝에, 그 발음이 나는 단어들을 쓰지 않고 대신 다른 단어를 쓰려고 어휘공부를 엄청 했다고 하네요ㅋㅋ 특이한 사람.

LAYLA 2010-02-05 16:23   좋아요 0 | URL
와- 재미있는 이야기!^^ 책보니 프랑스어도 잘하고 이탈리아어도 잘하고 라틴어도 잘하는거 같은데 그저 부러울 뿐..ㅋㅋ

비로그인 2010-02-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생의 베일 얼마전에 읽었어요. 발병 지역에 도착해서 옛궁성의 아름다움에 정화되는 부분도 인상적이더군요..

LAYLA 2010-02-05 23:5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하나하나의 문장이 모두 좋은데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한심스럽더라구요 !!!
 
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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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자리를 재배치한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좋은 자리 독점 금지, 서로의 일에 관심을 두기 위해, 그리고 사무실의 청결을 위해서'라고 한다. 생활 속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70쪽

헬싱키의 불만이 가장 머릿속에 남는다 "My dream is boring,,,but reality is more exciting" 내 꿈은 지루해 현실이 오히려 더 재미가 있다. 어떨 때는 꿈이 현실보다 제한돼 있다고 느낀다. 현실이 오히려 더 역동적이다.-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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