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1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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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내가 지난 3년에 걸쳐 읽었다고? 그건 아니지.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해서 질풍처럼 280쪽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 잠시 잊고, 아니 한참을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역전다방 <보불전쟁> 편을 보고 나서 바로 내달렸다. 역시 독서란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하나 보다. <패주>20권에 달하는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엔딩에 해당하는 19편이고, 프랑스 제2제정의 몰락을 가져온 보불전쟁과 1871년 파리 코뮌을 다루고 있다. 이제 첫 걸음이지만 왠지 에밀 졸라 읽기라는 숙제를 시작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소설 <패주>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보불전쟁(1870~1871)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프로이센이 추진한 독일 통일의 일보였던 보오전쟁(1866)부터 살펴봐야지 싶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독일주의에 대항해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표방했다. 게르만 민족의 큰형님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후발주자인 프로이센이 단 7주만의 전쟁으로, 특히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간단하게 제압해 버렸다.

 

다음 장애물은 서방의 대국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훗날 괴제라 불린 제2제정 나폴레옹 3세의 치세였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수많은 독일 영방국가 중에서도 바덴과 바이에른과 특히 친했던 프랑스는 사사건건 프로이센에 행동에 제약을 걸었고, 보오전쟁 중에도 중립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프로이센 육군 참모부의 몰트케는 특히 프랑스를 군사력으로 제압해야 독일 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보오전쟁의 승리로 게르만 민족의 패자로 등극한 프로이센의 군사적 위협이 점증하는 가운데,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대공이 유력한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지만 빌헬름 1세의 판단으로 고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개입하게 되면서,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비화되었다. 1870713,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문서로 스페인 왕위 계승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전쟁을 원하던 프로이센 군부를 자극하기 위해, 당시 총리였던 비스마르크가 해당 정보를 용의주도하게 수정해서 언론에 배포하면서,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 세계 각지에 정예 부대들을 파견해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떠밀리다시피 전쟁에 뛰어 들게 되었다. 알제리 식민지를 비롯해서 멕시코와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정예병들이 파병되어 있었다. 급박한 상황 가운데, 해외 파견군을 소환할 사이도 없이 나폴레옹 3세는 1870719일 프로이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여기까지가 에밀 졸라의 소설 <패주>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프로이센은 신속하게 338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서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약 25만 명을 동원해서 자국을 침공한 프로이센군 요격에 나섰다.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 주력 부대를 포위 섬멸하겠다는 명확한 전쟁 목표를 가지고 전쟁을 시작한 프로이센군과 달리 프랑스 군은 전쟁목표도 뚜렷하지 못한 오합지졸 군대였다.

 

이런 가운데 <패주>의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39세의 농부 출신 베테랑 군인 장 마카르 그리고 29세의 젊은 변호사 모리스 르바쇠르다. 에밀 졸라의 전작 <대지>의 주인공이었던 장 마카르는 사랑하는 아내 프랑수아즈와 땅을 잃고, 등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재입대했다.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던 모리스 르바쇠르는 비슷한 이유로 자진입대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 참전한 장의 전장에서의 경험을 풋내기 모리스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프로이센군이 메츠를 포위하고, 룩셈부르크를 지나 스당을 목표로 남진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고 파리에서 벨포르로 다시 랭스로 오가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정보전에서도 골리아트 같은 첩자들을 사전에 프랑스 영내에 파견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라인 계곡을 따라 군부대를 신속하게 기동시키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리드리히 카를이 이끄는 프로이센의 주력 부대는 서전에서 압도적 승리를 바탕으로 해서 스당으로 나폴레옹 3세의 부대를 몰아넣고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이번에 에밀 졸라의 <패주>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지만, 당시에 대한 이런 전반적 이해와 사전 준비 없이 덤벼 들었다가는 낭패를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장과 달리, 자유로운 영혼에 가까운 모리스는 배낭과 소총마저 방기하려다가 장과 충돌을 빚는다. 하지만, 전장에서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패주"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깨닫게 된다.

 

열혈 민족주의자 에밀 졸라는 프랑스 시민의 입장에서 프로이센군의 야만적 행위를 그대로 고발한다. 전쟁기계 같은 프로이센 부대는 무자비하게 적인 프랑스군을 소탕한다. 프랑스군 역시 만만찮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프로이센군의 그것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전쟁통에 장삿속을 채우던 푸샤르 영감의 용맹한 아들 오노레는 포병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에 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대포는 프로이센군의 대포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껏 쏘아 올린 포탄들은 공중에서 폭발하거나, 적 진지에는 도달하지도 못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정확한 포격에 프랑스군의 산산조각이 났다.

 

모리스의 쌍둥이 누나 앙리에트의 남편 바이스는 바제유에서 로랑과 더불어 자신의 집을 사수하다가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당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앙리에트는 야전병원에서 군의관 브로슈를 도우며 상실의 슬픔을 달랜다. 야전병원에서 팔다리를 잃은 숱한 병사들에 대한 에밀 졸라식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묘사는 정말 끔찍했다. 군의관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들것에 실려 야전병원에 오는 병사들의 수에 비해 의사는 물론이고 클로로포름을 비롯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붕대와 약품들이 부족했다. 이미 패주하기 시작한 부대에게 원활한 보급물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랑스군 역적의 용사 마크마옹 원수마저 전투 초기에 둔부 부상으로 전장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프랑스군의 패주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어 버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스당으로 패퇴한 나폴레옹 3세에게 항복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화재가 삼켜 버린 바제유와 일리고원에서의 일방적 학살 그리고 91일부터 시작된 프로이센군의 시계처럼 정확한 포격에 나폴레옹 3세는 휴전을 구걸한다.

 

이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내건 조건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프랑스군의 무조건적인 무장해제와 포위된 모든 병력들을 포로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산발적인 프랑스군의 선전도 없진 않았지만, 이미 전쟁의 대세는 프로이센에게 기울어져 버렸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항복하고, 그 순간 프랑스 제2제정은 무너져 버렸다.

 

장과 모리스는 이주반도에 설치된, 이른바 미제르 수용소에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군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식량과 인력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총살형에 처하겠다는 엄벌주의도 공포했다. 패주하는 가운데, 장을 구했던 모리스는 미제르 수용소에서 탈주를 시도하는 가운데 정강이 뼈에 총상을 입1은 장을 오직 우정의 힘으로 구해 탈출에 성공한다. 그 가운데, 106연대 소속 보두앵 중대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장렬한 죽음과 배신 그리고 살인에 이르는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을 에밀 졸라는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모리스는 다리를 다쳐 같이 탈출할 수 없게 된 장을 누나 앙리에트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시 파리로 향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파리 코뮌>으로 향하게 된다. 스당 함락 이후, 곳곳에서 프랑스 대중들의 저항이 이어지는 가운데 프로이센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던 메츠 요새를 점령하고, 오를레앙마저 제압하고 나서 드디어 파리를 포위했다.

 

극렬 공화주의자들은 파리를 적의 손에 내주는 대신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했다. 이미 부유한 부르주아들이 파리를 탈출한 뒤, 남은 이들은 결사항전의 의미를 불태웠다. 프로이센군의 물샐틈없는 포위로 먹을 게 떨어진 파리 시민들은 그야말로 쥐까지 잡아먹으면서 최후의 저항에 나섰다. 한편, 3공화정의 임시행정관 아돌프 티에르는 50억 프랑에 달하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알자스 할양이라는 치욕적인 강화 조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리에 머물고 있던 다수의 국민방위군들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파리에 잠입한 모리스는 국민방위군 소속으로 파리코뮌의 대의에 동조했다. 그리고 적의 수중에 파리를 내주기보다 차라리 모두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와의 전투에서는 그렇게 무능했던 베르사유군은 내전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장은 베르사유군 소속으로 파리에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비극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소설 <패주>는 보나파르티즘에 젖어 있던 한 세대의 종언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나폴레옹 3세 시절, 프랑스 제국은 산업화와 더불어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지만 내부적으로 곪아가던 제문제들이 보불전쟁이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 일순간에 폭발해 버렸다. 괴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능력도, 삼촌처럼 전장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지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파리 코뮌>이라는 방식의 더 큰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극단적인 폭력 대립을 유발했다.

 

그나마 에밀 졸라는 다시 프랑스 국가와 사회를 재건하는 적임자로 모리스 르바르쇠 같은 지식인 계급보다 장 마카르 같이 우직한 농부를 꼽았다. 에밀 졸라는 참담한 패전을 미화시키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한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재건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다. 에밀 졸라가 <패주>를 발표한 1792년에는 여전히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이라는 프랑스 근대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 생존해 있었다. 다수의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통해 에밀 졸라는 "시대의 종언"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역설적이게도 유혈이 가득했던 보불전쟁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전쟁이 사라져 버렸다. 1914년 새로운 전쟁이 유럽 대륙을 휩쓸기 전까지 세력 균형과 기술의 진보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도래했다. 평화와 번영을 위해 파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까. 에밀 졸라의 <패주>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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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0-01 1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계기가 있어야 하는것!
에밀졸라 읽다가 멈췄는데,,, 다시 읽어야할 계기? 레삭메냐님 리뷰가 .?

레삭매냐 2024-10-01 22:25   좋아요 2 | URL
제 부족한 리뷰가 그레이스님
의 독서에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에밀 졸라 고고씽~입니다.

초란공 2024-10-01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제르미날 읽고 있었어요~!!! 정리해보려면 오래 걸릴 듯 합니다 ㅜㅜ

레삭매냐 2024-10-01 22:26   좋아요 1 | URL
저도 정말 오래 전에 <제르미날>
쟁여 두었는데...

루공 마카르 총서, 분발하겠습니다.

닷슈 2024-10-01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네요

레삭매냐 2024-10-01 22:26   좋아요 2 | URL
역전다방 <보불전쟁> 편을 보고
읽으니, 더 재밌었습니다.

페넬로페 2024-10-01 16: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와 쿠포의 외동딸인 나나가 불행하게 죽는, 소설 <나나>의 마지막 부분이 1870년 보불전쟁이 시작되는 거더라고요.
패주가 그렇게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배경설명해주셔서 읽기 전 도움 많이 되었어요^^

레삭매냐 2024-10-01 22:30   좋아요 2 | URL
아 그랬군요. 에밀 졸라 샘의 책들은
잔뜩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고 뻐팅
기다가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가장 두껍다는 <패주>로 졸라 샘
스타트를 끊었네요.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울프강 2024-10-08 0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레삭매냐님이 쓰신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오타 하나가 유독 눈에 띄는군요.
중간에 ˝프랑스군 역적의 용사 마크마옹 원수마저 전투 초기에 둔부 부상으로...˝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역전의 용사를 잘못 쓰신거죠?
역전과 역적은 문맥상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리거든요. (^_^)
 
미스 론리하트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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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부터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를 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 필적할 만한 미국 산문계의 대가라는 평이 있더라. 3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다. 아울러 절판되기까지. 어제 저녁, 산책을 빌미로 사냥에 나섰다.

 

중고서점에 가서 <미스 론리하트>와 라오서의 <이혼> 그리고 클로드 모르강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세 권을 샀다. 그리고 바로 <미스 론리하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발표된 해는 1933년 그러니까 1919년부터 시행되던 금주법이 폐지된 해다. 그런데 책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에 가서 술을 한 잔 걸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점이 좀 궁금했다. 이미 그 당시에 금주법은 유명무실한 그런 법이었었나 하고.

 

미스 론리하트는 신문사에서 신문구독자들의 고민들을 상담해주는 칼럼니스트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는 그런 삶과는 많이 다르지만. 참고로 미스라는 말이 빚어내는 오해와 달리 그는 남자다. 그리고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베티라는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또 딱히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하여튼 간에 미스 론리하트란 인간은 정의하기 힘든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발표되던 1933년은 미국에서 대공황이 한참이던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들의 삶에는 고통과 가난 그리고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문사에서는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이 돈벌이가 될 거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통해, 나는 이 정도라면 행복하지 뭐 그런 심산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자기만족적 글쓰기랄까.

 

베티는 그런 미스 론리하트의 칼럼 쓰기가 못마땅해 그만 두라고 종용하지만, 이미 자신의 일에 중독된 미스 론리하트는 사실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도 애인을 설득하기 위해 광고대행 일을 찾아 보겠다고 공언한다.

 

침례교 목사님의 자녀답게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지만, 또 현실에서는 그만큼 타락한 인간이 없다. 술집에 가서 한 잔 걸치다가, 싸움이 붙어서 이가 다 흔들릴 정도로 얻어 터지고 또 의자에 맞는 봉변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도일 여사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잘 나가는 것 같았던 미스 론리하트 삶의 작은 균열이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하나의 결정적 탄환이 되었다.

 

사실 난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날>이 더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을 언제라도 살 수 있는 책이고 <미스 론리하트>는 도서관에도 없는 책이라 빌려서 읽을 수가 없기에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사다가 단박에 읽어 버렸다.

 

미스 론리하트가 구축한 질서는 완벽해 보인다. 애인 베티와의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긴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신문사에서 구독자들이 보내는 편지에 대한 고민 해결사이자 그리스도의 사제로서의 임무도 나쁘지 않다. 다만 삶이 태생적으로 지닌 가역적 유동성은 미스 론리하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벽해 보이는 질서 역시 결국 무질서로 향하게 된다는 단순하지만 불변의 메시지를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의 분량은 짧았고, 파국적 엔딩으로 치닫는 진행 속도를 따라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미스 론리하트>가 나에게 <싱글맨> 같은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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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30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 책 모두 탐납니다.
더군다나 절판이라니 더욱!
데려다놓고 읽지도 못하고 홀대할까봐 머뭇거려지네요
하지만 저도 사냥할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ㅎ으

레삭매냐 2024-09-30 14:00   좋아요 2 | URL
아웅, 저한테 하시는 소리인 줄
알았네요. 이런 저런 책들 만날
데리고 와서 홀대!

그래도 어제 산 책 중에 하나는
완독했으니 다행입니다.

책사냥, 성공 기원합니다.
 
피아노 튜너
대니얼 메이슨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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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것은 그저 빛 같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나. 모르겠다. 수많은 책들의 바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런 보석처럼 빛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2002년에 당시 의대생이던 대니얼 메이슨이 발표한 첫 번째 소설 <피아노 튜너>는 국내에 소개됐고 오래지 않아 절판됐다. 도서관에서도 빌려볼 수가 없어 결국 중고책으로 주문해서 어제 받았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로 이제 막 편입된 버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는 작가가 빚어낸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할까. 이 책을 다 읽지 않고는 이번 주말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독서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실 어려서 일본군의 임팔 침공을 다룬 전쟁사로 버마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무다꾸찌 렌야가 이끄는 일본 18군은 아라칸 산맥과 살윈 강 그리고 친드윈 강을 너머 인도의 임팔 공략에 나섰지. 보급과 수송을 무시한 결과, 작전은 일본 육군 최대의 참담한 패배로 기록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이와라디 강과 만달레이, 프로메 같은 버마의 지명을 만나게 됐다.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대니얼 메이슨의 <피아노 튜너>는 사실 진입 장벽이 빡센 편이다. 영국이 식민제국으로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후반, 제국의 핵심 이익의 기반이 되는 인도를 지키기 위해 영국은 버마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 188511, 버마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던 만달레이를 영국군이 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2주 만에 함락시킨 이후가 소설 <피아노 튜너>의 시대적 배경을 이룬다. 실제했던 림빈 동맹에 대한 언급도 소설 후반에 등장한다. 작가는 이런 방대한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 조사를 했을지 궁금해졌다.

 

1886년 가을, 영국 런던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던 중년의 에드거 드레이크는 버마 오지로 피아노 조율을 해달라는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게 된다. 거의 세계의 절반을 가로 지르는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철도와 증기선을 타고 장장 8,000km에 달하는 엄청난 여정을 에라르 피아노 전문가가 나설 이유가 있을까. 물론 에드거 드레이크는 이 요청을 수락했고,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을 모국에 두고 버마로 떠난다.

 

런던을 떠나 칼레에 도착해서 파리로,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지나기 위해 마르세유로 향한다.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수에즈 운하 너머 인도양까지 빡빡한 일정이 계속된다. 봄베이로 가는 배 안에서 에드거는 오직 한 이야기만 한다는 노인으로부터 난파되었다가 생존하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귀머거리 노인에게서 왠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향기가 났다.

 

대니얼 메이슨은 에드거 드레이크라는 인물을 앞세워, 빅토리아 시대 만연하고 있던 동양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는 자신의 반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울러 식민제국 건설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군인들에 대한 드레이크의 생래적 거부감에 대해서도 밑밥을 깔아 놓았다.

 

, 드레이크의 일정만 이야기하다 보니 도대체 왜 그가 버마 오지의 메이르윈 요새까지 가야 했나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그곳에는 대체 불가한 영국의 버마 식민지 경영에 꼭 필요한 인재 앤서니 캐럴이라는 군의관이 있었다. 그는 육군성을 협박해서 1840년형 에라르 피아노를 자신이 근무하는 메이르윈으로 보내 달라고 협박성 요청을 했다. 사람을 파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랜드 피아노를 그런 오지로 보내 달라고? 바로 이 장면에서는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브라이언 피츠카랄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피츠카랄도>가 떠올랐다.

 

새로운 피아노를 보내 달라는 요청은 말이 되지 않으니, 그 피아노를 조율할 수 있는 조율사를 보내 달라는 것이 바로 앤서니 캐럴의 요청이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 에드거 드레이크가 픽업되어 선발된 것이다. 군의관이라고만 하기에는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앤서니 캐럴이라는 인물의 광기가 언뜻 엿보이기 시작한다.

 

봄베이에 무사히 도착한 에드거는 알라하바드, 베나레스 그리고 캘커타를 거쳐 마침내 버마의 랑군에 도달했다. 드레이크는 그 험난한 여정 중에, 군의관이라기보다 거의 정보 요원에 가까워 보이는 미스터리한 인물 앤서니 캐럴이 쓴 버마 현지 정황에 대한 보고서로 샨스테이츠의 이모저모를 파악한다. 힌두스탄 어로 강도를 의미하는 산적에 가까운 무장집단인 다코이트가 준동하는 샨 고원의 불안정한 정세를 알려준다.

 

버마 식민지의 수도였던 랑군에서 드레이크는 마중나온 댈튼 대위의 환영을 받는다. 슈웨다곤을 구경하고, 랑군에 대한 대니얼 메이슨의 상세한 묘사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 카메라로 도시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 후반에 버마 복식 문화를 사전에 인지한 드레이크가 사우브와들의 회합에서 함께 한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인지를 알게 만드는 사전 장치의 하나였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댈튼 대위의 초대로 내키지 않는 호랑이 사냥에 참가했다가 오인사격으로 비극을 목격하기도 하는 드레이크. 식민지 영국 군인들의 무모함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게 되는 킨 므요와 함께 적의 습격을 받은 위험한 메이르윈으로 당국의 지시 없이 무단으로 향하는 에드거 드레이크.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서 피아노를 고치러 왔다고 말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1부의 엔딩이다.

 

2부에서는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앤서니 캐럴과 메이르윈 요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총탄에 맞아 건반이 파괴된 에라르 피아노를 수리하는 에드거 드레이크에 대한 모습이 그려진다. 이국적인 버마의 모습과 더불어, 피아노 조율과 수리라는 전문 분야를 묘사하는 대니얼 메이슨의 탁월한 능력에 그저 감탄했다. 어려서 바이엘이나 조금 치다가 피아노 건반의 세계를 떠난 내가 이렇게 다시 시밍이나 공명판 같은 피아노의 내부세계에 대해 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에드거 드레이크는 거듭해서 자신이 피아니스트 같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피아노 튜너로서 거의 마이스터 같은 아티스트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복잡한 세계에서 벗어나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드레이크를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것이 서구인들이 지향하는 영국 같은 문명세계가 아닌, 버마의 오지에서도 충분히 노래하는 코끼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전달한다.

 

그리고 앤서니 캐럴의 반협박에 의해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드레이크가 평화의 메신저라는 상징이 아닐까 하는 싶었다.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사건이었지만, 환상적인 음악의 힘으로 서로 상충하는 이익집단들로부터 평화를 도모하겠다면 너무 앞서 나간 설정이었을까. 동시에 메이르윈 요새에서 독단적 판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앤서니 캐럴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월터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캐럴에게 가스라이팅당한 드레이크의 운명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말라리아 연구를 위해 태국 어딘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설에서 에드거 드레이크가 메이르윈 요새에서 피아노 조율을 마치고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 생각에 드레이크의 말라리아 발병은 그의 버마 현지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신세계의 로터스 맛을 본 자는 아내 캐서린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게 되어 버렸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기 인생의 실패라고 썼던가.

 

<피아노 튜너>를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결말에 도달해서는 그저 이 책은 그저 빛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런 소설을 26세의 의대생이 썼단 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과 더불어 단연 올해 만난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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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단 말이지요.
일단 배경이 독특해서 읽고싶어지는 책이네요.

레삭매냐 2024-09-23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미리보기로 조금 봤는데...
시작부터 정말 특이한 설정이
더라구요.

19세기 이제 막 영국의 식민지
가 된 버마를 배경으로 한 참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9-24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배경의 소설이네요. 버마가 어딨는지도 잘 모르겠네요ㅎㅎ

레삭매냐님이 빛같은 소설이라 하니 읽어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9-24 18:52   좋아요 1 | URL
아마존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세우
겠다는 말 만큼이나 놀라운 설정이
아닐 수 없더라구요.

너무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버마가 지금은 미얀마로 이름이 바
뀌었다고 하네요.

독서괭 2024-09-26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극찬할 소설인데 절판됐나요? 아깝네요 ㅜㅜ

레삭매냐 2024-09-27 22:13   좋아요 1 | URL
좋은 책들은 왜 항상 절판되어
있는지... 아쉽습니다.
 
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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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작가와 책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래서 모름지기 책 읽는 이들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진리를 책을 읽을수록 깨닫게 된다. 역시 NYT 시리즈 96위의 오른 브릿 베넷의 책 <사라진 반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뉴욕타임즈가 아니었다면, 영영 이 책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 병렬독서 덕분에 진도가 늦긴 했지만 일단 가속이 붙으니 몰입도가 엄청났다.

 

브릿 베넷 작가는 소설 장르의 특징 중의 하나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나드는 서사를 능숙하게 직조한다. 루이지애나 맬러드라는 작은 타운을 떠난 두 쌍둥이 데지레와 스텔라 빈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생성도 일품이다.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시절, 쌍둥이 자매는 아버지를 백인들의 폭력에 잃는다. 그들에게 가난과 차별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무언가 새로운 삶을 위해 데지레와 스텔라는 맬러드 탈출을 꿈꾸고 결국 실행에 옮긴다.

 

데지레와 스텔라의 캐릭터성을 더 부각시키는 요소는, 맬러드에서 그들은 유색인종이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백인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넬라 라슨의 <패싱>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둘 중의 누군가가 패싱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소설이 데지레의 귀환으로 시작했던가. 그렇다면 패싱해서 사라진 반쪽은 바로 스텔라일 것이다.

 

데지레는 자신과 닮은 점이 없는 정말 검은 딸 주드 윈스턴을 데리고 요란한 귀환을 감행한다. 고향 맬러드를 떠날 때는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쳤지만, 귀환을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식을 잃었던 미스 아델은 데지레와 손녀 주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얼리 존스라는 훗날 데지레의 조력자이자 연인이 되는 캐릭터를 하나 추가한다. 그의 정체는 인간 사냥꾼이다.

 

워싱턴 DC에 살던 데지레의 남편 샘 윈스턴은 학대와 가정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인생에서 두 번째 도주를 감행한 아내의 추적을 의뢰한다. 인간은 누구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얼리에게 데지레 찾기란 누워서 떡먹기 같은 사건이었다. 얼리가 샘에게 그가 찾는 정보를 건네 주었다면, 소설은 거기에서 멈추었겠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얼리는 자신의 평판에 금이 가는 대신 데지레 모녀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 다음 파트에서는 캘리포니아로 간 데지레의 딸 주드가 배턴을 이어 받는다. 맬러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되는 주드. 고향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이모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드의 경우는 좀 다르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주드는 남장 여자 리스 카터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아 기묘하다 참), 미래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자력으로 생활비를 벌고, 리스를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경야독하던 주드는 케이터링 서비스 요원으로 어느 파티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 충격에 빠지게 된다. 주드는 드디어 어머니의 사라진 반쪽을 만난 것이다.

 

드디어 독자가 기대하던 에스텔, 스텔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색인종이 당해야 했던 차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스텔라는 뉴올리언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워싱해서 백인으로 변신했다. 그 배경에는 자신의 상사이자 명문가 출신으로 무려 예일대를 졸업한 블레이크 샌더스가 있었다. 별처럼 빛나던 19살의 스텔라와 사랑에 빠진 블레이크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텔라에게 보스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텔라는 쌍둥이 언니 데지레를 배신하고, 온통 거짓으로 도배된 자신을 창조했다.

 

때는 1968, 그야말로 흑인 민권운동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사리지지 않았다. 패싱해서 백인 행세를 하던 스텔라는 자신의 이웃에 유색인종 워커 가족이 이사 온다는 말을 듣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항상 변절자가 가장 험악한 행동을 마련이지 않은가. 로레타 워커와의 교제를 통해, 브릿 베넷 작가는 당대 LA 백인들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적으로는 흑인과의 평등한 삶에 찬성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에 흑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런 이중성 말이다.

 

로레타와의 관계 속으로 기울어져 가던 스텔라의 일상은, 어느 날 딸 케네디의 실수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텔라의 이웃들이 실제 행동(벽돌 던지기, 오물 투척 등)에 나서게 되면서 결국 백인들과의 공존이라는 높은 벽을 실감한 워커 부부는 철수를 결정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지킬 게 많아진 스텔라는 철저하게 두꺼운 마스크를 쓴 채,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데 전력한다. 사실 결심이 어렵지, 실행 절차는 요식절차에 불과하니까.

 

바로 스텔라의 완벽해 보이는 삶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그녀의 조카인 주드였다. 주드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공작을 시작한다. 우선 스텔라의 딸 케네디에게 접근해서 스텔라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한편 케네디는 요즘 말로 하면, 관종 정도가 아닐까.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유복한 집안 덕분에 일단 대학에 진학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연극이나 연기에 관심을 갖고 그러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할리우드의 주변부를 배회한다. 그리고 케네디가 궁금해 하던 엄마 스텔라에 대한 비밀 해독의 단서를 바로 주드가 제공하기 시작한다. 미스 아델과 쌍둥이 자매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고향 맬러드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언니 데지레와 달리, 수학에 재능을 지니고 있던 스텔라는 어느 순간 자각해서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에 진학해서 결국 통계학 교수가 되었다. 거짓으로 구성된 스텔라 인생의 태피스트리에 그야말로 정점을 찍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완성된 거짓말을 위해서는 스텔라는 계속해서 양심을 속이고 사랑하는 남편 블레이크와 딸 케네디에게도 항상 위선의 태양 같은 존재가 되어야말 했다.

 

스스로 창조한 거짓의 지지대가 붕괴한다면, 그녀의 삶 역시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웠을까. 그녀에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 데지레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자신의 결심으로 배신하지 않았던가. 비참하게 백인들에게 린치당하고 죽은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한시도 불안해서 곁에 야구방망이를 두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결심으로 행복하기 위해, 워싱을 결행하고 사라진 반쪽이 되었지만 결국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텔라는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그런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과를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업이겠지만.

 

브릿 베넷 작가는 마치 영화에서 에피소드마다 등장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캐릭터들의 이모저모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같은 효과를 소설적 스타일로 연출한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 타인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결정들을 내리기 마련이다. 삶의 모든 면들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잘못된 판단을 했다가, 일이 어그러지고 또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엉망이 되어 버리게 된다는 고전적 서사가 <사라진 반쪽>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스텔라였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을 철저하게 위장하고 과연 그것이 탄로 났을 때, 감당할 수 없을 후폭풍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을 선택했을까? 작은 실수 하나에도 후회와 번민으로 고민할 게 뻔 한데 스텔라 같은 결정을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스릴이 현실이 된다면 또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지.

 

과연 브릿 베넷의 <사라진 반쪽>은 책장을 넘길수록 몰입도가 배가되는 작품이 분명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치밀한 서사 빌드업으로 캐릭터들에게 맡겨진 미션들을 부여해서 수행하게 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소설의 주인공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동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용서와 화해를 도모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삶을 살아내게 될 것이다. 대단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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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9-19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세상은 넓고.. 재미난 책은 많군요 ㅜㅜ

레삭매냐 2024-09-19 13:02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정말루요.

코트디부아르 출신 작가
아마두 쿠루마의 <들짐승들의
투표를 기다리며>를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또 다른 신세계네요.
 
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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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NYT 독자 선정 이번 세기 베스트 100에 당당하게 36위로 랭크되어 있는 책이다. 목록을 보고 한동안 중고책방에서 없는 책들을 사 모았는데 정작 사서 다 읽은 책은 조앤 디디온의 <상실>이 처음이다. 그리고 보니 조앤 디디온의 다른 책은 나중에 사서 먼저 읽었네.

 

<상실>로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 양반, 대단한 작가였더군. 암튼 사둔 책은 순차적으로 언젠가는 읽게 될 테니 무슨 걱정이랴.

 

이 책의 원제는 <마술적 사고의 해> 정도로 번역될 것 같다. 하지만, <상실>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조앤 디디온은 20031230일 오랜 반려자였던 작가 존 그레고리 던을 심장마비로 잃고 난 뒤의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의 감정들을 평생 작가답게 기록으로 남겼다. 나의 독서 속도가 평소에 비해 현저하게 느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저자의 현학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그런 상실의 감정들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또 리뷰를 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의 심연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게 곤욕스럽다. 게다가 조앤 디디온은 사랑하는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랑하는 딸 퀸타나 마저 병으로 잃어야 했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도 등장하지만, 이미 식탁에서 쓰러진 남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전에 받은 심장 수술을 과부제조기라고 표현했던가.

 

좀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그런 약간은 진부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사는 곳을 바꾼다고 해서, 삶의 조건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작한다고 해서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다가올 죽음을 회피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상실>을 읽다 말고, 입수한 <푸른 밤>을 읽으면서 조앤 디디온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평생 글밥을 먹고 산 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의학 지식의 세계와 정보조차 책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에 지식인의 삶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에게는, 참 세상 어렵게 산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조앤 디디온이 반려자와 자식을 잃은 뒤에 절실하게 느낌 감정에 대해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조앤 디디온의 노모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부모의 내리사랑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흔이 넘은 조앤 디디온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셨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맺히는지 모르겠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까. 그러니 병상에 누운 퀸타나를 돌보는 저자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시 냉정한 작가답게, 남편과 자식을 잃고 난 뒤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애도와 비애 그리고 자기 연민에 대해 경계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만약 저자에게 평생의 업인 글쓰기가 없었다면 과연 조앤 디디온은 상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까.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글쓰기라면 더더욱 탈출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저자에게 글쓰기란, 지나간 삶의 복기이자 그 삶에서 미처 모르고 놓친 무언가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프로 의식을 발휘해서, 그렇게 바로 글쓰기에 돌입할 수는 없었으리라.

 

조앤 디디온에게 20031230일은 그저 평범한 날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개인에게 벌어진 거대한 사건(존 그레고리 던의 죽음)이 주변인의 삶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격변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종류의 기적을 희망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 소멸의 순간은 공평하고 가차 없다고 저자는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주제를 과감하고 선택하고,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연대기를 이런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다 읽는 데 무려 석 달이나 걸린 쉽지 않은 그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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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7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저는 읽을 수 있을랑가 모르겠습니다. 읽는데 3개월이 걸리셨다니 저는 한 5개월 잡아야 할 것 같네요. ㅠ

레삭매냐 2024-09-17 18:58   좋아요 1 | URL
저자가 표현하는 상실에 감정에
휘말려서 읽다 접었다를 반복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적에는 금방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