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레 일부터 제대로 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드레 일을 회사에서 시키면 아주 기분 나빠한다. 학력이 긴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다. 신입 여사원들 중에는 커피 심부름이나 복사 심부름 같은 일을 하고자 취직한 것은 아니라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허드레 일들을 왜 사람들은 우습게 여길까? “나 보다 못한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일을 그들보다 훨씬 잘난 내가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커피 하나도 제대로 타려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원두 커피나 그라운드 커피의 종류에 대하여 배웠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스턴트 커피도 어떻게 타는가에 따라 향이 다르다.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헹궈 내어 컵의 온도를 따뜻하게 한 뒤 물을 깨끗이 털어 내고 인스턴트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조금만 넣어 완전히 잘 갠 뒤 그 다음에 비로서 나머지 물을 채워 넣어야 향이 살아 난다. 그 뿐 만이 아니다. 커피를 타다 준 사람들 각각의 기호 즉 커피와 설탕과 크림이 어떤 식으로 배합되어야 하는지를 기록하여 놓아야 할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했으니 이젠 됐냐고? 아니. 그 기록한 것을 탕비실에 붙여 놓아 네가 결근했을 때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누구에게 어떻게 커피를 타다 주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이것이 이른바 “지식경영”이다). 거기까지 하면 되었냐고? 아니. 커피,설탕,프림 등이 한달에 얼마나 소요되는지를 통계로 만들어 현재 이러이러한데 이것을 저러저러하게 개선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한다. 거기까지 하면 되었냐고? 아니. 종이컵을 사용하여 비용이 많이 사용되니 개인 머그컵을 준비하자고 하면 어떨까… 등등등

복사는 어떨까? 입사 몇 개월이 되었는데도 복사기는 커녕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에 붙어 있는 여러 보턴들의 기능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직원들이 대다수이다.(나는 신입사원들이 먼저 고참 사원들에게 복사기 사용 설명서나 키폰 사용 설명서를 달라고 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팩스는 또 어떤가. 팩스 기기에 달린 보턴들에 대해 완벽하게 알려고는 아예 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이 팩스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며 보내는 직원 역시 100명 중 한명 꼴 밖에 되지 않는다. 99퍼센트는 자기가 가진 서류 원본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보낸다. 그 원본에 칼라 도표가 사용되어 있다면 팩스를 받았을 때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칼라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읽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신문 기사 같은 경우 작은 글씨들을 팩스밀리가 뭉개 버린다는 것을 미리 생각하여 그 부분을 크게 확대해서 보내는 사람 역시 만나기 정말 어렵다.

아주 오래 전의 일. 선박 챠터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존에 사용하던 뉴욕의 어느 해운 회사 대신 새로운 해운 회사들과 협상을 하던 중 거래 가능성 있는 곳에 대외비로 문서 하나를 보내야 하였다. 너무나도 중요한 문건이어서 나는 차장급 직원에게 직접 팩스 송신을 지시하였다. 그랬더니 얼마 후 절대로 그 문건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될 기존 거래처가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원인을 파악하여 보니 팩스 기기에 달려 있는 단축 다이얼을 엉뚱하게 눌러서 잘못 발송된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회사가 입은 손해는 그 차장의 연봉 몇 년 치에 해당되었다.

은행 심부름? 나는 담당자가 법인이 내야 할 주민세를 제때 내지 않아 과태료만 천만원 가까이 납부한 적도 있다. 과태료는 법인에서 세전 비용으로 처리할 수 없다. 때문에 과태료 천만원을 납부하였다는 말은 그 천만원에 해당되는 법인세와 주민세 마저 추가로 납부하게 된다는 의미이므로 법인에서는 천 몇 백만원을 손해 보게 된다. 애인 생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금 납부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행 심부름을 하찮게 여겨 생긴 결과이다.

서류 정리는 어떨까?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가 세상에 등장 하기 오래 전 DOS시대의 이야기이다. 하드 디스크 가격이 너무나 비싸 DOS용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들은 1 바이트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문서제목을 붙일 때 글자수의 제한을 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굴지의 법무법인에서 오래 일했던 직원이 경력 사원으로 입사하였다. 나는 전 직원 중 일부를 골라 불시에 컴퓨터 파일을 체크해 보곤 하였는데 반년 정도 후 그 직원의 파일 목록을 보곤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문서 제목이 모두 001,002,003 순으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법무법인에서도 이렇게 했었는데요…”였다. 내 대답은 “이런 닭 대가리…”(속으로만 말했다). 도대체 그렇게 정리한다면 무슨 문서가 어디에 쳐 박혀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허드레 일에서 생겨난 잘못은 종종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지만 담당자들은 기껏해야 시말서를 쓰거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만 한다. 야단을 심하게 맞으면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 시킨다.

그러면서도 허드레 일 하려고 취직한 것은 아니라고? 그런 작은 것 하나 귀신처럼 하지 못하는데 더 큰일을 달라고? 웃기지 마라. 일본 교토에 있는 일본전산은 연간 매출액 3,000억엔 이상인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이다. 이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1년간 무조건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 나가모리 사장은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청소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드레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존심을 내 세운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취직한 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존심? 뭔 자존심? 대학물 먹었다는 자존심? 꼴갑 떨지들 말고 주변을 살펴 보아라. 자존심 센 사람을 우리는 다른 말로 콧대가 높다고 한다. 콧대 센 사람을 당신은 좋아하는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콧대를 세운다면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는지 한번쯤 고려해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자존심이 세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성경에도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는 말이 나온다. 낮은 곳에서 걸레를 누구보다 먼저 잡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면서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 치울 때 그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인정할 것이다. 당신의 자존심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 의하여 당신이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 받을 때 저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추신: 나는 돈을 꽤 모은 뒤에도 새로운 사업을 하게 되면 작업복을 입고 밑바닥 일을 하곤 했다. 그래야 일 전체를 구석구석 빈틈 없이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허드레 일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당신이, 허드레 일은 당신보다 못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으로 믿는 당신이, 사업이나 장사를 하겠다고? 돈을 벌고 싶다고? 꿈 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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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사람이 준다. 윗사람에게 잘해라.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기성 연극을 부정하는 프랑스 신역극의 선구자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텅 빈 공간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등장 인물들에게는 시간 관념이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언제나 현재다. 그곳에서 부랑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가 축을 이루는 이 연극에서 두 사람은 ‘고도’를 기다리면서 ‘고도’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 죽어버리자고 한다.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이 "만일 고도가 온다면?"하고 묻자 블라디미르는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난해한 연극을 이해하여 보자는 것은 아니다.‘고도’가 신을 의미하는 말이건 무의미의 의미이건 뭐건 간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기회가 3번은 온다고 하지 않는가.“해와 달은 누구에게나 빛을 준다(日月無私照)”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 기회는 어디서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 혹시나 ‘고도’처럼 오는지 안 오는지 불확실한 가운데 세월만 잡아먹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명심하여야 할 사실은 그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며 당신 주변의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돈이 그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고 학벌이 주는 것도 아니다. 기회 수여의 결정권자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운동가 출신인 이명박은 1965년 현대건설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으나 불과 12년 만에 36살의 나이로 사장직에 올라 샐러리맨들의 우상이 되었다. 열정과 담력, 저돌성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현대건설 회장직을 던지고 정치인이 되었다. 비록 그는 자서전에서 "오너는 결코 전문경영인을 믿지 않는다"며 "한국에서 전문경영인은 사장이 아니라 ‘사장급 직원’에 불과하다"고 꼬집었지만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은 현대건설이라는 조직이 아니라 지금은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정주영 회장이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평생 경리 업무만 보았을 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명박은 기회를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를 눈 여겨 보다가 기회를 제시한다. 이것이 기회의 법칙이다. 왜 그럴까?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다. 이미 부자가 된 사업가들 중에는 돈에 대하여 동물적 후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우리들처럼 하나 뿐이다. 혼자서는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여러 나라의 성공한 사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필요하기는 한데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실업률이 제아무리 높아도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이 수많은 경영자들 입에서 나오지 않는가.

기회를 주고 싶은데도 기회를 받아먹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은 사업가들과 부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당신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지며 그들은 대개 당신보다 한 세대 앞에서 기득권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라.

빌 게이츠가 오늘의 성공을 갖게 된 것도 마이크로 소프트의 초창기에 IBM의 어느 이사가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IBM 에서는 PC 에서 사용할 소프트웨어(disk operating system)를 찾고 있었고 이미 다른 유명한 소프트웨어 회사와 접촉한 바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IBM 의 이사가 방문하였음에도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은 건방지게도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IBM의 이사는 이름도 없는 마이크로 소프트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정장 차림으로 예의를 갖추고 기다리던” 빌 게이츠를 만났던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성공적인 벤처 캐피탈 회사로 헴브리크 & 퀴스트(Hembrecht & Quist) 라는 곳이 있다. 이 회사에는 하루에도 수십통 씩 벤처 기업가들로부터 돈을 투자하여 달라는 애절한 투자 요청서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 요청서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투자심의를 할 때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이나 연구비 비중, 혹은 시장 점유율일까? 아니다. 창업자 자신의 소질과 자질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투자 요청서나 사업 계획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우선은 믿을만한 인맥을 통해 소개를 받은 기업가들을 우선 면접한다.

한때 주식시가 총액이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능가해 관심을 모았던 인터넷 접속 장비업체 시스코 시스템스 역시 직원 중 60% 가량을 내부 핵심인력의 추천에 의해 채용한다.

이러한 여러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신을 기회의 신에게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은 이미 이 사회에서 능력이 검증되어 돈과 지위를 획득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제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거나 그들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따라서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이제는 옷차림이나 언행에 있어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과연 당신보다 10년 이상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생각해 보라. 친구들에게 쓰는 말투를 그대로 나이든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되면 당신은 “예의도 모르는 건방진 놈”으로 인식되게 될 뿐이다.

이것은 외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다국적기업에서 일을 했었을 때의 일이다. 미국에서 남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한 일본인 직원이 도쿄(東京)에 있었다. 남미인들의 영어는 일반적으로 거칠고 공손하지 않으며 길거리 소년들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역시 비슷하였다. 나는 그가 나를 포함한 그 어느 외국인 상사들에게도 경칭이나 공손한 표현을 쓰는 것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 약 1년후 그는 홋카이도(北海道) 지사로 좌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말투나 옷차림에 대하여 인식 조차 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아주 극심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자기 친구로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에게 e메일을 보내도 언어 사용이 친구들에게 보내는 식이다. 나에게 독자들이 보내는 메일들을 읽어 보면 채팅 언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젊은 친구들이 생각 없이 자기 멋대로 지껄이면서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들도 부지기수이다. (독자가 보낸 첫번째 메일을 읽자마자 내 마음이 움직여 독자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하고 상세하게 내 의견을 말해 준 경우는 오직 딱 한 번, 롯데 그룹의 어느 직원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보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그의 흉내를 낸 메일들이 들어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행동은 또 어떠한가. 인사 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윗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커녕 윗사람을 자기와 동급으로 여기는 행동들이 그대로 표출된다. 명심해라. 윗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는 커녕 예의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사람으로 일단 비치게 되면 기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연장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자기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당신의 친구들이 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오직 진짜 부자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이 빌 게이츠의 친구이었음을 보편화시키지는 말라. 당신의 친구가 빌 게이츠가 아닌 이상은 당신 친구가 당신에게 제공하려는 기회의 대다수는 자기가 만드는 제품을 팔아달라는 영업의 기회이거나 당신의 자금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기회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내 말을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당신 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이지 그들에게 아부하라는 뜻은 아니다. 또 우리가 흔히 사람 하나 좋다 혹은 착하다고 말하는 그 경우는 사람이 유순하다는 의미이지 능력이 있고 소질과 자질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윗사람들이 찾는 사람은 능력이 있고 태도도 좋은 사람이지 유순하고 착하며 공손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래도 윗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일가친척이 우선이라고 믿을 지 모른다.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일가친척을 우선시할 것이다. 능력도 없는 일가친척을 우선시하는 윗사람은 당신이 던져 버려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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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찾지 말라

20세기 말,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였을 때 미 해병대가 파견되었다. 게릴라들은 주민들을 나무 십자가에 묶어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 총을 쏴 댔다. 미 해병대는 이런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뒤로 물러 나기만 했다. 그 결과 미군이 들어갔던 지역들은 모두 게릴라들이 석권하였고 그곳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한편 프랑스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였다. 외인부대는 자발적인 의사로 프랑스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군인이 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십자가에 주민들을 묶어놓고 그 뒤에 숨어 공격하는 게릴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주민이고 뭐고 고려함이 없이 그냥 다 쏴 죽였다. 그리고 게릴라들은 적어도 외인부대에 대해서만큼은 자기들의 수법이 통하지 않음을 알았고 후퇴하였다. 그 결과 외인부대가 들어간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신이 만일 작전 사령관이라고 하자. 어느 쪽 방법을 택할 것인가. 무고한 양민들 뒤에 숨은 적군을 살해하고자 그 양민들도 쏴 죽일 것인가. 아니면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후퇴할 것인가.

대부분의 전쟁 소설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은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는 못하여, 또는 적군 조차 죽이지 못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마는 사람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부대 전체가 입게 되는 손실은 별로 묘사되지 않는다).

1898년 독일에서 출생한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줄거리도 마찬가지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태풍 속에서 공습은 계속되고 폐허만 남은 세상에서 주인공 그래비와 운명적인 여인 엘리자벳은 찰나적인 사랑에 빠진다. 눈 덮힌 러시아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온 그에게 엘리자벳의 사랑은 존재의 이유가 될 정도로 강렬하다. 죽음의 거리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은 인간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과 동시에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다시금 부대로 복귀한 주인공 그래비는 엘리자벳이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살려준 빨치산에 의해 오히려 저격당해 허무하게 죽어간다.

가수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 비디오에서는 군인 한명이 정글 속에서 베트콩을 경계하지 않고 나비를 구경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전쟁터에서 전쟁의 법칙을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찾으면 당신이 죽는다.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려있던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 '서바이버'(Survivor)에서 참가자들은 두팀으로 나뉘어 경쟁하게 된다. 각 팀은 매 단계마다 자기 팀의 참가자 중 한명을 축출해 버려야 한다. 최후의 승자는 그러한 경쟁과 축출을 통해 끝까지 남은 사람이 되게 된다. 때문에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역할을 하게 될 팀원은 남겨두어야 하였지만 역으로 그 팀원이 나를 축출해 버리면 나는 패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아프리카 편을 보았다. 어느 한 팀에서 여자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그 환자를 돌보겠다고 약속한 팀원은 환자에게 음식을 준다는 미명하에 몰래 자기도 음식을 먹었다. 훔쳐먹은 것이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동료들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한 그 팀원이 당연히 제일 먼저 축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제일 먼저 축출된 사람은 여자 환자였다.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환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논리가 팀원들의 판단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매 단계마다 각 팀에서 축출된 사람은, 인간관계에만 치중한 사람과 개인적인 공로 혹은 명예만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최후에 승자가 된 사람은 동료들과의 동맹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새겨들어라!)

당신이 경쟁과 축출의 게임이 싫다면 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적군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군대에 가지 말고 대신 감옥살이를 하면 된다. 내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경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이 게임이 요구하는 차가운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휴머니즘을 찾는다는 것이다.

세계화 물결 속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경제 전쟁은 더더욱 심화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휴머니즘 향기 그윽한 대안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경제 전쟁이라고 말을 하여도 시큰둥 하게 듣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내 눈에는 지금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총탄들이 보이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떨어져 땅이 움푹움푹 패이고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냉전 이후 더 이상 국가의 역할은 없으며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사회적 평등과 책임을 전제하고 있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다)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지역갈등을 그 어두운 그림자로 갖고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그림자를 없애주고 살벌한 경제 전쟁을 종식시킬 앤소니 기든스의 “제3의 길” 같은 것은 과연 있는 것일까? 파이넨셜 타임즈의 컬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제3의 길을 " 유럽의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화려한 수식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제 3의 길이 있건 없건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길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길이 마련되기 전에 나는, 어쩌면 당신도 ,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당신이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경제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변화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총체적 중산층 국가로 불리던 일본마저도 그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해 중류층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이 게임은 아주 지극히 단순하다. 이익을 누가 더 많이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그것 뿐이다. 그것 이외 고려하여야 할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다. 지역 경제를 생각하거나, 정치적으로 특정 계층을 고려하거나, 기존 근로자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권에 신경을 쓰거나 하게 되면 그것은 곧 경쟁력 상실을 가져 온다.

전쟁 중에 나비가 아름답다고 해서 구경하지 말라.
전쟁 중에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손을 내 밀지 말라.
전쟁 중에 하늘 노을이 아름답다고 해서 눈길을 보내지 말라. 그래야 총에 맞아죽지 않는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살아 남으려면 휴머니즘이 아니라 손익계산서에서 이득이 나와야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냐고? 그래야만 경제 게임에서 이길 수 있고 자본이라고 하는 힘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지니지 못한 자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외교관인 장 지로두가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이 휴머니스트라면 경제 게임을 하지 않으면 된다. 축구팀에 농구 선수가 들어와서는 왜 손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징징대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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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사랑을 믿지 말아라.



혹시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의 이성에게서 가슴이 갑자기 아릴 정도로 시려지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고 난 뒤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아니 가슴이 내려 앉는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 살기가 만만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젠장. 단 하룻밤만이라도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대상.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고 마는 영혼. 이른 바 휠(feel)이 꽂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뭘 알겠냐 만은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으며 운명적 만남으로 찬미하는 것 같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Eyes Wide Shut 에서 그러한 감정은 현실을 위협하는 위험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성공한 의사 빌 하퍼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앨리스는 친구가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성으로부터 강한 성적 유혹을 받는다. 다음날 앨리스는 빌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한다. 여름 휴가 때 우연히 한 해군장교와 마주쳤는데 그에게 너무나도 강한 성적 충동을 느껴 그와 하루 밤만 보낼 수 있다면 남편과 딸 모두를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말이다.

영화는 우리의 두근거리는 마음 뒤편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이 성적 욕구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른다. 성욕을 일으키는 유전적 DNA 가 우리에게 본능으로 있다는 말이다. 그 DNA의 역할은 종족 보존을 위한 교미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며 이 유전자로 인하여 수컷은 자기의 씨를 수많은 암컷에게 뿌리려고 하고 암컷은 우성 인자를 받으려는 목적에서 더 나은 수컷을 선택하게 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을 프로이드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성적 본능으로만 조명할 수 있느냐고? 당신이 아무리 플라토닉 러브의 신봉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이성을 좋아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성적 본능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 것이 실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성적 DNA가 가져온 은밀한 충동이다. 이른 바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운명적 만남이라는 것이 사실은 종족 보존 DNA가 요구하는 최적의 교미 상대를 만났을 뿐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무대 위에 오르게 되면 우리의 행동과 마음을 그렇게 성적 유전자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라. 이것은 2000년 2월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2년간 남녀 5000명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여서도 입증된다. 연구팀은 가슴 뛰는 사랑은 18~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

미시간대 로버트 프라이어 교수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사랑에 빠지면 분비되는 세로토닌 등은 상대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해 사람을 눈멀게 만들지만 유효기간은 2년 정도라고 했다. 성적 호기심이 일단 채워지면 더 이상 화학 물질이 처음처럼 분비되지 않으며 연인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실은 유전자가 분비 시킨 화학물질이 가져온 결과라는 말이다.

본능에 의해 지배되어 시작되는 사랑은 그 원시적 속성으로 인하여 우선은 외모 같은 육체적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첫눈에 반하거나 첫인상이 좋아서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첫 단추 하나로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본능에 의하여 그렇게 지배된 사랑은 그 원시적 속성으로 인하여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다.

칠순이 다 된 영원한 은막의 여왕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8번의 결혼과 17번에 걸친 연애행각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매번 결혼을 할 때마다 “이제야 내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 사랑은 모두 깨져 버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본능에 의해 지배된 만남을 진정한 사랑으로 믿었기 때문 아닐까?

수많은 나라들에서 신혼 부부 3쌍 중 한 쌍 이상이 이혼을 하는 이유도 본능에 의해 치장된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오해하고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부들이라 할지라도 상당수는 이미 마음이 식어버린 채 살아 간다. 국정홍보처가 전국 20세 이상 남녀 4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다시 태어나면 현 배우자와 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47.8%나 됐다. 두 쌍 중 한 쌍은 이미 깨져 있다는 말이다.

어느 부부는 남자가 여자를 만난 순간부터 너 아니면 못산다고 농약까지 마시며 자살 소동까지 벌이면서 결혼하였다. 헌데 1년도 안가서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여자와 살림까지 차렸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하나 둘인가.

이혼 경력이 있는 기혼자였던 미국인 심슨 부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녀와 결혼하고자 영국 왕위를 내 놓았던 에드워드 8세의 경우는 어떠할까? 당시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였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함을 깨달았다.”(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그날 밤 에드워드는 호주로 건너가 몇 개월을 있으면서 심슨 부인이 이혼 수속을 마칠 때 까지 기다렸고 드디어 프랑스에서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려 온 이 사랑 이야기는 아마도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꿈꾸는 러브 스토리일 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살았을까? 그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하여” 별거하였다. 새겨들어라. 성격차이라는 말은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대단히 많이 싸웠다는 것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외교적 언어라는 것을.

기억하라. “왕자와 공주는 만나자 마자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고 행복하게 평생을 같이 보냈대요.”라는 식의 동화들은 적어도 절반은 거짓이므로 만나자마자 운명적으로 빠져버리는 사랑은 기대하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라. 운명적 만남의 두근거림은 사랑이 아니라 본능적 DNA 가 화학물질을 분비 시켜 당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원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과의 만남에서 누구나 외모 혹은 첫인상에 호감을 느껴야 관계를 열어갈 수 있지만 그것이 지속시켜주는 사랑의 시간은 길지 않다. 순간적으로 불 붙기 시작한 뜨거운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는 예는 대부분 그 사랑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영화 타니타닉에서처럼 죽음이나 사회적 굴레로 인하여 헤어져야 하는 경우에서 주로 나타난다. 즉 사랑의 시간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성적 본능이 이미 충족된 상태가 되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진정한 인간의 사랑은 육체적 조건에 집착하는 유전적 본능의 지배에서 한 단계 뛰어 넘는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 개성, 취미, 습관, 지성, 능력, 가치관 등등의 내면 세계에 매력을 느껴야 유지될 수 있다. 시작은 육체적 매력에 사로잡혀 시작되어도 내면의 뒷받침이 없다면 곧 사라질 거품이 된다. 때문에 사랑의 순서를 말한다면 이성(reason)의 교류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감성으로, 다시 감성이 감정으로, 그리고 그 감정이 본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결론: 남자는 자신이 어떤 여자를 만지고 싶고 애무하고 싶고 그 여자와 섹스하고 싶다고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섣불리 착각하지 말 것. 여자는 남자와 섹스를 할 때 느끼는 포근함이나 따스함 등등을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 증거로 100% 과신하지 말 것. 남자 여자 모두, 육체적으로 상대에게 길들여져 있고 벗은 몸의 친밀도가 크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계속 지속될 것으로 오판하지는 말 것. 만날 때 마다 스킨쉽 혹은 섹스에 탐닉하는 관계라면 당장 그만 둘 것. 가장 중요한 것: 외롭다고 사람을 사귀지는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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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에게는 과소비가 없다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암초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과소비하는 생활 태도이다. 흔히 과소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부유층의 과소비, 중산층의 모방소비, 하류층의 자포자기식 실망 소비가 그것이다.

하지만 과소비가 능력 이상의 소비를 의미하는 이상, 부유층의 과소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소비는 부자들이 하는 게 아니다. 부자도 아니면서 졸부들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분수 이상으로 소비하는 것이 과소비이다. 나는 한번도 부자들이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여 카드 빚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능력에 따라 소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때로는 능력에 맞지 않게 소비하였지만 과소비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에 먹고 입는 것에서 거의 거지 수준으로 살면서 엄청나게 절약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나는 과소비를 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지게 사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술 담배를 모두 끊고 그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에 몰두 하거나 이웃 사랑에 사용하는 사람 역시 삶을 지혜롭게 살 줄 아는 사람 아니겠는가.

내가 과소비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입고 걸치고 마시고 먹고 놀고 타는 데 있어서 갖가지 그럴 듯 한 핑계를 대며 이루어지는 중산층의 모방 소비와 하류층의 실망 소비이다. 능력도 없는데 부자들의 소비를 흉내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소비가 부자들을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비하는 것들의 대다수가 실은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업체들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차재호 서울대 사회심리학 교수는 심리학적으로 과소비 성향은 권력욕구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과소비를 하는 것은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짜릿한 맛을 즐기기 위함이고 희귀한 물건을 사 모으는 것은 권력욕구의 본질이 남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많은 수의 신용 카드를 소유하는 경향 역시 그것을 뽐낼 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카드로 호기 있게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소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애리조나 대학 경영대학원의 애릭 린드플레이시 박사팀이 1997년 발표한 논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논문은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젊은이들은 물질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충동구매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다. 소비벽이 심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물건이나 돈이 아니라 진실되고 따뜻한 인간관계라는 말이다.

버는 족족 돈을 쓰느라고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는다고? 카드 빚만 계속 쌓인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진실된 인간관계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싶어하는 허세만 강한 정신적 미숙아일 수도 있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소비가 과소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주는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자기 계발을 위한 지출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분 내느라고 사용했는가? 라이프 스타일 유지? 문화 생활을 하고자? 휴가를 즐기고자?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과소비로 몰아 부친다(명심해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한한다”는 조건이 있다).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특별한 천재적 재능도 없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일단은 최우선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할 것 아닌가. 쓸 것 다 쓰고 즐길 것 다 즐기고 무슨 돈으로 뭘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지금 당신의 서랍과 장롱 속에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라. 그리고 직접 확인해 보라. 평상시에는 기억 조차 나지 않는 것들을 당신이 상당히 많이 갖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것들을 살 때는 갖고 싶어서 샀을 텐데 왜 지금은 기억 조차 나지 않는 것일까? 없어도 될 것들을 구입하였기 때문 아닐까?

없어도 되는 것을 구입하는 그 헛된 행동에서 벗어나려면 제일 먼저 신용카드를 없애 버려라. 당신에게 꿈을 주고 당신을 세상에서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카드? 당신에게 겁을 주고 삶을 텅 비게 만드는 카드만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앞서가는 카드? 빚에 있어서 앞서 갈 것이다. 당신에게 돈을 되돌려 주는 카드? 원숭이 같이 조삼모사를 기뻐하지 말라. “여러분 부자 되세요?” 당신이 카드를 많이 쓸 때 부자가 되는 것은 그 카드 회사이고 그 회사 직원들이지 당신이 절대 아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s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원제는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이다)에서 이제 역사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끝으로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완성된 상태에 도달했다고 까지 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누구나 다 평등한 사회는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사회나 다름없는 문제를 안고 있으며 평등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역으로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반항하는 위험 요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를 꿈꾸지 말아라. 그리고 명심해라.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당신이 돈을 어디에 사용하고 어떻게 모으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신중하게 자기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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