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타우루스의 심장, 올빼미의 눈으로 신화가 된 남자

 
 




모딜리아니(맨 왼쪽), 앙드레 살몽(맨 오른쪽)과 함께 한 피카소.

석유를 마시고 불을 뿜는 광대
답은 명백하다. 별빛을 가리는 태양처럼 피카소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은 그밖에 모든 것, 심지어 그의 작품까지 빛바래게 만드는 찬란한 태양이었다.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 피카소의 다부진 몸매와 동물적 감각으로 빛나는 눈동자, 캔버스 앞에서의 신들린 몸놀림 등을 보면 과연 천재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이었다.
일찍이 피카소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아홉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데생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화풍을 얻기 위한 고독한 수련기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카소에게는 이 같은 습작 시기가 없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아홉 살에 이미 대가의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 열네 살에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할 때는 한 달 동안 그려야 하는 입학시험 과제물을 하루에 다 해치워버렸다.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서도, 그리고 2년 후 입학한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 미술학부에서도 피카소가 배울 것은 거의 없었다. 특히 그의 데생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술교사이던 아버지 호세 피카소는 아들의 데생 솜씨를 보고 경악한 나머지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천재에게 “당신은 어떻게 천재가 되었나요?”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마치 미인에게 “당신은 어떻게 미인이 되었나요?”하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지만, 어떻게 그처럼 많은 그림을 그렇게 빨리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옮길지 사전에 모르고, 심지어 어떤 색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모른다. 그림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자신을 공중에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 땅에 내려설지도 전혀 모른다.”
그는 한 번에 서너 장의 그림을 펼쳐놓고 동시에 작업했다. 여러 캔버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11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기 위해서 붓을 놓는 그를 보고 ‘피카소의 여인’ 중 하나였던 프랑수아즈 질로가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몸은 바깥에 가 있어.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신발을 밖에 벗어두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피곤할 수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스무 살의 피카소를 본 화가 브라크는 그가 마치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광대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는데, 이 정열적인 기질은 아흔 살이 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카소를 둘러싼 사람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이지만, 화가로 일가를 이룬 곳은 프랑스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오래지 않아 이 스페인 젊은이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아폴리네르, 로랑생, 모딜리아니, 앙드레 살몽, 브라크 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몽마르트르에 모였고 이들은 ‘세탁선(Bateau-Lavoir)’이라 불린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지냈다. 이 아틀리에 2층에 있던 피카소의 방은 그림과 물감, 세간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어 더는 지저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청년 피카소의 ‘청색 시대’가 지나가고, ‘아비뇽의 여인들’(1907)이라는 대작과 함께 입체파 화가 피카소가 탄생한다. 살롱전은 물론 이 낯선 화가를 외면했지만, 1909년에 열린 화상(畵商) 볼라르의 전시회에서 피카소의 작품이 평론가들과 화랑의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미국, 독일의 화랑들이 앞 다투어 그의 그림을 사들였다.
몽마르트르 예술가 그룹에서 피카소처럼 쉽게 성공을 움켜쥔 이는 없었다. ‘세탁선’과 몽마르트르의 카페 ‘라팽 아질’에 모이던 치들 중 모딜리아니는 가난 속에서 요절했고, 아폴리네르는 스페인 독감으로 급사했으며, 로랑생은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했고, 막스 자코브는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다. 몽마르트르의 끔찍한 가난을 온몸으로 버텼던 이들 중 피카소만이 살아남았다.
피카소의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그가 형태나 대칭을 고의로 무시한, 즉 입체파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넘쳤다. 사조나 양식을 따지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섹슈얼한 매력이 그림 속에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스페인 남자의 모습도 대중의 열광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독창적이고 과감한 그림에 화가의 이국적인 이미지가 합쳐지자 파리 미술계는 온통 피카소에게 매혹되고 말았다. 스무 살에 무일푼으로 파리에 온 피카소는 서른이 되었을 때 파리 최고급 주택가에서 하녀와 요리사, 운전기사를 두고 생활했다.
그리고 이 천재 화가 옆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때로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고, 때로 그의 아이를 낳은 아내였다. 여자는 늘 바뀌었다. 피카소는 평생 일곱 명의 여자와 동거했고, 그중 두 명과 결혼했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여자가 무수히 많았다. 피카소가 그린 수많은 그림을 보면 절대 다수가 여자 또는 화가와 모델을 그린 것이다.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그림, 춘화를 연상시키는 판화도 적지 않다. 여자, 황소, 미노타우루스, 모델, 화가, 투우, 새…. 피카소가 평생 그린 그림의 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자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반면, 남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피카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남자는 대부분 화가, 즉 피카소 자신이다.
아내와 여자?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시절, 석유를 살 돈이 없어 등잔 대신 왼손에 촛불을 들고 오른손으로 밤새 그림을 그리던 때에 피카소는 한 여자를 만났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이 아름다운 여성은 세탁선 건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가 마침 복도에 서 있던 피카소, 검은 눈이 매혹적인 남자에게 이끌렸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작은 키에 가무잡잡했으며 몸집도 작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 동거했다. 쓰레기 더미 같은 화실에서 피카소는 미친 듯이 페르낭드를 사랑하다가, 페르낭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실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페르낭드는 “잠깐만요, 옷을 입을 때까지 좀 기다려주세요!”하고 외치곤 했다. 이 기간에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고 무명 화가에서 사교계의 총아로 발돋움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가 기억하는 천재는 대부분 아쉽게 요절해 전설이 됐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타공인 천재였음에도 한 세기 가까운 삶을 살았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90세에도 ‘젊은이’로 불린 그의 곁을 내주지 않았으며, 그는 죽기 직전까지 붓을 들었다. 화폭이든 여인에게든 쉴 새 없이 천재적 욕망을 뿜어내는 것이 그의 질긴 운명이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 시사주간지 편집국장이던 1995년의 일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그해 시작된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돼 광주를 방문했다. 김훈은 백남준 인터뷰를 직접 하고 싶어 했고, 미술 담당 기자가 미리 광주에 내려가 백남준과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았다. 김훈은 인터뷰 당일 새벽 고속버스 편으로 광주에 내려갔다. 약속 장소는 광주시립미술관 앞, 김훈과 담당 기자는 미술관 앞에 서서 백남준을 기다렸다.
약속시간 오후 3시를 좀 지나 멜빵바지 차림의 백남준이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기자가 얼른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선생님, 저희 국장이 오셨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뭐라고? 난 약속한 적 없는데?” “아니, 약속하셨잖아요. 국장께서 서울에서 오셨는데….” “몰라, 나 바빠. 지금 가야 돼.” 백남준은 기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뒤뚱거리며 가버렸고, 기자는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끼며 김훈에게 보고했다. “백 선생이 약속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못 하겠답니다.” 그는 당연히 호되게 ‘깨질’ 각오를 했지만, 김훈은 얼굴색 하나 안 바뀐 채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천재는 그럴 수 있어.” 그리고 그 길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이 에피소드는 캐나다로 이민한 당시 기자 성우제가 쓴 에세이집 ‘느리게 가는 버스’에 실려 있다(후일담에 따르면, 김훈은 결국 서울에서 백남준과 인터뷰했다고 한다).
이 기막힌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왜 내 머릿속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떠올랐을까? 모르긴 해도, 생전의 피카소는 백남준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스로 왕이라 칭했던 오만과 독선, 예술을 위해 어떤 것도 희생하는 아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대미문의 창조성과 에너지까지 백남준은 피카소와 닮은꼴이다.

‘파이프를 든 소년’

피카소말고도 신화로 남은 화가는 많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못했으나 지금은 범작마저 몇백억원에 팔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고, ‘영광을 막 잡으려는 순간에 죽다’라는 묘비명처럼 서른여섯에 요절한 모딜리아니도 그렇다. 물랭루즈의 꼽추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멀고 먼 남태평양 타이티까지 흘러갔던 고갱, 그보다 훨씬 시대를 앞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등 미술계에는 전설과 사실을 넘나드는 화가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들과 확실히 다르다. 우선 그는 1881년에 태어나서 1973년에 타계했으니 ‘현대의 산물’이다. 생전의 피카소를 만났던 사람들이 아직 건재하고, 피카소의 일상을 담은 1950년대 기록영화도 남아 있다. 우리는 이 많은 기록을 통해 피카소의 키가 몇 센티미터였는지, 그가 어떤 억양의 프랑스어를 썼는지, 그림 그리는 순간에 표정과 손놀림이 어떠했는지 등을 모두 알 수 있다. 빛바랜 신화로 채색되기에 그는 너무나 근거리에 있으며, 전설적 천재치고는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또 피카소는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성공과 명예, 부를 다 얻었다. 그는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생애 동안 3만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의 가치는 현재 상상을 초월한다. 2004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의 초기작인 ‘파이프를 든 소년’(1905)이 1200억원에 팔려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 3위를 기록했다. 피카소 작품의 가격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형성돼 있었다. 1960년대 그의 소품 하나가 1억6000만원에 팔렸다. 당시 피카소는 유화만 500점 이상 소유하고 있었고, 수채화나 데생 등은 이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다. 이 작품들의 가치만으로도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였다.
피카소는 왜 유명한가
단순히 작품 가격만으로 피카소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피카소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예술가다. 예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의 이름은 안다. ‘피카소 미술학원’이나 ‘피카소 레스토랑’처럼 그의 이름은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괴팅겐대학교 미술사학과 카르스텐-피터바르케 교수는 피카소의 위대함을 ‘진보적인 예술과 전통적인 예술, 두 가지에서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요컨대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정신을 가장 독창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는 데 있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칭호를 듣기에 합당한 거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현대미술의 상징임에도 많은 사람이 피카소가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 그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는 잘 모른다. 피카소를 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가 어떤 그림을 그렸죠?” 하고 물어보라. 아마 열 명 중 아홉 명은 대답을 못할 것이다. 열에 한둘 ‘아비뇽의 여인들’이나 ‘게르니카’를 기억해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다시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건가요?”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답할 사람은 100명 중 1명쯤 될 것이다. 놀랍게도 ‘게르니카’가 ‘스페인 내전 중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공습과 학살의 참상을 고발한 벽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그럼 그 그림이 왜 위대한 거죠?” 하고 물어보라. 이 질문까지 통과할 사람은 정말이지 1000명에 한 사람 만나기도 어렵지 않을까?
이것이 피카소의 모순이다. 20세기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화가이나, 작품보다 작가 개인이 훨씬 유명하다는 것. 이는 화가에 대한 모독일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피카소라는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가 그린 그림은 기억하지 못하는가?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기, 그리고 기회

 
 



2000년 애플 이사회는 ‘임시’ CEO인 스티브를 정식 CEO로 임명했으며 스톡옵션 1000만주와 4000만달러가 넘는 전용제트기를 선물한다. 그러나 한때 스티브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사용했던 임시CEO(I-CEO)라는 직함은 이제 스티브 잡스의 새로운 직함처럼 굳어졌다. I-CEO 즉, 그는 아이맥, 아이팟 등과 더불어 애플을 상징하는, 아니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CEO가 된 셈이다.
췌장암 그 후 이야기
“1년쯤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단층촬영에서 췌장에 붙어 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다. 의사들은 췌장암은 치유 불가능하다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스티브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03년 10월의 일이다. 췌장암은 가장 치명적인 암이지만, 요행 스티브가 걸린 췌장암은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종류였다. 의사들은 수술을 하면 최소 10년 이상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티브 본인이 수술을 거부했다. 서양의학에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스티브는 처음에는 식이요법을 통해 암을 고쳐보겠다고 선언했다. 이후로 9개월간, 애플 경영진은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만약 스티브가 암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면? 그건 애플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애플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성능과 디자인, 심지어 애플 사옥 내의 카페테리아 디자인까지 스티브의 최종 승인 없이는 결정될 수 없었다. 애플 주주들이 스티브의 부재를 인정할지도 미지수였다. 그 누구도 스티브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결국 스티브는 식이요법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인정하고 2004년 7월31일 스탠퍼드대 부속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스티브는 애플 커뮤니티 e메일을 통해 자신이 한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수술로 암 세포를 떼어냈음을 알렸다. 애플의 주가는 ‘겨우’ 2.4% 하락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2008년 초부터 다시금 스티브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티브의 몸무게가 확 줄어든 것이다. 2008년 6월 제3세대 아이폰 발표회장에 스티브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하자 업계에는 그의 건강을 둘러싼 각종 루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7월21일 ‘뉴욕포스트’가 ‘스티브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자 애플의 주가는 9% 하락했다. 며칠 후 ‘뉴욕타임스’가 ‘스티브의 건강이상설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2008년 8월28일, 그야말로 ‘요상한’ 사건이 터진다. 블룸버그 통신에서 스티브의 죽음을 알리는 짤막한 부고 기사가 송고됐다. 이 기사는 오보였고 블룸버그 측은 사과와 함께 신속하게 기사를 내렸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업계의 불안은 증폭되었다. 유명 언론사가 부고 기사를 준비해두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스티브의 건강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 아닌가?
이해 12월, 애플 측은 2009년 1월 열리는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 ‘맥월드’(스티브가 신기에 가까운 프레젠테이션 솜씨를 보여주는 바로 그 무대)에서 스티브 대신 부사장인 필 쉴러가 기조연설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시 애플 주가는 6% 하락했다. 애플 측이 스티브의 건강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공식 발표를 하지 않자 ‘포천’은 ‘스티브의 건강은 사생활 문제이지만, 애플은 여기에 대해 성실하게 발표할 의무가 있다. 스티브의 건강이 단순히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잡스의 병가와 애플 위기설
그렇다면 스티브는 과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애플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단백질이 생성되지 않아 살이 빠지고 있다’는 정도다. 그러나 지난 1월 병가를 떠나기 직전에 보낸 메일에서 스티브는 ‘내 건강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호르몬 불균형보다는 더 심각한 이상이 발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도 스티브는 애플 CEO 직함을 유지하고 있고, 회사의 주요한 전략 결정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 1월 중순 ‘뉴욕타임스’는 ‘잡스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호르몬 이상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큰 이유이며, 주치의가 일에서 잠시 떠날 것을 권유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스티브의 병가는 심각한 건강 이상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스티브는 ‘포천’ 2008년 3월호와의 인터뷰 중 ‘만약 당신이 없다면 애플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행여 내가 버스에 깔려 죽기라도 하면 애플이 같이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사태가 터지면 파티가 열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없이도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을 비롯한 여러 유능한 사람이 애플을 잘 이끌어나갈 것이다. 내가 애플에서 수행하는 업무 중에는 후계자를 키우는 것도 있다.”
애플은 6월8일부터 12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2009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에서 3세대 아이폰 후속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때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아이폰을 들고 센세이셔널하게 복귀할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희망 섞인 관측이다. 사람들은 이미 여러 번 인생의 큰 위기를 뛰어넘은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위기 역시 보란 듯이 극복하고 6월의 WWDC 무대에서 특유의 현란한 프레젠테이션 솜씨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스티브는 일찍이 애플의 신제품들에 대해 “이것은 기술이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예술품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또 애플 제품들의 성공 이유에 대해 “고객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애플의 목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라는 차가운 기계,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회색 기계덩어리에 인간의 숨결과 꿈을 불어넣은 창조성의 대가 스티브 잡스. ‘꿈이 있는 컴퓨터’와 ‘혁신의 애플 문화’를 전도해온 스티브 잡스는 이제 그 자신이 바로 많은 이의 꿈, 즉 영원한 아이콘이 됐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잡스의 건강 이상설로 애플의 주가는 대폭 하락했다. 사진은 2008년 3월 아이폰 관련 기자회견 모습.

마침 회사 경영실적도 하락세였다. 매킨토시에서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가짓수가 적다는 이유로 소비자는 매킨토시를 외면했다. 매킨토시 판매가 1984년 들어 월 1만대 이하로 떨어졌다. 스티브와의 갈등으로 유능한 엔지니어들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그와 함께 애플을 창업했던 워즈니악마저 떠났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진원지는 애플의 이사회, 그중에서도 1983년 스티브가 직접 펩시콜라에서 영입한 마케팅 전문가 존 스컬리였다. 이사회는 스컬리를 애플의 CEO로 임명하고 스티브에게는 ‘프로덕트 비저너리(Product Visionary)’라는 이상한 직함을 줬다. 실질적 권한은 없는 명목뿐인 직함이었다.
뒤늦게 반란을 눈치 챈 스티브는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사회 멤버들은 스티브의 독선과 아집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28일, 스티브는 회사 내 유일한 친구인 마케팅 이사 마이크 머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사회가 자신을 축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머리는 스티브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가구 하나 없는 스티브의 집은-지금도 스티브는 집에 가구를 거의 들이지 않고 살고 있다- 어둠에 싸여 있었고 스티브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울고 있었다. 머리가 다가가 그를 안아주자 스티브는 한 시간 동안 말없이 눈물만 쏟았다. 아무리 천재 기업가라도 해도 스티브는 갓 서른의 청년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온 회사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티브는 유럽으로 갔다. 이탈리아와 스웨덴을 자전거로 돌면서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을 모두 잊으려고 애썼다. 그는 막 시작된 민간인 우주왕복선 탑승을 NASA에 신청하는가 하면,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치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NASA는 챌린지호에 탈 최초의 민간인으로 여교사인 크리스타 매콜리프를 선발했다(아이러니하게도 매콜리프가 탑승한 챌린지호는 1986년 1월28일 발사 73초 만에 폭발했다).
유럽을 떠돌던 여름, 스티브는 불현듯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제일 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뛰어난 인재로 작은 팀을 구성해서, 그들과 함께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 이것이 내가 제일 잘하며 또 즐기는 일이다. 바로 애플II나 매킨토시를 만들 때처럼.”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혔다. 스티브는 ‘뉴스위크’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서른 살이다. 아직 뒤에 물러나 선생 노릇 할 때는 아니다. 나는 물건을 만드는 게 꿈이다. 애플에 그런 일을 할 자리가 없다면 내가 그런 자리를 찾아야 한다…. 애플에서 보낸 10년은 내 삶에서 최고의 날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스티브는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를 조지 루카스 감독에게서 인수해 ‘픽사(‘픽셀Pixel의 동사형)’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음’이라는 뜻인 ‘넥스트’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처음’은 언제나 애플이었다.
이후 10년간, ‘넥스트’는 고전했지만 ‘픽사’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브는 정말 중요한 것은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꿈과 감동을 주는 ‘콘텐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픽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최초의 CG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가 개봉된 1995년까지 스티브는 파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픽사’에 쏟아 부었다. 1991년 디즈니와 후원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픽사는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1995년 ‘토이스토리’가 개봉됐을 때 스티브의 자금상황은 최악이었다. 빚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토이스토리’가 최소 1억달러는 벌어주어야 했는데, 본격적인 영화도 아닌 애니메이션이 그 같은 수익을 올린다는 건 영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개봉된 ‘토이스토리’는 3억58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개봉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벅스’‘몬스터 주식회사’‘니모를 찾아서’‘인크레더블’은 차례차례 전작의 흥행기록을 갱신해나갔다. 창조성과 기술을 결합하겠다는 스티브의 과감한 투자가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픽사는 2006년, 74억달러의 가격으로 디즈니에 매각됐다. 스티브는 디즈니 주식의 7%를 보유해 디즈니의 개인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왕의 귀환, 애플로 돌아오다
오 헨리의 작품 중에 ‘인생은 회전목마’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말은 스티브의 인생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스티브의 승승장구에 반비례하듯, 애플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1995년, 즉 스티브가 애플을 떠난 지 10년 후 애플은 컴퓨터업계 시장점유율 8%의 초라한 기업으로 전락했다.
1997년 ‘타임’에 ‘스티브 잡스의 임무: 애플을 살려내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애플 내에서도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잡스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애플의 요청을 거절하고 애플 주식 150만주를 팔아치운다. ‘나는 애플에 미련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셈이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르지 않았을까? ‘첫사랑’인 애플을 스티브가 버릴 수 있을까? 애플 CEO였던 길 어밀리오는 1998년 출간된 회고록 ‘애플에서 보낸 500일’을 통해 스티브가 이미 1995년 자신을 찾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스티브가 어밀리오에게 자신이 애플에 복귀할 것이라며, 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여론에 떠밀렸던 것인지, 아니면 3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는지는 미지수지만(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 스티브는 1997년 ‘임시(Intern) CEO’라는 직함을 달고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미다스의 손을 움직인다. 영원한 라이벌로 여겨졌던 마이크로소프트의 후원계약을 이끌어낸 데 이어(이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맥에 탑재되었다), 컬러풀한 차세대 컴퓨터 ‘아이맥’, 디지털 음악네트워크 ‘아이튠’, 음악재생기기 ‘아이팟’ 등을 연달아 개발해냈다. 이를 통해 한물간 기업 애플은 디지털 시대의 총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티브가 복귀한 지 3년 만에 애플 주가는 여덟 배 이상 상승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스티브 잡스.

출생과 입양, 대학 중퇴
잡스는 1955년생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부모가 변호사와 대학 이사라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 비해 스티브의 환경은 딴판이었다. 원래 스티브를 입양하기로 했던 변호사 부부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스티브는 해안경비대원 출신인 폴 잡스와 클라라 부부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폴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스티브의 생모는 무척 화를 냈다. 입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폴과 클라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티브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스티브의 친부는 시리아인이다. 친부 압둘파타 잔달리는 훗날 시리아에서 정치학과 교수가 됐다. 스티브의 친부모는 대학원을 마친 뒤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이들의 딸(스티브의 여동생) 모나 심슨은 소설가가 됐다. 스티브는 성공한 후에 친모인 조안 쉬벨과 여동생 모나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친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뜬 폴과 클라라 잡스뿐이었다. 폴과 클라라 부부는 툭하면 집안의 전자제품을 망가뜨리는 스티브를 전혀 말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부수고 맞추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스티브는 고교 시절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친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렇지 않아도 반항적이고 집요한 스티브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확실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부모에 대한 공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스티브는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취미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천재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워즈니악이 잡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스티브’는 곧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워즈니악 역시 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하다 콜로라도대에서 퇴학당한 괴짜 중의 괴짜였다. 훗날 스티브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자신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쿠페르티노에서 성장한 스티브는 꼭 시애틀의 리드 대학교(Reed College)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스티브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교 등록금은 굉장히 비쌌고, 그 때문에 부모님은 평생 모은 저축 대부분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굳이 그같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자신이 잡스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20대의 전반을 히피 생활로 보냈다. 게임제작업체에 취직해서 돈을 모아 인도 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있었다.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 일대를 돌아다니다 옴에 걸리기도 하고, 마른 개울바닥에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티브는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과 공허함, 친부모에 대한 상실감을 메우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를 떠돌던 스티브는 삭발한 머리에 노란색 법복을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은 차림새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스티브의 나머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는 불교도이자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돼 있었다. 억만장자임에도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늘 검은 티셔츠와 리바이스501 청바지, 맨발에 캔버스 운동화를 고집하는 그의 절제된 생활은 이 같은 젊은 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결하고 금욕적인 삶의 방식은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이맥과 아이팟 등 디자인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5년 가을, 워즈니악이 컬러 화면을 구동할 수 있는 회로기판을 만들어 스티브에게 보여주었다. 회로기판을 본 순간,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되겠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워즈니악을 꼬드겨 1976년 자신의 집 창고에서 컴퓨터 회사 ‘애플’을 창업했다. 그즈음 스티브는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자주 참선수양을 했는데, 이 때문에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애플’이 됐다. 그러나 회사 이름 때문에 스티브는 자신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비틀스의 ‘애플 레코드’와 오랫동안 상표 분쟁을 벌여야만 했다.
아무튼 스티브는 이렇게 해서 젊은 시절의 방황을 접었다. 입양, 대학 중퇴,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집요한 성격, 어디로 보나 스티브는 비뚤어지기 쉬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선불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컴퓨터에 의해 스티브는 첫 번째로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벗어났다.
회사가 설립되고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 ‘애플I’과 ‘애플II’를 만들어내자, 스티브는 놀라운 마케팅 능력과 시장을 읽어내는 혜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애플I과 애플II의 개량 버전들이 계속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즉 PC의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창업 4년 만에 애플은 증시에 상장되었고, 상장 하루 만에 주가는 32% 상승했다. 4년 전까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히피 청년 스티브는 나이 스물다섯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됐다.
애플을 잃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애플은 10년 만에 직원 두 명인 회사에서 종업원 4000명에 20억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애플은 최고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다, 나는 막 서른이 됐고, 그리고 해고당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첫 번째의 위기가 개인적인 문제였다면, 두 번째 위기는 좀 더 심각하고도 복잡했다. 애플은 스티브를 이사회 결정을 통해 축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티브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새로운 비전을 일찍 알아차리고, 놀라운 마케팅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티브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CEO였다. ‘포천’ 표현대로라면 그는 ‘벤츠를 거리낌 없이 장애인 주차지역에 주차하는’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인데다 타협을 모르는 경영 스타일을 구사하는 잡스는 신제품 개발의 하나하나를 다 챙기며 직원들을 가혹하게 독촉했다. 사내에선 점점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2년 스티브가 ‘타임’ 신년호 표지모델로 실렸다. 불과 스물 여섯 살의 청년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타임’ 지를 펴본 스티브는 경악했다. 기사 도처에 가시가 돋친 말들이 박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스티브에 대해 “프랑스 왕이 됐으면 잘할 사람이다”라고 빈정거렸고, 죽마고우이자 공동창업자인 워즈니악마저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했다. 기사 속 스티브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떼돈을 벌어 챙기는 사기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스티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