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 독서클럽에서 오정희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어느 문창과에 다닌다는 분이 오정희 작가의 글들은 정말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오정희 작가는 나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이 만추의 계절에 <가을 여자>로 드디어 오정희 작가와 만나게 됐다.

내공이 쌓이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장편소설보다도 단편소설 쓰기를 더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오정희 작가는 이 단편집에서 모두 25편의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낸다. 책 날개를 들춰보면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를 캐낸다는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은 글귀가 독자들을 맞이한다.

첫 이야기로 등장하는 <그 가을의 사랑>에는 남편의 여의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어느 여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연하남의 애틋한 사랑을 속삭인다.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다가오는 좀처럼 서로 들어내지 않는 은은한 사랑, 하지만 그 말미에는 연하남이 애용하는 은빛 펜치만큼이나 낯선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이런 한 방이 과연 언제 터질까 하는 기대감에 몸이 달기 시작한다.

<첫눈 오던 날>에서는 결혼의 가능성과 독신생활의 매력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고민녀의 이야기를, <비오는 날의 펜팔>에서는 예전의 아련한 추억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냉혹한 현실을,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의 다이어리를 훔쳐보며 한때 언어학자를 꿈꿨던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의 아이들은 내팽개쳐 두고 대신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는 어느 무책임한 엄마를 희화화하는 오정희 작가가 시전하는 촌철살인의 내공에, 웃다가 때로는 자괴감에 빠졌다가 하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고야 말았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특히 펜팔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건 아마도 숱한 개인적 경험에 의한 공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지의 이성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기다림과 편지의 나눔이 궁극적으로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 만남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세에서의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편지하노라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하긴 그 이야기에는 애수가 깃들어 있기라도 하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옛 펜팔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제안’을 들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직접 체험하거나 누군가한테서 듣지 않고서도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 빨리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 막무가내로 덤벼들었었다. 하지만, 연배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때로는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달관하는 자세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건망증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에서는 책망보다는 빙그레 작은 미소로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정희 작가가 빚어내는 이야기 묶음들의 갈피짬 속에는 아주 익숙한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향기가 다뿍하게 배어 있다. <가을 여자>를 통해 작가가 쫓는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깊어가는 가을 녘에 이렇게 멋진 책과 만나게 되어 참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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