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함정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지배하는가
자카리 쇼어 지음, 임옥희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저자 자카리 쇼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웹사이트의 대문에 바로 이 책 <생각의 함정>(Blunder)의 표지가 나와 있었다. 대학교수이자 세계 유수의 잡지들에 기고하는 자카리 쇼어는 <생각의 함정>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조명해 준다.

서론은 전기를 발명해서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전파해준 토머스 에디슨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뛰어난 발명을 했지만, 정태적 집착에 빠져 있던 에디슨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교류 방식이 아닌 직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더 나은 방법을 거부하는 치명적인 실책(blunder)을 범하게 된다. 뒤이어 등장하게 되는 노출불안에 대한 2,000년 전의 고사(古事)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테네에 반란을 일으킨 미텔레네인들을 치리하는 방식을 두고 매파와 비둘기파가 대립하게 되는데, 나약한 대처방식이 반란군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클레온의 주장과 반대로 강경책이 오히려 더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디오도투스의 의견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지난 세기 미국의 가장 큰 실패로 손꼽히는 베트남전에서의 실패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례는 적확하다. 우선 미국의 결정권자들은 베트남 지도자인 호치민에 대한 단편적인 판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외세로부터 자주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자라는 부분보다, 냉전 시대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면서 유연한 태도를 버리고 무력대결을 선택하게 된다. 그전에 이미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우방들의 지원 없이 국지전에 뛰어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던 반면 그의 후임자들인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은 잘못된 판단으로 무력개입을 하고, 수많은 물자와 인명의 손실을 가져 오게 된다.

아울러 베트남 사람들에게 교량의 건설이나 근대식 병원 같은 현대화의 세례가 가장 유효할 것이라고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판단했지만, 실제 베트남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토지분배, 공정한 세금의 부과 그리고 원활한 계층 간의 이동과 같은 사회정의였다. 베트남에서 식민경영을 하던 프랑스와 그의 뒤를 이어 개입하게 된 미국 같은 서구 열강들은 오로지 물질적인 접근방식을 고수하면서 궁극적인 패배를 자초했다.

저자 자카리 쇼어는 노출불안으로 시작된 다양한 인지함정(cognition trap)에는 환원적 관계에만 집중하는 원인혼란은 물론이고 어느 사건에 대한 평면적인 접근, 과거의 성공만을 바라보는 만병통치주의, 정보독점과 정보회피에 의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그리고 역사와 동서고금의 다양한 인물들의 실례를 통해 내재하여 있는 파괴적인 정신적 패턴을 구별해내고, 실책을 극복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여러 가지 인지함정 중에서 현재 우리의 상황과 함께 재고해봐야 할 민영화 만병통치주의의 예를 하나 살펴보자.

다음은 경직된 원형적 사고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로 미국 내 교도소에서 민영화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설 교도소에 대한 이야기다. 정부와 기업의 목적이 분명히 다름에도,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예산과 경비 절감이라는 이유로 교도소의 사설화를 진행했다. 하지만, 국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의 목적과 이윤 추구라는 기업의 목적이 서로 상충하면서 민영화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폐해들의 속출하게 됐다. 교도소 경영을 맡은 기업들이 교도소에 적절한 인원을 배치하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들을 충분히 공급하지 않으면서 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이 실패는 민영화 만병통치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한편,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를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대처는 이 책에서 자카리 쇼어가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핵심적 가치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초강경 무력대응을 주장하는 매파들을 진정시키면서, 유연성을 가지고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도발하는 대신 건전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문제 타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 핵전쟁의 위기를 간발의 차이로 빗겨 나갈 수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서술 방식과 역사적 실례 등을 통해 우리가 흔히 범하게 되는 인지함정의 오류들에 대한 설명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번역과 교정 과정에서 너무 많은 오류와 단어들의 통일성에 부족으로 책읽기가 참 곤욕스러웠다. 오죽했으면 목침 두께만 한 국어사전을 펴놓고 책을 읽었겠는가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평점에서 별 하나를 부득이하게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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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의 표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라는 점을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로, 한껏 크게 입을 벌리고 절규하는 남자의 뒤편으로 책들이 보인다. 그리고 “책이 되어버린 남자”라는 제목이 그 남자의 입속에서 독자들을 유혹한다. 독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는 이렇게 독자들을 어느 책에 미친 사나이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목차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설마 목차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 목차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목차가 없었다. 목차가 없어서, 도대체 책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호기심이 증폭했다고나 할까.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서지학(bibliography)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비블리 씨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벼룩시장에서 어느 여인의 의문사(리뷰를 쓰다 보니 책의 소유권과 관계된 순환적 구조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와 더불어 비블리 씨가 벼룩시장에서 “그 책”을 슬쩍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파란만장한 모험의 연대기다.

슈바이거르트 작가는 비블리 씨를 열혈 독서광으로 설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까지도 앗아갔다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애서가인 비블리 씨가 “그 책”을 얻고 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나머지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책들을 모두 헐값에 팔아 치운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 책”으로 인해 그의 잠 못 이루는 밤들은 늘어만 간다.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블리 씨의 책에 대한 고백은 같은 책쟁이의 고민을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렸을 적에는 플라스틱 레코드판에 미쳐서 밥도 굶어 가면서 모으곤 했었다. 이제는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게 돼서 밥도 굶으면서 책을 사거나 하지는 않지만, 꾸역꾸역 책을 사 모으고 있으며 여전히 품절이나 절판된 책에 대한 끝 간 데 모를 애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비블리 씨의 그런 책에 대한 사랑을 어느 순간, 판타지로 변형시킨다. 현실과 상상 속의 세계를 오가던 책쟁이의 망상이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다. 자신이 곧 책이 버린 비블리 씨는 문자 그대로 책이 되고서야 비로소 주체적 자아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변신의 장면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의 주인공 잠자가 떠올랐다. <변신>에서 잠자가 생물인 벌레로 변했다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에서 비블리 씨는 무생물인 책으로 변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무생물인 책의 활약은 비블리 씨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한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가이다. 물론 그에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덮어 버린 채, 책과 동일시된 비블리 씨는 자신/책을 무시하거나 모욕하고 혹은 위협하는 객체를 향해 증오와 분노 같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욕망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저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와의 첫 만남은 주인공 비블리 씨가 걸출한 책쟁이라 그런진 몰라도, 많은 부분에서 ‘맞아, 맞아!’ 하는 폭넓은 공감대의 형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이 정도로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실존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있었는지 놀라웠다. 심지어 작가 역시 비블리 씨와 같은 부류의 애서가 혹은 독서광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보기도 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 책”의 기이한 여정은 현존하는 책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커버한다. 개인의 소장은 물론이고, 도서관, 비밀서고 그리고 무덤에까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판타지에 버금가는 모험의 묘사가 탁월했다. 물론, 그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우연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한껏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순환적 구성이 특히 일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은 ‘무슨’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그림 동화책을 읽는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무슨이 그린 일러스트들은 책에 등장하는 콘텐츠들의 시각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따뜻하면서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바들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내공은 그야말로 득점 포인트였다. 그의 다른 작업이 궁금해서 그의 홈페이지인 무슨닷컴(http://www.moosn.com)을 방문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이 책에 대한 심각한 중독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못 말리는 독서광 비블리 씨의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책에 대한 사랑 고백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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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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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식민지 시절과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역사적 공통분모가 우리네의 그것과 묘한 공명을 울리게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소설 <광기>는 콜롬비아 출신의 여류작가 라우라 레스트레포(1950년생)가 2004년에 발표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국립대학에서의 교수직을 버리고 좌파 계열을 글을 쓰며,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에서 저항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우리나라에는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소개된 <광기>는 그녀의 9번째 작품으로 작가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원제 <Delirio> 역시 섬망 상태 혹은 일시적 착란 상태, 광란을 의미한다.

<광기>는 작가가 존경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올해 초에 사라마구 선생의 책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 <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두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를 연상시키는 아길라르와 광기에 휩쌓인 여주인공 아구스티나의 이야기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시제와 화자가 뒤죽박죽이 된 <광기>를 읽으면서, 왜 아구스티나가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작가는 느리지만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불행했던 아구스티나의 가정사와 그 선대에 독일에서 천국보다 낯선 콜롬비아의 사사이마에 정주한 그녀의 외조부 포르툴리누스의 이야기 그리고 실존했던 전설적인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판타지와 실재를 오간다.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순애보의 주인공 아길라르, 과거의 플래시백을 주로 풀어나가는 아구스티나, 포르툴리누스 할아버지와 블랑카 할머니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아구스티나에게 독백 형식으로 진행되는 미다스 맥알리스터의 이야기들이 초반에는 좀 낯설지만, 본 궤도에 오르면서 가속을 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호기심을 끈 인물로는 미다스 맥알리스터를 꼽고 싶다. 아버지를 여의고 무일푼으로 시골애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상경한 미다스는 론도뇨 패밀리의 장남 호아코의 친구로 상류사회의 단면을 엿보면서, 호아코로부터 사람들을 경멸하는 법을 배우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세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게 된다. 물론, 희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거래를 하게 되면서 점점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역시 소설의 핵심은 바로 아구스티나 광기의 근원은 어디일까하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부끄러운 집안사로부터 시작해서, 론도뇨 자녀들의 성장과 더불어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콜롬비아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나아간다. 어쩌면 개인과 사회 모두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길라르 같이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난망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소 결말 부분이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작가의 글과 만난다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아울러 제3세계 작가들의 글과 만난다는 다양성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다른 책들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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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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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클럽에서 오정희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어느 문창과에 다닌다는 분이 오정희 작가의 글들은 정말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오정희 작가는 나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이 만추의 계절에 <가을 여자>로 드디어 오정희 작가와 만나게 됐다.

내공이 쌓이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장편소설보다도 단편소설 쓰기를 더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오정희 작가는 이 단편집에서 모두 25편의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낸다. 책 날개를 들춰보면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를 캐낸다는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은 글귀가 독자들을 맞이한다.

첫 이야기로 등장하는 <그 가을의 사랑>에는 남편의 여의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어느 여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연하남의 애틋한 사랑을 속삭인다.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다가오는 좀처럼 서로 들어내지 않는 은은한 사랑, 하지만 그 말미에는 연하남이 애용하는 은빛 펜치만큼이나 낯선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이런 한 방이 과연 언제 터질까 하는 기대감에 몸이 달기 시작한다.

<첫눈 오던 날>에서는 결혼의 가능성과 독신생활의 매력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고민녀의 이야기를, <비오는 날의 펜팔>에서는 예전의 아련한 추억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냉혹한 현실을,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의 다이어리를 훔쳐보며 한때 언어학자를 꿈꿨던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의 아이들은 내팽개쳐 두고 대신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는 어느 무책임한 엄마를 희화화하는 오정희 작가가 시전하는 촌철살인의 내공에, 웃다가 때로는 자괴감에 빠졌다가 하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고야 말았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특히 펜팔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건 아마도 숱한 개인적 경험에 의한 공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지의 이성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기다림과 편지의 나눔이 궁극적으로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 만남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세에서의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편지하노라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하긴 그 이야기에는 애수가 깃들어 있기라도 하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옛 펜팔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제안’을 들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직접 체험하거나 누군가한테서 듣지 않고서도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 빨리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 막무가내로 덤벼들었었다. 하지만, 연배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때로는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달관하는 자세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건망증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에서는 책망보다는 빙그레 작은 미소로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정희 작가가 빚어내는 이야기 묶음들의 갈피짬 속에는 아주 익숙한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향기가 다뿍하게 배어 있다. <가을 여자>를 통해 작가가 쫓는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깊어가는 가을 녘에 이렇게 멋진 책과 만나게 되어 참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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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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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정혜윤을 검색해 봤다. 가장 먼저 툭 튀어나오는 사람은 기상캐스터란다, 어 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정혜윤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작년 여름에 읽은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였다.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으로 라디오 PD 출신의 글쓴이가 11명의 명사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다만, 명사들의 이야기보다 자신의 책읽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입맛이 씁쓰름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글쓴이는 당당하게 “런던”을 제목에 집어넣었다. 기존에 나왔던 두 권의 책처럼 분명히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지지 않을 텐데 어떤 식으로 책 이야기를 하려나 하는 나의 궁금증 반, 우려 반이 시작됐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런던은 그저 구실이었다. 여느 여행 에세이처럼 런던의 숨겨진 은밀한 비밀들을 속삭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철저한 오산이다. <런던을 속삭여 줄게> 역시 정혜윤식 책읽기 이야기였다. 이미 작년에 학습효과가 있어서, 지난번 만큼 실망스럽진 않았다. 역시 인간은 체험의 동물인가 보다, 기대치를 낮추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타인의 책읽기 가운데, 나도 읽은 책을 만나면 참 기쁘다.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 소개 편이 그랬다. 다 읽고 나서 다른 이에게 선물해 버려서 지금은 나의 수중에 없는 책이지만, 앞을 못 보는 이가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은 눈에 선했다. 글쓴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독자들을 자신이 읽은 책과 지은이들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썰’을 풀기 시작한다. 꼭 집어서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작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이작 뉴턴 그리고 불멸의 로맨티스트 바이런의 이야기들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 둘 다, 예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면을 취하는 인물들이라고 했던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에서는 과연 내가 제대로 디킨스의 책이 얼마나 되나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다음 편에 등장하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나에게, 독일 나치 루프트바페의 런던 공습이 일상화되었던 1940년대의 어느 날 화염에 휩싸인 채 고고하게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놓은 흑백 사진 이미지 그대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로 국왕의 목마저 서슴지 않고 날려 버리는 영국인들의 책에서나 볼법한 합리주의적 사고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이 세계 최강의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처에서 약탈해온 진귀한 인류의 문화유산들로 뒤덮여 있는 전시장이었다. 특히, 그리스에서 집요하게 반환을 요구하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통째로 뜯어왔다는 ‘엘진 마블’이 왜 아테네가 아닌 런던 복판에 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됐다. 영국인들이 드는 말도 되지 않는 핑계들은 그야말로 그리스 예술품을 반환하지 않으려는 그네들의 얄팍한 술수라는데 한 표 던지고 싶다! 어쨌거나 이웃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는 달리 무료입장이라는 사실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지은이는 동서고금을 가로질리는 대영박물관에서 신화 속 세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빼놓지 않고 독자들에게 속삭여 준다.

그 외에도 트라팔가르 광장의 주인공 넬슨 제독, 세계 최강의 식민제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비운의 역사가 스며 있는 런던탑 그리고 영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그리니치 천문대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퀼트 조각 이불을 맞추듯 그렇게 ‘패치워크’ 내공을 선보인다.

올해만도 런던이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였을까? 기대했던 색다른 감흥들이 실종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책의 어디선가, ‘사랑에 이끌리면 미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을 보는 순간 그야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 지은이는 참으로 자의식 과잉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밀턴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도 하고 있다, 아니 그럼 정말 예외적인 존재인 찰스 맨슨도 예외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책을 읽던 중에 순간 답답해져 오던 갑갑증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글쓴이에게 정말 고마운 건 이 책을 통해 나에게 로이드 존스가 쓴 <미스터 핍>이란 책을 소개해 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혹되지 말지어다, 이 책에 나오는 런던은 프로파간다다! 런던을 빌미로 한 책읽기 에세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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