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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기다림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책이 국내에 출간된 지 11년이 지났다. 책은 절판됐다. 결국 중고서점에서 구해서 읽었다. 왠지 이 책은 꼭 구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인생책으로 부를 만하지 않나 싶다.
요즘 무더위에 책읽기가 지지부진했지만, 매일같이 조금씩이라도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을 읽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되었다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나딤 아슬람은 무려 5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과연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래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아프간의 우샤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헛된 기다림>은 방점을 찍는다.
아프간 땅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불교가 있었다. 영국 출신 의사 마커스 콜드웰의 아내 카트리나가 만든 향수 공장에 있던 돌부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마커스는 아프간 출신 아내 카트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의 침공(아 그전에는 영국이 개입했었나) 그리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무자헤딘 전사들의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래,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해 버렸다. 이슬람과 평등주의는 양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던가. 탈레반이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상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소설 초반에 왼손을 잃은 마커스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한 독서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방의 이교도와 결혼한 의사이자 화가였던 카트리나는 투석형을 당해 죽는다.
지식과 남녀가 평등한 교육을 경멸하는 탈레반을 피해, 마커스들은 천장에 책을 못질해서 매달아둔다. <헛된 기다림>의 표지에 등장하는 못에 뚫린 책의 이미지는 기가 막힌 선택이었다. 책을 탄압하는 탈레반의 모습에서 타리크 알리의 소설 <석류나무 그늘 아래> 초반에 등장하는 가르나타를 정복한 기독교도들이 책을 불사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종교에서나 근본주의는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니었나.
마커스의 집에는 삶에서 상실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우선 아프간에 파병되어 실종된 동생 베네딕트를 찾아 나선 소련여자 라라(라리사 페트로브나)가 있다. 남편 스테판의 죽음 그리고 동생의 실종으로 무너지는 영혼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보석상으로 위장한 전직 CIA 요원 데이비드 타운은 역시 소련군에게 납치되어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커스 딸 자민의 과거를 추적하는 중이다. 이십대 초반의 카사는 이교도와 자신의 땅을 침략한 미군을 상대로 지하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용의가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이다. 두니아는 파괴와 살육의 땅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이들에게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의 왼손을 잃은 마커스는 자신의 집을 그들의 영적 힐링을 위한 공간으로 아낌없이 내어준다.
<헛된 기다림>을 읽기 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인터뷰에 대한 내용을 보고, 아프간 현대사에 대해 글들을 찾아봤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정치인들은 아프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저자 나딤 아슬람은 정보요원 데이비드 타운을 통해 미국인들의 그런 시각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형 조너던을 베트남에서 잃은 데이비드는 조국과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아프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벌어진 각종 비밀업무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런 이들의 행동이 과연 아프간 땅에 평화와 안녕을 가져 왔던가. 아마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시도들은 미국과 아프간 사이의 물리적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나 싶다. 투석형, 절단형 그리고 탈영하거나 낙오돼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을 부즈카시로 참혹하게 다룬 장면에서는 '야만'적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 나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딤 아슬람 작가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벌어졌던 그런 야만적 행위들을 통해, 여전히 아프간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을 직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방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간극은 영원이 메울 수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신만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카사의 스토리에 가장 관심이 갔다. 어려서부터 알라를 위한 성전 전사로 키워진 카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쟁 병기였다. 신을 위해 모든 인간적 욕망을 거세하고 철저하게 신의 전사로 성장한 카사가, 마커스의 '힐링 하우스'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과 3일을 보내면서 미세한 심경변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나딤 아슬람은 바로 이런 식으로 암울한 아프간의 미래에 한조각 희망을 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투신한 두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차이일 뿐.
<헛된 기다림>에는 문학작품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오래 세월에 걸친 가슴 아픈 로맨스가 등장하기도 하고, 고대에서 출발해서 현재에 이르는 아프간의 역사, 무지에서 비롯된 이슬람 종교에 대한 오해, 잃어버린 혈육 혹은 사랑을 찾기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무시하고 달려드는 맹목적 헌신과 엔딩에 배치된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의 해결 등... 400쪽 남짓한 책에 이런 다채로우면서 매혹적이고 또 슬픈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 나딤 아슬람의 역량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정말 "아름답게 쓰인" 책이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다.
지금까지 나딤 아슬람은 다섯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8년에 나온 <헛된 기다림>이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의 다른 작품들의 국내 출간을 기대하기란 과연 난망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