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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할까요? 1 - 허영만의 커피만화
허영만.이호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4월
평점 :
지난달에는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난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 2024> 30부작을 보느라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아예 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침 뉴욕타임즈 금세기 베스트 100선이 나왔고 부지런히 랭킹되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을 사들였다. 베른트 하인리히와 조앤 디디온의 책들도 사서 읽고 모으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8월이 되었고, 어제 옆지기 도서관에 간다고해서 스피노자의 그래픽 노블과 오션 브엉의 책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나중에 빌려온 책들을 죽 살펴 보니 허영만 화백의 <커피 한 잔 할까요?> 시리즈 두 권이 있더라. 요즘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커피 만화를 빌려 오셨네. 나도 요즘 너튜브에서 카페 창업을 다루는 컨텐츠를 보고 있던 차라, 상당히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독서 슬럼프에는 역시나 만화/그래픽 노블이 최고다.
1974년에 만화가로 데뷔했다는 허영만 화백은 어느새 반세기 동안이나 만화를 그려오셨다. <식객>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주제는 ‘커피’다. 예전에 회사를 그만둔 이들의 로망이 치킨집 사장이었다면 이제는 카페 사장이 꿈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커피 장사가 레드 오션이라는 점이다. 컴포즈나 메가커피 같은 프차들이 저가 커피 시장에 뛰어 들면서 아메리카노 1,500원 공식이 탄생했다.
이렇게 저렴한 커피라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의 경험에 따르면 저가 커피들이 저렴한 이유가 있더라. 우선 맛이 좀 없다. 그래서 돈을 좀 더 내더라도 나는 괜찮은 카페의 라떼를 마신다. 그리고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 커피 주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스피드다. 밥시간이 꼴랑 한 시간이니 때문에, <2대커피>처럼 드립커피를 내리거나 그런 커피전문점은 이용할 수가 없다. 서둘러서 커피를 마시고 또 산업현장에 뛰어 들어야 하니 말이다.
<커피 한 잔 할까요?>의 중심에는 30년 커피 베테랑 박석 사장이 운영하는 <2대커피>가 있다. 아니 자식도 없고 커피에 미쳐 결혼도 하지 않은 사장에게 2대가 있을 리가? 그건 아니고 이화여대 부근에 커피집을 내려다가 엎어지고 간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나 어쨌다나. 케세라세라 마인드를 가진 사장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젊은 바리스타 강고비가 박석 사장의 수제자(?)로 영입되면서 카페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2대커피>는 커피 전문점을 추구한다. 박석 사장은 30년 베테랑 답게, 절대 원칙에 어긋나는 그런 사술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2대커피>에 입사한 강고비에게도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자신의 원두를 모두 다 써도 좋으니,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를 내려 보라고 주문한다.
뭐랄까 박석 사장과 강고비의 관계는 중세 마스터-어프렌티스 같은 관계를 연상시킨다. 박석사장은 쉽게 에스프레소를 내릴 수 있는 레시피를 수제자에게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도제도 언젠가는 마스턱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에스프레소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라 동반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박석 사장은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거의 날밤을 세우다시피 하며 연구해서 내린 에스프레소에 60점이라는 박한 점수를 주는 박석 사장. 바로 이거다. 스스로 연구해서 자신만의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박석 사장은 얼핏 보면 고집불통의 꼰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 <2대커피>가 어쩌면 동네 사람들의 문화 진지가 되길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내린 커피가 맛없다고 불평하는 인간들에게는 과감하게 커피값을 받지 않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꼰대가 맞긴 하지만 또 완전 꼴통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커피만화를 보면서 허영만 화백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진심으로 취재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론 좋은 원두를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꼭 좋은 원두를 쓴다고 해서 좋은 커피가 나오는 건 아니라고 한다. 프차 커피에 질린 사람들은 이제 좀 더 전문적인 맛의 커피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가격도 문제가 아니다.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은 커피 한 잔은,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허영만 화백은 박석-강고비 듀오와 연관된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성을 통해 좋은 커피를 사람들에게 대접하려는 바리스타들의 고군분투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서사를 구축한다. 결국 커피도 사람이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를 소비하는 것도 바로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2대커피>에도 물론 진상 손님들이 등장한다. MZ세대를 상장하는 강보기 같은 선수들은 진상 손님들이 시전하는 몰상식에 도전장을 내밀고, 항의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박석 사장은 그네들의 사연을 들어 보고 그들을 내쫓는 대신 자신의 고객으로 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게, 어쩌면 박석 사장의 인생철학이 아닐까? 그가 보여주는 똘레랑스와 삶의 여유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 화백의 커피 만화를 보다 보니, 나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근데 오늘은 너무 덥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나도 따뜻한 스페셜티 커피를 한 잔 마시러 유명한 커피집 사냥에 나서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