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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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 - P44

빈센트는 그 비슷한 나이였을 때 대놓고 물었다.
"엄마는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잘 쓰면서 왜 우리를 낳았어?"

내가 끝내 좋은 답을 내놓지 못한 질문. - P62

부모는 죽고 자식은 계속 살아간다. 통계적으로 볼 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들어맞는다. 하지만 간혹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 자식들은 죽고 부모는 계속 살아간다. 그 부모가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선택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가거나 아니면 자식을 따라 저승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 자식들은 죽고 부모는 계속 살아간다. 그 부모가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자식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식의 죽음이 너무도 쉽게 하루는 한낱 뉴스거리가 됐다가 다음 날에는 뒷이야기가, 그러다 결국에는 통계의 일부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 P87

아이가(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직후의 나날들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의 나날들과 닮은 구석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갓난아기의 첫 나날을 섹 때처럼 충실하게 날짜를 세는 일은 드물다. 태어난 지 하루, 태어난 지 사흘, 태어난 지 이레, 태어난 지 두이래, 태어난 지 세이레.. 그런데 내 경험상 그처럼 꾸준히 한 날 한 날을 세는 때가 또 있으니, 바로 아이가 죽었을 때다. 하루가 지났네, 사흘이 지났네, 일주일이 지났네, 석 달이 지났네...그렇게 촘촘히 새는 나날에 끌고 가는 그모든 시간과 순간은 길게 늘어지면서도 덧없이 흘러간다. - P103

만약 심연 속에서 여생을 살아야 한다면 심연이 내 서식지다. 자기의 서식지와 싸우느라 기운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P108

내 정원은 희망이나 재생의 비유가 아니다. 꽃이 밝음과 낙관의 전령 노릇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자살하거나 분노하는 장미는 없고, 우울하거나 반항하는 백합도 없다. 식물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다. 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고자 식물은 자랄 수 있을 때 자라고 그럴 수 없을 때 휴면에 들어간다. - P116

그러나 나는 이 음식들에 ‘사랑을 담아 만들었다‘라고 하진 않겠다. ‘사랑‘은 그 의미가 남다른 단어인데도 대부분 일상에서 무의미하게 쓰인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음식들을 ‘정성껏 만들었다‘고 할것이다. - P119

자기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라고 불린다. 아내는 때로 과부가 되고, 남편은 홀아비가 된다. 그러나 자기 형제자매나 단짝이나 자식을 잃은 이를 부르는 단어는 없다. 어떤 상실은 쉽게 이름 붙여지지만, 어떤 상실은 끝내 이름을 얻지 못한 채 남는다. - P146

세상에 고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마세요. 당신의 눈물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 P167

진짜 구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책은 그 비슷한 것을 가져다 준다. - P188

삶은 절대적 의미에서 살 가치가 있다. 예술이 추구할 가치가 있고, 과학이 탐구할 가치가 있으며, 정의가 좇을 가치가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언가가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할 능력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 P199

만약 빈센트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다르게 대답했을 것이다. 난 고통을 알고, 고통에 대해 글도 잘 썼지만, 고통과 맺은 관계는 변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안다고. 빈센트에게 삶이 더 쉬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더 잘 겪어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믿는다. 고통 속에서는 더 또렷이 보게 된다. 고통을 겪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 있고,그 나머지 사소한 고통이나 본질적이지 않은 아픔 같은 것이 있다. 그런 것은 그저 돌멩이일 뿐이므로 무시하거나 옆으로 쳐내면 그만이다. 또한 우리는 좀 더 유연해진다. - P209

흔히 우리는 어떤 결승선을 마음에 두고, 번거로움이나 아픔을 되도록 덜 겪으면서 그 결승선에 최대한 빨리 도달할 방법을 찾는다. 아마 이런 충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견디려는 욕구, 이를테면 시간을 길들여 어떤 이득을 얻겠다는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에서 시간은 길들일 수 없다. - P219

어렸을 때 수영을 배운 사람은 대체로 별 생각 없이 수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 살아가는 일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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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 체인지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18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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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거칠어지고 시력이 나빠지고 이가 빠지는 일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 이겨내야 할 질병이 아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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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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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았다.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관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늘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했다. 그는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이어가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늘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그 일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그 일을, 그럼에도 그는 그럭저럭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낙담했지만 자신의 남은 삶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체 불가한 관계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관계를 염려하지느 않았다. 그는 중요한 것을 상실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모르는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누구를 잃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자신이 잃은 게 아내인지, 자기 자신인지, 그와 아내가 공유했던 것인지. 생각이 갈팡질팡하며 그의 마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 P78

한달에 두어번, 금요일 저녁에 영화를 관람하는 건 그녀의 루틴이었다. 그녀가 영위하는 삶의 수준에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유지할 수 있는 취미 생활. 물론 그것이 이젠 습관처럼 되어버린 외로움을 적당히 포장하는 한 방식임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 P85

그 시기, 애실에게 삶은 손에 잡히는 무엇이었다. 하루하루를 끌려다니듯 허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삶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다는 느낌. 원한다면 고삐를 바짝 당길 수도, 느슨하게 풀 수도 있다는 믿음. 그건 지금껏 그녀가 가져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런 것을 갖게 되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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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ㅣ 창비시선 500
안희연.황인찬 엮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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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읓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 P58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찾찾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손택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P64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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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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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쓸 때의 나와 특정 감정을 느꼈던 순간의 나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날 있었던 일을 써야 했기에 내가 느낀 감정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 P15

나는 진짜를 쓰고 싶었다. 진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촌스러운 생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인간으로서는 그토록 비겁하게 살아왔을지언정 작가로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 글쓰기는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내 모습을 꾸미기 위한 장식도,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 P64

아주 짧게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별과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이별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존재와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영영 헤어진다는 건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일이라는 것도. - P76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됴. - P81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아기는 머리를 움직여 그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려고 애썼습니다. 그게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거였지요. 몇 주 지난 뒤 다시 만난 조카는, 벌써 자동차 소리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극에 놀라고, 그게 뭔지 평가하고, 받아들일지 말지 분류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 자극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운 거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언젠가는 예쁜 돌멩이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거나 웅덩이를 만날 때마다 뛰어넘거나 하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까지 곧장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세상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큰 산이라든지 보름달이라든지 다른 사람의 사랑 같은 걸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위대함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P89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그가 말했다. 또 그러는 편이 좋아. 사실 우리는 때로 잊어야 하지. 잊는 건 중요한 일이란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해. 그래야 좀 쉴 수 있거든. 듣고 있니? 우리는 잊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영영 잠을 잘 수 없게 될 거야.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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