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8월
구판절판


물론 선의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생에게 손을 대는 열성적인 선생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남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체벌이 열성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것은 세속적인 권위에 의해 지탱되는 단지 비굴한 폭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28쪽

정보라는 것은 참 묘해서, 들어오는 정보의 어디까지가 필요하고 어디서부터가 필요하지 않은지를 생각해보면, 점점 경계선이 불분명해진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전부 필요없는것 같고, 반대로 일단 정보가 부족하다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안해지게 된다. -46쪽

사람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감퇴하는 것이 비단 성적인 능력만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능력'도 감퇴한다. 이는 확실하다. 예컨대 젊었을 적에는 나도 제법 빈번히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좌절해서 눈앞에 깜깜해지거나, 누군가가 던진 한 마디에 가슴을 찔려 발밑의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꽤 심각했던 나날이었다-130쪽

왜 나이를 먹으면 상처받는 능력이 떨어지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또 그것이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마음이 편안한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처받는 일이 적은 쪽이 편안하다. 지금은 누군가한테 아무리 심한 말을 듣더라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 배반당해도, 믿고 빌려준 돈을 못 받더라도, 어느 날 아침 펼쳐든 신문에 하루키는 벼룩의 똥만큼도 재능이 없다는 기사가 실려있더라도 그렇게 상처받지 않는다. 물론 마조히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기분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런일로 낙담하거나 며칠이고 끙끙 앓으며 고민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쩔수 없지 뭐 다 그런거잖아 하고 생각하고 그걸로 잊어버린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잊으려고 애를 써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130쪽

결국 이것은 어쩔 수 없지 뭐 다 그런거야 하고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다시 말해, 몇 번이나 그런 비슷한 일을 경험해왔고, 그 결과 무슨 일이 생겨도 뭐야, 또 지난번과 똑같은 일이잖아? 하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젠 매사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강인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한 감수성이 닳아버렸다는 의미이다. 즉 뻔뻔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나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보잘것없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일종의 순진한 감수성을 간직한 채 내가 속한 직업적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소방수가 레이온 셔츠를 입고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31쪽

그렇지만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다지 상처받지 않게 된 것은 나라는 인간이 뻔뻔스러워진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고 인식했고 나는 그 이후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절실히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131쪽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에서 주인공 올비 싱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자면, 인생은 호러블한것과 미저러블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예를 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그리고 음...미저러블 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17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