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을 곁, 증거


  가을은,

  방황하기 썩 좋은 계절은 아니다. 성인으로 이십년 살아 오면서 내 스스로 방황하고 있다 느낀 건 늘 여름이었다. 어떤 조짐이 보이는 건 약 오월 무렵 부터이고 한여름이 되면 뜨거워진 태양만큼이나 방황하는 깊이도 커지곤 했다.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하는 건 추석이 지나 찬바람이라는 가을이 피부로 체감될 때, 두어장 남은 달력을 넘겨보며 한해의 이익과 손실을 따져보게 되는 시기. 바로 시월이 오기 전, 이 무렵 부터인 것이다.


  같은 무렵,

  여자들은 필히 자신들의 노화 정도를 체감하게 되는데 주로 탈모, 피부처짐, 소화불량, 불면증등을 호소하게 된다. 이때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감기와 몸살에 시달리고 몸이 좀 나아진 후 여행이라도 가볼라치면 반드시 겨울이 눈앞에 닥쳐와 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준비없이 시간에 이끌려 관성대로 두어 개의 모임에 참석하고 나면 한해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 나이들면서 점점 느끼는 것이지만 한 계절을 무사히 그러고도 알차게 통과한다는 건 결코 쉽거나 작은 일이 아니다. 더불어 앞으로 계절이 중년에 축복이 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그러면서 인간은, 여자는 지나간 계절을 회상한다. 가을은 증상으로 여자의 노화를 유발한다.


  자주,

  발견되는 증상으로 흘러간 가요를 찾아 자꾸 듣게 된다는 것, 가사를 확인하고 새삼 몇 구절에 맞장구를 친다는 것. (나는 오늘 무도를 접고 불후의 명곡을 보았다.)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서 무얼 할까, 나 없이도 잘 살아갈까... 이런 류의 가사는 유독 전기고문처럼 가을의 일상을 내버려두지 못한다. 나의 첫사랑은 얼마 전 스마트폰의 프로필 사진을 변경했다. 사람들은 어떨 때 프로필 사진을 변경할까. 내 경운 하나의 사진에 꽂히면 그 사이트가 폐쇄될 때까지 프로필 사진 같은 건 잘 안 건드리는 쪽인데. 또 내가 아는 남자들은 사진같은 걸 자주 변경하고 꾸미는 세심함 같은 게 없는 사람이 많은지라 그가 멀쩡한 자신의 얼굴에서 그냥 바닷가 같은 사진으로 바꾸어 놓은 게 나는 자꾸 걸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정면 사진은 보다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이고 자연환경은 자신보다 메타포적이니까. 예를들면 떠나고 싶다거나, 자유가 그립다거나, 나는 사라졌다거나 뭐 이런. 그래 어쩜 그도 방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야무진 추측을 해보곤 폰을 던져버렸지만.



#2. 서점 옆, 영화관


   한 달에 한번은 직접 걸음으로 서점엘 가는 것 같다. 서점에 가보면 온라인에서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다. 확실히, 사람들은 가을에 책을 안 읽는다. 텅텅빈 서점에서 나는 방황할 수 없겠다는 실망감이 들었다. 정신은 여름보다 더 뚜렷하고 그래서 어디론가 도망가거나 떠나고 싶거나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다. <도가니>의 개봉에 맞춰 현재 소설베스트는 도가니였고, 약 삼년 째 2,3위는 <엄마를 부탁해>이다. 지겹고 신물이 난다. 언제까지 공지영과 신경숙만이 소설을 지배하는 서점이 되어야 하는 걸까. 유재석과 강호동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승철과 이문세도. 김건모와 신승훈도. 이들의 공통점은 한 시절이 십년은 간다는 것인데 그럼 앞으로 몇년은 더 공지영, 신경숙이어야 하지 않나. 제길.

 

 
<컨테이젼 -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  맷 데이먼, 기네스 팰트로, 캐이트 윈슬럿, 주드 로, 마리옹 꼬띠아르>


   울 동네는 운좋게도 서점과 영화관이 같은 건물에 있다. 아이와 함께 <도가니>를 볼 수 없어 <컨테이젼>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우린, 충격을 머금고 영화관을 나왔다. 장르와 소재가 전혀 다른 영화였지만 지난번 <혹성탈출>의 마지막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제 미국은 누구를 대놓고 비판하고 자기들을 치켜세우기 보다는 다같이 구별없이 인간임을 반성하자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세상이 이렇게 된건 자기들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구나, 싶었다. 늘 그렇듯 그들은 영리하다. 이데올로기나 경제, 테러, 환경 등 모든 문제를 따져보기 전에 그 모든 것은 우리 다같은 인간들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근본주의,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는 과도하지 않으면서 진중한 메시지를 남겼다. 스티븐 잡스와도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맷 데이먼, 주드 로, 케이트 윈슬럿, 기네스 팰트로같은 흥행배우들을 데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색다른 영화를 연출했다. 시간상 오래 견딘건(?) 맷 데이먼 이었지만 그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외려 평이해 보였달까. 나는 이들 주연배우들을 보면서 새삼 내가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느꼈다. 약 십년 전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는 <리플리, 2000>라는 영화에서 이미 삼각관계로 출연한 바 있다. 그땐 그들도 한창 팽팽했었는데 어느덧 나처럼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있더라는 것. 그들 중 그런대로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던 배우는 주드 로였고 솔직히 캐이트 윈슬럿은 이토록 연기파로 성장할지는 몰랐었다.  

 


<리플리 - 안소니 밍겔라 감독, 2000 / 맷 데이먼, 기네스 팰트로, 주드 로>


   <컨테이전, Contagion, 2011>은 말 그대로 전염을 뜻하는 의학 스릴러 영화이다. 신종 플루처럼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내용상 소재가 전개되는 모습은 재난장르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재난형 블록버스터나 SF적 서사를 표방하진 않았다. 비슷한 류의 바이러스 의학 영화의 경우 대개 미국식 영웅주의를 결말로 내비치거나 가족의 의미, 사랑의 복원등 인간성 및 가치중심주의로 회기하는 패턴인 것에 비해 상당히 바이러스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 영화이다. 교육적으로 본다면 구성주의적이고 서사적으로 본다면 열린 결말에 가깝다. 한마디로 문제해결이 아닌 의제 제시형 컨텐츠에 해당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아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가지고 대개 평하는 자들은 감독의 주제의식이 높다, 이렇게 말하던가.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바이러스가 퍼지게 된 이튿날, 그러니까 최초 감염자가 전염된 다음 날인 D-2 번째 날부터 영화가 시작되고 라스트에 D-1, 그 첫째 날이 역으로 공개된다. 기네스 팰트로가 왜 어디서 어떠한 경로로 감염이 되었는지 마지막에 제시되는데 이 마지막 장면이 미치도록 뇌리에 남는다. 러닝타임으로 보았을때 기네스 팰트로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데 생각나는 건 온통 그 여자가 나오는 장면이 거의 지배적이다. (이런걸 밝히는 걸 스포일러라고 하던데 영화로 확인하시기 바란다. 기네스 팰트로 때문에 나는 구역질이 나올 뻔 했고 죽어도 부검은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ㅠ)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게 있다면 그건 치명적 바이러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위기상황에서의 인간이 행하게 되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이다. 감독이 마음에 들었던 건 등장하는 인물마다 교묘하게 해당직업, 놓인 위치에 따라 극한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자기중심 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그 정당성을 질문했기 때문이다. 눈에 띄던 인물은 유명 블로거로서 음모론 같은 걸 제기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주드 로였다. 그는 바이러스로 숨진 최초 피해자를 취재한 사람이었고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소위 말하는 민간요법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블로그에 게시하여 떼돈을 벌게 된다. 정부와 보건당국, 제약회사간의 이권을 둘러싼 꼼수를 고발하고 자신이 사회정의를 위해 취재를 하고 있다는 식의 인터뷰를 자행한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는 병이 걸리지도 않은 자신의 몸에 개나리즙이라는 요법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국민 대 사기를 친 인물이었고 나중에 이미 번 떼돈으로 보석금을 내고 당당히 석방이 된다. 처음엔 그도 정의감 불타는 저널리즘 정신으로 개인취재를 하던 블로거였지만 유명 인기 블로거가 되고 보니 자신의 말 한마디가 법전처럼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에선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현상과 인터넷을 통해 사회학적 바이러스가 유포되는 것을 동격화 한다. 정의감이라는 것도 결국 나르시시즘이라는 바이러스에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는 면역력 약한 인간의 심리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선 신기하게도 이렇게 사회나 국가를 위해 정의롭기 보다는 오로지 개인 자신만을 위해 정의롭던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누구보다 그 위선을 경쟁력 삼아 바이러스 가득한 이 사회를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하지도 남달리 악하지도 않은 필요에 따라 자기위선과 자기기만을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죽기직전까지 알량하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참 사소하고 애처롭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을 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슬펐다. 이야기는 실종되고 문제의식만 남았다. 가을도 그렇지않나. 계절은 사라지고 언제나 고독만 남는것.



#3. 방황 후, 시작


   고로, 나는 방황한다.

   적어도 아직은 방황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금 방황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 괴롭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나는 언젠간 이 시기를 작별할 것이고 다시 세상과 조우하는 날을 맞이 할 것이다. 아마 내가 방황을 끝낼 시점엔 이렇게 팔자좋게 글이나 쓰고 있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많이 알지 못하는 친구 하나는 아침방송 보며 커피마시는 호사를 누리는 주부들이 제일로 부럽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주부들이 되기 싫어 사실 아침에 TV를 켜지는 않는 주부였다. 스마트폰에 내 소개가 ‘가장 얇은 단위의 인연의 끈’이라고 되어 있다는데 학습지 선생님은 나더러 혹시 책을 많이 읽으시냐고, 시집이나 아니면 특이한 책을 많이 읽으시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이 상당히 모욕적이었지만(선생님은 나 기분나쁘라고 한 질문이 아니지만 ㅠ, 나는 보기와 달리 책을 많이 읽으시는 군요 식의 평가가 미치도록 안듣고 싶었던 이중인격의 소유자이므로) 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기만 했다. 자존심이 센 것이랑 자존감이 높은 건 다른 문제인데 말이다. 괜한 일로, 사소한 한마디로 하루를 고민하기 싫어 나는 그 질문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내 방황의 핵심에 그 '보기와 달리'는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다. 나는 어딜 가서 혹은 누군가가 책 많이 읽냐는 말이 왜 이리 싫은 걸까. 나는 정말이지, 책 좀 읽고 글 좀 쓴다는 말이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생애 지독한 욕처럼 들린다. 내가 그들 한테 책 사달라고 한 적 없으며 내 글 읽어 달라 한 적 없는데. 풋, 이런 막되먹은 식의 자기방어 논리를 갖다 붙이고 싶어진다. 모든 건 현재, 내가 방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싶다.

   서점에서 어떤 책을 펼쳤는데 거기 내 폐부를 정통으로 찌르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심리학 책이었는데 사람들은 칭찬하는 사람보다 비판하는 사람을 더 지적이고 똑똑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하필 예로 서평을 들었는데 어떤 책이 좋다고 하는 사람보다는 그 책과 작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에게 호감은 덜 느끼지만 그 작자가 훨씬 더 유능하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느낀다는 연구결과. 하하하.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호감도는 낮더라도 능력있게 보이고 싶으면 누군가를, 무슨 책을, 이 사회를 실컷 비난하라는 말씀. 그 챕터를 읽고 나는 그 책을 사고 싶지 않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서가를 한참 방황했다.



   그러곤 그냥 본능적으로 방황스런 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은 결국 사고 싶었던 옷을 그 옷을 입는 것과는 별개로 사고 만다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는 어떠한 책을 본능에 못 이겨 사고 만다는 것이다.  알라딘의 할인, 적립금같은 걸 포기하고 나는 그냥 제 값을 내고 말 때가 한달에 한번은 꼭 무슨 생리하듯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소설이 매우 싫어졌다. 대중소설에선 스토리에 대한 갈증을 못 느끼고 본격문학에선 난해함의 이성에 도무지 감성이 동하질 않는다. 시집에선 관념을 해체시키는 방식들이 지겹고 젊은 작가들의 말장난도 역겹다.(이것을 언어의 유희라고 할 너그러운 가슴이 아니시다, 지금은) 그렇다고 나이든 작가의 선 굵은 서사가 뭐 애국할 일 있다고 예전처럼 와 닿지도 않는다. 트렌디한 신문이나 잡지 연재 모음집은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빤한 정치서적들은 그들의 정의로운 위선이 내 선량한 존경심을 방해한다. 그래서 아무런 의도없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내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나만 조용히 알고 싶은 책들을 찾게 된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보물찾기라도 하듯 나는 서점에서 아무도 찾으라 한적 없는 책들을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사실, 진중권의 <아이콘>을 읽으며 약간 실망을 했다. 이 분은 참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하는 범상치 않은 재주를 가지셨구나. 나는 그냥 무거운 것들은 무거운게 좋다.)

   그래, 나는 사실 조금은 더 방황하고 싶다. 가을에 자꾸 무언가를 계획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어제 이승철이 오래 간만에 뼈있는 한마디를 하더라. 언제든지 대중의 껌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사실 지난 시절, 오랜 세월동안 자타공인 달콤 쌉싸름한 껌이 되어온 그가 그렇게 씹어 대온 대중들에게 던지는 공개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그의 젊은 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고 마약, 이혼같은 음악인으로서 진부한 개인사로 잊어먹을라 하면 구설수에 오르곤 했었지. 그의 노래에도 '방황'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였던가. ‘파란 넥타이, 줄무늬 팬티, 그것만이 전부는 아냐’ 뭐 대충 이런 가사가 생각난다.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 하던 구절도. 사랑을 찾아 떠난 것도 방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십 년전에 사랑을 찾아 헤매는 방황을 노래하는 가수였다.

  그런데 살아보니 사랑을 찾아 헤메는 건 방황은 아닌 것 같다.

  방황은,

  방황은, 자기 자신을 찾을 때라야, 대체 어디있는 건지 자신을 찾아 떠날 때라야 방황답다는 결론이다. 나는 내 실체, 내 본질, 내 진실 이런 것들과 매일을 싸우고 견디느라 이 방황의 시간이 바쁜 사람에 속한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이제 내 방황의 내용이 아니고 그것의 종결 시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쩌면 내가 멈추고 싶은 것은 방황이 아니고 방황의 인식, 마무리, 그로 인한 또다른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더 방황하고 싶다. 나는 정신을 좀 똑바로 차린 채로 방황을 이어나가고 싶은데 이 책은 ‘정신차린 방황’을 선호하는 나의 의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나는 이제 불확실한 삶이 가장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우친 꽤 영악한 방황기술자가 된 것은 아닐까.


   
 
방황의 기술이 안전지대를 박차고 나와 경계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죽음과의 만남도 반드시 그에 포함될 것이다. 죽음은 납득할수 없는 우리 인생의 경계다. 죽음은 삶을 경솔하게 낭비하지 말라고 외치는, 삶을 존중하라고 호소하는 비밀이다. 그 비밀로 혼란에 빠져보자. 바로 지금. 모든 순간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시간이라는 것을, 모든 순간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기회라는 것을 명심하자. ‘늙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건 굳이 늙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215p
 
   


   방황을 정신차리고 똑바로 제대로 기술적으로 시도하라는 건 사실 방황을 하지 말라는 뜻과도 통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건 방황이 아닐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웃기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을 울리거나 공부하지 말라고 하면서 공부하게 하는 류의 책이라 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방황을 그만두려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방황을 더 깊게 하고 싶어서라 반박하고 싶다. 올 가을엔 더. 제대로. 그건 어쩌면 방황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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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25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처음에 포스터만 보고는 이 영화 주연배우들 모으느라고 돈 좀 썼겠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한사람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화가 급 땡기네요. 소더버그 감독이라면, 오션스 시리즈나 트래픽 같은데서, 여러 배우 떼거리로 나오는 이야기를 솜씨좋게 비벼내던 능력이 있으니, 일단 기본은 할 거 같은데 말이죠.^^ 형이상학적인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영화라..도대체 어떤 식의 영화일지 짐작이 잘 안갑니다. (그리고, 혹시 방황이 끝나시더라도, 글은 계속 써주시면 참 감사할 것 같다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ㅋ)

한사람 2011-09-25 12:28   좋아요 0 | URL

예, 전 무심코 보았는데 나중에 기억해보니 '더 자켓'이라는 영화가 기억나더라구요.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감독으로 기억해요. 오션스 일레븐도 기억나고. 맥거핀님 말씀 처럼 떼거지 영화로서 어느 누구에게 촛점을 맞춘 연출보다는 모두 모아서 사회적 문제를 던지는 성향이 많은 것 같네요. 형이상학적 바이러스는 그냥 제 생각이고요. 주드 로가 계속 혼자서 취재를 하고 다니는데 감독은 정부의 거짓말이나 블로거의 거짓말이나 층위만 다를뿐 우리는 보도된 진실만을 비판할수 있다, 뭐 그런 메시지를 던진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 적당한 위선과 거짓이야 말로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항체라고 말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ㅠ

전반적으로 저는 추천할 만했습니다~ 제가 워낙 영화보고는 아니다, 그런 말 안해요 ㅋㅋ
예전엔 책보다 영화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책으로 턴하면서 영화보면서 자꾸 문학적 분석을 하려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그냥 즐기지를 못하는게 아쉬워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각적 효과 화려한 영화보다는 이런 질문형 영화가 좋아요^^

글이야 뭐~ 하하, 그런 말 들으면 제가 감사하고 뭉클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소리 들을 자격있나, 뭐 그런 또 시답지 않은 자기검열로 들어가네요..병입니다 ㅠ

노이에자이트 2011-09-2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한사람 님이 가까이 있다면 왁스의 '여정'을 불러드리고 싶군요.이 노래 아시죠?

한사람 2011-09-25 23:30   좋아요 0 | URL

잘 기억이 안나서 찾아서 들어보았어요..
가을과, 여자와 잘 어울리더군요.
안그래도 어제 오늘 거의 지나간 노래들과 시간을 보내네요 ㅋ

고마와요. 근데 왁스는 요즘 보기 힘들죠. 나가수 같은데 안나오나 ㅠ

노이에자이트 2011-09-25 23:45   좋아요 0 | URL
왁스 노래 괜찮은 게 많죠.10대 부터 40대까지 팬도 다양하고...'여정'은 제 애창곡이죠.

2011-09-25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5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