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튜너
대니얼 메이슨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이것은 그저 빛 같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나. 모르겠다. 수많은 책들의 바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런 보석처럼 빛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2002년에 당시 의대생이던 대니얼 메이슨이 발표한 첫 번째 소설 <피아노 튜너>는 국내에 소개됐고 오래지 않아 절판됐다. 도서관에서도 빌려볼 수가 없어 결국 중고책으로 주문해서 어제 받았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로 이제 막 편입된 버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는 작가가 빚어낸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할까. 이 책을 다 읽지 않고는 이번 주말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독서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실 어려서 일본군의 임팔 침공을 다룬 전쟁사로 버마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무다꾸찌 렌야가 이끄는 일본 18군은 아라칸 산맥과 살윈 강 그리고 친드윈 강을 너머 인도의 임팔 공략에 나섰지. 보급과 수송을 무시한 결과, 작전은 일본 육군 최대의 참담한 패배로 기록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이와라디 강과 만달레이, 프로메 같은 버마의 지명을 만나게 됐다.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대니얼 메이슨의 <피아노 튜너>는 사실 진입 장벽이 빡센 편이다. 영국이 식민제국으로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후반, 제국의 핵심 이익의 기반이 되는 인도를 지키기 위해 영국은 버마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 188511, 버마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던 만달레이를 영국군이 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2주 만에 함락시킨 이후가 소설 <피아노 튜너>의 시대적 배경을 이룬다. 실제했던 림빈 동맹에 대한 언급도 소설 후반에 등장한다. 작가는 이런 방대한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 조사를 했을지 궁금해졌다.

 

1886년 가을, 영국 런던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던 중년의 에드거 드레이크는 버마 오지로 피아노 조율을 해달라는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게 된다. 거의 세계의 절반을 가로 지르는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철도와 증기선을 타고 장장 8,000km에 달하는 엄청난 여정을 에라르 피아노 전문가가 나설 이유가 있을까. 물론 에드거 드레이크는 이 요청을 수락했고,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을 모국에 두고 버마로 떠난다.

 

런던을 떠나 칼레에 도착해서 파리로,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지나기 위해 마르세유로 향한다.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수에즈 운하 너머 인도양까지 빡빡한 일정이 계속된다. 봄베이로 가는 배 안에서 에드거는 오직 한 이야기만 한다는 노인으로부터 난파되었다가 생존하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귀머거리 노인에게서 왠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향기가 났다.

 

대니얼 메이슨은 에드거 드레이크라는 인물을 앞세워, 빅토리아 시대 만연하고 있던 동양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는 자신의 반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울러 식민제국 건설과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군인들에 대한 드레이크의 생래적 거부감에 대해서도 밑밥을 깔아 놓았다.

 

, 드레이크의 일정만 이야기하다 보니 도대체 왜 그가 버마 오지의 메이르윈 요새까지 가야 했나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그곳에는 대체 불가한 영국의 버마 식민지 경영에 꼭 필요한 인재 앤서니 캐럴이라는 군의관이 있었다. 그는 육군성을 협박해서 1840년형 에라르 피아노를 자신이 근무하는 메이르윈으로 보내 달라고 협박성 요청을 했다. 사람을 파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랜드 피아노를 그런 오지로 보내 달라고? 바로 이 장면에서는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브라이언 피츠카랄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피츠카랄도>가 떠올랐다.

 

새로운 피아노를 보내 달라는 요청은 말이 되지 않으니, 그 피아노를 조율할 수 있는 조율사를 보내 달라는 것이 바로 앤서니 캐럴의 요청이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 에드거 드레이크가 픽업되어 선발된 것이다. 군의관이라고만 하기에는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앤서니 캐럴이라는 인물의 광기가 언뜻 엿보이기 시작한다.

 

봄베이에 무사히 도착한 에드거는 알라하바드, 베나레스 그리고 캘커타를 거쳐 마침내 버마의 랑군에 도달했다. 드레이크는 그 험난한 여정 중에, 군의관이라기보다 거의 정보 요원에 가까워 보이는 미스터리한 인물 앤서니 캐럴이 쓴 버마 현지 정황에 대한 보고서로 샨스테이츠의 이모저모를 파악한다. 힌두스탄 어로 강도를 의미하는 산적에 가까운 무장집단인 다코이트가 준동하는 샨 고원의 불안정한 정세를 알려준다.

 

버마 식민지의 수도였던 랑군에서 드레이크는 마중나온 댈튼 대위의 환영을 받는다. 슈웨다곤을 구경하고, 랑군에 대한 대니얼 메이슨의 상세한 묘사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 카메라로 도시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 후반에 버마 복식 문화를 사전에 인지한 드레이크가 사우브와들의 회합에서 함께 한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인지를 알게 만드는 사전 장치의 하나였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댈튼 대위의 초대로 내키지 않는 호랑이 사냥에 참가했다가 오인사격으로 비극을 목격하기도 하는 드레이크. 식민지 영국 군인들의 무모함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게 되는 킨 므요와 함께 적의 습격을 받은 위험한 메이르윈으로 당국의 지시 없이 무단으로 향하는 에드거 드레이크.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서 피아노를 고치러 왔다고 말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1부의 엔딩이다.

 

2부에서는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앤서니 캐럴과 메이르윈 요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총탄에 맞아 건반이 파괴된 에라르 피아노를 수리하는 에드거 드레이크에 대한 모습이 그려진다. 이국적인 버마의 모습과 더불어, 피아노 조율과 수리라는 전문 분야를 묘사하는 대니얼 메이슨의 탁월한 능력에 그저 감탄했다. 어려서 바이엘이나 조금 치다가 피아노 건반의 세계를 떠난 내가 이렇게 다시 시밍이나 공명판 같은 피아노의 내부세계에 대해 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에드거 드레이크는 거듭해서 자신이 피아니스트 같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피아노 튜너로서 거의 마이스터 같은 아티스트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복잡한 세계에서 벗어나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드레이크를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것이 서구인들이 지향하는 영국 같은 문명세계가 아닌, 버마의 오지에서도 충분히 노래하는 코끼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전달한다.

 

그리고 앤서니 캐럴의 반협박에 의해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드레이크가 평화의 메신저라는 상징이 아닐까 하는 싶었다.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사건이었지만, 환상적인 음악의 힘으로 서로 상충하는 이익집단들로부터 평화를 도모하겠다면 너무 앞서 나간 설정이었을까. 동시에 메이르윈 요새에서 독단적 판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앤서니 캐럴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월터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캐럴에게 가스라이팅당한 드레이크의 운명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말라리아 연구를 위해 태국 어딘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설에서 에드거 드레이크가 메이르윈 요새에서 피아노 조율을 마치고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 생각에 드레이크의 말라리아 발병은 그의 버마 현지화를 상징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신세계의 로터스 맛을 본 자는 아내 캐서린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게 되어 버렸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기 인생의 실패라고 썼던가.

 

<피아노 튜너>를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결말에 도달해서는 그저 이 책은 그저 빛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런 소설을 26세의 의대생이 썼단 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과 더불어 단연 올해 만난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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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단 말이지요.
일단 배경이 독특해서 읽고싶어지는 책이네요.

레삭매냐 2024-09-23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미리보기로 조금 봤는데...
시작부터 정말 특이한 설정이
더라구요.

19세기 이제 막 영국의 식민지
가 된 버마를 배경으로 한 참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