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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일본 문학을 접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는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었고, 최근까지만 해도 다카노 히데유키나 오쿠다 히데오 같이 조금은 가벼운 작가의 글을 즐겨 읽었다. 그러던 중에 작년에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면서 일본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주관적 편견을 허무는 계기가 됐다.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과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가 그것이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야마모토 겐이치 작가의 팩션 <리큐에게 물어라>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들이 담뿍 담겨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통일 이뤄 나가는 역사적 배경으로 해서, 실존 인물인 다도 아티스트 센 리큐의 죽음에 얽힌 비화가 꾸준하게 역사소설을 발표하는 야마모토 겐이치의 글에 담겨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솔직히 말해서 다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리큐에게 물어라>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다완, 다호 혹은 다석 같이 다도에 관련된 어휘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다는 센 리큐의 전설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도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다도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성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
연전에 본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언뜻 본 장면을 인용하자면, 다도에 사용되는 다완은 누가 사용했느냐에 따라 조선에서 쓰이던 막사발이 일본에 건너가서는 국보로도 둔갑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떠올랐다. 이를테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지중지하던 조선의 막사발이 한 500년 정도 지나면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센 리큐의 할복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는 플래시백을 쫓는다. 마치 삶이라는 인간 행위의 근본을 쫓듯이, 독자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같은 전국시대의 영웅들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절을 빙 돌아 다시 주인공의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문득 책의 뒷부분부터 다시 읽어 보면 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본 다도를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센 리큐는 중국산 다구인 당물(唐物)로 치장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서원 다도가 아닌, 차를 숭상하는 이들의 내면세계와 정신을 중요시하는 와비 다도에 자신의 삶을 걸었다. 센 리큐는 행다를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가 아닌, 모든 것이 지고의 미를 위해 합일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를 끓이고, 농차를 개는 그의 모습을 소설에서는 청량한 관능으로 묘사하지만, 나에게 그의 삶은 처연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고 절정의 아름다움, 화사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센 리큐의 절대미학에 대한 야마모토 겐이치의 기술에는 유현한 아취가 배어 있다. 비좁은 다실에서 주와 객으로 차 한 잔을 사이에 대면하는 풍경은, 칼만 등장하지 않았다 뿐이지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의 대결만큼이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예수회의 복음을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 야심 차게 히데요시를 찾은 포르투갈 출신의 사제 발리냐노에게 무인의 갑주에 동백꽃 한 가지로 응수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천하를 노리는 수많은 영웅을 제압하고 마침내 전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절대군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에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센 리큐의 눈에 돈과 색을 밝히는 히데요시는 천박 그 자체다. 비록 아티스트와 패트론이라는 관계로 만나게 되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그런 천박함을 센 리큐는 참을 수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품에 안은 히데요시가 센 리큐의 그런 오만을 허용할 리가 없다. 속된 말로 노는 물이 틀린 두 사나이의 예견된 충돌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다도의 예와 전국시대 말엽의 정치적 상황에, 아무도 모르는 녹유 향합으로 상징되는 센 리큐의 반세기를 아우르는 사랑에 야마모토 겐이치는 방점을 찍는다. 센 리큐가 남몰래 평생을 걸쳐 사랑한 여인이, 바로 조선 출신의 무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절세가인이라는 점이 조금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예의 여인에 대한 정한(情恨)이 평생 아름다움의 극한을 추구한 센 리큐의 동인이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갔다.
한 잔 차에 인생을 다리는 센 리큐의 행다에서 사물의 본질과 지고의 아름다움을 쫓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들끓는 현세에서, 소박한 차솥에 조용하게 끓인 그윽한 박차 한 잔의 향기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