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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슬픔, 잠시멈춤
나는 이제 그녀가 어쩐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본 오사카나 중국 상해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피를 나눈 한 민족이거나 재외동포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이라는 '마음기록'으로 기존의 심정적 거리는 물론 물리적 거리감까지 좁혀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조국인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오랜 기간 김일성을 추종해왔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비밀경찰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같은 시기에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을 그들로부터 잃었다는 경험은 마치 북한 지식인으로서 탈북자라는 증언자가 되어 우리와 같은 언어로 우리의 비극을 노래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온전한 공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루마니아 문학은 물론이고 영문학, 독문학까지 전공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한 그녀가 당시 체제에 협조해 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세련된 방법으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다고 해도 한반도의 정세가 변함에 따라 친일과 친미를 넘나들었던 우리 지식인들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문학성과는 별도로 그마저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그 마음 헤아릴만 한 우리의 가슴이 아니던가.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청춘일기'라 했다. 실제 청춘이었을 당시 『상실의 시대』를 거쳐 온 나의 두 번째 청춘엔 마치 내 청춘의 씻김굿처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무사히 치러내었기에 이제는 보다 의젓하게 '청춘'을 관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억압된 현실과 그녀의 환부가 더 지독할 것임을 알면서도 상처에의 두려움보단 진실에의 호기심이 앞서던 나였다. 비록 우리에겐 뒤늦게 소개된 작품이었지만 『숨그네』 이후 그토록 검었던 그녀만의 '낱말상자'를 다시 열어 내 숨결을 뛰게 하고 싶었고 낱말을 오리고 잘라 붙여가며 그려낸 그녀의 작품을 또 한번 내 가슴걸이에 걸어보고 싶었다. '독재'와 '청춘'이라는 진부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재에 그녀는 소설적 증언과 시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재차 낯선 행복의 기쁨을 선사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달뜬 기대와 달리 이번엔 『숨그네』와 『저지대』때 만큼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만큼 충분히 슬프지는 않았다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내 슬픔은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지점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다음은...자기 외면과 반목의 수순을 밟으며 누군가를 향해 마음껏 원망하고 비난하고 싶어졌다. 그것은 누구라도 모질게 청춘을 짓밟은 대상이 아닌 그렇게 짓밟힌 당사자도 아닌, 짓밟고 짓밟히는 그 모든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목격해낸 같은 시대의 또래 청춘들이었다.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들 사이에 우리와, 내가 부자연스럽게 서 있었고 그녀의 작품에서 비로소 내 자리가 또렷이 발견되던 극명한 위치인식은 슬픔을 가로막는 미안함, 미안함이 지나친 화에 가까웠기에 결코 내가 원하던 좌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짐승』은 ...그렇게 잊어버린 내 '마음짐승'을 지긋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 서슬퍼런 독재와 비극적인 청춘을 기어이 살아냄으로써 오늘날 당당한 증언의 기회를 부여 받은 것은 아닐까. 아니, 그 모든 진실을 증언하고자 했기에 끝내 청춘을 견뎌온 것은 아닐까. 살려고 몸부림치며 붙들어온 문학이 이제는 그녀를 살아가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나간 상처를 보란듯이 문학으로 살려내었다. 문학은 그녀를 살렸고 그녀는 문학을 살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청춘도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딘다는 것...문학의 고통이 자신의 유일한 기쁨이었을 그녀에게 이 '견딤의 미학'(미학이라 칭하는 것에 무례를 용서바란다)은 한번뿐인 청춘이라는 빛나는 보석을 가장 안전하고도 정당하게 끌어안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고 그 방식은 다시 그녀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1987년 독일로 망명하기 전까지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에서 억압받은 생의 기간은 이십년이 넘었으며 그 시간은 정확히 그녀의 생물학적 청춘과 일치한다. 그녀는 이 시기에 문학을 공부했고 젊은 작가들과 언론 자유운동을 펼쳤고 기계공장에서 번역사로 근무하며 정보원이 되어 달라는 비밀경찰의 요구를 받았다. 같은 시기 그녀의 문단 데뷔작인 단편집 『저지대』는 금서조치 되었다. 『저지대』를 읽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가족과 마을 풍경에 이르는 소용돌이치는 원색적 묘사에 당시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을 거라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서른 네 해 까지 불같던 청춘을 차갑게 견뎌낸 후에서야 비로소 도주가 아닌 선택적 망명을 감행했다. 그녀가 걷고, 먹고, 자고, 보고, 듣고 겪은 그 모든 것을 견뎌온 세월 앞에 나는 구경꾼으로서의 청춘을 지내온 한 사람으로서 그저 말없이 고개 숙여야 했기에 육체만 빼고 모든 정신을 죽임으로써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긴긴 시간들을 정중히 애도하고자 한다.
네모, 보석상자
그녀의 청춘이 잠시 머물렀던 공간은 '네모'라는 기숙사였다. 그녀의 작품에선 '네모'라는 도형적 표식이 개인과 사회의 절망을 상징하는 그녀만의 미학적 관용어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녀는 『저지대』를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을 '상자같은 마을'이라는 네모로 표현한 바 있다. 그때의 상자는 씻을 수 없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의 관을 암시한다고 느껴졌다.『숨그네』에서는 레오가 5년 동안 살아낸 수용소를 '검은색 상자'라는 네모로 자주 서술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기거했던 네모난 방에 달린 네모난 창과 네모난 침대, 그 밑의 네모난 트렁크, 문 옆의 네모난 벽장, 출구위에 달린 네모난 스피커는 모두 독재정권의 억압과 감시, 폭력과 불신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네모'가 꿈을 상실한 어둡고 컴컴한 죽음의 공간을 의미하게 된 것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일 것이다. 유년시절 소수의 독일인들이 모여 살았던 슈바벤마을에서의 음울한 기억,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거짓과 무관심, 폭언과 폭력에 시달린 가족관계가 시작된 절망의 장소가 바로 네모난 자신의 집, 자신의 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하지만 슬픔이나 절망조차 도식화, 규격화되어야 했던 네모난 상처를 눌러 박은 그녀는 작품 속에서는 네모를 원망하다가도 정작 자신의 현실에서는 기어이 죽음의 공포를 삶의 욕구로 치환하는 감동적 반전을 보여준다. 네모난 상처에 자라난 짐승도 마음은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는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해 네모난 트럭에 몸을 싣고 자신이 견뎌낸 모든 청춘을 네모난 트렁크박스에 담아 그녀만의 네모난 낱말상자로 창조해 낸다. 이 작품에서도 룸메이트인 롤라가 네모난 벽장에서 숨을 거두고 오랜 친구인 게오르크는 네모난 창문으로 뛰어 내리지만, 그녀, 자신만은 죽음(관)이라는 네모에 갇히지 않고 그 안에서 문학이라는 삶을 생산해 내고 만 것이다. 이는 죽음의 블랙박스에서 탄생한 기적의 보물상자였다고 믿고싶다. 롤라가 죽으면서 유품으로 남긴 자신의 상념을 기록한 공책을 끝내 문학이라는 숭고한 기록으로 살려내는 그녀만의 저력이 거기 있었다. 질식해 숨이 끊어 질 듯한 마지막 순간까지 내몰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녀의 청춘은 네모로 사방이 막힌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자신만이 진실을 조형해 낼 비밀의 마법상자로 변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주어진 네모에 영원히 갇히지 않고 그 네모 속에서 희망을 건져 낸 그녀를 보면서 결국 문학은 네모난 세상도 끝이 없는 바다로 재생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바다가 네모날 지언정 그 속에서 탄생하는 보석은 살아있는 창조물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실체로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네모라는 비밀상자에 담겨진 가슴저린 선물들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절망, 악세사리
작품 속에서 화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 네 명의 죽음을 온몸으로 마주한다. 그런데 이들 죽음을 목도한 화자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들은 저마다 낱말이 든 자루를 남겨 놓고 가는 것 같다'고 마지막 회상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구들 네 명의 죽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 그들의 죽음은 결국 독재정권하에서 불안과 공포로 스러져간 청춘군상을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황폐하고 음산했던 도시에서 불안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거나, 감시로부터 고통 받았으며 질병으로 인해 수척해졌거나 타자로 인한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 시절의 가여운 청춘이었다. 작가는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루에 들어 있던 낱말을 자신의 비밀상자에 담아 우리에게 보석같이 전달해 준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상처받은 내면과 죽음을 연결하는 그들의 일상적 소품을 고이 간직해 시적 메타포로 포장하였다. 나는 그녀의 비밀상자에서 그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옥죄고 벼랑끝으로 내몰았던 허리띠, 창문, 노끈, 호두라는 귀한 유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궁핍과 결핍의 지독한 핍진장치이기도 했던 각자의 소품들은 표면상으로 살인의 직접적 매개체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통제해온 권력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위협적인 상황이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의 목걸이
친구들 중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던 롤라는 벽장안에서 화자의 머리띠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화자의 '원피스 허리띠'는 유년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상징하는 억압과 폭력의 소품이었다. 어머니는 화자의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의자에 원피스 허리띠로 몸을 묶고는 할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다. 화자는 이때 진실을 목구멍으로 삼키면 말이 되지 않고 거짓말이 되는 위선을 최초로 경험한다. 자신을 억압하던 원피스 허리띠로 목을 졸라 맨 롤라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진실을 그대로 삼키지 않고 오늘처럼 세상에 내뱉는 일이 아니었을까. 롤라의 허리띠는 그녀에게 진실의 목걸이가 되어 잔인하게 돌아왔음이다. 롤라는 스타킹의 올이 가장 많이 풀려있었으며 벽장에 옷이 가장 적었고 밤이면 전차를 타러나가는 것 외엔 외견상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었지만 화자를 포함한 친구들은 롤라를 맹목적으로 증오하고 멸시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녀가 죽은 뒤 대강당에 모여 학생들이 그녀의 죽음을 비난하며 오래 박수치던 장면은 악마의 환청처럼 소스라치게 등골이 오싹해지던 순간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누구도 쉽게 멈출 수 없었던 그들만의 박수는 이미 죽은 롤라의 영혼마저 처참하게 짓밟은 2차적 살인행위로 느껴졌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학생들에게도 평생토록 지우지 못할 죄책감을 안겨주는 계획된 집단행위였을 것이다. 야만적 집단성이 연대어린 공동체의식으로 미화, 승격되기 위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자리잡았을 집단행위, 내가 아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인의 칼
한편 게오르크는 조국땅을 떠나 그토록 어렵게 도착한 프랑크 푸르트 임시숙소 육층 창문에서 뛰어 내려 도보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죽음이 객사인지, 살인에 의한 추락인지, 투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삶의 의지가 강하리라 믿었던 게오르크였기에 그의 죽음은 다소 예견된 롤라의 죽음보다 충격적이었다. 스스로 강한 결심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는 미행과 가택수사, 심문을 견디지 못하고 피폐된 청춘의 모습으로 창문을 뛰어 넘었다기 보다 순간적인 환청이나 망상의 일환으로 보고 싶었다. 게오르크에게 있어 조국의 창문은 미래나 꿈을 소망하는 능동적 통로가 아닌 사생활과 자유가 없는 감시로서의 수동적 올가미였을 것이다. 흡사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씌우던 프레임으로서 네모난 칼이 연상되었다. 그가 창을 통해 표적으로서의 과녁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창을 통과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오로지 출국 허가증을 받아 조국을 떠나는 것이 온 희망이었던 그가 임시숙소라는 경계지대를 넘지 못한 것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고독화된 절망을 향한 최고치의 자기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열편이 안 되는 시를 남겼고 우리는 그것을 유작시라 이름한다. 절망을 노래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에게는 노래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보다 더 큰 죽음의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다. 모든 죽어간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기지 못한 시 때문이 아니겠는가.
헤르타 뮐러의 소설들은 단락 하나 하나가 한편의 서사시, 서정시를 연상시킨다. 『숨그네』의 실제 주인공이자 그녀에게 소재를 제공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시인이었고 그녀의 주변엔, 특히 청춘을 나눈 그 시기엔 시인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친구들이 심문을 받게 된 최초 계기 역시 '시' 때문이었는데 시인은 시적화자와 좀처럼 분리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김지하, 고은 역시 군부독재하에서 투항하던 대표적 시인이었다. 정작 시인이기도 했던 그녀가 시의 숨결과 시의 핏줄을 가지고 소설로 뼈와 살을 만들어 영광의 꽃을 피운 이유는 그녀가 시인의 유전자를 가진 소설가였기 때문일까. 소설에선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별의별 인물을 창조하여 그들의 자리만 마련해 주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사태를 관망할 수 있다. 그녀는 시로써 자신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억압된 현실은 소설로 타자를 말하게 하는 입장을 고수하도록 종용했을지 모르겠다. 이는 그녀가 조국 루마니아를 버리고 독일이라는 타국의 망명지를 선택하여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행로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로는 독일과 루마니아 두 문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으로서의 아픔을 루마니아의 속담이나 노래에서 연상되는 낱말(의미)과 독일어로 쓰거나 읽을 때 나타나는 낱말(표음)을 결합해 '마음짐승'과 같은 독창적인 조어로 잉태해 내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작품이 시인과 시와 연관성을 가질 때, 그 곳에서 시인과 시가 죽었을 때 아주 많이 슬프다. 그녀로서는 그녀의 부모나 자식이 사망하는 것과 같은 아픔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핏줄로 소설을 탄생시킨 그녀였을 테니까. 시인인 청춘으로서 게오르크의 죽음이 더욱 내 가슴을 짓눌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물의 끈
또 한명의 친구 쿠르트는 자신보다 타자에게 발생한 사실로 인한 간접공포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집단에서의 이탈이나 낙오를 두려워하던 쿠르트는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동료의 행동과 심리에 지배당하는 경향을 보인다. 쿠르크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해 가는지 인식 하지 못한 채 '마음짐승'에 굴복당한다. 쿠르트를 포함한 남자친구들의 어머니는 공교롭게도 재단사라는 직업적 공통점과 질병을 가진 약자로 소개된다. 그중 쿠르트의 어머니는 위경련을 앓고 있었는데 같은 유전자를 지닌 그가 최초 심문시 받은 고문은 시가 쓰여진 종이를 먹음으로써 속을 토하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도축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하루 종일 피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역겹고 비루한 노동으로 청춘을 견뎌야 했다. 그는 내장과 골이 난무한 일터에서 일꾼들이 마시는 짐승의 피에 구역질을 느끼는 목격자였지만 나중엔 자신도 같은 행위를 자행하는 공범자가 되고 만다. 반복되는 타인의 불행만큼이 자신의 절망의 높이가 되어버린 그에게 친구 게오르크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프로포즈와도 같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수락의 의미로 그들이 책과 편지를 포장하던 노끈을 가지고 자신의 심장을 동여맴으로써 청춘을 모질게 절단한다. 쿠르트의 노끈은 결국 죽음이라는 선물을 포장 한 것이었다. 쿠르크처럼 심성이 유약한 성향을 지닌 젊음이 더 이상 모질 수 없도록 자신을 파멸시키고 마는 청춘의 표상이 되어 강철같은 나약함을 증명하곤 할 때...어쩌면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약하다는 것의 증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죽지 않고 살아낸 강인함이나 죽지 못해 살아온 나약함이나 동일한 무게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택한 청춘이야 말로 그 순간 가장 강한 젊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동정심도 들었음이다. 실제로 작가도 자신이 특별히 강인한 성품이어서가 아니라 근근히 친구들처럼 끝내 죽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심정을 오히려 투박하게 비하하는 대목을 여러군데 접할 수 있었다. 어떤 청춘이 더 강인한 것이고, 또 어느 청춘이 더 바람직 했는 지를 논하기 전에 퍼뜩 지금 살아 있어 마주한 오늘이 세상 누구의 청춘보다도 감사하다는 이기심이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약했어도 훗날 다행이라는 내 심정을 쿠르크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묶어버린 것이 계속해서 책이나 편지였으면 좋았을 아쉬운 죽음이었다.
...불운의 부적
아름답게 추했던 테레자는 악의는 없었지만 진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배층과 연결된 아버지를 둔 덕에 경제적 궁핍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말과 행동은 그녀 자신에게 혹처럼 자라나던 병마만큼이나 위험스런 청춘의 미성숙을 상징했다. 그녀는 새롭게 사귀게 된 친구인 화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지시 혹은 강요하는 권력에는 별다른 주저없이 순순히 응하는 발걸음을 선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화자가 테레자와 같이 찾게 된 네잎클로버를 대하는 그들의 대화에서도 작가의 숨은 뜻을 엿볼 수 있었다. 테레자는 행운을 좇는 네잎클로버의 형식인 네 잎에 주목했지만 행운이 필요치 않은 화자는 '물클로버'라는 자신이 만든 식물의 이름이 더 중요했기에 테레자에게 네잎클로버를 건네 버린다.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이 더 중요했던 화자는 실체로서의 육체가 병들어버린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인 친구의 죽음엔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친구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보다는 배신이나 증오의 감정이 화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레자는 결국 아버지의 염탐지시를 큰 거부 없이 받아 들이며 화자와 감시반, 우정반의 심정으로 다시 재회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호두처럼 자라던 혹을 경고하던 화자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나는 테레사의 혹을 호두알로 묘사한 부분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인상깊었다. 호두는 외양은 거칠고 볼품없지만 속에는 영양과 실속이 가득한 건강식품이 아니던가. 겉모습에 너무 가치를 두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테레자의 호두알 크기의 혹은 세상이 청춘에 경고하던 메시지 였을 것이다. 테레자가 그 경고를 알아차렸다면 호두는 그녀를 지키는 부적이 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죽음의 혹으로만 성장했다.
'이유없는 반항'이 무조건 청춘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체성이 상실된 청춘은 결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교훈이 담긴 죽음이었다. 어떠한 굳건한 생각을 고집하는 것 만큼이나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 역시 소름끼치게 다가왔던 무고한 청춘의 죽음이기도 했다.
초록, 멜로디
작가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친구들 외에도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체주의 사회의 실상을 이면에서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 조연으로 자리 잡은 그들은 헤르타 뮐러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자 재단사와 남자 이발사가 그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 나는 이들이 직업성을 십분 활용해 당시의 상황을 연주해 내는 멜로디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비밀의 상자 뚜껑을 열어 은근하고도 천천히 울려 퍼지는 오르골 음악이 어쩐지 구슬프면서도 음산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작품 속 재단사 중에는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의 어머니들(비중은 적었지만)이 모두 쓸개, 위, 비장이 나빠 하나씩 속병이라는 질병을 가진 병자로 소개된다. 어딘가 한 두 군데씩 정상이 아닌 사람들(속이 나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악기를 끌고 와 넋이 빠진 모습으로 속마음을 힘겹게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져 듣는 내내 귀가 편치 않았음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마땅히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꾸어 줌으로써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서비스업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작가는 바늘과 가위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 직업의 특수성을 내세워 '규격'의 외피와 '획일'의 정신을 부르짖는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들이 바늘과 실로 꿰매어낸 천조각과 가위로 깍아 내버린 머리털, 잘려나간 손톱들은 바로 무고한 시민들이 토해내는 내면의 상처조각이라 느껴졌기에 유난히도 가위질이 예리하고도 섬뜩하게 체감되었다. 그런가하면 재단사와 이발사가 위치한 공간은 혹독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타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고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었던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숨겨야 할 비밀을 보관할 수 있는 은폐의 장소로도 그려지고 있어 그 양면성이 흥미로왔다. 독재체제하에서 소식은 곧 비밀과도 같은 동의어였을까. 이들에겐 타인의 상처나 불행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서로가 공유하는 것이 익숙함이 되어 오히려 그 두려움이 그들을 살게 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외려 아무런 두려움이 존재치 않음이 또 다른 두려움이 되었다는 화자의 독백이 비로소 겹쳐지는 대목이었다. 두려움이나 공포도 습관이 되어 인간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인정하기 싫었지만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이 선사하는 멜로디는 분명 절망의 악기로 연주한 죽음의 협주곡이었음에 틀림없다. 친구들이 모여 소중한 기억을 나눈 여름별장으로부터 우리들은 각자 네모난 초록색 보석상자를 선물받았지만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르골의 멜로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눈을 감으면 이들과 중첩되는 시각적 이미지로 자꾸 빛바랜 초록의 사진이 연상되었다. 이상했다. 초록은 생명과 자연의 색으로 싱그러운 젊음을 상징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 아니던가. 그런데 이 작품에서 초록은 따먹으면 생명을 위협한다는 '초록자두'나, 롤라의 목숨을 끊어 놓은 '초록색 허리띠'이거나 혹은 죽은 롤라의 트렁크와 옷장에 뿌려지는 '청록색 가루'처럼 하나같이 죽음을 암시하는 전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 이었다』 에서도 거리의 초록색 나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초록색 칼로 묘사되고 있었다. 흡사 피부가 초록색인 냉혈동물 파충류의 그것처럼 핏기 없는 얼굴이거나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의 혐오스런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던 초록의 기운은 처음부터 바로 이해되진 않았다. 하지만 헤르타 뮐러가 뽑아내는 마법의 카드엔 두 개 이상의 감각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묘사가 일상적이었기에 나는 내 임의로 청각(음악소리)을 시각(초록색)화 하면서 감각의 전환효과로 받아들였다.
초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뿌리 깊었다. 게오르크가 화자에게 선물한 '닭괴롭히기' 놀잇감 역시 초록색 나무판이었으며 쿠르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만들어주신 재킷 역시 초록색 재킷이었다. 세 명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즐겨 마신 맥주 역시 초록의 액체였다. 작품 속에서 주로 화자가 중심이 되는 서사를 줄기로 삼다가 자주 아이의 시점으로 바라본 도시와 어른들은 애초부터 아이들의 초록빛 희망을 차단하며 그것은 절망이자 죽음이라고 세뇌시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초록의 희망을 지운 그 자리에 그대로 절망을 끼워 넣어야 비로소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초록자두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 어른들이 원망스러워 그것을 마구 먹어대던 아이가 어른거린다. 음산하게 흐르던 멜로디에 이 초록빛이 비추어 오면 나는 그들의 이미지가 서서히 정지됨을 감지하고는 했다. 초록빛 스틸 컷에서는 식물을 곡괭이질 하던 아버지가, 시계태엽을 감던 어머니가, 체스말로 전쟁놀이를 하던 할아버지가, 뜻모를 노래를 하던 할머니가 자신들의 습관화된 동작을 서서히 멈추어 버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 결국 초록은 '침묵의 빛'이었던 것이다. 과외와 인민선동과 창녀짓이라는 억울한 죄목을 짊어진 화자(작가)에게 자신의 청춘은 희망을 삼켜버린 절망의 초록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生이 아닌 死의 초록으로 청춘을 견뎌왔고 그럼으로 자신은 청춘을 살아온 것이 아닌, 죽어왔다는 그녀만의 도저한 항변과도 다름 아니었다. 그녀의 뼈를 뚫고 지나간 바느질은 이렇게 우리 앞에 초록의 박음질로 새로 돋아난 것이다. 그러니 한땀 한땀 그 돋을 새김이 힘겹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녀의 마음을 읽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리움, 자장가
이렇듯 화자는 롤라로부터 시작된 연이은 친구들의 죽음과 육체와 정신을 옥죄는 감시로 인해 청춘을 살아 내었다기 보다는 죽어지낸 것으로 느껴진다. 모든 감각과 감정을 죽이고 내가 아니어야 하는 나이거나 내가 아니고 싶은 나로 온전한 '나'를 저만치 유체이탈시켜 두고 껍데기로서의 '나'만 여기 빌려와 生의 의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실체가 부재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던 화자가 친구들처럼 죽지 않고 삶을 지켜낸 방식, 그 견딤의 미학의 근원에는 이처럼 '부재에 대한 신념'이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작가도 실제 현실에서는 자신이 없음을 견디는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마하여 결국 그녀만의 생존전략으로 승화시키지 않았던가. '나의 언어는 비속한 창녀다. 그러나 나는 이 창녀를 처녀로 바꾼다.'고 말했던 어느 작가가 생각난다. 청춘은 지나온 입장에서는 아무런 꾸밈없이도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하겠지만 내가 청춘인 지금 입장에서는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게 어쩌면 인생의 시간에서 가장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절정일 때 일 것이다.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가 억압당한 것은 물론 사고나 재해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던 친구가 자신도 위협을 받던 그 이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할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부재했어야 할 과거를 딛고 오늘날 자신이 존재했어야 할 이유를 가장 감동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유난히도 작품의 무게가 버거웠던 이유는 바로 살아남은 그녀의 숭고한 존재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비극의 옷을 입은 시, 시의 옷을 입은 소설, 소설의 옷을 입은 그녀의 문학은 늘 검은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의 구두끈을 매는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가 작가로서 철저히 작가답게 삶을 살아왔고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만 온전한 시간을 쏟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그러지 않고서는 生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글쓰기가 곧 숨쉬기와 같았던 그녀만의 생존방법이자 자유를 얻는 유일한 탈출구였음에 틀림없다. 이유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색의 옷을 고집한 어느 디자이너도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녀의 한 가지 색은 아버지 사후 남은 평생 검은색 옷만 입겠다던 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는 의미였던 것일까. 긴 시간 독재와 맞서 견뎌온 그녀만의 제복일지 모르겠다. 검은 상자같던 마을에 살고 있던 동물과 식물들에 대한 향수일까. 독재치하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친구 롤프와 롤란트에 대한 영원한 애도일까. 아...순간 이 모든 것에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녀의 한 가지 색이 그녀가 부재하면서 존재했던 시간, 死해버린 청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연민의 상복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녀 스스로 부활하기 위해 그녀가 버리고 죽인 것들에 대한 용서의 상징임을 깨닫겠다. 이 작품은 그녀 자신을 포함해 그녀의 친구들처럼 독재로 희생된 꽃다운 청춘을 위한 '弔歌(조가)' 였던 것이다. 그녀의 숙연한 작가정신에 다 지나간 청춘이 뒤늦게 반성으로 사로잡힌 꼼짝 못할 시간이었다면, 실은 내 청춘은 행운이었으며 독재에 스러진 청춘에 빚진 내 청춘을 스스로 검열해 보는 시간이었다 고백한다면 그녀가 이제라도 마법의 얼음을 풀어 줄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쉽게 살아남은 청춘, 운이 좋은 청년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실하지 않고자 거짓을 택한 적은 없으나 침묵하며 진실을 외면한 적이 있으니 롤라의 룸메이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행동하는 양심'은 아니었던 비겁한 청춘이었다. 혹시나 나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시위에 연루된 친구들을 비난하는데 동조한 적도 있으니 강당에서 롤라의 죽음에 눈물을 참으며 박수를 쳐대던 집단들과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낙오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진실하며 적당히 박수치던 내 청춘이 지켜 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같이 7,80년대 군부독재아래 억압받던 문인들을 떠올린 독자들도 있을까.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의 순명이라 믿었던 우리 시대 문인들은 루마니아처럼 표면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지도 않으면서 민주주의라는 위선의 허울 속에서 저항시인, 민족작가로 자동분류, 삭제될 뻔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누군가의 청춘이 비참하게 상실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소실되지 않고 여실히 살아서 증명된 것일 터, 우리는 그들의 상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세상을 향해 우리들이 빚진 것들을 조곤조곤 읊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마음에 깃든 짐승을 어루만져 본다. '마음짐승'은 작가가 만든 조어로서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자장가의 한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배고픈 천사'와 '감자인간', '심장삽'을 기억하는 우리는 '마음짐승'이 누구보다 순수했던 어린마음이 상처를 받아 누군가를 잡아 먹고 할퀴는 짐승처럼 자신과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내안의 숨겨진 자아일 것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고사성어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오늘날, 남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인간이나 마음이 몹시 흉악하여 인간으로서 몹쓸짓을 하는 사람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녀의 '마음짐승'이 자신의 내부를 향해 자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네 '인면수심'은 다분히 타자를 향한 공격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어쨋거나 마음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짐승같은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마음을 먹는다고 표현하니 하물며 짐승같은 마음을 먹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짐승에게 몸과 마음을 먹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와 같은 마음을 먹었을 짐승같은 상대에게도 먹혀버린 내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짐승같은 마음을 먹고 또 짐승같이 친구의 마음을 먹고, 그러한 친구들에게 짐승같이 먹혀온 마음을 고스란히 달래가며 우리 앞에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청춘의 짐승과 우연히도 일치했기에 사뭇 그 발견이 죄스러웠노라 고백하겠다.
헤르타 뮐러의 작품은 문학이 가지는 기록이자 증언으로서의 가치위에 독특한 그녀만의 독창적인 조어를 합체시켜 이루어낸 거대한 진실의 창고였다. 이 책은 '독창적인 작가는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한번 깨우쳐 주는 작품이었다. 더불어 그녀의 상실과 지금의 진실과 그리고 그들의 청춘에 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고개 숙여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청춘에 물러선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청춘의 짐승을 다음의 청춘에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백도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춘을 상실한 그들을 향한 예의이자 그리고 우리를 향한 용서이자 다음 청춘을 향한 뼈아픈 충고이자 배려일 것이다.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어 버린 발걸음을 이제야 힘겹게 떼어본다. 진실을 삼키며 짐승을 길러낸 마음이 아닌, 진실을 꺼내어 인간을 껴안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되고 싶다.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이 분명 우리의 걸음이고 싶다. 어떤가, 마음짐승을 어루만져 주는 할머니의 자장가가 그리운 이 밤, 잘못하고 돌아온 우리네 가슴에 짐승도 잠들게 할 그녀의 노래가 더욱 따스하게 들려오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들은 저마다 낱말이 든 자루를 남겨놓고 가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