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2016년 한국 문학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드디어 읽었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 치솟는 판매고와 순댓국집에서 점심을 즐기는 할머니들까지 이야기하던 <채식주의자>를 그 열기가 한참 지나고서야 읽게 됐다. 다 읽은 소감은 역시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이 무려 9년 전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일련의 연작소설이라는 점 등이 흥미로웠다.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의 어떤 점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일개 독자로서 알 수는 없겠지만, <채식주의자>가 촉발시킨 것이 문화애국주의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또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 3편의 중편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모두 세 명의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가 어느날부터 꿈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을 고집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일상의 안온함과 지극히 평범함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내의 변신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 봐도, 영혜가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이 모호하기만 하다. 몇 번의 악몽을 꾸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지속해온 습관을 단숨에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쨌든 남편은 극단적 채식에서 장모의 생신과 처형의 집들이날 벌어진 일련의 폭력과 자해, 발광 그리고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냉혹하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남자는 두 번째 화자 영혜의 형부다.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그는 아내에게 들은 처제의 몽고반점(우습지만 나는 몽고반점 타이틀을 보고는 중국집 생각을 했다)이 주는 이미지의 저열한 유혹에 빠져 예술혼을 불사른다는 미명 아래 결국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야 만다. 모든 파국이 그렇듯, 우연히 동생의 자취방을 찾은 인혜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들은 모두 새처럼 비상해서 끝을 냈어야 했던가.

 

 

다시 인혜가 세 번째 화자로서 바통을 이어 받아 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과연 남편을 사랑했던가? 정신세계가 무너져 가족들도 내친 동생을 돌보고, 지우 때문에 그러지 못할 것 같은 남편과의 관계도 냉정하게 정리한다. 인혜는 축성산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가 병원을 탈출하기도 하고 육식은 물론 모든 식사를 거부한다는 소식에 동생을 찾아 나선다.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동생을 보며, 동생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가족 중에서 가장 멀쩡한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냉정하게 이어지는 일상에 대한 고찰은 정말 대단했다. 얼마 전 읽은 편혜영의 <홀>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고 건설현장에서 불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는 일상성의 주기적인 반복이 섬뜩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부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육식으로 상징되는 현실계의 폭력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저항으로 읽어야 하나?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술혼에 불타는 어느 중년남성의 일탈로 봐야 할까? 어떤 해석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고, 또 역설적으로 어느 해석도 적용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벌이는 행각들이 불가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찔한 유혹을 발산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도대체 영혜의 (채식주의자로) 변신을 촉발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녀가 꾼 꿈으로만은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변신을 결심하는 순간, 내친 모든 것들이 주는 상징성을 보라. 가장 먼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한 남편을 내버렸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울타리인 가족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집들이에서 아버지가 행한 폭력에 대한 저항은 극단적 자해로 나타났다. 훗날 인혜가 후회하는 것처럼 과거에 그런 요소들이 제거되었다면 지옥 같은 현실의 아수라판이 재현되지 않았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누적된 폭력의 잔해들이 영혜의 극단적 저항을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황망하게 유탄을 맞은 영혜의 남편이 가장 불쌍한 존재가 아닐까.

 

 

비디오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영혜의 형부는 또 어떠한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모든 책임은 처제의 몽고반점이 격발한 불타오르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그에게 있었다. 결국 그가 쫓은 색채와 이미지는 모두 허상이 아니었던가.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그를 대신해서 일상과 생계 그리고 자식을 책임진 아내 인혜에게 일말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면 이성이 행동을 금지했을 텐데. 그가 남보다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말자.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는 한강 특유의 불편함을 상징하는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스스로를 나무라고 생각하는 영혜에게 삶은 괘념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일절의 음식을 거부한 그녀를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절하게 설득하는 언니에게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더 이상 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결국 <채식주의자>를 읽었지만, 맨부커상 이전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이 책이 이 정도의 대중성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후 한강 작가가 쓸 책이 더 기대된다.

 

아, 이제 데보라 스미스가 새로 쓴 <Vegetarian>을 읽어봐야겠다. 마침 미리 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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