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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여지껏 이분의 책이 이렇게 도발적인 시선을 유발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수채화라기 보다는 아크릴물감의 빨강색을 두른 책표지가 그야말로 '의미심장'했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번 벗겨본 줄리앙 슈나벨의 그림(붉은 상자, 1986)은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고 할 정도로 강렬하고 솔직했다. 자유롭게 뻗어 가는 나뭇가지들이 내게는 오래전부터 자라온 뿌리로 느껴졌으며 마침 같은 가지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상자들은 뜨겁게 봉인된 열매로, 붉은 바탕을 메우던 눈처럼 뿌려진 흰 꽃들은 주체할 수 없는 생명의 환희로 다가와 온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왔음에도 새삼스럽게 살아있음이 감사한...이것일까.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생명의 경이로움이란.
그래서였는지 그동안의 소설과 산문에서 버릇처럼 느껴온 감동의 색깔도 보다 더 진하고 원색적으로 느껴졌음이다. 책의 본문에 작가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느낀 글이 서술일뿐 서평이 아니라 언급하였는데 그건 내가 이 작품을 읽었다고 글을 쓴다 할때 해야 할 말이었다. 달리 이러쿵 저러쿵 말이 필요 없는 글들을 내가 감히 책의 내용에 대해 평評할 수가 있을런지 내 앞에 놓여진 붉은 심장에 가만히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박완서 작가는 내게 있어 현실과 세상에 대한 모든 핑계를 침묵하게 하는 분이었다. 부모님이 가신 이후론 더욱더 부모님과 동시대인으로서 늘 언제라도 마음 한구석 그리움의 시원처럼 유현하게 자리하던 분이었다. 매일을 부족함 없이 풍요로운 식단에 다양한 메뉴를 찾다가도 때가 되면 어머니가 차려주는 찌개와 김치로도 허기진 밥심을 채우고 또 한번 기지개를 펴듯 그렇게 내게는 문학의 고향이자 소설의 친정같은 분. 언제나 좋아하는 작가를 적어내라고 할 땐 '박완서', 한 치의 고민 없이 대답해왔다. 불혹이 된 내가 늘 못 가본 길을 떠올릴 땐 그 길의 대로변엔, 아니 길의 최초 시작지점 이정표엔 늘 그 이름 석자가 있었기에 그분에게도 못 가본 길이 있을까...마땅히 가야했고 죽어도 가보고 싶었던 길을 선택했다고 느껴지는 그분이었기에 많이도 궁금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이 꽃보다 붉은 책이 몇 년 전에 헤어진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설레고 초조한 기다림이었기에 그 재회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 나도 현역작가로서 꼭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기에 첫사랑에 대한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무색케 하는 뜨거운 청춘소설을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연재작으로 만나보는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터 였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지만 나는 그 재회의 기쁨만큼은 정성껏 서술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들을 예를 다해 기억해 내고 싶다. 그래서 이럴 땐 글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온다. 화려한 문장이나 절절한 단어로 잘 구성된 글이 꼭 그 감동의 정도도 극대치였다고는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치하지만 의학이나 과학에서 사용되는 혈액, 체온, 눈물, 맥박등과 같은 객관적 검사치를 통한 결과로서 감동의 정도가 평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환자로선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을 테니까. 이 작품은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비슷한 말과 근사한 수식을 아무리 찾아봐도 역시 사랑해 그것보다 더한 말이 필요 없는 고백처럼 나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낮의 더위가 염증이나 여름을 포기 하고 싶을 때 진한 몸보신의 엑기스라도 마신 기분, 나는 그 생명水에 대해 서술해보겠다.
작품은 크게 자연과 생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뭉근히 감지 할 수 있는 사유의 글과, 신문에 연재했던 '친절한 책읽기', 그리고 먼저 생을 달리한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전반에 저 깊은 밑바닥 어딘가에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각은 마치 고향의 땅속에서 무심코 버려진 씨앗이 한줌의 흙과 바람과 공기를 마시고 아주 천천히 싹을 틔우는 생명의 발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어렵게 틔운 싹이 계속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엔 기어코 흐드러진 꽃잎 위로 보석같은 열매가 오롯이 남겨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가슴에 맺히는 것이 恨 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가슴에도 맺히던 붉은 열매...누구나, 누구라도 각자의 가슴에 붉디 붉은 열매 하나쯤 자라날 토양은 있었나보다. 누가 심어 주었을까. 혹시 원래부터 자라날 씨앗이었건만 몰랐거나 모른 척 했던 것은 아닐까.
푸르게 토해내는 질긴 뿌리
많은 정신의학 연구에서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정원을 가꾸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생명에의 관심을 다시 쏟을 수 있고, 혹시 동반자가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에도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정원에는 일종의 불멸성이 내재해 있으므로 지금이 아닌 다음 계절, 그 이듬해 봄 까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남을 것에 대한 기대와 자신이 돌 본 것이 자라남에 대한 기쁨과 보람, 그로 인한 삶의 감사등으로 스러져 가는 노년에 품위있는 노화를 선사한다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상당 부분에 자신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소설의 배경처럼 흘려 놓고 있었다. 흙과 씨앗의 생명력, 계절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정원의 변화, 온갖 식물들의 행태등을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신문을 보는 하루의 일상적 일과처럼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리고 흙을 상대로 자유와 평화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 기원을 유년시절 고향의 앞마당과 추억이 깃든 살구나무로 찾아간다. 경기도 산골짜기 마을로 이사 간 이유를 어린 시절 고향과의 유사성에서 원형을 찾는다.
나는 흙을 밟으며 자라지도 않았고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에 살아보지도 못한 도시의 아파트 세대지만 한강변에 살아보았기에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한강의 풍광을 조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속을 노닐던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그 아름다운 비늘을 드러내 보여준 그 짧은 순간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는 작가의 표현에 무릎을 탁치며 고개를 끄덕여 버린 것도 내가 바라본 한강과 다르지 않았음이다. 자주 이용하던 양평길도 마치 인문학 강의를 마주 앉아 듣는 것처럼 역사에서부터 사상, 문학적 배경까지 공시적, 통시적 시각을 편하게 담아내는 문장의 드라이브는 실제 한강변 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이토록 깊은 사유와 통찰의 근원적 힘은 아마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작가의 질긴 생명력이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작가가 기뻐하고 환희하듯 그를 통해 독자 역시 같은 힘을 느낀다면 생명의 힘은 얼마나 막강한 것일까.
붉은 기억의 열매
다수의 작품에서도 직접,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전쟁이나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애끓는 고통에 대한 기억은 이제 상실감을 초월해 치유에 대한 자긍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극심한 고통의 시간들을 끊임없이 견뎌온 그 세월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남한산성> 이라는 작품을 기억할 때도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전쟁 속 피난당시 느꼈던 뼛속 추위와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이야기 하고,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말 할 때도 결국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서 같은 고통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하루키의 달리기를 보면서 그가 느꼈다는 '고통이 극에 달하면서 뭔가가 돌담을 뚫고 훌쩍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 즉,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것 같은 아주 조용한 경지를 맛보고 고통까지 사라진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완벽하게 공감하고 우리를 이해시키기 까지 한다.
척박한 땅에 질기게 뿌리내린 생명력은 무엇으로 열매 맺은 것일까. 그녀는 불타는 남대문이나 2002년 월드컵을 기억 할 때도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사회전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 하다가도 그 근원적이고도 성숙치 못한 우리의 자의식 밑바탕에 자신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곁들여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갈래머리 여학생일 때도, 4.19 현장을 바라보면서도 애국심이나 승리감, 우월감으로 피가 끓고 가슴이 울렁거린 적이 있었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동안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확인 하는 것이 이제 삶의 골인지점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오늘에서 이 비슷한 기억들을 어떻게 남겨 둘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하고 있었다.
죽음을 초월해 보이는 성찰이 심원한 고백으로 느껴져 새삼 작가의 지나온 시간에 경건하고도 무연한 경외감이 들었다. 작가의 가슴에 피어난 붉은 열매는 상처로 묻혀질 봉인된 기억이 아닌 생명과 사랑으로 치유된 삶의 희망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그를 뛰어 넘은 삶의 의지야 말로 작가가 맺어 놓은 열매이자 충만한 기쁨이 아니었을지.
그리움의 꽃잎
나는 2008년도에 신문에 연재한 '친절한 책읽기'를 자신하게 기억한다. 그중 두어 개 이야기는 당시 읽었던 순간의 느낌은 물론이고 마음에 드는 문구를 보고 블로그에 적어 옮기기 까지 한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한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문장을 재차 확인하고 벅찬 반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야말로 '강력한 정신한테 허약한 정신이 한바탕 휘둘리고 난' 독자로서 그렇다면 나는 분명 앞선 문장에서 '시'를 '박완서'로 바꾸어야 할듯하다. 시간이 지나도 가시에 찔린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이렇듯 잊었던 감성을 다시 일깨워 주다니 새삼 고마움에 전율했다.
글의 후반부에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과 박경리 작가, 박수근 화백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한껏 피었다가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면 작가의 회고에 누가 될런지 모르겠다. 하얀 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감사의 향기를 퍼트리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글이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마 박완서 작가도 후배 문인들에게 더 진한 향기로 사랑을 베풀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순간 작가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다로 느껴졌다고 한다면 얼마간 무례한 발언일까. 작가에게서 지금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껴졌고 그 기쁨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늘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우연히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정원을 거니는 느낌, 또 우연히 빈집을 봐주는 행운이 찾아온 느낌...그리곤 그녀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전해받고 온 느낌.
나는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하게 글 쓰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길 바란다. 빨갱이 콤플렉스에 짓눌려 피하기만 하던 붉은 색이 아닌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원초적 붉음에 삶의 희열을 느끼고 그 감정을 그대로 말해주길 바란다. 그녀의 길이 누구에게는 못가본 길, 아름다운 길이 되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의 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곤 나 역시 아직 가보지 못한 길, 꼭 한번은 가 보고 싶은 길에 고개를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계속해서 그녀가 행복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처럼 나는 소망한다, 그녀의 행복을, 그리고 내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