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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평점 :
나의 독서는 언제나 그렇듯 충동적이다. 이기호 작가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모두 40편의 짧은 소설이 실린 소설집에는 2016년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코드들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읽을 수가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온라인 지면을 메우는 단신 뉴스들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먼저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을 다룬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치보이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학도 별 볼 일 없이 지내던 청년 셋이 여름을 맞아 멋진 비키니 입은 여대생들과 썸씽을 꿈꾸며 달랑 편도 교통편을 이용해서 바닷가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휴가지의 비싼 바가지 요금과 당장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 뿐이었다. 그들의 한바탕 모험기는 결국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날 주차장 알바를 하다가 살이 데이는 고통으로 끝을 맺는다. 무위도식하는 청년들에게도 남들 같이 느긋한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야 할까. 역시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계속 실패하던 청년이 참 쉽죠잉~을 남발하는 스타 쉐프의 초간단 또띠아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밀대 대용으로 사용하던 소주병을 깨먹으면서 곤히 잠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깨우는 불상사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무리 일 없이 지내는 백수라지만, 배고픔과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이라는 인간 기본의 생리 현상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누가 쉽다고 해서 누구나에게 적용이 되는 건 아니라는 간단한 진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활전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결정을 내린 남자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주물공장의 부도로 결국 졸음쉼터에서 만오천원 짜리 화덕과 번개탄으로 생을 마무리지으려던 남자의 결심은 느닷없이 등장한 트럭 운전사 아저씨의 방해를 받는다.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하질 않나, 간이 잘밴 고등어를 싸게 넘겨 주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하나의 희비극은 삼만원에 주겠다는 고등어를 살 돈이 없다는 거다. 마지막에 트럭 운전사 양반은 주인공이 삶을 마감지으려던 화덕으로 별도 좋은데 고등어나 구워 먹잔다. 그리고 남자의 흘러 내리는 눈물. 그런 거 보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승에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저승 가서 그만큼 받게 된다는 전형적인 인과응보식 이야기도 진부하지만 울림이 쎄다. 우리는 바쁘고 피곤하며, 시간이 없다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우리를 이렇게 키워 주신 부모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제삿날 돌아가셔야 자식들이 두 번 걸음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자식걱정 앞에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 자식들은 나이 드신 어머니의 그런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었던 재산 나부랭이를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 이런 대조야말로 구차한 오늘을 사는 우리네 초상에 대한 저격이 아니였던가. 층간 소음으로 위층에 사는 우락부락한 남정네를 찾아간 아래층 남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손주를 돌아가신 영감으로 착각하고 뒤쫓는 기괴한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주변의 이런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멋지게 탈바꿈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공무원 생활을 은퇴해서 농사를 시작한 아버지가 벌이는 에피소드도 만만치 않다. 평생 서류 작업만 해오신 양반이 농작물 경작법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책을 보고 유기농 토마토를 손주들에게 물리도록 공급하시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출발하셨지만, 농약으로 범벅이 된 토마토를 한 아름 안겨 주시는 상황은 정말. 그 이듬해에는 식용 옥수수 대신 사료용 옥수수를 보내시는 통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전화로 먹지 말라고 만류하기에 이른다. 한편 잘하던 숯불돼지갈비집을 때려치고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처참한 득표수를 기록한 친구를 말리는 당부 편지도 또한 일품이다. 결국 당선도 되지 못하고 숯불구이집도 망하고, 대신 통닭집을 운영하던 중에 때가 되어 다시 시의원에 도전하겠다는 친구에게 차라리 시의원 연봉이 탐나서 업종전환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외국인 백만시대에 바다 건너 저 멀리 아일랜드의 골웨이라는 곳에서 온 아일랜드 출신 원어민 선생님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술을 마셔대는 한국 풍습에 혀를 내두른다. 아일랜드 사람들도 술이라면 못지 않은데,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배달의 민족이 아니랄까봐 낮밤 없이 피자와 치킨이 배달되는 동방예의지국 코리아에서는 특히 연말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환송회와 송년회를 빌미삼아 말아 마시고, 꺾어 마신다. 결국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로지 씨는 속병이 나고, 골웨이의 한가한 펍에서 마시는 맥주가 그리워지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표지에도 등장한 <아파트먼트 셰르파>에 대한 풍자는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원동기 면허증 같은 건 필요 없고 튼튼한 체력을 요구하는 점주의 질문에 주인공은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25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킨집의 최대고객 행복아파트는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단다. 배달의 편리함은 좋지만, 치킨을 배달하는 청년에게 공동전기료가 부담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강제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게 그냥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한다면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현실과 문학적 허구를 넘나들면 종횡무진 글을 써제끼는 이기호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더라.
단편소설의 핵심은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들은 우리네 삶 속에 덕지덕지 묻은 그런 진실들을 캐내고 있다. 너무나 현실을 복제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 감동을 먹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가, 묘하게 비튼 풍자에 웃음을 빵빵 터트리기도 했다. 오락적 차원에서라면 정말 별평점 열 개를 줘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전히 미스터 버티고 서점 사장님의 특별한 띠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백점만점이다. 역시 띠지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단편소설집
이런 소설이면 정말로 잘 팔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