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식민지 시절과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역사적 공통분모가 우리네의 그것과 묘한 공명을 울리게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소설 <광기>는 콜롬비아 출신의 여류작가 라우라 레스트레포(1950년생)가 2004년에 발표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국립대학에서의 교수직을 버리고 좌파 계열을 글을 쓰며,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에서 저항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우리나라에는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소개된 <광기>는 그녀의 9번째 작품으로 작가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원제 <Delirio> 역시 섬망 상태 혹은 일시적 착란 상태, 광란을 의미한다.

<광기>는 작가가 존경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올해 초에 사라마구 선생의 책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 <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두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를 연상시키는 아길라르와 광기에 휩쌓인 여주인공 아구스티나의 이야기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시제와 화자가 뒤죽박죽이 된 <광기>를 읽으면서, 왜 아구스티나가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작가는 느리지만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불행했던 아구스티나의 가정사와 그 선대에 독일에서 천국보다 낯선 콜롬비아의 사사이마에 정주한 그녀의 외조부 포르툴리누스의 이야기 그리고 실존했던 전설적인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판타지와 실재를 오간다.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순애보의 주인공 아길라르, 과거의 플래시백을 주로 풀어나가는 아구스티나, 포르툴리누스 할아버지와 블랑카 할머니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아구스티나에게 독백 형식으로 진행되는 미다스 맥알리스터의 이야기들이 초반에는 좀 낯설지만, 본 궤도에 오르면서 가속을 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호기심을 끈 인물로는 미다스 맥알리스터를 꼽고 싶다. 아버지를 여의고 무일푼으로 시골애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상경한 미다스는 론도뇨 패밀리의 장남 호아코의 친구로 상류사회의 단면을 엿보면서, 호아코로부터 사람들을 경멸하는 법을 배우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세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게 된다. 물론, 희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거래를 하게 되면서 점점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역시 소설의 핵심은 바로 아구스티나 광기의 근원은 어디일까하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부끄러운 집안사로부터 시작해서, 론도뇨 자녀들의 성장과 더불어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콜롬비아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나아간다. 어쩌면 개인과 사회 모두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길라르 같이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난망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소 결말 부분이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작가의 글과 만난다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아울러 제3세계 작가들의 글과 만난다는 다양성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다른 책들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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