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의 표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라는 점을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로, 한껏 크게 입을 벌리고 절규하는 남자의 뒤편으로 책들이 보인다. 그리고 “책이 되어버린 남자”라는 제목이 그 남자의 입속에서 독자들을 유혹한다. 독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는 이렇게 독자들을 어느 책에 미친 사나이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목차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설마 목차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 목차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목차가 없었다. 목차가 없어서, 도대체 책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호기심이 증폭했다고나 할까.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서지학(bibliography)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비블리 씨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벼룩시장에서 어느 여인의 의문사(리뷰를 쓰다 보니 책의 소유권과 관계된 순환적 구조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와 더불어 비블리 씨가 벼룩시장에서 “그 책”을 슬쩍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파란만장한 모험의 연대기다.

슈바이거르트 작가는 비블리 씨를 열혈 독서광으로 설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까지도 앗아갔다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애서가인 비블리 씨가 “그 책”을 얻고 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나머지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책들을 모두 헐값에 팔아 치운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 책”으로 인해 그의 잠 못 이루는 밤들은 늘어만 간다.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블리 씨의 책에 대한 고백은 같은 책쟁이의 고민을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렸을 적에는 플라스틱 레코드판에 미쳐서 밥도 굶어 가면서 모으곤 했었다. 이제는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게 돼서 밥도 굶으면서 책을 사거나 하지는 않지만, 꾸역꾸역 책을 사 모으고 있으며 여전히 품절이나 절판된 책에 대한 끝 간 데 모를 애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비블리 씨의 그런 책에 대한 사랑을 어느 순간, 판타지로 변형시킨다. 현실과 상상 속의 세계를 오가던 책쟁이의 망상이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다. 자신이 곧 책이 버린 비블리 씨는 문자 그대로 책이 되고서야 비로소 주체적 자아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변신의 장면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의 주인공 잠자가 떠올랐다. <변신>에서 잠자가 생물인 벌레로 변했다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에서 비블리 씨는 무생물인 책으로 변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무생물인 책의 활약은 비블리 씨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한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가이다. 물론 그에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덮어 버린 채, 책과 동일시된 비블리 씨는 자신/책을 무시하거나 모욕하고 혹은 위협하는 객체를 향해 증오와 분노 같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욕망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저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와의 첫 만남은 주인공 비블리 씨가 걸출한 책쟁이라 그런진 몰라도, 많은 부분에서 ‘맞아, 맞아!’ 하는 폭넓은 공감대의 형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이 정도로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실존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있었는지 놀라웠다. 심지어 작가 역시 비블리 씨와 같은 부류의 애서가 혹은 독서광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보기도 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 책”의 기이한 여정은 현존하는 책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커버한다. 개인의 소장은 물론이고, 도서관, 비밀서고 그리고 무덤에까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판타지에 버금가는 모험의 묘사가 탁월했다. 물론, 그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우연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한껏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순환적 구성이 특히 일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은 ‘무슨’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그림 동화책을 읽는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무슨이 그린 일러스트들은 책에 등장하는 콘텐츠들의 시각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따뜻하면서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바들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내공은 그야말로 득점 포인트였다. 그의 다른 작업이 궁금해서 그의 홈페이지인 무슨닷컴(http://www.moosn.com)을 방문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이 책에 대한 심각한 중독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못 말리는 독서광 비블리 씨의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책에 대한 사랑 고백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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