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이 존재하는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백을 모면하고 있을까. - P19
곤충학자가 나비를 채집하고 서커스를 위해 포획업자가 맹수를 포획하듯이, 인간을 채집하려는 이상한 인간. 인간이면서 인간을 채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부도덕하고 범죄적인 냄새가 나는데, 심지어 현실에서 잡는 것도 아니고 언어라는 채집망으로 상대의 본질을 훔쳐버리는 인간. 더군다나 그것을 종교인처럼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기 그지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알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인간. 아무런 권리도 없으면서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을 사회가 용인하고 있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 P24
어쨌든 독자는 그 ‘알고 싶다‘는 욕구를 플롯을 통해 ‘필연‘으로 치환시키고 싶은 욕구를 품게 된다. 왜, 어떻게, 무엇을 알고 싶은지 독자는 잘 모른다. 독자는 소설이 그것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 P41
‘이 소설이 끝나면‘일는 말은 지금 내게 최대의 금기어다. 이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를 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세계를 상상하기 싫기도 하고 두렵다. ...유일하게 남겨진 자유는 그 작품의 ‘작가‘라 불리는 일일까. 마치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의 자식의 대부가 되듯이. - P91
나는 일찍이 1948년에 <중증자의 흉기>라는 수필을 쓰며 "나와 같은 세대에서 대다수의강도가 나온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라고 썼는데, 지금도 이 마음은 잃지 않고 있다. 금각사라는 소설도 분명히 범죄자에 대한 공감에 바탕을 둔 작품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끌어올 것까지도 없이, 본래 예술과 범죄는 매우 가까운 관계다. ‘소설과 범죄는‘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소설은 많은 범죄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는데, 적과 흑에서부터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범죄자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명작의 수가 오히려 적을 정도이다. - P94
소설의 복안이 떠올랐을 때, 단편에서는 마지막 장면, 장편에서는 가장 중요한 장면의 이미직 분명히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단순한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고 강력한 의미를 띠기 시작해야 한다. - P132
나는 출발 당시부터 자신의 문체를 확고하게 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생활하면서 걸어온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체를 부모의 유산처럼 처음부터 가진 작가는 없을 것이다. 문학적 재능이 대개 유전되지 않는 것처럼, 문체도 유전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자신은 아니다. 문학가는 어차피 한 세대에 한정되며, 문체도 한 세대에 한정된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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