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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파란 눈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어느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나 흥분이 된다. 그것도 문학계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주인공은 바로 토니 모리슨이다. 저자의 전작읽기에 도전하고 있는 중인데, 이 책까지 해서 발표된 11권의 소설을 모두 모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파란 눈>은 나의 토니 모리슨 컬렉션의 화룡점정 격이랄까.
<타르 베이비>, <파라다이스> 그리고 <솔로몬의 노래>는 아직 읽지 못했다. 다른 책에 우선해서, <가장 파란 눈>부터 읽었다. 토니 모리슨을 좀 더 인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책을 읽기 전에 <가장 파란 눈>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어서 <빌러비드> 때와 같은 그런 기피와 공포를 느꼈노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서 작가가 인도하는 서사의 결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전작읽기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읽었다.
소설의 화자는 올해 9살 먹은 클로디아 맥티어다. 언니 프리다와 함께 살던 가운데, 그녀의 삶 속에 타인이 뛰어든다. 문제적 주인공의 이름은 페콜라 브리드러브다. 페콜라는 아빠가 집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피운 덕분에 맥티어 아줌마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아마 1941년 가을이었던가. 소설은 여름부터 시작해서 겨울과 봄을 지나 다음해 여름에 이야기의 종언을 맞는다.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소녀들은 비극을 통과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 로레인에 사는 가난한 흑인들의 삶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투사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노예해방령(1863년)이 발표되었을 때, 울부짖던 흑인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소유인 집을 가지게 되자 그야말로 쓸고 닦아 빛나는 정원을 만들어냈다지. 그런데 그런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를 게 없어 보인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초라한 셋집에서 출발해서 양옥집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우리네 소설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지긋지긋한 가난과 계급의 문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가 보다.
순수한 소녀 페콜라는 ‘푸른 눈’을 가지고 싶어한다. 왜 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 대신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걸까. 어쩌면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가 후기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결국 자기혐오에 도달하게 되는 그 지점이 나에게는 비극의 정수처럼 다가왔다.
맥티어 가족네 세 들어 살던 헨리 워싱턴 아저씨를 클로디아와 프리다는 사랑했다. 하지만 초장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거라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맥티어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차이나와 마지노 라인을 끌어 들이고 결국 프리다를 추행하지 않았던가. 그런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과거에도 여전히 있어왔다고 페콜라의 아빠 촐리 브리드러브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아니 비극의 전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촐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에게 버림 받았다. 자신의 이모할머니 지미에게 구조된 촐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해 주셨던 할머니의 장례식날 백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성적 수치를 당한다. 맙소사! 그리고 비극은 대를 이어 전달된다.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에서도 등장한 것처럼 지미 할머니의 장례식에 즈음해서 공을 묘사한 흑인 여성들의 연대는 부러울 지경이다. 백인들은 흑인 남성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은 자신의 배우자들이나 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들은 묵묵하게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식사를 차리고 온갖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들을 존중해 주는 건 동료 여성들과 아이들뿐이었다고 토니 모리슨의 목소리는 증언한다.
페콜라의 엄마 폴린이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서서히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구축해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촐리와의 가정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자신의 가정을 대신해서, 백인 고용주의 가정에 자신을 투사하는 장면은 페콜라가 “가장 파란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려서부터 백인들에게 봉사하고 복종의 미덕을 배우면서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인식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쪽의 흑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41년은 이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1929년 여름의 자연 재해는 곧이어 터질 대공황의 전주곡이 아니었을까. 미국의 1930년대는 백인이나 흑인 모두에게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폴린은 로레인에 정착한 뒤에도 선주민들의 은근한 차별로 고생한다. 같은 흑인이면서도 흑인과 깜둥이는 다르다고 차별하는 건 또 무엇인지.
성적 포식자로 활동하는 소프헤드 처치가 길에 뿌린 전단을 들고 그를 찾아가는 페콜라의 모습은 현대판 주술사를 찾아간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느껴졌다. 동화에 등장하는 주술사들은 항상 어처구니 없는 대가를 요구하지 아마. 페콜라가 소프헤드 처치에게 “가장 파란 눈” 대신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요구했다면 어떨까.
그렇게 나는 토니 모리슨의 데뷔작 <가장 파란 눈>을 읽었고 이제 5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