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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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회

그럴 때가 있다. 너무나 할 말이 많아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을 때. 몇 십년 간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이 서로를 애타게 찾다가 어느날 갑자기 해후라도 하게 된 그날이라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이별을 감내한 후 드디어 만남의 순간이 실현된 그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두어달 전 이 책을 덮고 난 심정이 꼭 그러했다면 나는 분명 너무나 할 말이 많은 쪽 이었을 터이고 그런 만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못내 고맙고 기특하다. 지난 봄 목울대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급한 대로 꿀꺽 삼켜버린 책을, 청춘의 열병이 아닌 불혹의 체증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던 그때 그 사람들을 가만히 그러잡았다. 다시 들쳐보고 확인하고 만져보고 결국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팍에 꼭 끌어 안는다. 상처도 그리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가버렸다 생각하지 않고 저만치 부러 두고 온 것으로 여기었던 내 청춘을 어루만지듯...그리움의 여운이 아직이다.

물 먹은 스펀지 처럼 축축했다. 처음엔 마음이 축축해 지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몸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책을 읽는 중간에 시작된 감기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고 다시 책을 집어 들기가 얼마나 두려웠던지 작가고 작품이고 주인공이고 그런 건 일단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그토록 시름앓이 하던 증상이 꼭 프랑스 감기와 닮았었다. 파리는 고작 영하 1도의 기온에도 습도가 높아 안개처럼 스며드는 한기에 많은 유학생들이 병을 얻고는 한다. 나 역시 파리로 오랜 출장을 갔었던 그 겨울에 한동안 현지감기로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냉기 속에서 밤새 가습기를 틀어 놓고 일어난 것처럼 미칠 것 같은 외로움도 함께 덤으로 폐부에 스며들게 되는 악명높은 '프랑스 감기'와 꼭 같은 느낌의 감기였던 것이다. 뒤늦게 육체적인 감기를 인정하고 원인을 찾았을 땐 그건 마흔살 올해의 감기가 아니라 이십대 청춘의 그때 감기였다는 자각에 나는 육체적 아픔도 회춘이 되는 것인지 의아했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청춘성장소설이었다고 나에게 있어서 지나간 청춘에 대한 연가나 헌사는 아니었던 터 이다. 청춘에 물러선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청춘이 그립기도 한 주관적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인증수단이었다. 유난히도 청춘이나 연애에 준하는 수식이 앞서는 작품들을 기꺼이 선호하지 않아 왔었고 혹시 접했다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냉정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건 그런대로 잘 견뎌왔다는 자긍이 아닌, 나는 상처 받은 적이 없다는 부인이나 외면도 한몫했음이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청춘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내면의 무의식에서 시작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인생에서 '청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객관적 세월들을 그만 황급히 묻어 봉인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썩어서 버리지 못하고 급속히 냉동시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처들로 오랜 세월 보존된 덕에 영영 부활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청춘과 영원히 이별 할 수 있었던 나에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오히려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거나 부러 확인하려 하지 않았던 상처들을 또렷이 기억하게 함으로써 비교적 담담한 채 중년을 맞이할 기회를 여간해선 도와주지 않았다. 아마도 미련하게 마흔을 지독한 열병으로 투병 중이던 나에게 이 작품은 분명 청춘을 똑바로 반추하라는 최후의 기회를 제공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십대의 외국타지에서 걸린 바이러스가 이렇게 재발될 리가 없었다.

이번 작품은 작가가 특정시대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고 친절히 설명해주었지만 이 작품을 읽었을 독자 누구라도 그러하듯 그 특정시대는 내가 청춘이었을 당시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나였다. 그것은 작가의 전작인『엄마를 부탁해』를 접했을 때에도 마치 내 어머니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느껴진 작가의 놀랄만한 공감 소통력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생활방식은 어느 누구의 청춘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끝까지 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음이다. 물론 내 청춘 속에서만 외로움과 그리움, 편지와 책, 눈맞춤과 입맞춤, 헤어짐과 상처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헤어진 모든 연인은 더 아름답고 죽어간 모든 시인은 더 위대한 것처럼 지나간 모든 청춘은 더 아픈 것일 테니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젊은이는 청춘이라는 시간적 공간안에서 모두 각자의 상처를 손에 들고 어깨에 짊어지고 등에 업고 부둥켜 안고 있다. 이들이 청춘을 밟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청춘을 지나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대적 배경은 물론이고 만약 영어, 중국어, 일어, 불어로 번역되어 살짝 지명만 바꾼다 해도 독자들은 자기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대문명의 기계를 배제했다는 미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잠시라도 인터넷에 접속 못하면 안절부절 하는 네트워크와의 분리불안증이 너나 할 거 없이 심각한 오늘에도, 로봇과 당당하게 결혼을 하는 시대가 올 것 같은 내일에도 불멸의 청춘으로 기억 될 가슴앓이는 청춘에 대한 이 세상 모든 이의 그리움의 질량만큼 계속하여 세상에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윤, 단, 명서, 미루...마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가 저마다의 특색인 어느 아름다운 종들의 이름처럼 이 네 명이 울리는 종소리는 깊고도 길었다. 네 명은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잃어가며 자신의 종을 울리고 자신만의 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아간다. 여기에 먼저 방법을 알아내었고 또 지금까지 알아가려 노력하는 윤교수라는 청춘의 스승이 이 들 네 명을 보이지 않게 연결해 주고 손 잡아 준다. 이들 젊은이 네 명과 젊은이 였었던 한명이 울려내는 종소리는 다행히도 우리들 각자 자신들만의 청춘에 훌륭한 배경음이 되어 유현하게 자리잡는다. 그들이 청춘을 알아가던 시간이 다시 내 청춘에 포개어지는 엄숙한 이 합체식은 우리들 뇌리에 오랫동안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들이 소통하고, 관계하며, 변화를 희망했던 방식을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먼저, 소설은 팔년 만에 임종을 앞둔 윤교수의 소식을 알리는 명서의 전화와 그를 받아든 윤의 감회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윤교수의 임종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소식을 알리려는 전화벨과 소식을 듣고 달려가게 된 사이에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우이다. 전화벨은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을 찾고 있는 소통의 신호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청춘을 향한 발신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들 네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누군가를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상처를 얻게 된다. 이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아마도 휴대폰, 컴퓨터가 아닌 전화선이 꼬불꼬불한 유선전화라는 기계를 도구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울리는 소리는 지금처럼 세상에 울리는 온갖 종류의 소리가 아닌 '나는 지금 단 한사람 너를 찾고 있다'는 보다 명징한 '따르릉'의 한 가지 벨소리였음이 분명하다. 수신자는 그 하나의 소리에 눈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유추할 수 밖에 없고 발신자는 내가 누군지 확인 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마음으로 의지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애절한 통신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화라는 기계를 이용하지 않는 나머지 대다수의 시간엔 언제나 마음과 일체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는 감성적 아날로그 행위를 보다 많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마음을 다해 걷고, 마음을 다해 쓰고, 마음을 다해 읽는 것으로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것이다. 이 안쓰럽고 다소 미련스러운 방식은 아이폰과 트위터의 속도와 범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을 담지 않아도 얼마든지 나를 알리고 상대를 알 수 있는 무례함과 가벼움을 허락치 않으며 소통이 막 이루어진 순간 이후에도 외롭거나 허무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진심과 진실성에는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걷고, 쓰고, 읽는 것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살아 있는 한 계속될 일이기 때문에 이들의 청춘은 영원할 수 있어 보였다.

엄마를 보내고 휴학했던 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와 자신과 약속한 다섯 가지 중 마지막 약속은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걷겠다는 것이었다. 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무작정 걸었기에 넓고 좁은 길이 너무 많아 자주 길을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처가 살아나려 할 땐 누군가가 그리울 땐 시장과 헌책방, 고궁, 공원과 학교 를 걸어왔고, 세상의 끝이라도 보게 될 것처럼 명서와 바닷길을 걸었고, 윤교수를 만나기 위해 험난한 눈길을 헤쳐 걸었다. 윤과 명서, 미루는 도시를 순례하듯 같이 걸어가며 길과 친해지고 사람을 알게 되고 공간에 익숙해지는 청춘의 탐색과정을 통과한다. 걸었기에 잃어버렸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걸으며 찾으려한 그들의 청춘은 자꾸 넘어져도 언젠가는 자기 발로 걸음을 떼고 마는 어린아이의 첫 발자욱을 그리게 한다. 이들의 '걷기'는 '숨쉬기' 였으며 이들의 '걸음'은 '생존'과도 같은 동일이음어 였지 않을까. 그들이 작품 속에서 걸어 다닐 때마다 어느 시절 숨을 내쉬며 걸어간 내 발자국이 같은 길 위로 희미하게 새겨지는 기쁨이 느껴지기도 해 가슴이 쉬지 않고 방망이질을 해댈 때가 많았다. 그들이 걸었던 길이 사르트르와 까뮈가 차를 마셨다는 카페골목처럼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거지향적인 욕심일까. 내가 걸어왔던 길도 대부분 사라져 버린 오늘이지만 누군가와, 아니혼자라도 걸었던 그 시간만큼은 영원하기를 바래본 순간이었다.

명서는 학교 앞 서점에서 구입한 갈색노트에 자신의 행적과 사유를 남기는 것으로 윤과 단이, 그리고 자신과 소통하고자 했다. 명서는 앞 못보는 동료를 위해 스스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개처럼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거울처럼 안고 사는 미루에게 길잡이가 되었듯, 작품에서도 '갈색노트'라는 이정표를 통해 우리에게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노트의 색깔이 마침 갈색인 것은 빛바랜 추억의 일기장을 들쳐보는 회상효과를 일으켰고 작품 속에서 마치 윤이의 질문과 고민에 대답과 원인을 밝혀주는 의미로서 '정답노트'나 '진실노트'의 의도된 장치로도 느껴졌다. 가죽의 겉표지를 선호하는 내 취향과도 꼭 같았지만 청춘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마음은 매번 조심스럽기도 해 한마디, 한문장도 놓치기 싫었음이다.  

거식증이 있었던 미루는 자신이 먹은 것을 하나의 의식처럼 노트에 기록하고 의문을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 경위를 적는다. 윤, 명서, 미루는 문장 이어쓰기 놀이를 하며 희망을 쌓고, 단이는 군대에서 윤에게 편지를 보내며 시간을 견뎌낸다. 윤교수는 시집을 쓰고 사직서를 내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건넨다. 이들 중 미루가 자신의 식사기록을 남기던 장면은 유독 내 기억의 한 자락을 자꾸 노크해 그만 문을 열어 버릴 수 밖에 없던 순간이기도 했다. 고혈압이었던 내 아버지는 매일아침 자신의 혈압을 체크하고 그것을 강박적으로 작성하는 기록맨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당신이 당신의 힘으로 거동이 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수시로 정리를 해놓고 자신의 뇌를 점검하는 행위가 기록의 습관이지만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무엇을 하고 기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록하려 무엇을 하게 되고 기록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미루나 내 아버지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기록함으로써 견뎌내려 한 것 같아 미루의 노트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이들은 각자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말테의 수기를 읽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시집을 읽어주고 노래를 들려주며 서로의 청춘을 어루만진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청춘이었을 때 기형도의 시집이나 전경린의 수필 한권쯤은 의례 가방에 넣고 다니며 마치 요절한 천재 작가들이 못다피운 청춘의 꿈을 그때 청춘이었던 자신들에게 바치는 헌사 쯤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친구가 있고 또 그것을 들어줄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처럼 이들에게 쓰고 읽고 노래 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나로 이어지는

윤, 단, 명서, 미루 이 들 네 명은 모두 각자 태어나기 이전의 내면의 쌍둥이같은 존재를 품었기에 서로에겐 반쪽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윤이는 단이를, 명서는 미루를 잃게 되면서 자신의 반쪽을 상실하게 된다. 단이는 어린시절부터 윤의 고향친구였고, 명서는 같이 한 공간에서 식구로도 지낸 미루의 이웃친구였다. 그런데 여기서 윤과 명서의 만남으로 파생된 윤과 미루의 관계에서도 같은 상처를 가지게 된 동등한 입장으로서 이차적인 반쪽관계가 형성된다. 즉, 윤과 미루는 서로 암으로 사망한 엄마와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언니를 대신하는 존재로서 서로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나는 사실 윤과 명서의 애틋한 러브라인 보다도 동성간이지만 윤과 미루가 마음을 나누는 과정들이 퍽이나 공감가고 시큰했기에 그런 만큼 미루의 죽음은 원래 반쪽이었던 명서의 슬픔보다 더 큰 윤의 슬픔으로 거칠게 다가왔음이다. 여학교만 15년을 다녀온 생의 이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돌이켜 보니 그 시절 매일을 붙어 다니며 걷고 쓰고 읽는 것으로 청춘을 나누던 친구들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 선명하게 자각되어 겉잡을 수 없이 슬픔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을 보내고 남겨진 두 명의 청춘 윤과 명서는 각자의 반쪽을 잃은 후 살을 도려내는 상실을 받아 들이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질듯 하면서도 완벽히 반쪽이 되지는 못한다. 각자 엄마와 언니를 잃었던 윤과 미루는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똑같이 친구를 잃은 상처를 공유하게 되었으면서도 왜 이들은 서로를 껴안을 수 없었을까. 이 부분에서 아마도 나처럼 나이든 많은 독자들이 지난날 첫사랑을 포함한 몇 번의 사랑에서 시행착오로 얻게 된 자신들의 상처텃밭에 비로소 그리움의 싹이 발아 되는 것을 감지했으리라 믿는다. 남녀간의 이성에서는 각자 너무나 큰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땐 결코 같이 손잡고 있는 것이 사랑을 지속하는 일이 못될 수도 있다는 훗날의 깨달음이 윤과 명서를 보면서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을 할 땐 내상처의 크기와 관계없이 상대의 사랑의 질량과 비교없이 누구라도 내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했다...다행히도 소설 종결부에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언젠가 함께 늙고 싶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반쪽으로 재생될수 있음을 예감케 하였다.

이들이 서로와 관계 맺고 연결되는 직접적 계기는 청춘의 상처라는 눈에 보이는 소설적 장치들이었지만 이들이 그 상처를 극복하는 존재들로서 뒷켠 한 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응원을 해준 것은 윤교수라는 우리 시대 청춘의 스승이었다. 윤교수는 보이지 않게 연결된 사람들을 이어주는 따스하고 희망어린 '손'을 상징한다.

윤교수는 크리스토프의 전설을 통해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었듯 사람들과 손잡는 법을 온몸으로 실천하도록 유도한 당사자이자 전달자였다. 윤의 아버지와 사촌언니는 윤이 외롭고 힘들 때 피같은 체온을 담아 손을 꼭 쥐어주었다. 윤은 그 손으로 불에 타고 있던 언니의 손을 놓지 않아 화상을 입게 된 미루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언니의 손을 놓기 힘들었던 미루에게 남겨진 화상은 외양적인 수치감은 물론 내면적인 죄책감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흉터였기에 윤의 배려는 미루에게 재생의 의지를 제공한 것이다. 미루는 자신의 노트에 윤교수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으로 삶의 구원을 갈망한다. 단이는 거미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서 엄마묘소를 향한 윤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순수한 마음을 건넨다. 명서는 시내 한복판 시위대 현장에서 길을 잃고 맨발이 된 윤의 손을 놓지 않으며 훗날 같은 상처를 이겨내야 할 그들의 의지를 암시한다. 윤교수는 운명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 제자들의 손바닥에 별이 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으로 사람들이 진실하게 소통하는 방식을 끝까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관계하는 방식은 결국 함께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손을 내밀어 기꺼이 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선사하며 마치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된 듯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손을 잡아 준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을 잡아주는 일일 것이다. 두 손을 잡는 것의 몇 배로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으리라 생각하니 어느새 내 가슴도 홧홧해져 그 뜨거움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꿈을 꾸고 희망하는

작가는 이들이 꿈을 꾸고 변화를 희망했던 각자의 공간을 세밀하게 창조하여 우리를 초대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 걷기도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머물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청춘의 추억을 생산한 보다 구체적인 그들의 공간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특유의 서정적 묘사로 상실한 가족이나 동시대인으로서의 공동체적 연대감에 절대적인 공감을 유도해 내는데 성공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그 어떤 공간도 이 세상에서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해내며 독자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마는 놀라운 치유능력을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한 공간에서 그들의 추억을 접하면서 청춘이었을 나의 꿈과 희망을 살며시 포개어 보는 마음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한 윤교수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정지해 있지 않고 계속하여 성장하던 청춘 속에서 그들이 꿈을 꾼 공간은 바로 희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사촌언니의 신혼집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던 윤은 자신만의 옥탑방에서 명서, 미루와 함께 체온을 나누고 불안과 고독을 겨루어 낸다. 아주 작은 빛줄기도 차단하며 마음의 문들 닫았던 윤이 자신의 방문을 직접 열고 친구들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혼자 눈물을 흘렸을까.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세상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내게도 있었다. 돌이켜 보니 혹시 청춘이 아니었다면, 나이 들어 내가 누군가를 더 위로해 주어야 할 어른의 입장이었다면 책임감이나 혹은 그동안에 맺어놓은 관계들의 무게때문 이라도 마지못해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청춘의 상처는 세상에 더 빛나 보이는 자신과 같은 청춘들로 인해 그 상처가 더 깊어진다. 그래서 였는지 윤이 마음을 열어 친구들을 맞이한 그날,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았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 윤과 명서, 미루 세 사람은 윤의 옥탑방에 모여 아욱국과 깻잎김치를 서로의 밥에 얹어주며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한다. 윤은 처음으로 그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알리고 미루는 깻잎을 떼어 밥숟가락에 얹어주며 위로의 마음도 건네준다. 깻잎은 바로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면서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라 고백한 적이 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에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반찬을 권하며 엄마의 죽음을 말하는 윤의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고 싶었고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향이 진한 깻잎을 담아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놓고 나는 책을 덮고는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소리 내어 울었다. 딱 한번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찌개와 장아찌들을 먹어 볼 수 있다면...한번만...그 순간, 사람은 떠난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떠나면서 그 사람이 만들어주던 음식을 못 먹게 되었음도 하늘이 무너지듯 슬플 수 있구나...절망은 이렇게 부끄러운 자신의 욕구에서도 시작될 수 있구나 싶어 스스로 많이도 놀라웠고 그 사실은 상실감 이상의 격한 서글픔이 되버렸던 것 같다. 그들이 밥을 먹는 모습은 그렇게 나를 울렸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라면 느껴보았을 따스한 인간애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세 사람이 함께한 밥상이었지만 그 밥상에는 윤의 부모님과 사촌언니, 단이와 함께한 추억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반찬으로 차려졌고 미루의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져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가슴 벅찬 청춘의 진수성찬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 반면 미루는 지상과 단절된 계단 끝에 위치한 지하방에 꼭꼭 숨어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을 계속하여 쌓아 두려고만 했다. 미루에게 있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명서가 심어준 백합꽃이 비추는 한줄기 빛이었기에 그 빛을 통해 흘러들어온 윤과는 목욕탕이라는 서로를 숨길 수 없는 공간에서 마저도 상처를 벌거벗고 마침내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된다. 미루는 죽은 언니, 명서와 함께 했던 빈집을 자신이 잊지 말아야할 상처의 원형이자 동시에 재생의 장소로 인식하였는데 이곳에서 우연히도 윤, 단, 명서, 미루가 단의 입대를 앞두고 며칠간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꿈과 같은 추억을 남기게 된다. 이 장면은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지만 각자 인생에서 청춘을 아름다움으로 회상할 때 잊을 수 없는 불멸의 풍경이 되어 오롯이 회상되고 있었기에 가장 아프면서도 가장 그립고 행복했던 청춘의 상징이자 꿈으로 다가왔다. 미루는 그 빈집이 팔리게 되자 현실을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하고 언니와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점점 어디서 태어났느냐 보다 어디에서 죽을 것인지가 더 궁금하고 그런 만큼 더할 수 없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미루의 삶은 불행한 청춘의 표상이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생을 마감하고 정리할 공간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죽음이야 말로 그녀에게 있어 또 다른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누군들 불꽃같이 치열했던 청춘, 그 시기에 꿈같던 기억하나 없겠는가. 누군들 청춘보다 아름다운, 그 곳에 죽음만이 희망으로 여겨졌던 순간 하나 없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장면 하나로 나머지 눈물이나 실수를 이기고 여기까지 살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과 미루에 비해 집이 마땅치 않았던 단과 명서는 각각 군대와 성당이라는 도피 장소에서 현실에의 절망을 이겨보려 했지만 그곳은 또 다른 상처를 생산해 내는 더 잔인하고 분명한 현실을 대표할 뿐이었다. 특히 단이에게 군대는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윤이에게 거절까지 당한 장소로서 그대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는 청춘이 사장된 공간으로 표현된다.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곧 생존을 할 수 없게 되는 가장 명백한 증거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네 명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희망과 절망을 겪어내는 공간 뒤에 작가는 소설의 처음과 끝에 윤교수의 매개공간을 창조해 이들을 한데 모이게 함으로써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여기서 윤교수가 실재하던 연구실은 윤과 명서, 미루가 최초로 조우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헤어짐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윤교수의 빽빽하던 책꽃이에서 출발하였고 윤이 타이핑 했으며 그들이 나누어 가진 '우.리.는. 숨.을. 쉰.다.'라는 교재는 실제로도 그들의 숨통 역할을 하는 이야기 이상의 힘을 발휘했으며, 미루가 죽은 후 남겨진 노트는 윤교수, 윤, 명서를 향한 시와 편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윤교수의 책꽃이에 오롯이 꽃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모두들 어디선가 울리는 전화벨을 듣고 달려와 모인 장소는 바로 윤교수의 임종을 앞둔 병원이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윤교수의 죽음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 할 수 있게 된다.

희망의 종소리

그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종소리는 하나의 울음이 되고 날아가는 새가 되고 흩날리는 눈송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시 오늘의 아침을 만들었다. 단이를 생각하면 봄날의 진달래와 개나리만으로도 신이 났었던 소꿉친구가 생각난다. 윤과 명서를 생각하면 스무살 풋내기 때 여름날의 축제가 떠오른다. 미루를 생각하면 가을날 코스모스와도 같았던 학교선배가, 윤교수를 생각하면 한겨울 눈이 쌓인 우리들만의 성탄절이 떠오른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아버지가 쓰러지는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가정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지나가는지도 몰랐던 청춘을 질기게 외면하는 것으로 대상이 없는 복수를 꿈꾸었고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아왔다. 청춘이 없었기에 실연도 상처도 없었다고 믿어왔고 그러한 믿음은 그 시절 종교이상으로 내가 청춘을 넘어오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자리했다. 외동딸이었던 내가 공주님을 버리고 졸지에 가장이 되고나서 정확히 15년 후 아버진 길고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셨다. 그 15년 동안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었고, 누군가와 이별했고, 누군가의 죽음을 겪었었지만 그런 일들은 항상 처녀가장의 어깨 뒤에 숨겨야 할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기에 냉소와 무관심으로 똘똘 무장한 채 스스로를 곧추세울 수밖에 없었다. 죽도록 죽을 만큼 바빴고 바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이문세의 노래 중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이야' 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나는 이제 누가 물어보면(물어보지도 않겠지만) 많이 아팠다고 그 시절은 참 많이도 힘들었다고 말할 것 같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야 할,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해, 죽도록 힘들었던 그 시절을 지나온 지금의 내가 너무나 근사하지 않냐고 되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시절 미처 씻겨 내리지 못한 내 청춘의 상채기들을 어떻게든지 해원(解寃)하여 더 이상 빚을 안고 두 번째의 스무살을 맞이해선 안 될 거라는 무의식적인 절박한 심정이 그토록 필사의 사투로 내몰았던 벼랑 끝 독서는 이제 어엿한 추억이 되었다. 이해하지 않고 넘어갔던 상처들, 보듬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잊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가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가 한번은 부활하여 기어이 돌아오고 말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은 청춘에 대한 예의 깊은 성찰과 위로는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자신만의 의식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을 거슬러 꽃다운 내 청춘을 만나게 해준 작가의 노력에 이제야 눈물 짓는다. 청춘이라는 이 진부하고도 흔한 소재로 이토록 한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금 재확립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찬 날들이었다. 그녀가 선사하는 문학적인 공감과 인간적인 위로는 가족이 해체되고 진실은 은폐되고 인간성은 상실되는 오늘날에 만연된 불안과 공포를 정교하게 감싸안는 신화적 기운으로까지 느껴진다.

나는 이제 서야 뜨거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를 살아내는 일은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청춘보다 더 치열할 자격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다시, 지나간 청춘을 어루만지듯 표지를 애무해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희망이라 했던가.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희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쩌면 나는 더 뜨거워지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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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3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이럼 안되는거잖아요~ㅠ.ㅠ
책보다 리뷰가 더,더,더...좋으면 신경숙 님한테 '쪼콤"미안해 지는 거잖아요~


2010-08-31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