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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목욕탕과 술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지식여행 / 2016년 7월
평점 :
예전에 도쿄에 처음(그리고 지금까지는 마지막) 갔을 적에 지인과 에비스타운을 찾아 낮술을 즐긴 적이 있다. 주중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바쁜 시간에 마시는 낮술 한 잔의 여유는 정말 최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진짜 고수는 따로 있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만화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라는 양반은 정말 대단했다. 이번에 만난 <낮의 목욕탕과 술>(이하 낮탕술)에서 모두 열 곳의 특색 있는 목욕탕과 시원하게 목욕을 한 후에 마시는 생맥주, 사케 그리고 소주의 향연을 한 권 책에 담아냈다. 두께도 얇아서 읽는데 부담도 없다. 고지식한 위인이라 차례대로 읽었지만,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벌건 대낮에 노렌(포렴)을 걷고, 보무도 당당하게 목욕탕을 향해 진군해 가는 기세가 남다르다. 이 대중목욕탕은 아마 우리나라하고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이, 굳이 무언가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욕탕에 들어가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프리랜서 구스미 선생이 정말 부러웠다. 작가가 서식하는 도쿄는 물론이고 홋카이도를 필두로 해서 일본 방방곡곡을 누빈다. 아마 자신이 갔던 곳 중에서 특색 있거나 혹은 개인적 사연이 있는 목욕탕 열 곳을 선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은 모두가 홀딱 벗고 (점잖지 못한 표현이기는 하나 작가의 표현 그대로) 불알을 대놓고 다들 열심히 몸을 씻는데 열중하는 장면을 작가는 그대로 스케치해냈다.
욕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어떤 이들은 고릴라나 바다사자 도사 혹은 성성이 아님 오랑우탄에까지 비유할 정도다(뒤에 두 표현 내가 지어낸 표현이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홀딱 벗은 사람들이 바깥 세상에서는 무얼 하나 상상해 보는 것도 낮탕술 기행기의 또다른 재미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유쾌한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재밌지 아니한가.
내가 진짜로 감명 받은 부분은 만화작가인 자신의 직업을 딴따라, 비렁뱅이 혹은 타인들을 위한 바보라고 부르며 기꺼워 한다는 점이었다. 유쾌한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기비하적인 패러디 그리고 또 늙은이들만 찾는 목욕탕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젊은 기운이 넘쳤으면 한다는 발상도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가 찾은 목욕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아무래도 욕탕 위에 뚜껑을 닫고 공연을 한다는 벤텐탕이었다. 목욕탕 록과 놀이정신의 결합이야말로 굳이 요한 하위징아의 어려운 호모 루덴스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아이디어가 아니던가.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대중목욕탕에 대한 아쉬움도 절절한다. 구스미 선생은 목욕탕에는 페인트화가 제격이고, 신사 지붕 스타일의 정통 도쿄식 목욕탕이야말로 제격이라고 선언하지만 어디 세태가 그러하던가. 손이 많이 가는 페인트화를 타일화가 대체하고, 카운터에서 사람이 손님을 받는 대신 리뉴얼한 자동발권기가 대세인 모양이다. 아, 능구렁이 구스미 선생이 어느 목욕탕에서 만난 성인용 DVD에 대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그런 물건이 떡하니 탈의실 로커 위에 있는 걸까. 만약 그게 속을 알 수 없는 최신 마케팅 전략의 하나라면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자자, 목욕탕 이야기도 좋지만 진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렇게 목욕을 마친 구스미 선생은 치밀한 사전조사 혹은 추체험을 바탕으로 인근에 자리잡은 이자카야나 허름한 술집은 전전한다. 주말에 책을 다 읽고 어제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생각해 보니, 구스미 선생은 보통 이자카야들이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3시에서 5시 사이에 목욕을 느긋하게 즐기고 이제 막 영업에 들어간 첫손님으로 가게를 찾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대단하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인들과 함께 할 때도 있고 홀로 찾을 때가 더 많았지만, 시원한 맥주와 사케 그리고 소주를 연신 특색 있는 돼지볼살구이 같은 음식들로 독자의 흥취를 자극한다. 아니 당장에라도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유행하는 먹방의 귀재들을 능가하는 문학적 먹방 아니 술방의 다름 아니었다. 왜 빨리 주문한 술을 대령하지 않냐는 투정이 귀엽기만 하다. 시원한 잔에 담겨 나오는 크림색 거품이 살짝 묻혀진 맥주를 그리고 삿포로에서 삿포로 맥주를 마시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묻는 능청스러움에 그만 할 일을 잊어버린다. 원고료를 줄 수 없는 출판사 사장이 젊디젊은 작가를 데리고 목욕탕과 낮술 세계로 인도하는 장면도 압권이다. 어쩌면 그런 시간의 더께들이 쌓여서 낮탕술의 베이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구스미 선생의 발자취를 쫓아 일본에 건너가 기회가 된다면 그가 전술한 낮탕술 기행에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문제는 언어다. 일본어를 못하는 위인이 낯선 술집에 들어가 영어로 주문을 날린다고 상상해 보니 다만 웃음이 나올 뿐이다. 메뉴 주문할 때 아는 말이라고는 “코히 비루” 밖에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또 구스미 선생의 멋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하나는 일찌감치 시원한 술과 다양한 안주거리들을 만끽하고, 본격적으로 퇴근길 단골손님들이 들이닥칠 무렵에는 조용히 자리를 나선다는 점이다. 역시 고수답다.
기타모리 고 선생이 상상 속에서 창조한 가나리야바 같은 곳이 부근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회사 사무실을 뛰쳐나가 나만의 낮탕술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지 못하는 게 그저 원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