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다리는 네 개다. 크고 작은 상흔들로 뒤덮인 목발 두 개는 나이테와 같다.
서강大 張英姬(장영희·영문학) 교수는 생후 한 살 무렵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이다. 몇 년 전 美 하버드大 방문교수 자격으로 보스턴에 있을 때 그녀는 우연히 유방암을 발견했다. 두 번의 수술을 받고 귀국했을 때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 내다니…』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불운이 찾아왔다. 2004년 9월 척추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결국 2001년부터 3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북 칼럼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는 삶에 대한 절절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張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강大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목발을 짚고 인문대학 연구실로 향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에밀리 디킨스의 詩 「희망은 한 마리 새」를 번역하며 張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할 때, 가만히 마음속 깊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한 마리 작은 새가 속삭입니다. 「아니, 괜찮을 거야. 이제 끝이 날 거야. 넌 해낼 수 있어」 그칠 줄 모르고 속삭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에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을 출간하면서 『덤덤한 삶을 혐오한다』고 하셨던데.
『(웃음) 어떤 사람이 불운한 삶을 원하겠어요. 평범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심심한 걸 싫어했어요. 주위에서 「공기 좋고 햇볕 많이 드는 자연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내라」고 하지만 제가 워낙 일을 많이 벌여 놓고 복잡하게 지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 없는 삶은 얼마나 심심한 삶일까요. 지지고 볶고 살아도 사람 속에서 사는 게 훨씬 재미있지 않나요?』
―말이 빠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도전적으로 들립니다.
『제 말투가 이북 사투리 같다고 해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모두 이북 출신이십니다. 제자들이 제 말투가 「엄마」 하지 않고, 「오마니」 하듯 「옴마」 라고 한다고 그래요. 저는 모르죠(웃음)』
―성격이 쾌활하신데 누구의 영향을 받았나요.
『1남5녀의 셋째로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어요. 게다가 조카가 10명이나 됩니다. 만나면 엄청 시끄럽습니다. 딸들은 멀리 살아도 늘 바글바글합니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살았다는 게 성격 형성에 굉장한 도움이 됐다고 봐요.
저는 「걸림돌이 디딤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살아오며 장애인이라는 조건이 걸림돌이었지만 언제나 디딤돌로 쓸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었어요』
불쑥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장기로 삼는 요리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생태찌개를 먹었어요. 저는 요리하는 데 굉장한 흥미와 취미가 있어요. 식탐도 있습니다. 케이블TV도 요리채널을 좋아하고, 치과 같은 데 가면 여성잡지의 요리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리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제 일을 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해요』
요리에 굉장한 흥미와 취미
―문득 드는 생각인데, 요리책을 쓰시면 아주 재미있게 쓰실 것 같아요.
『요리책이 아니라 다른 글도 재미있게 쓸 자신이 있어요(웃음). 연령대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쓰는 재주가, 감히 있다고 생각해요. 유치원생을 위한 책은 아이들의 놀이와 호기심에 맞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카가 10명인데 거의 함께 살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막내 조카가 여섯 살이고, 제일 큰 조카는 결혼을 해서 애까지 낳았으니 굉장히 범위가 넓어요』
張교수는 하우스먼의 詩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를 인용하며 조카 준서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조카가 사랑에 빠졌다.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눈은 피안의 세계를 향한 듯 허공을 헤매고…. 맞다, 바로 짝사랑의 징후다. 하지만 준서야, 아파도 사랑해라.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아픔을 겪고 나서야 너는 아름다운 삶의 진주를 만들 수 있단다>
내게 선택은 사치였다
―살아오며 인생의 진로를 바꿀 만한 중요한 선택이나 결정을 한 일이 있습니까.
『선택은 제게 사치였어요. 살아오며 선택의 여지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 하다못해 대학 진학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어요. 장애인은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입학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어요. 그땐 특수학교도 없었어요』
그녀의 아버지 張旺祿(장왕록·前 서울大 명예교수·1994년 작고) 박사는 딸을 일반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장애 학생을 받아 주지 않아 張교수가 상급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선친은 노심초사 학교를 찾아가 읍소한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는 마치 神託(신탁)처럼 인생의 길잡이가 됐다』고 한다.
張교수가 高3이 되자 선친은 여러 대학을 찾아 사정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우여곡절 끝에 서강大 영문과 학과장이던 브루닉 신부를 찾아가 통사정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張교수의 회상이다.
『대학을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도 취업할 데가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게 큰 불운이지만, 역설적으로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뇌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만한 고뇌가 필요 없었어요. 선택이 없었던 것이 제겐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서강大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서강大에는 박사과정이 없어 연세大에 응시했다. 면접시험장에서 그녀는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張교수는 몇 달 후 뉴욕주립大에 진학해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귀국했다.
『연세大에서 저를 받아 줬다면, 유학을 가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어요. 부모님과 동생들이 완벽하게 수발을 들어 주니, 낯선 땅 기숙사에 살며 모든 것을 혼자, 내 몸으로 꾸려 가며 공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유학은 저의 선택이 아니었어요. 정말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당시엔 너무 상처받고 슬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분(면접관)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날 용기와 동기유발이 된 겁니다』
―어떻게 유학 준비를 하셨습니다.
『초벌 번역해서 아버지께 드리면, 「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를 믿으셨거든요. 아버지는 책을 내실 때 서문에다 「원고정리를 도와준 딸 영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표현을 늘 하셨지만, 저는 흡족할 수 없었어요.
제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었고, 특히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제 성취감을 위해 철저하게 부모님 몰래 유학 준비를 했고, 뉴욕주립大로부터 입학허가와 스칼라십을 받고서야 말씀드렸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두 달 전이었어요. 이미 준비하고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떠나는 비행장에서 난리치고 울었지만』
張旺祿 원칙,「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
張교수의 선친인 故 張旺祿 박사는 저명한 영문학자였다. 서울大 영문학과·同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大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미국 문학을 번역, 소개해서 美 컬럼비아大에서 주는 「미국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또한 채택률 1위의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가이기도 했다.
번역서 및 저서로 「그리스, 로마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달과 6펜스」,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압살롬 압살롬」, 「영문학사」, 「미국문학사」, 「헨리 제임스 소설론」 등이 있다. 영역서로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 등이 있다.
―선친께서는 엄하셨습니까.
『아뇨. 하나도 엄하지 않으셨어요. 또 자상하지도 않으셨어요. 자식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셨어요. 제자들 수발이 먼저였어요. 집안일은 어머니가 도맡으셨는데, 「공부해라, 마라」는 식의 말씀도 없으셨어요. 구두장이 아들이 맨발 벗고 다닌다고, 제게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치신 적도 없었습니다』
―채택률 1위의 교과서 대표저자로서 부녀가 共著(공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지금도 대표저자가 돼 중단했던 교과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張교수님께서는 「張旺祿 원칙」을 여러 번 강조하셨더군요.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라는 것이 아버지의 철칙이셨어요. 같이 밥 먹다가도 막힌 문장이 생각이 나시면, 그냥 국그릇에 수저를 놓은 채 서재로 가셨어요.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자기 일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지만 정성을 쏟아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독자들은 저자가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 분명히 안다고 하셨어요. 열 시간 걸려 책을 쓰면, 열 시간짜리 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수준이 낮고 어린 독자들이라 해도 정성이 들어간 책은 금방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특히 선친께서 가장 엄하셨던 게 교과서 작업이셨습니다. 교과서를 쓸 때 「한 페이지에 무엇이든 하나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누누이 강조했어요』
문법을 알아야 제대로 된 영어 가능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비법이 있으면 알려 주시죠.
『아무리 발음이 예쁘고 유창하다 해도 문법을 몰라 글이 엉망이면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없어요. 요새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요. 원어민 수준도 많아요. 워낙 학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니까.
하지만 영어 쓰기를 시켜 봐요. 다 무너져요. 문법적으로 논리가 없고, 깊이도 없고, 창의성도 없어요. 어느 정도까지는 「영어로 배낭여행 잘 다녀온다」, 「영어로 잘 논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언어라는 것은 말하기·듣기·읽기·쓰기를 다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3인칭 단수를 빠뜨리고 「she work」 라고 쓰면,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린 시절, 시험공포증이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세월이 흘러 이젠 학생들에게 아주 점수가 짜고 까다로운 교수로 입소문이 났더군요.
『학생들이 다른 수업에서 100을 투입하면 A학점이 나오는데, 제 수업에서는 200의 功을 들여도 A학점이 안 나온다고 해요. 어쩌면 제 기대치가 높다고 할까요? 저는 많이 읽히려고 해요. 또 대학 때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가장 읽기 좋은 두뇌 상태예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은 소설의 장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까지 기억나지만 요즘은 지난주에 읽은 책의 주인공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있어요. 학생들에게 원서 두 권을 읽히며 한 학기를 끝낼 수도 있지만, 윽박질러 가며 열 권을 다 읽혀도 학생들이 모두 따라와요. 그러니까 이왕이면, 열 권을 다 읽히는 게 낫죠. 당연히』
에이허브 선장의 도전
張교수는 『스무 살 무렵인 1970년 초 휴교령과 시위로 수업을 할 수 없게 돼 소일거리로 읽었던 책들이 결국 문학을 일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19세기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백경(Moby Dick)」은 자신의 영혼에 지표를 제시해 준 작품으로 기억한다.
「백경」은 거대한 흰고래를 잡기 위해 포경선 피쿼드號(호)의 선장 에이허브가 겪는 모험담이다. 에이허브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백경을 잡으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자신도 죽고 피쿼드號도 침몰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녀는 어느 산문에서 선장 에이허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운명론자도, 그렇다고 비운명론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에이허브를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설사 운명이란 것이 있어서 내가 내 삶의 승리자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싸우겠습니다. 에이허브처럼, 에이허브는 인간의 무능과 허약함에 반기를 들었고, 단지 삶이 그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동냥자루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굴복하는 삶보다는 도전하는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문학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
―에이허브 선장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다리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백경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쫓는 게 아닙니다. 사실 백경은 「마분지 가면」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그저 「마분지 가면」일 뿐이라고 봤어요.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계획적인 어떤 힘이 가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며 인간을 놀리고, 꼭두각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마치 운명의 힘이나 神의 힘이랄 수 있어요.
에이허브는 「이 백경이라는 가면을 쳐부수고 정체를 봐야겠다. 나중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도 괜찮다. 벽 속에 갇힌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야겠다」며 운명에 봉기를 든 겁니다.
심지어 「태양도 나를 모욕하면 쳐부수겠다」고 해요. 굉장히 멋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을 가끔 학생들에게 인용하는데, 모비딕은 가르치기에 너무 두껍고, 학생들이 지겨워해서 몇 障(장)만 골라 가르쳐요. 끝내 에이허브 선장이 죽고 그의 포경선도 침몰하고 말지만, 운명에 결국 패배할지언정, 그래도 한번 운명에 맞서 싸워 보고자 하는 도전 의지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어요』
―교수님은 문학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동력이 없는 저를 문학이 풍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학창시절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밖을 돌아다녀야 해요. 아무리 그림을 그리려 해도 물리적 조건이 허락지 않으니까 불가능했지요. 반면 공부하고 책 읽는 일은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기동력이 없으니 아무리 하고 싶어도 물리적 조건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이 많았지만 문학은 달랐습니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요.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어떤 구원이냐에 따라 조건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언젠가 한 학생이 제게 「교통사고를 당한 이를 문학이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난감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학이 무슨 마술을 가르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어느 분야보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려 준다」고요. 누구를 직접 구할 수는 없지만, 구할 수 있다는 마음이 바로 문학이라 생각해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문학입니다』
백혈구 수치와의 신경전
張교수는 나와 만나기 전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요즘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검진을 받는다. 완치됐던 유방암이 뼈로 전이된 게 2004년 9월의 일이니 벌써 17개월이 흘렀다. 매주 병원 신세를 져야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어두운 기색이 없다.
―병원은 일주일에 몇 번 가시나요.
『일주일에 한 번 갑니다. 오늘 오전에 갔고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가야 해요. 오전에 뼈 검사를 위해 주사를 맞았는데 세 시간 뒤 다시 검사를 해야 한다네요』
―쉬셔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백혈구가 엄청 떨어졌더라구요. 원래 정상인의 백혈구는 5000~6000인데, 글쎄 800으로 떨어졌더군요. 의사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사실 어제(2월27일) 강원도 홍천에 있는 콘도에서 영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가는 게 힘들었고 스케줄이 빡빡했지만 새내기를 환영하는 것이 교수로서의 의무였어요. 그래서 갔는데 엄청 힘들더라고요. 백혈구는 피곤하면 그대로 떨어지는데… 깜짝 놀랐어요. 「백혈구가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은 왔지만 그렇게 떨어질 줄 몰랐어요』
―평소엔 백혈구 수치가 얼마나 나옵니까.
『글쎄 1500~2000은 나와요. 어쨌든 백혈구를 증진시키는 주사를 맞았습니다』
―비교적 암투병 사실이 많이 알려지면서 교수님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경계가 무너진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이 알려진 데 대한 부담은 없나요.
『정기적으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화면 하단에 제 경력이 자막으로 떴습니다. 장영희는 무슨 학교 출신이고, 어떤 책을 썼는지가 나오고 맨 마지막에 「현재 암투병 중」이란 말로 제 경력사항이 마무리되더군요.
「아, 이제는 암까지 내 경력의 일부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 우습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저의 투병이 주위에 힘이 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병원에 가면, 많은 사람이 다가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요. 정말로 단 한 분이라도 저를 보고 「봐라. 나도 저 사람처럼 아파도 실실 웃으며 다녀보자」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저한텐 기가 막힌 기쁨이고 보람일 거예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神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한다. 「일어서는 법」은 넘어져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張교수의 밝은 생각은 사람들에게 「기쁘게 넘어지는 법」을 가르친다. 겹겹의 고통을 딛고 선 그녀에게 神은 어떤 존재일까?
절대적인 존재가 함께해 주시리라는 믿음, 표출되는 믿음이 아니라 제 의식 저편에 깔려 있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제 동생들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기도를 너무 잘해요. 하지만 저는 성체조배를 위해 다섯 시간 동안 꼬박 앉아 있지 못해요. 심심해서…. 가족들은 다들 밤새워 기도하죠. 새벽이 되면 가족들이 제 수발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드리곤 해요. 저는 자고 있고(웃음)』
그녀는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하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文福(문복)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소설가 박완서는 『정확하고 온화하게, 그리고 표 안 나게 강한 글을 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완벽한 올빼미형
번역서로 「종이시계」, 「햇볕드는 방」, 「톰 소여의 모험」 등이 있고 선친과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살아 있는 갈대」, 「스칼렛」 등을 共譯(공역)했다. 김현승의 詩를 번역해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출간해 지금까지 33쇄나 찍은 「내 생애 단 한 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출간한 문학 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현재 14쇄를 찍었다.
―글은 보통 언제 쓰나요.
『완벽한 올빼미형입니다. 대부분의 글은 자정 무렵부터 새벽 3~4시까지 쓰고 잠이 듭니다. 그리곤 오전 11시쯤 일어나요. 그래서 첫 수업은 늘 낮 12시30분에 시작해요(웃음).
한 문장 쓰고 고민하고, 괜히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 열어 보고, 집안일 참견해 보고, TV를 켜기도 해요. 그러니 글을 한 편 쓰는 데 시간이 굉장히 걸려요. 책 서문 하나 쓰는 데도 며칠 걸립니다.
조선일보에 북 칼럼을 연재할 당시, 「지금 마감이 끝났다. 대기하고 있다」고 독촉할 때도 「지금 갑니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 뒤 간신히 데드라인을 지켰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데드라인이 있어야 글 쓸 거리가 떠오르거나 영감이 떠오르는 타입입니다. 「내일 아침까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글을 넘겨야 한다」면, 그때부터 슬슬 쓰기 시작해요』
張교수는 약 14년 동안 英字신문 「코리아타임스」에 「미친 조각 이불」이라는 영문 칼럼을 써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었다.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썼어요. 1986년이면 제가 30代였는데, 가장 왕성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어로만 썼어요. 굉장히 좁은 독자층이었지만 소위 마니아들이 많았어요.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하자 신문사 측에서 한 편이라도 더 써 줬으면 했어요. 당시 글을 읽어 보면 「그때 잘 썼구나」는 생각이 들고, 몇 편은 제 맘에 꼭 들어요. 일부는 영문으로 출판했고 나머지는 미국 출판사를 찾고 있어요』
임팩트 강한 寓話 쓰고 싶다
―우리말과 영어 중 어느 쪽이 글쓰기가 편합니까.
『두 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이 때론 악조건이에요. 영어로 쓸 때는 미친 듯이 우리말이 방해해요. 반대로 우리말로 쓸 때는 자꾸만 영어가 들어와요. 서로가 서로를 방해합니다. 그러다 보면, 영어도 우리말도 아닌, 소위 죽도 밥도 아닌 경우가 생겨요』
―소설을 쓸 계획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맨날 TV를 보면 복통이 터집니다. 「어떻게 저렇게 쓰나, 대중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판하는 능력은 있어도 쓰라고 하면 못 쓸 거예요. 소설은 또 다른 재능을 요합니다. 하지만 장기계획을 갖고 영어로 써보고 싶어요』
―대강의 뼈대는 세워 놓으셨나요.
『말하면 사람들이 웃을 거예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寓話(우화)를 쓰고 싶습니다. 내용은 이런 식입니다. 핵전쟁이 나서 땅 위의 모든 생물체가 죽었어요. 그러나 땅속 깊이 씨앗이 묻혔어요. 온갖 씨앗이 다시 한 번 생명을 얻어서 꽃을 피우는 꿈을 꾼다는 이야기입니다. 씨앗마다 나름의 특성이 있으니, 재미나게 쓸 거예요. 전 밋밋한 이야기를 안 해요』
張교수는 인상 깊게 읽은 수필집으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꼽았다.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히는 이 작품은 시각과 청각의 중복장애를 딛고 선 헬렌 켈러의 작품이다.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대해 『너무나 절절해서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않고 사는 내게는 차라리 충격이었다』고 했다.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張교수에게 「만약 사흘 동안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어디를 가고 싶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답변은 담담했다.
『저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사실 사흘만 걷겠다는 열망은 없어요. 일생을 걸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죠. 사흘만이라는 전제조건이 너무 제한적이기에…』
그러나 두 발로 내딛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강렬하면서도 따스했다.
『아이스크림 콘을 손에 쥐고 걸어가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콘을 먹으며 걷는 모습을 보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조카 손을 잡고 파도 치는 백사장을 걷고 싶어요. 파도가 치면 종종 뒷걸음치며 물러서는 소박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