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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오래전에 MFA에서 봤던 피카소 초기작품 전시회가 생각났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그의 초기작 역시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가가 되면 아마추어 시절의 작품들까지 덩달아 뜨고, 무수한 찬사가 쏟아지는 게 세상의 법칙이 아니던가. 2009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 19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는 <저지대>를 나는 타이틀 <저지대>를 빼고 짤막짤막한 단편들부터 다 읽고, 후기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차례로 섭렵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오랜 지배로 동유럽의 국경선이 애매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특히 헤르타 뮐러의 고향인 니츠키도르프가 있는 루마니아 서부의 바나트 지방은 세르비아-헝가리 그리고 루마니아 세 나라에 걸쳐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지역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복잡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루마니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명의 독재자가 있다. 한 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정권을 세워 히틀러의 동맹으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온 안토네스쿠가 있고, 다른 한 명은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다. 두 명 모두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1982년에 처음 나온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는 역시나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검열을 거치면서 몇 개의 단편이 빠졌었다고 하는데, 그 암울한 시대를 이겨낸 헤르타 뮐러의 문학은 새로운 천 년에 빛을 발하고 있고 반면 그녀를 핍박했던 독재자 내외는 무려 160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고 한다.
독일계 루마니아 출신의 헤르타 뮐러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명의 루마니아라는 공간으로 독자들을 조심스레 인도한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조국에서 외국어를 말하면서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고 말이다. 분명히 여권에는 루마니아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독일어로 가족과 이웃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전통 독일의 풍습에 맞게 살면서도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질감 말이다. 나중에 차우셰스쿠의 독재 치하에서 벗어나 독일에 정착하기 전부터 헤르타 뮐러는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았던가. 이방인으로서의 면모를 <저지대>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데뷔작에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저지대>에서는 루마니아 바나트 지방의 목가적인 풍광을 엿본다.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엄숙함 가운데서 느껴지는 가족들 간의 긴장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의사에게 뇌물을 먹여 가며 송아지를 도살하고, 집안일에 강박증을 가진 어머니는 빗자루질로 세월을 보낸다. 사람들 간의 관계 못지않게, 작가가 그리는 바나트 농촌 풍경에 묘사는 참 마음에 들었다. 헤르타 뮐러는 참새 둥지 하나, 고향 땅에 자리한 살구나무 한 그루에도 문학의 풍성한 세례를 부여한다. 그 땅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없이 어떻게 그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저지대>에 이어 등장하는 <썩은 배>에서는 언니와 내가 목격하는 아버지의 부정에 대한 증언을 기록한다. 부정의 대상이 다름 아닌 이모라는 사실에 그만 경악하게 된다. <저지대>에서도 얼핏 내비쳤던 가족 내부의 긴장이 팽팽하게 묘사된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차에 싣고간 채소를 팔아 번 돈을 어머니에게 가져다주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금지된 터부에 도전하며 가정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지목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게 읽은 단편은 바로 <마을 연대기>였다. 천국보다도 더 낯설게 들리는 바나트 지방에 사는 독일계 루마니아 사람의 참모습을 볼 기회였다고나 할까. 독일계 조상을 둔 바그너 혹은 슈나이더 같은 그네들의 성이며, 교회-학교 그리고 시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바나트 독일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차우셰스쿠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루마니아 산업 재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협동 혹은 국영농장에 대한 조심스러운 스케치도 인상적이었다.
개구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명백하게 전체주의 비밀경찰국가 루마니아를 빗댄 <의견>과 장학위원회라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잉게 이야기를 그린 <잉게>에서는 헤르타 뮐러가 구사하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읽는 <숨그네>에서도 그렇지만, 그녀의 글을 통해 증언문학의 순기능이 원활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첫 만남으로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지대>로 그녀의 조국 루마니아와 대가의 작품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