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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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내가 그의 작품이라고는 <노인과 바다> 말고는 읽은 게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이미 이 책을 샀었다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 헤미웨이 책들에 대한 저작권이 풀리면서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책을 내던 시절에 아마 산 모양이었다. 그리고 물론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았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간단하다. 우리의 주인공은 제이콥 반즈, 파리에 사는 엑스팻(expatriates) 다른 말로는 고국이탈자란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된 평화시절이 지나고,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렸던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성불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쉥겐 조약으로 유럽의 국경이 거의 허물어지긴 했지만,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나고 흥청거리던 구대륙에 살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가장 빛나던 젊음의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낸 이들을 로스트 제네레이션이라 부른다고 했던가.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접어둔 채 오늘의 쾌락을 위해 파리에 줄지어선 카페와 레스토랑을 드나들며 과음을 일삼고, 파티와 환락의 시간들이 이어진다. 어쩌면 그네들의 그런 모습은 전쟁에서 상실한 것들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사랑놀음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디 브렛 애슐리가 있다. 아마 남주 제이크와 결혼했다가 갈라섰던가. 띄엄띄엄 읽다 보니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 유행했던 자유부인 못지않게 자유분방한 신여성으로 남자 없인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여인네 때문에 제이크를 비롯한 친구들이 골머리를 많이 썩는다. 다양한 군상의 엑스팻들이 등장하는 <태양은 다시 뜬다>의 공간적 배경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소설이 시작된 유럽의 문화수도 파리 그리고 산페르민 축제로 유명해진 에스파냐의 팜플로나가 그곳이다.

 

이십대 나이에 이 작품을 발표한 헤밍웨이는 일약 유명 스타 작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헤밍웨이 스타일로 유명한 빙산 이론(iceberg theory)도로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군더더기 없는 일체의 기교를 배제한 채,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압축된 문장으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펼치는 관계의 심연을 훑어 낸다고 해야 할까. 그런 여백의 미학 때문에 헤밍웨이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건 간에 상상 그 이상의 다양한 층위의 해석들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계의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낚시를 즐긴 헤밍웨이(책 뒤편에 실란 꼬마 헤밍웨이가 긴 낚싯대를 휘두르는 사진을 보라)는 제이크 일행이 팜플로나로 가서 본격적인 투우를 관람하기 전에 들른 에스파냐 부르게테에서 송어 낚시를 즐기는 광경은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었다. 낚시의 고수답게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조차 직접 잡아내는 디테일에 깜짝 놀랐다. 시원하게 흐르는 개울물에 준비해간 와인을 시원하게 담가 두는 치밀함이며, 낚아 올리는 송어를 잡아 손수 손질하는 장면도 정말 멋졌다. 팜플로나에서 광란의 휴식을 보낸 뒤, 산세바스티안 바닷가에서 노독을 풀며 독서하는 주인공의 망중한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역자는 <태양은 다시 뜬다>를 다른 서평가의 분석을 통해 순례기로 보기도 했는데 나는 이 책을 타향에서 원 없이 삶을 즐긴 고국이탈자(엑스팻)들의 여행기로 보고 싶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복잡하게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로 변명해 볼까.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역시 투우다. 예전부터 에스파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게 되면 꼭 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투우였다. 요즘은 잔인한 동물학대라는 이슈 때문에 예전 같이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이 소설이 발표된 1920년대만 하더라도 에스파냐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헤밍웨이는 실존했던 전설적인 투우사들의 실명을 들어가며 폭력적인 이벤트의 정수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고장의 행사였던 산페르민 축제가 지금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서 연인원 100만 명이 참가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태양은 다시 뜬다>는 수일간 계속되는 산페르민 축제기간 동안, 밤이고 낮이고 술을 질탕 퍼마시며 젊음을 소비한 고국이탈자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보고서다.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의 파편을 접수한 젊은이들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유한한 삶을 향락적으로 소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로 정한 것처럼 그렇게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주인공 제이크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아피시온(열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가히 만인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렛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주변에서 위성처럼 떠도는 남자의 모습이 ‘로스트 제네레이션’을 관통한다고나 할까. 이 남자, 저 남자와 숱한 염문을 뿌리던(심지어 열아홉 먹은 절정의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도!) 레이디 애슐리는 어쩌면 자신이 결국 돌아갈 곳은 제이크 곁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방황을 멈추지 않는다. 하긴 그 누가 겉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여로를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설에 나오는 멋진 문구처럼 ‘아무튼 그렇게 되고 말았다(That was it all right)’는데 어쩔 것인가.

 

좀 엉뚱하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헤밍웨이의 고전 <태양은 다시 뜬다>를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언젠가 가보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많아, 작가의 여정을 그대로 좇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구도의 길에 나선 순례자는 무엇 하나 풍족한 게 없지 않았던가. 지금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넉넉하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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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26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는 천재였던가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20대에 그것도! 자격지심이 느껴지네요 ㅎㅎ잘 읽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09-26 20:40   좋아요 1 | URL
다 그렇게 가는 거지요 -

여전히 헤밍웨이의 책들을 읽지
못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