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정면으로 다루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작가는 좌우대립의 철저한 희생자였다. 6·25전쟁 중 투옥된 남편을 만나러 서대문형무소를 매일 기웃거렸고, 작가 자신과 가족은 일상화된 위험과 공포에 노출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차츰 손상되고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재물을 탐하는 모순을 접하면서 이데올로기의 허망을 보았다. 그에게는 생존이 더 급했다. 그가 보기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치아를 통해 수용된 사회주의는 로맨티스트적·계급적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맑스 보이’ ‘엥겔스 걸’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탐구와 함께 박경리는 ‘생명사상’에 대한 모색을 계속한다. 여주인공은 전장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무관한 채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마치 ‘전장’ 속에서 ‘시장’의 세계를 살아가는 듯한 인물이다. 작가가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 것은 헌신적이고 가식 없는 사랑을 통해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박경리 문학의 뛰어남은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사적 비약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좌익의 평등 열망과 우익의 자유 열망, 그리고 각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들 간의 설전이 소설의 등줄기를 타고 앙상블을 이루어낼 때, 이미 박경리는 당시 어느 작가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줬다. 최인훈의 ‘광장’은 인텔리 주인공과 농부를 대면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내려온 남자 주인공을 박경리는 농부와 대면시킨다. 누가 이것을 행동주의자의 로맨티시즘적 한계라고 하겠는가?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
박경리의 삶은 생명을 향해 열려 있었던 세월이었다. 인천에서 꾸린 짧은 신접살림, 연안에서의 짧은 교편생활, 전쟁과 남편의 죽음, 용공 혐의, 아들의 돌발적 죽음, 사위인 김지하의 출현, 유신과 폭력, 그리고 새롭게 다가온 생명에 대한 연민, 이런 한국 현대사의 얼룩 속에 홀로 내던져진 작가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한(恨)의 근원을 캐어 생명사상을 잉태하는 크고 넓은 모성이 된다. ‘토지’ 탄생의 전경(前景)이 여기서 펼쳐진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장편소설이다. 동학운동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기록으로 남는다. 작가가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오로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4반세기 동안 완성도를 높여간 것은 우리 문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 문단에서도 아마 이런 식의 작가적 투혼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박완서는 박경리의 영결식에 바친 추모사에 못다 한 이야기를 보탠 ‘신원(伸寃)의 문학’(‘현대문학’ 6월호)에서 ‘토지’를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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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되던 해 진주여고를 졸업한 박경리는 이듬해 결혼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을 여의고 뒤이어 아들마저 잃었다. 어머니와 단 하나의 혈육인 딸을 부양해야 하는 작가의 삶은 가파르고 메말랐다. 전쟁은 분명 뒤틀린 현실을 낳았고, 그 시대를 산 모든 삶을 불구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은 휴지처럼 구겨졌고, 삶은 몸서리쳐지는 고통과 불행의 늪이었다. 당시 전쟁미망인은 생존의 벌판에서, 또 사회적으로 따가운 눈총에서 아무런 바람막이가 없었던 ‘희생의 제물’ 같았다.
박경리는 원래 몽상가였다. 그러나 질곡의 현대사는 그를 긴장시키고 엎드리게 했고 균형을 잡도록 했다. 주어진 현실에서 소망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세속적 욕망은 버려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에겐 삶의 큰 울림을 주는 어떤 세계가 필요했다. 작가는 문학에 매달렸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집념에 가득 찬 도스토예프스키”의 고투에 작가는 감명을 받았고, 제임스 조이스에게선 예술가라기보다는 고도의 장인정신을 배웠다. 토머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토마스 만의 작품과 함께 박경리의 창작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태산준령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문학적 실험을 멈추지 않은 고골리의 작가정신에 공감했고, ‘고요한 돈 강’의 작가 솔로호프를 통해서 작가는 사실적 묘사와 도도한 서사시적 구성에로 시야를 넓혔다.
찬바람 몰아치는 신작로에 홀로 남은 듯한 소외감, 인간의 조건 속에서 튕겨져 나와 바닷가 모래알 하나가 된 듯한 절망감, 왜 사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반복하던 끝에 박경리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계산’이 추천·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초기 소설에는 삶의 신산스러운 풍경이 자전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1990년대 42쇄 찍은 ‘김약국의 딸들’
‘불신시대’를 통해 작가는 ‘소설 쓰는 일’과 ‘사람 사는 문제’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문학적 경향을 보였다. 작품이 일기나 수필처럼 전후의 현실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폐쇄된 주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기구한 삶 속에 유폐된 것 같았다. 그러나 1959년에 발표된 ‘표류도’에서 박경리는 전쟁미망인의 고통에 찬 삶을 주제로 다루면서, 자폐적 고립성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개방적 자세를 취하는 등 상당한 변모를 보인다. 세계와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절대시했던 종전의 주인공과는 달리, “내 피부에, 내 심장에 불행한 인간들은 다정한 친구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 됐다.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 생명이 있기 위하여 나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의 다짐은 외로운 ‘표류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제 박경리는 “억울하고 괴로운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진술의 의미를 뒤집었다. 세상 사람들의 꿈과 슬픔을 이해하고 담아내기 위한 공적 담론으로써 작품을 대하는 소설가로 한 걸음 뛰어오른 것이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박경리로 하여금 전업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한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 우선 어딘가 ‘낯익은 이야기’란 느낌을 받는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의 어떤 불행한 집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느낌, 아니면 내 고향 어느 대가(大家)의 몰락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은 2004년 마산 MBC가 특집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의 대담에서 박경리 자신이 “‘김약국의 딸들’은 솔직히 말해 통영의 떠도는 얘기를 모아서 재편집했다”고 말한 것처럼 설화적 요소가 짙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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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방송 드라마로도 몇 번씩 각색된 대하소설 ‘토지’.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로 평가받는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지난 5월8일 여든둘의 고단한 삶을 놓아둔 채 우주로 사라졌다. 전쟁미망인의 삶을 그린 자전적 소설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50여 년. 자신에겐 철저하게 인색한 그였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후한 삶을 살았다. 소설을 통해 한(恨)과 민족, 생명의 참뜻을 가르치고 간 작가 박경리. 그는 왜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팽팽한 삶”을 살면서도 ‘생명’에 대한 외줄을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일까.

 
 




형식은 문인장이었지만 사실상 국민장(國民葬)과 다름없었다. 세속의 명예나 인기는 비속하고 허황된 것이라고 한사코 거부하던 그에게 세상은 진정성을 다해 존경과 예의를 바쳤다. 신문은 1면에, 방송은 첫머리에 작가의 죽음을 보도했고, 따뜻하고 융숭한 해설과 장례 진행의 속보를 계속 내보냈다.
현직 대통령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문화훈장을 직접 추서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난 5월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햇볕에 탄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그 어떤 한국인에게도 이처럼 간곡한, 국민장이 아니면서도 국민적 애도에 젖은 장례가 과거에 있었던가. 이는 평생을 두고 자신에겐 가혹하리만큼 인색하고 냉정했던, 그러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겐 베풀고 보살피고 거두는 일에 헌신을 다한, 한 특별한 영혼에게 바치는 전 국민적 헌사였는지 모를 일이다.
‘초저녁 범띠생’ 사주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박경리가 문단에 갓 등장한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더 된 어느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리던 날, 그가 한 말이다. 작가 자신 “얼결에 떠밀려 나가 말했다”고 했지만, 그 내용은 작가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파란만장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박경리는 생전에 어느 강연장에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미발표 유고 시 ‘일 잘하는 사내’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거친 풍파를 헤쳐온 삶에 대한 아픔을 진솔하게 토로했다. 일부 청중은 당시 박경리의 대답을 듣고 흐느꼈다.

“다시 태어나면/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홀로 살다 홀로 남은/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박경리의 어린 시절과 젊을 때 모습.

작가 박경리는 1926년 10월28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훗날 문학적 자전(한국일보 1984년 7월1일자)에서 밝혔듯이 그의 출생은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 자신의 사주풀이에 의하면 박경리는 초저녁 범띠생.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이므로 여자치곤 기가 아주 센 사주였다. 아버지는 작가를 낳은 뒤 어머니를 떠났고, 이후 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 감정 속에서”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진주여고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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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개이야기]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 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념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부리가 깨지고 발톱도 뽑아내는 고통이 수반하는  충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쉽게 얻은 충전은 쉽게 방전하기 때문이다.

 

 

[라면과 쏘주 한잔]

 

군대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들었던 건 새벽 경계근무다.

곤히 자다가 고참이 깨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고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닌 나지막한 관등성명을 내고 일어나는 것이다.관등성명을 대지않고 일어나지 않으면 군기가 빠졌다고 아침 점호때 깨질 것이 분명하다.

훈련과 작업, 그리고 교육을 받는 군대생활에 잠이 주는 그 편한함은 하루 중 누구에게도 방해받지않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겨울날 고참들의 근무복을 챙겨주고 헐레벌떡 움직여 내무실을 나서면 한 겨울 칼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몸서리친다. 이 추운날 2시간을 견디는 것은 참음이 아니라 고통이다.

낯설은 부대, 이등병에게 밤하늘의 별과 칼바람은 혹독한 시련이다.

힘든 야간경계후 복장을 해제하고 지친몸을 침상에 뉘려 하는 데 같이 근무를 한 고참이 나를 부른다. 제대가 한달도 안남은 말년의 최고참이 베치카 옆에서 나를 부른다. 베치카 옆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끌여지고 있었다. 나무 젓가락을 주면서 먹으라는데 한 입 먹으니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라면은 처음 먹어 보는 것 같다. 김치까지 송송 썰어넣어서 벌겋게 끓인 라면은 환상의 맛 그자체이다. 추위와 피로가 확 물러서는 기분이다.

고참이 옆의 수통에서 무언가  가득 한 컵을 따라준다. 마시라해서 한잔 마시니 쏘주 한잔이 아닌가?
쏘주가 그렇게 단줄은 난생 처음 알았을 것이다. 달다 달다 라는 말로도 표현 못할 천상의 맛 그자체이다.
라면과 쏘주 한잔... 그 새벽에 고참과 이등병도 없었고 환상의 시간속에서 나는 군생활을 당분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충전을 제대로 얻었다.

  깊은 심연의 바닷속에서 두레박을 건져서 올린 그 라면과 쏘주 한잔은 군생활 중 나에게 최고의 감사한 충전이었다.

 

 [시골밥상과 사홉 소주]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한 친구는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였고 또 한 친구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다. 나는 양호와 많이 취함의 중간에서 헤메고 있었다. 밤 10시를 넘어선 시간이다. 한여름 날씨지만 무덥던 한 낮의 열기는 사라지고 시골 밤은 피부로 쌀쌀함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막차는 끟기고 술들은 취해있고 잘 곳은 없는 우리는 한심한 젊은 청춘들이다. 상당히 큰 저수지의 물들만이 그저 조용히 흐르고 있구나.

 

그랬다.

고교를 졸업하기전 취업을 나가는 데 그때가 몇일 남지 않은 날이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익산에서 여기 완주 깡촌 시골 저수지까지 차를 몇번 갈아타고 왔는지 모르겠다.먼저 텐트치고 일박을 한 친구들이 술만 사가지고 오면 된다하기에 친구 3명이서 밤 새워 놀아보자고 해서 도착해보니 텐트친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묵었던 흔적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다.

무슨 사연이 있으려니... 그저 한 여름에 얼어 죽기나 하겠냐 하고 사왔던 술들을 마시고 또 마셨다.  밤이 깊어오고 취한 친구가 속출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따! 이거 어디든 밤 이슬 피해 잠을 자야지 안되겠다. 취한 친구를 깨워서 인가가 몇채있는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술에 취해서 뒹글어 이마가 까지는 놈,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놈, 소피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놈... 여러 놈들이 많이도 취한 채 아무집이나 문을 두드리니 시골 적막한 밤에 우리는 불청객이자 아주 몰지각한 건달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 얼른 들어와 자라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들이지. 농사일하는 저 분들에게는 깊은 수면에 빠져있는 데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그냥 재워달라고 해도 시원찮은데 술에 취해 얼굴도 불량하지, 완전히 인간말종 흉내를 내니 당연한거지.문전박대는 당연한거지...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오셨다.

어떻게 이야기를 드렸는데 흔쾌히 들어와서 자라고 하셨다. 술취한 놈씨를 방안에 밀어놓고 그대로 뻗었는데 이불을 가져오시는 할아버지와 양은주전자와 컵을 가져다 주시는 두 분을 뵈고 그저 아무 기억도 없이 쓰러졌다..

해가 중천에 떴나 보다. 할머니의 소리에 눈을 비비며 대청마루에 나갔다. 한상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이 우리를 기다린다. 보기에도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식들이다. 갖은 야채와 반찬들, 고추에 오이,그리고 강된장으로 만든 쌈장,특히 육개장같이  김치를 넣고 끓인 국그릇이 눈에 띄였다.
밥 그릇과 국 그릇도 인심만큼이나 크고 넓다. 크다. 완전히 뚝배기같다. 옛날 할아버지들이 드시던 쇠 밥그릇이다.

말 그대로 시골밥상 그 자체다. 보기만 해도 인정이 듬뿍 담긴 시골밥상 말이다.

 
"너그들, 밤새 술 마시드랴 힘들었제. 자 여그 밥 많이 묵고 정신들 후딱 차리그라! 내 너그들 내 막내 자석 같아서 어젯밤에 재워준 거래이. 젊은 놈들이 어째 이기지도 못하는 술들을 그렇게 쳐묵고 정신 못차리고 댕기는 거여. 막내아들이 서울로 돈 벌러갔는데 아마 너그들 보다는 몇살 더 먹었을 걸. 그리고 이거 한잔들 혀!"

 하시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밥상옆에서 꺼내시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저것은 소주다. 그냥 작은 소주가 아닌 사홉들이 소주다. 작은 대접에 한잔씩 가득 따라 주시면서 하시는 할머니 말씀.

 "야들아! 술은 말이여. 술로 푸러야 하는 벱이여. 한잔씩들 쭉 마셔불면 속이 싹 가라않을 것이여. 어서들 먹더라고..."

하시면서 할머니가 먼저 주욱 드셨다. 고추를 장에 찍어드시면서 찌개를 한 수저를 맛깔스럽게 드시는데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영감이 없어서 아쉽다는 말씀도 하셨다.
친구들과 한잔씩 마셨다. 도저히 못 마실것 같은 술을 마셨다. 그런데 와이리 시원하고 입에 좍 달라붙는지 모르겠다.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끓여주신 해장국은 수저가 바쁘게 움직였다. 국에 밥을 가득말아 넣어 정말 맛깔스럽게 먹었다. 중간 중간 소주를 한잔씩 반주를 하는 데 그 맛이 그렇게 명품이 될 줄은 정말 그때는 몰랐다. (그날 이후로 지금껏 나는 술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에도 소주 한병은 기본이고 두병까지 마셔본 날도 내 인생에 쾌 된다.) 한 여름날에 대청마루에서 산과들을 마주보면서 숙취를 깨야하는데 더 한잔하는 그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할머니는 떠나는 우리를 보시면서 금새 정이 드셨는지 꼭 또 놀러오라고 하시면서 서운함을 내 비치셨다. 그리고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셨다. 펴보니 오천원짜리 지폐였다.

" 얼마 안되는구마. 너그들 차비하고 취업 잘 다녀오거래이. 술좀 작작 조금만 쳐묵고 말이다."

세상 그 어떤 말로도, 감사하다는 말의 몇 백배의 말로도 표현 못 할 감동이었다. 내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가버린 진정한 감동이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면서 꼭 다시 들려서 맛난거 사가지고 놀러오겠노라고 약속을 드렸다. 버스는 먼지를 휘날리면서 멀어져갔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서 계시면서 손을 흔드셨다.
정말 내 친할머니보다 더 한 감동이 휘몰아쳐와 안 보이는 곳까지 계속해서 할머니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 마음의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나를 잡아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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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밥상과 사홉 소주]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한 친구는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였고 또 한 친구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다. 나는 양호와 많이 취함의 중간에서 헤메고 있었다. 밤 10시를 넘어선 시간이다. 한여름 날씨지만 무덥던 한 낮의 열기는 사라지고 시골 밤은 피부로 쌀쌀함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막차는 끟기고 술들은 취해있고 잘 곳은 없는 우리는 한심한 젊은 청춘들이다. 상당히 큰 저수지의 물들만이 그저 조용히 흐르고 있구나.

 

그랬다.

고교를 졸업하기전 취업을 나가는 데 그때가 몇일 남지 않은 날이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익산에서 여기 완주 깡촌 시골 저수지까지 차를 몇번 갈아타고 왔는지 모르겠다.먼저 텐트치고 일박을 한 친구들이 술만 사가지고 오면 된다하기에 친구 3명이서 밤 새워 놀아보자고 해서 도착해보니 텐트친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묵었던 흔적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다.

무슨 사연이 있으려니... 그저 한 여름에 얼어 죽기나 하겠냐 하고 사왔던 술들을 마시고 또 마셨다.  밤이 깊어오고 취한 친구가 속출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따! 이거 어디든 밤 이슬 피해 잠을 자야지 안되겠다. 취한 친구를 깨워서 인가가 몇채있는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술에 취해서 뒹글어 이마가 까지는 놈,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놈, 소피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놈... 여러 놈들이 많이도 취한 채 아무집이나 문을 두드리니 시골 적막한 밤에 우리는 불청객이자 아주 몰지각한 건달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 얼른 들어와 자라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들이지. 농사일하는 저 분들에게는 깊은 수면에 빠져있는 데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그냥 재워달라고 해도 시원찮은데 술에 취해 얼굴도 불량하지, 완전히 인간말종 흉내를 내니 당연한거지.문전박대는 당연한거지...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오셨다.

어떻게 이야기를 드렸는데 흔쾌히 들어와서 자라고 하셨다. 술취한 놈씨를 방안에 밀어놓고 그대로 뻗었는데 이불을 가져오시는 할아버지와 양은주전자와 컵을 가져다 주시는 두 분을 뵈고 그저 아무 기억도 없이 쓰러졌다..

해가 중천에 떴나 보다. 할머니의 소리에 눈을 비비며 대청마루에 나갔다. 한상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이 우리를 기다린다. 보기에도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식들이다. 갖은 야채와 반찬들, 고추에 오이,그리고 강된장으로 만든 쌈장,특히 육개장같이  김치를 넣고 끓인 국그릇이 눈에 띄였다.

밥 그릇과 국 그릇도 인심만큼이나 크고 넓다. 크다. 완전히 뚝배기같다. 옛날 할아버지들이 드시던 쇠 밥그릇이다.

말 그대로 시골밥상 그 자체다. 보기만 해도 인정이 듬뿍 담긴 시골밥상 말이다.

 

"너그들, 밤새 술 마시드랴 힘들었제. 자 여그 밥 많이 묵고 정신들 후딱 차리그라! 내 너그들 내 막내 자석 같아서 어젯밤에 재워준 거래이. 젊은 놈들이 어째 이기지도 못하는 술들을 그렇게 쳐묵고 정신 못차리고 댕기는 거여. 막내아들이 서울로 돈 벌러갔는데 아마 너그들 보다는 몇살 더 먹었을 걸. 그리고 이거 한잔들 혀!"

 

하시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밥상옆에서 꺼내시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저것은 소주다. 그냥 작은 소주가 아닌 사홉들이 소주다. 작은 대접에 한잔씩 가득 따라 주시면서 하시는 할머니 말씀.

 

"야들아! 술은 말이여. 술로 푸러야 하는 벱이여. 한잔씩들 쭉 마셔불면 속이 싹 가라않을 것이여. 어서들 먹더라고..."

하시면서 할머니가 먼저 주욱 드셨다. 고추를 장에 찍어드시면서 찌개를 한 수저를 맛깔스럽게 드시는데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영감이 없어서 아쉽다는 말씀도 하셨다.

친구들과 한잔씩 마셨다. 도저히 못 마실것 같은 술을 마셨다. 그런데 와이리 시원하고 입에 좍 달라붙는지 모르겠다.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끓여주신 해장국은 수저가 바쁘게 움직였다. 국에 밥을 가득말아 넣어 정말 맛깔스럽게 먹었다. 중간 중간 소주를 한잔씩 반주를 하는 데 그 맛이 그렇게 명품이 될 줄은 정말 그때는 몰랐다. (그날 이후로 지금껏 나는 술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에도 소주 한병은 기본이고 두병까지 마셔본 날도 내 인생에 쾌 된다.) 한 여름날에 대청마루에서 산과들을 마주보면서 숙취를 깨야하는데 더 한잔하는 그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할머니는 떠나는 우리를 보시면서 금새 정이 드셨는지 꼭 또 놀러오라고 하시면서 서운함을 내 비치셨다. 그리고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셨다. 펴보니 오천원짜리 지폐였다.

" 얼마 안되는구마. 너그들 차비하고 취업 잘 다녀오거래이. 술좀 작작 조금만 쳐묵고 말이다."

세상 그 어떤 말로도, 감사하다는 말의 몇 백배의 말로도 표현 못 할 감동이었다. 내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가버린 진정한 감동이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면서 꼭 다시 들려서 맛난거 사가지고 놀러오겠노라고 약속을 드렸다. 버스는 먼지를 휘날리면서 멀어져갔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서 계시면서 손을 흔드셨다.

정말 내 친할머니보다 더 한 감동이 휘몰아쳐와 안 보이는 곳까지 계속해서 할머니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 마음의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나를 잡아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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