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잉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가 처서였다. 폭염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낮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최악의 더위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더위 핑계를 고만 대고,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네 개의 단편이 실린 비키 바움의 <크리스마스 잉어>를 읽었다.

 

비키 바움 작가의 책은 <그랜드 호텔> 이래 두 번째던가. <크리스마스 잉어>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테마를 잡아 출간 중인 흄세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됐다. 오스트리바 빈 출신의 유대계 작가 비키 바움이 지난 세기 어느 순간들의 시대상을 담은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배치된 단편들의 역순으로 <백화점의 야페>부터 시작해 보자. 올해 17살 먹은 제화 수습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청년 야페 플룬트가 주인공이다. 그의 삶의 배경은 초라하고, 변변한 기술마저 없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기술을 쌓고 있는 중이다. 가난한 청년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세상의 온갖 상품들이 넘쳐흐르는 백화점에서 멋진 넥타이를 보고는 그걸 목에 매면 왠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망상, 아니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문득 그전 이야기에 등장한 신경증에서 광증으로 전이되는 피아노 교사의 이미지가 바로 떠올랐다.

 

돈 없는 청년에게 6마르크 짜리 넥타이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까스로 마련한 1마르크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넥타이 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페의 선택은 어디로 흐르게 되는 걸까. 청년은 백화점에 잠입해서 모두가 잠든 사이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그의 소망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총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야페의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물질적 욕망에서 출발한 야페의 일탈은, 파괴 욕망으로 변질되고 결국 자신마저 날려 버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세 번째 이야기인 <굶주림>은 더 비극적이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집안의 규수였지만 지금은 쇠락해서 보잘 것 없는 연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주인공이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궁색함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죽은 약혼자가 남긴 스컹크 한 마리다. 아니 애완견도 아니고, 반려 동물이 스컹크라니. 이런 설정부터 혀를 차게 만든다.

 

돈 없는 이들이 아낄 수 있는 건, 음식이었다. 양배추 수프인가 만날 싸구려 음식만 먹던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결국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찰해 주던 의사는 그녀에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해준다. 잘 먹고 건강을 챙기라고. 아니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돈이 없다고. 그래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표현이 너무 역설적인가!) 피아노 교습을 가기 위해 타야 하는 전차비를 아끼느라 걸어 다니기 일쑤다. 도저히 건강을 챙길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지.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세들어 사는 집 아들이 홍역에 걸리면서 그녀에게도 운이 트기 시작한다. 빌리의 홍역 간호에 자원하면서, 미스 가브릴로프스키 하루에 다섯 끼나 얻어먹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빌리를 왕진하던 의사 에밀 쾨벨링을 자신의 연인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닥터 쾨벨링은 순전히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신경증에 호기심을 가졌을 뿐인데 말이다.

 

이번 이야기 역시 비극이라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오랫 동안 제자 빌리의 간호에만 치중하다가 기존의 피아노 교습을 받던 학생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닥터 쾨벨링 역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광증에 가까운 신경증이 폭발해 버렸다. , 그것 참.

 

<>은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은 친칸 부인의 지극히 평범한 삶에 대한 간단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작가는 빠듯한 예산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친칸 부인은 번듯한 옷장을 하나 장만하러 나섰다가 비를 맞고, 폐렴을 앓다가 수백만 영겁의 파도 속의 하나의 파도가 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친칸 부인이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는 장면에서 왜 나는 저승사자가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어느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롯하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과 만찬이라는 이번 흄세 시리즈의 키워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 <크리스마스 잉어>였다. 잉어 요리가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의 명절(크리스마스)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말리 고모의 등장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화가 사라지기 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한다. 명절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렇게 음식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 나도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한 시절을 보냈지만, 파편화된 핵가족 시대에는 그럴 일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곧 우리의 명절이 다가오는게 좀 아쉽다라는 느낌이다.

 

명절 만찬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말리 고모는 잉어 쟁탈전에서도 유감 없는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멋진 잉어를 공급해 주는 이가 나중에는 배척당하게 되는 유대계 상인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좋았던 시절은 1938년 안슐루스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웃의 이상한 독재자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크리스마스 잉어가 구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뒤바뀐 시절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잉어 없는 크리스마스 명절은 상상할 수가 없다. 말리 고모가 명절에 보여주는 일종의 책임감은 마치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녹두빈대떡을 만들기 위해 불린 녹두를 맷돌에 갈아 내리는 신성한 작업을 묵묵하게 수행하던 젊은 시절의 작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리 고모가 어렵게 구해온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에 오를 잉어 요리 후보를 욕조에 넣어 보살피게 되면서 라너 박사의 식구들은 잉어를 애착하기 시작한다. 요리를 하기 위해 잉어 아달베르트를 잡아달라는 말리 고모의 말에 전쟁터에서 적군과 사납게 싸우던 조카들이 차례로 꼬리를 내려 버린다. 누가 어느덧 가족 같이 되어 버린 아달베르트에게 먼저 포크를 내밀 것인가.

 

좀 더 고차원적 해석을 더해 보자면, 욕조에 갇힌 채 명절 식탁에 오르길 기다리던 잉어 아달베르트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선량한 민중들이 아니었을까. 게르만 민족을 패전의 수치와 무지막지한 실업, 살인적 인플레이션에서 구할 민족의 지도자로 착각하고 칭송했던 독재자는 레벤스라움을 위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들에게 파멸적 재난을 제공하지 않았던가. 순간의 판단착오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뭐랄까 어떤 유쾌함을 기대했건만, 저자 비키 바움은 왠지 독자들에게 쓴맛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모모 2024-08-24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눈길이 머물렀던 소설의 글을 읽고나니 더 관심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4-08-24 23:03   좋아요 2 | URL
흄세의 식욕과 만찬 키워드 픽업
이 멋진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4-08-25 10: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흄세 시리즈는 책 표지가 참 예뻐요. 근데 읽어본 책은 한 권도 없네요. 조르주 상드 책 표지가 너무 예뻐 사서 책장에 그림처럼 세워놨는데 볼때마다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4-08-25 23:38   좋아요 3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흄세 시리즈의 표지는 가히 판타스틱
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드의 책은 예술이네요.

전 개인적으로 <폴과 비르지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레이스 2024-08-27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뭔가 있을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네요.
흄세시리즈는 안사봤는데, 한권 사면 다 사서 꽂아놓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그런 책일듯요
하지만, 그래도 요 책은 사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8-28 09:19   좋아요 3 | URL
세문 시리즈가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클만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사서 읽어야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다 절판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다른 버전으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요.

얇은 소설집이라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책이 국내에 출간된 지 11년이 지났다. 책은 절판됐다. 결국 중고서점에서 구해서 읽었다. 왠지 이 책은 꼭 구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인생책으로 부를 만하지 않나 싶다.

 

요즘 무더위에 책읽기가 지지부진했지만, 매일같이 조금씩이라도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을 읽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되었다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나딤 아슬람은 무려 5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과연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래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아프간의 우샤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헛된 기다림>은 방점을 찍는다.

 

아프간 땅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불교가 있었다. 영국 출신 의사 마커스 콜드웰의 아내 카트리나가 만든 향수 공장에 있던 돌부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마커스는 아프간 출신 아내 카트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의 침공(아 그전에는 영국이 개입했었나) 그리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무자헤딘 전사들의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래,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해 버렸다. 이슬람과 평등주의는 양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던가. 탈레반이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상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소설 초반에 왼손을 잃은 마커스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한 독서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방의 이교도와 결혼한 의사이자 화가였던 카트리나는 투석형을 당해 죽는다.

 

지식과 남녀가 평등한 교육을 경멸하는 탈레반을 피해, 마커스들은 천장에 책을 못질해서 매달아둔다. <헛된 기다림>의 표지에 등장하는 못에 뚫린 책의 이미지는 기가 막힌 선택이었다. 책을 탄압하는 탈레반의 모습에서 타리크 알리의 소설 <석류나무 그늘 아래> 초반에 등장하는 가르나타를 정복한 기독교도들이 책을 불사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종교에서나 근본주의는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니었나.

 

마커스의 집에는 삶에서 상실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우선 아프간에 파병되어 실종된 동생 베네딕트를 찾아 나선 소련여자 라라(라리사 페트로브나)가 있다. 남편 스테판의 죽음 그리고 동생의 실종으로 무너지는 영혼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보석상으로 위장한 전직 CIA 요원 데이비드 타운은 역시 소련군에게 납치되어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커스 딸 자민의 과거를 추적하는 중이다. 이십대 초반의 카사는 이교도와 자신의 땅을 침략한 미군을 상대로 지하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용의가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이다. 두니아는 파괴와 살육의 땅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이들에게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의 왼손을 잃은 마커스는 자신의 집을 그들의 영적 힐링을 위한 공간으로 아낌없이 내어준다.

 

<헛된 기다림>을 읽기 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인터뷰에 대한 내용을 보고, 아프간 현대사에 대해 글들을 찾아봤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정치인들은 아프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저자 나딤 아슬람은 정보요원 데이비드 타운을 통해 미국인들의 그런 시각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형 조너던을 베트남에서 잃은 데이비드는 조국과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아프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벌어진 각종 비밀업무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런 이들의 행동이 과연 아프간 땅에 평화와 안녕을 가져 왔던가. 아마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시도들은 미국과 아프간 사이의 물리적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나 싶다. 투석형, 절단형 그리고 탈영하거나 낙오돼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을 부즈카시로 참혹하게 다룬 장면에서는 '야만'적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 나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딤 아슬람 작가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벌어졌던 그런 야만적 행위들을 통해, 여전히 아프간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을 직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방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간극은 영원이 메울 수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신만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카사의 스토리에 가장 관심이 갔다. 어려서부터 알라를 위한 성전 전사로 키워진 카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쟁 병기였다. 신을 위해 모든 인간적 욕망을 거세하고 철저하게 신의 전사로 성장한 카사가, 마커스의 '힐링 하우스'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과 3일을 보내면서 미세한 심경변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나딤 아슬람은 바로 이런 식으로 암울한 아프간의 미래에 한조각 희망을 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투신한 두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차이일 뿐.

 

<헛된 기다림>에는 문학작품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오래 세월에 걸친 가슴 아픈 로맨스가 등장하기도 하고, 고대에서 출발해서 현재에 이르는 아프간의 역사, 무지에서 비롯된 이슬람 종교에 대한 오해, 잃어버린 혈육 혹은 사랑을 찾기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무시하고 달려드는 맹목적 헌신과 엔딩에 배치된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의 해결 등... 400쪽 남짓한 책에 이런 다채로우면서 매혹적이고 또 슬픈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 나딤 아슬람의 역량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정말 "아름답게 쓰인" 책이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다.

 

지금까지 나딤 아슬람은 다섯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8년에 나온 <헛된 기다림>이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의 다른 작품들의 국내 출간을 기대하기란 과연 난망한 걸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4-08-22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인생책을 만나셨군요. 저도 중고책 구해봐야겠어요. 아프가니스탄 배경 소설은 호세드 할레이니 책만 읽어봤는데 기대되네요.

레삭매냐 2024-08-22 18:55   좋아요 2 | URL
[귓속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쿠팡에서 새책을 파는 것 같습니다만.

할레이니의 책과 수준이 다르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24-08-22 19:27   좋아요 2 | URL
바로 샀어요! 알라딘 중고도 있는데 2만원 채워야해서 담아두기만 했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용!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도 매불쇼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방송을 들었다. 뭐랄까, 요즘 자주 듣다 보니 유시민 작가와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방송 중에 보니 지난달에 사서 어제 다 읽은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 눈에 띄었다. 유 작가는 한 20만 권 정도 팔리면 좋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도 유시민 선생이 바라는 1/200,000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뿌듯했다.

 

민심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쏜 종이로 만든 탄환에 맞아 현 정부는 지난 총선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국회에서 내놓는 법안에 ""는 족족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전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라는 점을 시사했다. 답답한 마음에, 임기종료일을 검색해 보니 1006일이 남았다고 한다.

 

그가 구축한 성공 방정식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대선 승리의 기세를 몰아,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밴드왜건 효과는 대단했다. 하지만 정치 초보인 알파 메일은 연승이 가져다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승리의 원인이었던 연합 정치의 토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우선 눈엣가시 같았던 젊은 당대표를 몰아냈다. 그 다음에는 지지율 바닥을 달리던 당대표 후보를 당의 간판으로 만들었다. 총선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민심을 읽지 못하고,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후보를 사면해서 다시 후보로 내세웠고 참패했다. 당대표를 날려 버리고, 정치 초보인 자신의 심복을 비대위원장으로 삼아 총선을 치렀다.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지난번 총선에서도 180석 예상으로 노스트라다무스를 뺨치는 예언을 했던 유시민 작가는 이번에도 냉정하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서, 총선 결과를 예측했다. 선거 전까지 그야말로 드라마를 뺨치는 듯한 일들이 허다했지만, '정권심판 프레임'이라는 거대한 줄기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공천과 경선 과정에서 많은 잡음을 생산해냈지만(이 또한 보수언론의 과민반응이었다), 현역 물갈이에 성공하고 역대급 성적을 기록했다.

 

유시민 작가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기존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 언론 저널리즘의 현 주소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말이다. 최근 유시민 작가와 함께 MBC 대담에 등판한 한국일보 기자는 여전히 레거시 미디어의 순기능에 대해 설파했지만, 돌아선 시청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일들에 대해 취재하고 방송하지 않는가? 왜 소수의 저널리스트들이 뉴스 가치를 재단하고,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제약하는가에 대해 묻고 싶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거시 미디어의 권력은 급전직하 중이고, 상대적으로 너튜브의 실력을 갖춘 저널리스트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양받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내가 낸 세금으로 강아지 배변지나 동남아에서 물건을 쌀 때 사용하는 친환경 포장지로 재활용되는 신문사에 지원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질 판이다.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신문을 광고수주 때문에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찍어내고, 바로 트럭에 실려 폐지가 되는 과정을 보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유시민 작가는 정치인과 정치업자를 구분한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정치업자는 권력 쟁취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의 알파 메일은 단 한 번 선거로, 가장 큰 판에 걸린 판돈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가 최고권력자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리 지난 2년을 복기해 봐도 알 수가 없다. 말로는 노동시장, 연금 그리고 교육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모두 실기했고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모두 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들이고, 거대 야당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지만 정치로 이런 복잡한 개혁들을 풀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협조를 구하는 게 아니라, 제거해야할 정적으로 규정하고 사정기관을 총동원해서 사냥에 나섰다. 그전에 무혐의 받은 건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선에서 석패한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수사는 매서웠다. 작년 가을에는 구속의 위기까지 몰리지 않았던가. 유시민 작가는 자신은 정치인으로 이런 수모를 견딜 자신이 없어서 정치를 그만뒀다고 썼던가. 보통의 멘탈로서는 공개적으로 조리돌림당하고, 자신에 적대적인 언론에 의해 당하는 수모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이런 일들을 참고 있다고 저자는 쓴다.

 

이재명이 '죽을 뻔한' 사람이었다면, 그전에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국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이미 죽었던 법학자 조국은 정치인으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국회의원이 되어 돌아왔다.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경쟁하지 않고, 비례정당 승부수를 띄웠고 조국혁신당은 대성공을 거뒀다. 중도를 표방하는 민주당에 비해, 보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조국혁신당의 시원시원한 발언과 강령에 시민들은 24% 비례표로 화답했다. 조국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보여줄 정치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분투를 응원한다.

 

유시민 작가는 일찍이 고블린의 예를 들어, 알파 메일의 말로가 매우 비참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다. 그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상되는 비극의 재현을 막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임기단축이나 대연정 같은 방안들이다. 알파 메일이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아마 그 방안들을 받아 들였겠지만, 정치업자는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 같다. 저자는 닉슨 대통령의 경우를 들어 '놀리 프로시콰이 (Nolle prosequi:항구적 불기소 특별사면)'라는 생소한 개념을 소개한다. 참신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기대난망이다.

 

다시 현실이다. 아직도 1006일이 남았다. 주권자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한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초래한 후과가 너무 크고 아프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4-08-08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6일로 끝나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그대로 답습되어 연장되면 어떡하지요?
ㅠㅠ

레삭매냐 2024-08-08 15:40   좋아요 2 | URL
너무 급작스럽게 시스템이
무너져 버려서, 나중에 후
유증이 오래갈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초란공 2024-08-08 0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명대사가 맴도는 밤이네요.
“저놈의 목을 쳐라!”

레삭매냐 2024-08-08 15:42   좋아요 1 | URL
So be it.

고양이라디오 2024-08-21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리뷰를 보니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ㅎ 리뷰에 공감합니다. 아직도 1000일 가까이 남았다니 많이도 남았네요ㅠ

레삭매냐 2024-08-21 10:43   좋아요 2 | URL
천일동안...
오래 전에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
생각이 나네요.

참 긴 시간이지요.
 
커피 한 잔 할까요? 1 - 허영만의 커피만화
허영만.이호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달에는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난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 2024> 30부작을 보느라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아예 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침 뉴욕타임즈 금세기 베스트 100선이 나왔고 부지런히 랭킹되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을 사들였다. 베른트 하인리히와 조앤 디디온의 책들도 사서 읽고 모으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8월이 되었고, 어제 옆지기 도서관에 간다고해서 스피노자의 그래픽 노블과 오션 브엉의 책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나중에 빌려온 책들을 죽 살펴 보니 허영만 화백의 <커피 한 잔 할까요?> 시리즈 두 권이 있더라. 요즘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커피 만화를 빌려 오셨네. 나도 요즘 너튜브에서 카페 창업을 다루는 컨텐츠를 보고 있던 차라, 상당히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독서 슬럼프에는 역시나 만화/그래픽 노블이 최고다.

 

1974년에 만화가로 데뷔했다는 허영만 화백은 어느새 반세기 동안이나 만화를 그려오셨다. <식객>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주제는 커피. 예전에 회사를 그만둔 이들의 로망이 치킨집 사장이었다면 이제는 카페 사장이 꿈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커피 장사가 레드 오션이라는 점이다. 컴포즈나 메가커피 같은 프차들이 저가 커피 시장에 뛰어 들면서 아메리카노 1,500원 공식이 탄생했다.

 

이렇게 저렴한 커피라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의 경험에 따르면 저가 커피들이 저렴한 이유가 있더라. 우선 맛이 좀 없다. 그래서 돈을 좀 더 내더라도 나는 괜찮은 카페의 라떼를 마신다. 그리고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 커피 주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스피드다. 밥시간이 꼴랑 한 시간이니 때문에, <2대커피>처럼 드립커피를 내리거나 그런 커피전문점은 이용할 수가 없다. 서둘러서 커피를 마시고 또 산업현장에 뛰어 들어야 하니 말이다.

 

<커피 한 잔 할까요?>의 중심에는 30년 커피 베테랑 박석 사장이 운영하는 <2대커피>가 있다. 아니 자식도 없고 커피에 미쳐 결혼도 하지 않은 사장에게 2대가 있을 리가? 그건 아니고 이화여대 부근에 커피집을 내려다가 엎어지고 간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나 어쨌다나. 케세라세라 마인드를 가진 사장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젊은 바리스타 강고비가 박석 사장의 수제자(?)로 영입되면서 카페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2대커피>는 커피 전문점을 추구한다. 박석 사장은 30년 베테랑 답게, 절대 원칙에 어긋나는 그런 사술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2대커피>에 입사한 강고비에게도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자신의 원두를 모두 다 써도 좋으니,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를 내려 보라고 주문한다.

 

뭐랄까 박석 사장과 강고비의 관계는 중세 마스터-어프렌티스 같은 관계를 연상시킨다. 박석사장은 쉽게 에스프레소를 내릴 수 있는 레시피를 수제자에게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도제도 언젠가는 마스턱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에스프레소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라 동반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박석 사장은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거의 날밤을 세우다시피 하며 연구해서 내린 에스프레소에 60점이라는 박한 점수를 주는 박석 사장. 바로 이거다. 스스로 연구해서 자신만의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박석 사장은 얼핏 보면 고집불통의 꼰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 <2대커피>가 어쩌면 동네 사람들의 문화 진지가 되길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내린 커피가 맛없다고 불평하는 인간들에게는 과감하게 커피값을 받지 않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꼰대가 맞긴 하지만 또 완전 꼴통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커피만화를 보면서 허영만 화백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진심으로 취재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론 좋은 원두를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꼭 좋은 원두를 쓴다고 해서 좋은 커피가 나오는 건 아니라고 한다. 프차 커피에 질린 사람들은 이제 좀 더 전문적인 맛의 커피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가격도 문제가 아니다.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은 커피 한 잔은,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허영만 화백은 박석-강고비 듀오와 연관된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성을 통해 좋은 커피를 사람들에게 대접하려는 바리스타들의 고군분투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서사를 구축한다. 결국 커피도 사람이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를 소비하는 것도 바로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2대커피>에도 물론 진상 손님들이 등장한다. MZ세대를 상장하는 강보기 같은 선수들은 진상 손님들이 시전하는 몰상식에 도전장을 내밀고, 항의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박석 사장은 그네들의 사연을 들어 보고 그들을 내쫓는 대신 자신의 고객으로 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게, 어쩌면 박석 사장의 인생철학이 아닐까? 그가 보여주는 똘레랑스와 삶의 여유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 화백의 커피 만화를 보다 보니, 나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근데 오늘은 너무 덥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나도 따뜻한 스페셜티 커피를 한 잔 마시러 유명한 커피집 사냥에 나서야 하나.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24-08-21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ㅎ

레삭매냐 2024-08-21 10:47   좋아요 2 | URL
문득 이 시리즈를 드라마로
만드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8-22 19:24   좋아요 2 | URL
드라마도 괜찮을 거 같네요ㅎㅎ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나 흥분이 된다. 그것도 문학계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주인공은 바로 토니 모리슨이다. 저자의 전작읽기에 도전하고 있는 중인데, 이 책까지 해서 발표된 11권의 소설을 모두 모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파란 눈>은 나의 토니 모리슨 컬렉션의 화룡점정 격이랄까.

 

<타르 베이비>, <파라다이스> 그리고 <솔로몬의 노래>는 아직 읽지 못했다. 다른 책에 우선해서, <가장 파란 눈>부터 읽었다. 토니 모리슨을 좀 더 인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파란 눈>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어서 <빌러비드> 때와 같은 그런 기피와 공포를 느꼈노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서 작가가 인도하는 서사의 결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전작읽기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읽었다.

 

소설의 화자는 올해 9살 먹은 클로디아 맥티어다. 언니 프리다와 함께 살던 가운데, 그녀의 삶 속에 타인이 뛰어든다. 문제적 주인공의 이름은 페콜라 브리드러브다. 페콜라는 아빠가 집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피운 덕분에 맥티어 아줌마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아마 1941년 가을이었던가. 소설은 여름부터 시작해서 겨울과 봄을 지나 다음해 여름에 이야기의 종언을 맞는다.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소녀들은 비극을 통과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 로레인에 사는 가난한 흑인들의 삶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투사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노예해방령(1863)이 발표되었을 때, 울부짖던 흑인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소유인 집을 가지게 되자 그야말로 쓸고 닦아 빛나는 정원을 만들어냈다지. 그런데 그런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를 게 없어 보인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초라한 셋집에서 출발해서 양옥집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우리네 소설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지긋지긋한 가난과 계급의 문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가 보다.

 

순수한 소녀 페콜라는 푸른 눈을 가지고 싶어한다. 왜 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 대신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걸까. 어쩌면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가 후기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결국 자기혐오에 도달하게 되는 그 지점이 나에게는 비극의 정수처럼 다가왔다.

 

맥티어 가족네 세 들어 살던 헨리 워싱턴 아저씨를 클로디아와 프리다는 사랑했다. 하지만 초장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거라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맥티어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차이나와 마지노 라인을 끌어 들이고 결국 프리다를 추행하지 않았던가. 그런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과거에도 여전히 있어왔다고 페콜라의 아빠 촐리 브리드러브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아니 비극의 전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촐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에게 버림 받았다. 자신의 이모할머니 지미에게 구조된 촐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해 주셨던 할머니의 장례식날 백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성적 수치를 당한다. 맙소사! 그리고 비극은 대를 이어 전달된다.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에서도 등장한 것처럼 지미 할머니의 장례식에 즈음해서 공을 묘사한 흑인 여성들의 연대는 부러울 지경이다. 백인들은 흑인 남성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은 자신의 배우자들이나 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들은 묵묵하게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식사를 차리고 온갖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들을 존중해 주는 건 동료 여성들과 아이들뿐이었다고 토니 모리슨의 목소리는 증언한다.

 

페콜라의 엄마 폴린이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서서히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구축해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촐리와의 가정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자신의 가정을 대신해서, 백인 고용주의 가정에 자신을 투사하는 장면은 페콜라가 가장 파란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려서부터 백인들에게 봉사하고 복종의 미덕을 배우면서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인식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쪽의 흑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41년은 이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1929년 여름의 자연 재해는 곧이어 터질 대공황의 전주곡이 아니었을까. 미국의 1930년대는 백인이나 흑인 모두에게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폴린은 로레인에 정착한 뒤에도 선주민들의 은근한 차별로 고생한다. 같은 흑인이면서도 흑인과 깜둥이는 다르다고 차별하는 건 또 무엇인지.

 

성적 포식자로 활동하는 소프헤드 처치가 길에 뿌린 전단을 들고 그를 찾아가는 페콜라의 모습은 현대판 주술사를 찾아간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느껴졌다. 동화에 등장하는 주술사들은 항상 어처구니 없는 대가를 요구하지 아마. 페콜라가 소프헤드 처치에게 가장 파란 눈대신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요구했다면 어떨까.

 

그렇게 나는 토니 모리슨의 데뷔작 <가장 파란 눈>을 읽었고 이제 5권이 남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7-31 0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니 모리슨 전작읽기!
특히 이 책, 따라 읽고 싶네요.
빌러비드하고 한권더 읽었는데,,, 다른 책은 기억이 안나네요
비러비드가 워낙 임팩트 있어서!

레삭매냐 2024-07-31 10:06   좋아요 2 | URL
<빌러비드>의 강렬한 임팩트~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단 국내 미출간된 원서까지
컬렉션은 완성했지만, 어느
지점에서 전작 도전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자목련 2024-08-01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니 모리슨 아직인데, 표지에 혹합니다!

레삭매냐 2024-08-01 10:41   좋아요 1 | URL
이번 신판이 구판에 비해 확실히
표지가 월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절판된 책들 그리고 미출간
소설도 나왔으면 합니다.

coolcat329 2024-08-01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오랜만이에요. 토니 모리슨 전작읽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책만 사놓고 아직 한 권도 읽은 게 없지만 꼭 읽고 싶은 작가입니다. 첫 작품이 이 책도 읽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8-01 18:50   좋아요 2 | URL
오오 쿨캇트님도 토니 모리슨 선생
의 책들을 컬렉션하셨군요.

저도 책만 사 두고서도 미처 못읽
고 있답니다. 언젠가는 전작 읽기에
성공하겠습니다. 언제가는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