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잉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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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처서였다. 폭염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낮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최악의 더위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더위 핑계를 고만 대고,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네 개의 단편이 실린 비키 바움의 <크리스마스 잉어>를 읽었다.

 

비키 바움 작가의 책은 <그랜드 호텔> 이래 두 번째던가. <크리스마스 잉어>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테마를 잡아 출간 중인 흄세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됐다. 오스트리바 빈 출신의 유대계 작가 비키 바움이 지난 세기 어느 순간들의 시대상을 담은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배치된 단편들의 역순으로 <백화점의 야페>부터 시작해 보자. 올해 17살 먹은 제화 수습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청년 야페 플룬트가 주인공이다. 그의 삶의 배경은 초라하고, 변변한 기술마저 없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기술을 쌓고 있는 중이다. 가난한 청년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세상의 온갖 상품들이 넘쳐흐르는 백화점에서 멋진 넥타이를 보고는 그걸 목에 매면 왠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망상, 아니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문득 그전 이야기에 등장한 신경증에서 광증으로 전이되는 피아노 교사의 이미지가 바로 떠올랐다.

 

돈 없는 청년에게 6마르크 짜리 넥타이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까스로 마련한 1마르크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넥타이 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페의 선택은 어디로 흐르게 되는 걸까. 청년은 백화점에 잠입해서 모두가 잠든 사이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그의 소망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총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야페의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물질적 욕망에서 출발한 야페의 일탈은, 파괴 욕망으로 변질되고 결국 자신마저 날려 버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세 번째 이야기인 <굶주림>은 더 비극적이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집안의 규수였지만 지금은 쇠락해서 보잘 것 없는 연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주인공이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궁색함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죽은 약혼자가 남긴 스컹크 한 마리다. 아니 애완견도 아니고, 반려 동물이 스컹크라니. 이런 설정부터 혀를 차게 만든다.

 

돈 없는 이들이 아낄 수 있는 건, 음식이었다. 양배추 수프인가 만날 싸구려 음식만 먹던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결국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찰해 주던 의사는 그녀에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해준다. 잘 먹고 건강을 챙기라고. 아니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돈이 없다고. 그래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표현이 너무 역설적인가!) 피아노 교습을 가기 위해 타야 하는 전차비를 아끼느라 걸어 다니기 일쑤다. 도저히 건강을 챙길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지.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세들어 사는 집 아들이 홍역에 걸리면서 그녀에게도 운이 트기 시작한다. 빌리의 홍역 간호에 자원하면서, 미스 가브릴로프스키 하루에 다섯 끼나 얻어먹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빌리를 왕진하던 의사 에밀 쾨벨링을 자신의 연인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닥터 쾨벨링은 순전히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신경증에 호기심을 가졌을 뿐인데 말이다.

 

이번 이야기 역시 비극이라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오랫 동안 제자 빌리의 간호에만 치중하다가 기존의 피아노 교습을 받던 학생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닥터 쾨벨링 역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광증에 가까운 신경증이 폭발해 버렸다. , 그것 참.

 

<>은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은 친칸 부인의 지극히 평범한 삶에 대한 간단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작가는 빠듯한 예산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친칸 부인은 번듯한 옷장을 하나 장만하러 나섰다가 비를 맞고, 폐렴을 앓다가 수백만 영겁의 파도 속의 하나의 파도가 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친칸 부인이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는 장면에서 왜 나는 저승사자가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어느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롯하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과 만찬이라는 이번 흄세 시리즈의 키워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 <크리스마스 잉어>였다. 잉어 요리가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의 명절(크리스마스)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말리 고모의 등장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화가 사라지기 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한다. 명절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렇게 음식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 나도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한 시절을 보냈지만, 파편화된 핵가족 시대에는 그럴 일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곧 우리의 명절이 다가오는게 좀 아쉽다라는 느낌이다.

 

명절 만찬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말리 고모는 잉어 쟁탈전에서도 유감 없는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멋진 잉어를 공급해 주는 이가 나중에는 배척당하게 되는 유대계 상인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좋았던 시절은 1938년 안슐루스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웃의 이상한 독재자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크리스마스 잉어가 구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뒤바뀐 시절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잉어 없는 크리스마스 명절은 상상할 수가 없다. 말리 고모가 명절에 보여주는 일종의 책임감은 마치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녹두빈대떡을 만들기 위해 불린 녹두를 맷돌에 갈아 내리는 신성한 작업을 묵묵하게 수행하던 젊은 시절의 작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리 고모가 어렵게 구해온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에 오를 잉어 요리 후보를 욕조에 넣어 보살피게 되면서 라너 박사의 식구들은 잉어를 애착하기 시작한다. 요리를 하기 위해 잉어 아달베르트를 잡아달라는 말리 고모의 말에 전쟁터에서 적군과 사납게 싸우던 조카들이 차례로 꼬리를 내려 버린다. 누가 어느덧 가족 같이 되어 버린 아달베르트에게 먼저 포크를 내밀 것인가.

 

좀 더 고차원적 해석을 더해 보자면, 욕조에 갇힌 채 명절 식탁에 오르길 기다리던 잉어 아달베르트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선량한 민중들이 아니었을까. 게르만 민족을 패전의 수치와 무지막지한 실업, 살인적 인플레이션에서 구할 민족의 지도자로 착각하고 칭송했던 독재자는 레벤스라움을 위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들에게 파멸적 재난을 제공하지 않았던가. 순간의 판단착오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뭐랄까 어떤 유쾌함을 기대했건만, 저자 비키 바움은 왠지 독자들에게 쓴맛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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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24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눈길이 머물렀던 소설의 글을 읽고나니 더 관심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4-08-24 23:03   좋아요 2 | URL
흄세의 식욕과 만찬 키워드 픽업
이 멋진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4-08-25 10: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흄세 시리즈는 책 표지가 참 예뻐요. 근데 읽어본 책은 한 권도 없네요. 조르주 상드 책 표지가 너무 예뻐 사서 책장에 그림처럼 세워놨는데 볼때마다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4-08-25 23:38   좋아요 3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흄세 시리즈의 표지는 가히 판타스틱
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드의 책은 예술이네요.

전 개인적으로 <폴과 비르지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레이스 2024-08-27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뭔가 있을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네요.
흄세시리즈는 안사봤는데, 한권 사면 다 사서 꽂아놓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그런 책일듯요
하지만, 그래도 요 책은 사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8-28 09:19   좋아요 3 | URL
세문 시리즈가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클만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사서 읽어야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다 절판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다른 버전으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요.

얇은 소설집이라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