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해하는 계절


   환절(換節)의 계절입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적이 있었어요. 돌아보면 그땐 내가 봄이었고 내가 여름이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가 꽃보다 화려하고 내가 태양보다 뜨거운데 계절이 나보다 중요했을까요. 꽃이 떨어지는 게 슬플 리가 없는 시간이었죠. 그런 게 청춘인거 같아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다음 계절에 또 주인공이 될 줄로 믿고 있던 시간들. 계절을 의심하거나 계절에 배신당하지 않는 계절과 거리두기.

   여름이 길었습니다. 조금 지루하고 그래서 지쳤던 거 같아요. 초조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다보니 의식적으로 어느 여름보다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 이 사람은 이러니까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 저 사람은 저럴 수 밖에 없었을 거야. 글은 말이 아니고 생각의 전부도 아니고 사람의 본질도 아니야. 글도 여러 생각들 중에 선택한 하나의 감정이지. 선택하지 않은 다른 느낌마저 판단할 수는 없는 거야. 나만해도 쓰고 싶은 글에만 노력을 기울이지. 글은 나라는 사람 전체에서 거의 모두를 빼버리고 난 나머지일거야.

   예전엔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이해는 하지만 내심 기분은 나빴던 적이 많았어요. 이해는 머리로 하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이해라는 건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슴이 먼저이어야 이해도 완성되는 것이라구요. 사랑이 누구에게나 그 앞에 ‘죽도록’이라는 수식이 포함된 개념이라면 이해도 그 앞에 ‘가슴깊이’라는 조건이 전제된 것이다, 그런 생각. 이해는 했는데 기분은 나쁜 것은 아마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자신은 그 정도는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어이없게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한없이 너그러운 존재니까요.

   그런데 웃긴 건 이러한 ‘이해보편주의’가 다시 세밀한 감성을 방해한다는 것이죠. 모두 이해하는 건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 모든 걸, 모든 사람을 이해해버리고 나면 마음은 편하지만 더 이상 치열할 건 없습니다. 다시 처음처럼 거리를 두게 되요. 그건 그만큼 이해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인데 또 다시 이해하라고 할까봐. 내가 노력해야 이해하는 일이 벌어질까봐. 물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용서나 관용하는 태도가 습관이 될 수는 있어요. 내가 손해 좀 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파여진 곳에 나도 모르는 것이 쌓여있더라구요.

   저는 이런 이해위주의 일상이 한번씩 브레이크가 걸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환절기, 지금의 계절이 떠나가고 다음의 계절이 다가올 때 잠시 두려운 진동을 느낍니다. 빛과 바람, 온도와 습도가 몸에 신호를 주나봐요. 가을이 되면 갑자기 빛줄기의 무게가 더해집니다. 빛의 색깔도 깊어져요. 무거워진 태양빛이 강물에 떨어질때 비로소 유속의 흐름이 느껴져요. 물이 흘러가는 게 그만 눈에 포착되는 겁니다. 제 눈이 갑자기 셔터스피드가 느려진 것도 아니고 조리개가 커진 것도 아닌데 피사체의 흐름이 초단위로 감지되곤 합니다. 흘러가고 있었구나 ! ... 그때 저는 비로소 여름이 갔다는 걸 깨달아요. 제가 시인이었다면 그 순간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을 거라는 확신을 합니다. 

 

#2. 방황하는 계절


   그리곤 잠시, 아주 짧지만 방황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 여름의 세상은 이러했어. 사람들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가끔 생각해요. 계간지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상하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없다고 하면서 시사주간지를 집어 들고 문학을 잘 모른다 하면서 계간지를 구독해요. 생각해봐요. 몸이 허약하고 운동을 잘 못하는 친구들이 태권도를 배워서 다시 건강하고 근사해지는 것처럼 사람들은 모르니까, 더 알고 싶으니까 정치도 문학도 기웃거리는 게 아닐까. 무관심하다는 표현도 사실은 무척이나 관심있는 대답이죠. 이건 관심이 없다는 뜻의 무관심과는 전혀 반대의 무심한듯한 관심인듯해요. 알려고 한다고 해서 내가 많이 아는 건 아니라는 뜻의 무관심, 그러니까 이정도면 관심있는 거라 할 수 없다는 (겸손하고 예의바른)무관심인 것 같아요.



창비 계간지를 이년째 구독하고 있는데 지난 일년은 그냥 제목만 확인하고 거의 책꽂이에 꽂아 두었어요. 구독도 자의적인 건 아니었고 어찌 알았는지 전화가 와서 하게 되었어요.(창비 홈페이지 회원이었다나) 여기서 제가 거절을 하지 않고 수락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의미있는 선택이었다고 봐요. 매 계절마다 문학잡지를 받아보는 것에 동의하고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는 것. 그리고 일년이 지나 (연장 권유에) 다시 안볼 생각도 볼 생각도 없던 차에 무심한듯 수락을 또 했다는 것.

그리곤 처음으로 페이지를 꼼꼼히 넘겨보았습니다. 재미있더라구요. 이번 가을 호 특집이 바로 ‘이명박 이후’를 내다보며 였거든요.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어요.

총체적 완력이 이명박 정부보다 훨씬 약할 수밖에 없는 진보정부가 가져야 할 무기와 자세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대관소찰(大觀小察)’에서 나오는 심모원려(深謨源廬)의 지혜와 끈기,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의 견고한 연대일 것이다. 이 중심에는 국가경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잘 조직된 정치집단과 지식인 집단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갖추지 않은 집권경쟁은 정치적 도살장에 들어가기 위한 싸움에 불과할 것이다. ...(중략) 그런 점에서 2012년 경쟁에 뛰어들 사람들은 욕망과 포부이 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수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배를 만들기 전에 거칠고 광대한 바다를 먼저보면, 어떤 배를 만들고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야권연대 혹은 정치연합의 문제는 이 중차대한 민족사적 과제와 자신의 왜소한 힘을 인식할 때, 한마디로 백낙청의 말처럼 “원을 크게 세우면” 상당부분 부풀리게 되어있다. 2012년 대회전에서 성패의 관건은 시대와 국민을 아는 대관소찰, 자신을 아는 자아성찰(自我省察) 국민을 진정으로 섬기는 지공무사(至公無私) 분열과 유아독존을 뛰어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에 달려있다.

- 2013년 체제는 새로운 코리아 만들기, 김대호 / -115p

‘배를 만들기 전에 거칠고 광대한 바다를 먼저보자’는 결론은 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인식하자는 위치감각에 대한 질문이겠죠. 저는 ‘대관소찰’이라는 어려운 말이 맘에 들어요. 바로 계절이 바뀌고 내가 지금 얼마나 와 있는 건지 내가 위치한 지점은 전체 바다에서 어디쯤일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어디에 써먹어도 좋은 사자성어 아닐까요?



그런데 정말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지금 왜 이 책을 읽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숙제 비슷하게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책을 집어 들때 왜 하필 이 책을 놓지 못하지, 그런 생각이 갑자기 말이죠.  

창비 계간지를 덮고서 우연히 알게 된 <기획회의>라는 출판 전문지입니다. 출판계 트친(아주 친한 건 아니구요. 그냥 답글 하는 사이 ㅋ)이 출판업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아주 좋은 내용 많다고 해서 기웃거려봤는데 의외로 그쪽에선 품절사태로 잘 구할 수 없는 잡지이더군요. 이번 302호 특집이 ‘우리시대 어록‘ 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도 보니 트친계의 종교스타 조정민 목사와 혜민 스님, 高 율리안나 수녀님이 소개되었더라구요. 140자 안에서 위로와 깨달음을 주는 분들이라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1/2011090102745.html)

<기획회의>에서 특집으로 다룬 내용은 SNS시대의 촌철살인마들- 안철수, 김진숙, 박경철, 김여진, 이외수, 공병호, 김태원, 김애란, 김제동- 입니다. 이들의 어록을 분석하고 특징을 통해 역으로 우리가 얻어온 것들을 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제가 출판인은 아니지만 독자로서도 재미난 기획이었습니다. 트윗을 하다보면 누구나 진보, 좌파가 되지요. 트윗에선 진보성향의 논객들이 이성, 감성, 교감, 공감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까요. 저 역시 저들 중 두사람을 팔로잉 하고 있는데 이외수 작가님은 꼭 어디서 월급받는(?) 사람마냥 평범한 일상과 아무것도 못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어요.


진보 개혁논객들은 발이 척척맞는 축구를 한다. 조국 교수가 중원의 사령관 지네딘 지단처럼 이슈를 조율하면 진중권 교수는 웨인 루니처럼 매섭게 몰아붙인다. 박경철과 선대인이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탄탄한 수비를 해주면 혜성처럼 나타난 김여진이 메시처럼 매서운 단독 드리블로 몰고 간다.     -20p


   이들 중에서 특이했던건 트윗상이 아니라 소설에서도 어록을 남긴 작가가 되었다는 김애란에 대한 시각이었어요. 어록시대를 맞아 그녀의 소설 속 문장들이 어록에 익숙한 독자들의 기호와 맞아 떨어졌다는 평가였습니다. 유명인사들의 어록이 방송이나 트위터 상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김애란의 어록은 허구인 소설 속 상황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죠. 김애란의 소설 속 유머와 희망이 아날로그적인 문장을 타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뻗어나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미안해하지마.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야.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뻐” 같은 메인 카피형의 문장이나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같은 반전형 문장이 트위터에 가져오기 참 적절하다는 것이죠. 이건 소설의 서사와 작품성과는 별개의 문제인데 140자의 형식과 그 형식안에서의 감동의 습관이 김애란의 소설을 베스트셀러하는데 일조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분석이라 신선했고 출판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 일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추석은 친척의 계절이요, 자존심의 명절입니다.

   제 기억으로 추석은 설날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나, 얼마나 발전했나를 가족적으로 점검해 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건 시기적으로도 한 해의 하반기를 향하고 있고 취직의 계절이 지나고 여름 휴가, 보너스를 챙긴 뒤라 아무래도 서로의 실적들을 의식하게 되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며느리들끼리 음식 준비하고 차롓상 차릴 때 주로 나누는 대화를 보면 누가 잘되었고 누구는 망했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니까요. 이번 추석엔 ‘이명박 이후’와 ‘이시대의 어록’에 대해 떠들어 보면 어떨까요. 남자들이 결론없이 정치이야기를 할 것이 뻔하고 여자들은 집값과 물가이야기 할 게 뻔한 이번 추석에 지적인 며느리가 되어 보는 것도 쏘쿨한 계획일 듯해요.  

   뭐 대놓고 갑자기 고사성어를 들이대면 웃기니까 ...예를 들면, 올밴처럼요. 엊그제 무릎팍 도사에서 올밴이 유홍준 교수에게 지식을 교정해주는 큰 일(?)이 있었잖아요? ‘G2’가 아니고 ‘G20’ 이며 ‘실험실’이 아니라 ‘표본실’이라고 한건 웃기면서도 짜릿했어요. 우리가 그 많고 많던 중간, 학기말, 모의고사에서 얼마나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답안지에 써대었습니까. 이번엔 전부치면서 김애란의 소설에 대해 말해봅시다. 저도 트위터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 같은 엄마들이 트윗에서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떠드는 건 잘 보지 못했어요. 죄다 아프니까 청춘인 분들, 아니면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한 아저씨 들이던걸요. 드라마 이야기, 김선아 부러운 이야기가 나와도 슬쩍 한예슬 사태를 견주며 여배우의 고달픔을 위로합시다. 나가수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실은 마흔두살 아줌마를 타겟으로 했다는 김영희 PD가 대단하지 않냐고 한마디 던집시다. 취직은 했냐, 시집은 안가냐, 전세는 구했냐 개념없는 질문을 던지지 말고 반대로 그런 질문을 듣고는 마음 상해 삐딱한 포커 페이스 짓지 말고 보다 사회통찰적인 시누이, 사회위로적인 며느리, 공감능력적인 딸자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ㅋ.

   물론, 저는 추석에 조용히 환절의 계절을 감당해야 할 듯 합니다. 여행은 시월로 미루었고 산소는 여행후로 넘겼어요. 기꺼이 환절의 고통, 그 우울을 기다립니다. 저는 리뷰는 남성적으로 페이퍼는 여성적으로 써볼까 싶습니다. 결론은 이중적이라는 말씀이네요 ㅠ. 볼트가 이번엔 서두르지 말고 잘 뛰어서 멋진 경기를 펼치기 바랍니다. 또 주말인가요... 더위가 참 끈질기네요. 그 고집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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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9-02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저에게 특별한 날이었어요. 개강하는 날이라서 일찍 마친 덕분에 무릎팍 도사를 볼 수 있었어요. ^^;;
원래대로 수업을 한다면 무릎팍 도사가 방영되는 첫 부분을 볼 수가 없거든요/ 제가 학교에서 집으로
도착하는 시간이 거의 11시 20분인데다가 씻고 하는데 20분 정도 감안한다면 황금어장을 라디오 스타를
먼저 보는 꼴이 된답니다. ㅎㅎ 그리고 어제 대구는 낮 최고 기온이 35도래요.. 어제 오전부터 예선 경기를
치뤘던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


한사람 2011-09-03 00:12   좋아요 0 | URL

요즘은 예전 11시 5분에 시작했던 예능프로가 드라마 늘리기 편성으로 완전 끝나면 1시가 다 되어야 하더군요
저는 피곤해서 중간에 끄고 자는 경우가 많아요(확실이 나이 드니까 초저녁 잠이 많아져서요 ㅋㅋ)

개강이라...참 아득한 단어네요
내일은 드디어 볼트가 200m 경기를 하네요. 결승전을 보면 대부분 마지막 1m앞에서 역전을 하더라구요
끝까지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숙연한 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