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체인지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8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부가 거칠어지고 시력이 나빠지고 이가 빠지는 일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 이겨내야 할 질병이 아니다.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사람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았다.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관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늘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했다. 그는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이어가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늘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그 일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그 일을, 그럼에도 그는 그럭저럭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낙담했지만 자신의 남은 삶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체 불가한 관계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관계를 염려하지느 않았다. 그는 중요한 것을 상실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모르는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누구를 잃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자신이 잃은 게 아내인지, 자기 자신인지, 그와 아내가 공유했던 것인지. 생각이 갈팡질팡하며 그의 마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 P78

한달에 두어번, 금요일 저녁에 영화를 관람하는 건 그녀의 루틴이었다. 그녀가 영위하는 삶의 수준에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유지할 수 있는 취미 생활. 물론 그것이 이젠 습관처럼 되어버린 외로움을 적당히 포장하는 한 방식임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 P85

그 시기, 애실에게 삶은 손에 잡히는 무엇이었다. 하루하루를 끌려다니듯 허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삶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다는 느낌. 원한다면 고삐를 바짝 당길 수도, 느슨하게 풀 수도 있다는 믿음. 그건 지금껏 그녀가 가져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런 것을 갖게 되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시선 500
안희연.황인찬 엮음 / 창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읓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 P58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찾찾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손택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P64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쓸 때의 나와 특정 감정을 느꼈던 순간의 나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날 있었던 일을 써야 했기에 내가 느낀 감정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 P15

나는 진짜를 쓰고 싶었다. 진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촌스러운 생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인간으로서는 그토록 비겁하게 살아왔을지언정 작가로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 글쓰기는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내 모습을 꾸미기 위한 장식도,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 P64

아주 짧게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별과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이별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존재와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영영 헤어진다는 건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일이라는 것도. - P76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됴. - P81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아기는 머리를 움직여 그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려고 애썼습니다. 그게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거였지요. 몇 주 지난 뒤 다시 만난 조카는, 벌써 자동차 소리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극에 놀라고, 그게 뭔지 평가하고, 받아들일지 말지 분류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 자극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운 거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언젠가는 예쁜 돌멩이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거나 웅덩이를 만날 때마다 뛰어넘거나 하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까지 곧장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세상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큰 산이라든지 보름달이라든지 다른 사람의 사랑 같은 걸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위대함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P89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그가 말했다. 또 그러는 편이 좋아. 사실 우리는 때로 잊어야 하지. 잊는 건 중요한 일이란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해. 그래야 좀 쉴 수 있거든. 듣고 있니? 우리는 잊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영영 잠을 잘 수 없게 될 거야. -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 욕망과 결핍, 상처와 치유에 관한 불륜의 심리학
에스터 페렐 지음, 김하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이혼은 낙인을 남겼다. 하지만 요즘은 떠날 수 있는데도 곁에 남기로 선택하는 것이 새로운 수치다. - P37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바람피우는 남성의 비율은 1990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면 여성은 40퍼센트 증가했다. - P42

이전 세대에는 ‘감정적‘측면을 외도로 간주하는 일이 없었다. 과거의 결혼에는 서로의 감정을 독차지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지금도 없는 국가가 많다. 이 개념은 오늘날 커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을까? 결혼은 배우자 외에 감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거나 다양한 감정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더욱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를 한 사람에게 전부 쏟아부으면 관계는 더 취약해진다. - P55

역사가 스테파니 쿤츠는 결혼이 주로 경제 연합체였던 시기에 때로는 불륜이 사랑을 위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쿤츠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회에는 성욕과 열정, 파트너에 대한 이상화가 합쳐진 낭만적 사랑 개념이 있다. 하지만 대개 이런 것들은 결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는데, 결혼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이익을 따지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진정으로 순수한 사랑은 결혼 밖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 P63

"널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역사상 이 두 말은 함께 쓰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대두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사회가 급변하면서 결혼의 의미가 재정립되었다. 결혼은 경제 단위에서 동반자 관계로 서서히 진화했다. 이제 결혼은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 사랑과 애정을 토대로 한 두 개인 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되었다. 작은 마을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외로워지기도 했다. 개인주의가 서구문명을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현대의 삶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외로움과 맞서 싸우기 위해 배우자 선택에 낭만적 염원이 스며들었다. - P64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야심 찬 실험을 진행 중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배우자와 섹스하려는 이유가 농장에서 일할 아이들 여섯 명이 필요해서도 아니고(사실 그러려면 여덟을 낳아야 한다. 두 명 정도는 일찍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의무여서도 아닌 때가 도래했다. 우리는 섹스가 ‘하고 싶기‘때문에 하려고 한다. 현대의 섹스는 욕망에서 비롯되며, 자유로운 선택을 보여주는 최고의 표현 방식이자 자기 자신의 표현이다. - P66

결혼에 기대하는 바가 이만큼 컷던 적은 없다. 우리는 과거에 가족이 제공했던 모든 것, 즉 안전과 자녀, 재산,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욕망하며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파트너까지 원한다.부부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ㅡ 더 나아가 열정 넘치는 연인이어야 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새로운 올림포스를 그려냈다. 이곳에서는 무조건적 사랑이 이어지고, 친밀함이 마음을 가득 채우며, 섹스는 늘 짜릿하다. 이 모든 것을 쭉 한 사람과 한다. 그리고 둘이 함께해야 할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 P68

작은 결혼반지에는 상당히 모순적인 꿈들이 담겨 있다. 우리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안정과 안전, 일관성, 믿음을 주길 바란다. 모두 정착과 관련된 경험이다. 한편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이 경외와 미스터리, 모험과 위험도 주길 바란다. 내게 안락함과 강렬함을 줘. 내게 익숙함과 새로움을 줘. 내게 지속성과 놀라움을 줘. 오늘날 연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따로 떨어져 있던 욕망들을 한 지붕 아래 묶어 놓으려 애쓴다. - P68

외도는 그저 사랑의 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상실이다. 질리언은 남편에게 이렇게 맗한다. "이제 난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 중 한 명이 됐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고 평생 날 따라다닐 거야. 당신이 날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어.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 P91

진실은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수도 있으며, 가학적 쾌락이 동반되면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 P161

외도는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삶"을 약속한다. - P189

가장 좋은 상태의 독점적 관계는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다는 바람이다. 가장 나쁜 상태의 독점적 관계는 살아 있다는 두려움에 대한 치료제다. 둘은 헷갈리기가 쉽다.

-애덤 필립스, 독점적 관계 - P203

욕망을 연구하는 나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빼놓지 않고 이 질문을 한다. 바로 "언제 파트너에게 가장 끌리나요?"다.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파트너에게 매력을 느낄 때"다. 제삼자의 시선은 상당히 에로틱하다.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