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커피 한잔을 마시며 딱 책의 무게만큼만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바보. 그렇게 친다면 차라리 시 한편을 읽어야 했다. 헤어짐은 짧을수록 좋다고 했는데...머리의 온도가 내려가는 데는 참혹하게 실패한 것이다. 짧지만 강렬했고 이별했지만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얇은 책인데 별일 아닌 듯 시작되는데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젖은 솜처럼 되어있어. 독서의 즐거움은 그렇게 요지부동인 듯한 내 마음이 흔들릴 때야"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 책을 덮고 난 신경숙작가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요지부동인 듯한 내 마음'의 요지부동이었다. 요지부동한 마음의 근거는 아마도 익히 잘 알고 있음에 대한 자신감일 터이다. 예를 들면 사랑을 해본자의 첫사랑에 대한 끄덕임 혹은 결혼을 해본자의 첫날밤에 대한 미소...그런 심정들. 나 역시 이 작품에 대한 평가와 호기심이 몇 개월 머릿속에 잘 보관되 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실은 브레이크 타임 용으로..)책을 집어 들었기에 내려놓음의 무게가 한층 버거웠다고나 할까. 독서란 책 집어 들 때와 책 내려놓을 때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당하는 이 우매함 때문에 또 다음 책을 집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쥘과의 하루>는 그냥 누워서 다른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던 나를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최근 어느 소설집, 박성원 작가의 <하루>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달리는 버스광고판에 적힌 화제의 신간 헤드카피였다. 그 신간이 혹시 <쥘과의 하루>는 아니었을까하는 맘가는 대로 생각을 해본다. 쥘과의 하루를 보낸 아내 알리사의 하루를 이해했으니 나라는 사람 그만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세상을 안다는 것...그일 참 무엇보다 슬픈 일 아닌가. 세상을 안다는 게 슬픈 일이라면 어쩌면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50년을 같이 살 맞대고 살아온 배우자의 죽음 같은 건 굳이 언제인지, 왜, 어떻게 인지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꼭 알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의 배우자인 내가 아니라 나의 배우자인 그였으면 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경운 배우자 보다 내가 먼저 죽길 바란다. 내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고 그리하여 내 죽음을 잘 마무리 해주길 바란다. 이것은 내가 부모님을 떠나 보낸 후 배우자에게 억지스럽게 받아낸 약속이었다. 살아생전에 다시는 다른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마주하는 형벌을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퍽이나 이기적이었지만 약속대로 조건들이 이행될 리 없음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다짐으로 매우 든든한 내 미래를 보장받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엔 내 배우자의 죽음을 확인하며 겪어야 할 온전한 내 절망과 죽음의 절차가 가져오는 부수적인 추억들, 상실로 생겨나는 先경험자의 상처 기득권을 전혀 확보하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가 알차게 숨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작품속의 알리사는 쥘의 죽음을 목도한 그날 아침,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 자궁속에서 꿈틀거리며 새날을 향해 요동치는 기분을 꽤 오래 유지해가며 쥘의 기분과 마음을 시시각각 헤아려 주는 것이다. 몇 분이 흘렀던 것일까. 십분...십오분...기껏해야 삼십분을 넘지 않은 남편의 사체가 소파에 그대로인 알리사의 아침은 그렇게 그 전날과 똑같이 시작되었음이다. 이들 부부는 자식을 결혼시키고 은퇴 후의 삶을 깨가 쏟아지듯 행복하게 살았을까...? 결혼 생활 50년에 작은 임대아파트에서의 하루하루 일상은 오래된 시계와도 같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서로의 규칙들이 서로만이 인정하는 서로의 습관들이 生의 안도와 평화를 유지하는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부스스하지 않은 차림으로 신문을 가지러 가고 먼저 일어난 사람이 커피와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 신문의 기사를 읽어주고 시간이 되면 산책을 하고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메뉴를 떠올리곤 시장을 다녀올 것이다. 자식의 안부전화, 지인과의 수다, 친척의 부고...같이 산다는 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나누는 것...매일 주어지는 시간과 같은 공간에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한사람이 사라진다면 그전에 그 사람과 같이 하던 모든 것들도 사라지는 것일까.

제일 낭만적인 설정은 쥘이 눈오는 날 아침 침대나 욕실에서 죽지 않고 소파에 앉아 죽었다는 상황이었다. 그의 죽음은 진행형이었고 잠시 휴식이었고 삶의 전이상태였던 것이다. 쥘은 눈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눈이 온다고 알리사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일까. 쥘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알리사는 소파에 쥘을 그대로 두고 식사를 준비하고 목욕을 한다. 열시면 어김없이 쥘과 체스를 두러 방문하는 자폐아 소년 다비드를 맞이한다. 알리사의 마지막 의식과도 같은 이 작업은 그녀가 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여 벌이는 통곡과 아쉬움의 향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쥘의 죽음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세상과 타자로부터 그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알리사가 쥘의 부고를 최대한 늦추려는 마음이 지극히도 현실적으로 다가왔음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가. 가족의 죽음을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혼자 그 광경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지 않았던가. 놀라움이든 두려움이든 그 다음은 순서대로 죽음의 절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시간에 떠밀려 결혼식을 치루어 내듯 죽음의 의식도 마찬가지 인 것이다. 그렇다고 알리사가 쥘과의 마지막 이별의식을 특별하게 치루어 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쥘이 죽음에 직면하기 전의 모습 그대로, 그들이 살았던 어제와 똑같이 하루를 살아낸다. 그러면서 흐르는 시간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그와의 시간들을 마음에 쌓게 된다.

죽은 남편을 앞에 두고 그와의 생생한 추억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알리스의 아픔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는 고백부분에 이르러 흔들리던 가슴을 세차게 짓누른다. 언젠가 자신과 떠났던 휴양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알리사는 그날 밤을 떠올리며 오열한다. 잡지에 꾹꾹 눌러쓴 남편의 글씨 자국만으로도 다른 여자의 이름과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있었던 그녀였기에 얼마나 두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는지 그러면서도 몰라야 했고 모른 척했던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더 깊었는지...그것은 생의 마지막에도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알리사는 두 사람이 신혼 초 실수로 놓쳐버린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에 대한 상처도 처음으로 꺼내놓으며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했을 자신들만의 비밀에 눈물의 용서를 구한다. 핏기가 사라져 점점 푸른 반점이 생겨나던 남편의 손은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게 했다. 알리사에게 한평생 죄의식을 갖게 했던 아버지의 손은 어린 시절 매맞던 기억의 손이었지만 남편의 푸른 손을 보고는 자전거사고로 심하게 다친 자신의 다리를 침착하게 치료해주던 아버지의 멍든 보라색 손을 떠올리게 되면서 비로소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으로 재생된다. 남편의 손은 죽음을 인정하는 나의 상처이겠지만 그 상처로 환기되는 아버지의 상처는 사랑이었다. 죽음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알리사는 다하지 못한 말이 있어 소파에서 죽음을 맞이한 남편에게 자신이 평생 용서하지 못했던 비밀들을 털어 내며 그 응어리를 토해내었다. 죽은 남편이 용서해주어야 할 비밀들이 아니었음에도 알리사는 '죽음'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향해 자신의 지나온 잘못과 상처를 열어 보였다. 마치 쥘이라는 구원자가 다 짊어지고 가 줄 것 처럼. 아팠다. 우린 뜻대로 안되는 옹졸한 마음 하나 때문에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상대도 자신도 용서 할 수 있는 비겁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알리사처럼 아무것도 용서하지 못한 내 자신을 초라하고 서럽게 만들었음이다.

다행히 알리사의 슬픔 만큼이나 소중하게 다가온 존재는 있었다. 매일 아침 열시에 쥘과 체스를 두러 오던 자폐아 소년 다비드였다. 자신이 형성한 습관과 일상의 구조속에서만 안정을 찾는 다비드는 이 작품을 쥘과의 하루 속에 병행되는 다비드와의 하루를 탄생시킨 희망의 빛이었다. 다비드는 소파에 앉아 숨을 거둔 할아버지를 보고 저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껍데기라 칭한다. 하지만 그 껍데기를 앞에 두고도 다비드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펜케이크의 요리를 만들어 내고 할아버지의 체스말을 두며 게임을 멈추지 않는다. 할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한 다비드 역시 알리사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으로 그만의 이별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자폐아 소년 다비드가 알리사 할머니의 침대에서 잠이 들고 알리사는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남편이 사라진 빈 공간에 자폐아 소년이 대신 한 것은 분명 인위적 결말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남편이 사라졌음을 재차 확인하게 될 알리사의 마음이 신경쓰이는 것은 바로 그 다음날, 내일이라는 외로운 일상과 다시 마주쳐야 하는 그 변함없음에 대한 섭섭함 그것이었을까. 바깥엔 눈이 오고 커튼은 따스했고, 소년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오늘 그녀가 연장한 이별식의 시간에서만 가능한 배려였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일까. 쥘과의 하루는 어짜피 어제 그녀의 하루와 같았고 오늘 그녀의 하루였기에 내일 그녀의 하루 일 것이다. 결국 쥘이 있건 없건 그녀의 하루였다는 사실은 내일의 몫 역시 (쥘 없이도)그녀의 것임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 날을 기억한다. 그가 걸어 다니던 공간, 그와 스치던 시간, 그와 마주한 탁자, 그와 손잡던 소파...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사람만 하나 없어진 그 순간에도 아침의 커피와 점심의 메뉴와 저녁의 약속은 존재했다. 배우자를 먼저 잃어야 한다면 꼭 읽어야 할 작품이었다. 배우자를 먼저 잃기 싫은 사람도 꼭 읽어야 할 작품이었다. 결국 배우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그때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될 지 모르겠다. 배우자가 있다하면 용서해야 할 비밀 한가지쯤 없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누가 되었건 배우자의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날이 비밀을 밝혀야 할 날이라 여긴다면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건 어짜피 용서할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주는 것일 테다. 벌써부터 외로와 진다. 하지만 오늘의 일상은 누구보다 훌륭한 카운슬러일 것이다. 배우자의 힘은 곧 일상의 힘일 것이니. 그 힘은 혼자가 된 후에도 습관을 가지고 반복할 수 있는 내성을 길러 줄 것이다. 우린 그날까지 일상을 지금처럼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그 때까지는.



- 파도소리와 심장소리가 살아온만큼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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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0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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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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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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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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