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는 또 다른 방법




장진 감독님께서 ‘라디오 북클럽’에 나온 게스트 중 인상 깊었다고, 지난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 때 제 얘기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분은 왜 제 이야기를 했을까요? 저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웃음) 저는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사람이고요, 12~3년 전에 우연히 재즈 하모니카를 듣고 매료되어, 5년 전 첫 음반을 낸 이후로 쭉 음악 활동을 하고 있어요.
어렸을 적 시신경이 손상되어 책을 눈이 아니라, 손으로 읽거나 귀로 듣거나 해요. 물론 눈으로 넓게 보면 더 느낌이 많이 와 닿을 수도 있겠지만, 그 외의 수단으로 책을 읽어도 받을 수 있는 느낌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독서를 오래하면 어깨가 아파요


듣는 책이 85%쯤 되고, 점자책은 15% 정도 될 거에요. 녹음도서를 들을 때는 앉아서 듣거나, 방황하면서(걸어다니면서) 들어요. 목소리가 꾸준한 톤으로 나오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잠이 들 수도 있거든요. 점자책을 볼 일이 있으면 무조건 책상에서 봐요. 보통은 눈이 아파서 잠시 쉬시죠? 저는 두꺼운 점자책을 넘기다 보면 보면 어깨가 아파서, 책상에서 바른 자세로 읽어요. 이편이 집중도 훨씬 잘 되고요.


목차 속에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책을 처음 열었을 때 보이는 목차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가들이 목차의 제목을 그냥 대충 붙여놨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제목 속에 정말 먼 미래도 보이고, 가까운 앞날도 보이는 것 같아서 일단 그 제목들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긴 책은 작가 서문을 꼭 보죠.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서문 안에 얼마만큼은 들어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을 독자들이 어떻게 봐 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쓰여있기 때문에, 꼭 서문을 보면서 책을 고르죠.



풋풋하고 친밀한 민초들의 이야기


저는 학생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와 관련된 책이 그렇게 재미있더라고요. 역사책/역사 소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도 있고, 읽다 보면 그 사실들이 역사 속에서 순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 묘미 때문에 흥미 있게 책을 보게 되었죠.
역사 책 중에서는 <임꺽정>, <장길산> 그리고 <객주>에서 보이는 것 같은 서민들의 이야기가, 제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풋풋함과 친밀감을 주더라고요. 우리나라 역사서를 보면 왕 이야기가 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저는 왕 주위에서 일어나는 암투와 권모술수는 왕이라는 상황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큰 흥미가 안가더라고요. 이보다는 서민들의 시각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훨씬 큰 감동을 줘요. 그래서 저는 이런 민초들의 이야기를 상당히 좋아하죠.


책이 없다면...


책이 읽기 싫으면,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강박적으로 읽는다고 머리에 들어오겠어요? 그런데 만약 책이 없어서 내가 한 권도 읽지 못했다면, 글쎄요...세상 사는 한 부분을 잃어버린 거겠죠. 생각을 할 필요도 못 느끼고, 세상 살면서 쌓인 피로를 여과도 하지 못한 채 말로 쏟아내지 않을까 싶어요. 이건 상당히 위험한 것이죠. 책은 그 생각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전제덕의 서재는


예를 들어서 300p 정도의 일반 책을 점자로 만들면, 두꺼운 책 네다섯 권 정도가 나오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수호지>를 점자책으로 만들면 백과사전 한 질 분량이 나올 거에요. 이런 상황이라서 점자책으로 웬만한 서재는 꽉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웃음)
어쨌든 책을 통해서 자꾸 새로운 것,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싶고 서재에도 그런 책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책들이 많아야 앞으로의 삶을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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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과 기억을 건드려주는 서재


작업실이 여러 군데 있어서, 서재라고 해서 작정하고 책을 읽는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하는 공간은 아니고…이 공간에 있다가, 몇 권 있지도 않은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 권을 빼서 몇 페이지를 보고, 다시 집어넣는데, 순간순간 어떤 영감이라든지 기억이라든지 살짝 건드려주기에는 이 공간이 제일 좋아요. 그리고 아이가 있는 집은 아마 그럴 거에요. 여기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아내도, 아이도 슬쩍 보다 가는 것 같아요. 대단히 좋은 피난처이기도 해요.


시간의 흐름을 타는 책장


이 책장보다 더 많아지면 그때는 책을 정리하거든요. 어떤 규칙은 없고, 옛날 책인데도 가끔가다 꺼내보는 책들 몇 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를 준다든지 하고, 신간 위주로 꽂혀 있겠죠?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 정도였어요. 네, 그렇죠. 옛날부터 모아놓은 책들이 계속 쌓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하는 책장이에요. 개중에서 안 없어지는 책들은 유일하게 제가 쓴 작품이에요. 제가 쓴 희곡, 작품, 시나리오가 서툴게 제본된, 이거는 안 변하고 세월과 함께 갈 책들이에요.



형과 함께 책을


열독을 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부터였던 것 같고. 보니까 저희 부모님이 독서에 관한 교육을 잘 해줬던 것 같아요. 교육을 위해 어디를 간다거나 장난감에 관련된 것은 특별히 인상 깊은 게 없는데, 어렸을 적부터 늘 책을 사다 주시면서 책을 보는 시간을 즐겁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두 살 터울의 형님이 계셨는데, 어렸을 적 자기 전에 같은 책을 펴놓고 둘이 같이 보는 거에요. “형, 다 읽었어?”, “응, 다 읽었어.”, “너, 다 읽었어?”, “잠깐만, 나 좀 남았어.” 둘 다 그 페이지를 다 읽어야지 같이 넘기면서, 책 한 권을 같이 보는 .. 그랬던 시간이 꽤 길게 있었던 기억이 나요.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글을 쓰는데 뭔가 참고하느라, 리서치를 위해 읽는 책은 사실 재미가 없고, 그냥 정서와 무형의 아우라를 받기 위해서는 독서가 아주 좋죠. 사람 다음 책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사진이니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영감을 얻고 그런다고 하시는데, 저 같은 경우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거나, 아니면 책에서 받는 느낌이지요. 영화나 연극은 오히려 안 보고요.



나와 맞닿아있는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책에서 직접적인 소재나 영감, 이미지를 받았던 기억은 특별히 나지 않아요. 작품도 때에 따라 다르니까. 그런데 제 대사라든지 글의 뉘앙스는 적지 않게 성석제의 언어하고 맞닿아 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나 느낌을 이 작가도 사용하고, 이 작가의 글을 보고 너무 즐거워해요. 그리고 나는 그냥 작은 대사나 그 뉘앙스인데 이 사람은 그걸로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만들어놓잖아.
그러다 보니까 제가 성석제 작가의 글을 너무 좋아하고 자주 읽었던 것 같아요. 책장을 보면 지금도 성석제의 소설은 일고여덟 권 있을 거에요.


이야기꾼으로서, 앞으로의 장진




얼마 전 골프 오픈에서 톰 왓슨이 보여준 것이 있어요. 나이 예순이 된 노장 골퍼가 마지막 우승 펏을 하기 위해 그린으로 좍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그가 1977년에 그 대회에서 우승할 때 걸어가던 모습과 교차로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30년 전에 그와 지금의 그, 둘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똑같이 되풀이된 거죠. 결국에는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서 우승을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표정은 너무 행복했고. 그 표정을 보고 ‘나도 내가 청춘을 보냈던 영역에서, 저 나이가 되어 저 표정, 인자하고 편한 표정으로 저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굉장히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꾼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창작자 영역을 얘기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순수하게 예술을 대하고 이야기를 만드는데, 결국 시장에 나가는 순간 상업적 결과로 판정을 많이 받거든요. 그럴 때 상업적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 영역에서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창작자의 고유한 정신이란 것을 지켜내면서 끝까지 살아남기가 너무 힘든 판이에요. 그래서 적당한 때 그냥 알아서 그만둬야지,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저 표정을 보고 요즘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요.
얼른 새 희곡도 써야죠. 지금 가장 속상한 게 일정 때문이기도 하고, 새 희곡을 못 쓰고 있는데… 그런데 곧 나올 것 같아요. 머릿속에 희곡이며 소설이며 지금 폭발 직전까지 쌓여있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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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모두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


제 서재는요, 사고뭉치에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곳이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이 방에서 책도 썼고, 이 세상을 모두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도 여기서 꾸고 있어요. 여기에는 책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이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산이 있고, (뒤에도) 산(사진)이 걸려있고.... 책과 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가 한꺼번에 모여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딱 한 군데 이야기하라고 하면, 바로 여기, 사고뭉치입니다.


“한비야 팀장님 책 읽을 시간 있으세요?” “당연하죠"


제가 책을 사러 가면, ‘책 읽을 시간 있으세요?’ 이렇게들 물어보세요. 당연히 있죠. 저는 일부러 차를 안 사요. 지하철 타고 다녀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어요. 직장까지 왕복 한 시간 반은 책 읽는 시간이에요. 해외에 다녀도 시간 있어요.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 비행기 갈아타는 시간,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 이런 자투리 시간에 읽는 책만 해도 일년에 20권은 되는 것 같아요.



다섯 시간 만에 사람을 다르게 만들어 주는 책


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는 이유는, 책은 전 인류의 지혜잖아요, 독서는 그 지혜의 보고에 한 개인이 빨대를 꽂고 있는 것이고요. 빨대만 꽂고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가 세상의 지혜와 만날 수 있는……책 말고 그런 게 뭐가 있을까요? 첫 페이지를 펼 때와 맨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는, 다섯 시간 만에 그렇게 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저는 책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책이 있어서 평생 심심하다는 말은 이제 안 하겠구나




실은 어렸을 때는 책을 설렁설렁 읽었어요. 숙제 내주면 읽고, 독후감 써오라 그러면 언니 것 베끼다 맞고 그랬죠. 사실 ‘책이 있어서 내 평생 심심하다는 말은 이제 안 하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때에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딱 우리 눈높이에 맞는 100권의 독서 목록을 주셨어요. 보통 100권의 목록을 보면 ‘니체’, <에밀>같이 고등학교 1학년들이 읽기에는 어렵고 지겨운 책들이 들어있잖아요. 그런데 그 선생님은 정말 우리한테 딱 알맞은, 도서관에서도 금방 구할 수 있고 읽고 바로 돌려볼 수 있는 그런 책을 권하셨어요.
그런데 또 제가 그 책을 다 살 수가 없잖아요. 비싸기도 하고. 그 때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제가 도서관에만 가면 ‘비야 왔구나’ 하시면서 책 찾는 것도 도와주고, 대출된 책이 반납되면 우리 반까지 와서 말해주시고…… 사실 그 선생님 덕분에 책을 다 읽었죠. 그 선생님이, 지금 생각하면 일생의 은인인 것 같아요.


<1년에 100권 읽기 운동본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선생님들의 응원을 받아가며 일년에 딱 100권을 읽고 났더니 평생, 이렇게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일년에 100권 읽기를 거의 매년 했고요. 사실 일년에 100권을 읽는다는 것은, 많다기 보다는 늘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 정도, 그리고 편식하지 않고 두루 읽을 수 있는 정도에요. 그리고 누군가 ‘뭐 재미있는 책 없어?’ 하고 나한테 물을 때 재미있는 책을 권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아요.
제가 지금 긴급구호 팀장으로 정말 가슴 뜨거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 이외에 또 다른 가슴 뜨거운 삶이 있다면 책을 쓰고, 읽고, 그리고 권하기에요. 책을 권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요. 좋은 책을 서로 권해서 읽는, <1년에 100권 읽기 운동본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제가 본부장 했으면 좋겠어요.


편식하지 않는 독서




그런데 보통 권하는 목록을 보면 너무나 딱딱한 책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독서를 밥상이라고 생각해요. 주식도 있고 부식도 있고, 그 다음에 후식도 있고 간식도 있고. 주식으로 읽어야 되는 책 중에는 어려운 책도 있죠. 책상 앞에 앉아서, 줄 치면서 머리를 쓰면서 읽는 책 말이에요. 그 다음에는 반찬, 그 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지만, 몸에 좋아서 먹는 것도 있는 것처럼, 다양하겠죠. 후식처럼 달콤한 책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이건 영양가도 별로 없고 살만 찌고 그런 책이에요.
그런데 주식같이 딱딱한 책만 권하면 재미없잖아요. 어떻게 맨날 밥만 먹고 살아요? 국수도 먹고, 만두도 먹고 반찬도 여러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엄마가 꼭 먹으라고 챙겨주는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는 것처럼 좀 골고루 권해주면, '공부에 도움이 되거나 보기는 싫은데 봐야 한다', 이게 아니라 '재미있게 읽으면서 저절로 지식과 교양을 쌓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알게 될 거에요. 이렇게 골고루 재미로 읽은 책이 경험의 스펙트럼을 확 넓혀주게 될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꼭 먹어야 하는 거, 좋아하진 않지만 꼭 먹어야 되는 것도 세상에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돼요. 아니면 이빨 다 빠져요, 말랑말랑 한 것만 먹으면.


책을 혼자 읽고 끝내면, 가슴이 터져서 살 수 없어요.


예전에 중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사람들에게 책 좀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해서 모은 100권으로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제가 있던 방 번호를 따서 419 도서관이요. 두꺼운 대학 노트가 꽉 찰 정도로 대출 장부가 찼었어요. 지금 우리집은 독바위 도서관이에요. 책 빌려주고, 연체하면 벌금 받고. 그러니까 (보스톤에 유학을 가서도) 어차피 제 주위에는 누군가가 보내거나 내가 구해오거나 해서 책이 모이겠죠. 저는 책을 읽으면서 혼자만 좋다고 끝내면, 가슴이 터져서 살 수가 없어요. 누구한테라도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런데 보스톤에는 지금은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단 한 명도 없지만, 가면 금방 사귀겠죠? 그러면 좋은 책, 정말 재미있는 책, 마음에 남는 책을 권하면 아무리 바쁜 유학생들도 다 읽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스톤에도 또 제 주변에는 도서관이 생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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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있어서 서재는 요람 같은 거죠


저한테는 서재란 보시다시피 요람 같은 거죠. 보물섬 같기도 하구요. 만화책이라든지.. 워낙 그림책도 많으니까. 작업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쉬고 자고 또 에너지를 충전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간이니까 집보다 여기에서, 어떤 면으로는 더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이 서재의 제일 큰 특징은, 역시 만화책이 절반 이상 메우고 있다는 거죠. 여기 꽂혀있는 책들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조금 차이점이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직업과 관련된, 작업을 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해, 영감을 얻기 위해서 책을 구입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 책들을 밑줄을 긋다시피… 책을 넘기면, 아 이거는 남벌이야, 이거는 외인구단이야, 어 이거는 지옥의 링인데 하는…식으로 전달되어 오니까..훨씬 이 서재 자체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죠. 제가 되돌아보면서 만화를 그리면서 살아온, 많은 이야기들이 책 하나하나에 스며있겠죠.


6살에 처음 책을 만났어요


어릴 때, 포항 시골에 살 때는 책이라는 걸 구경을 못했었고요. 6살인가에 경주로 나와 가지고 처음 책이라는 것을 길거리에서 본거죠. 그 때 처음 본 책이 바로 그림책, 그러니까 만화책이었어요. 그 당시 많았던 것이 역사만화, 과학만화였어요. 김유신, 모세, 십계, 알렉산더 이런 것들 다 만화책으로 알았고, 마이크로, 미사일.. 이런 것들까지 다 만화로 알기 작해서 결국 책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소설 중에는 김내성 선생의 소설을 제일 먼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커스 소녀> <붉은 별>이라든지..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스타일 있는 작가를 연구하며 배웁니다




이외수 작가와 김훈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분들의 색깔 있는 스타일을 좋아해요. 수업중에도 학생들한테도 이 두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이분들처럼 ‘나는 어떤 작가인가’ 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 ‘내 문장이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0대 때는 이외수 선생의 글에서 영향을 좀 많이 받았다고 봐야겠죠. 이외수 선생처럼 시적이면서,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설명이 되는 그런 문장을 구사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 동경도 했고요. 요즘은 김훈 선생 특유의 단문을 좋아합니다. (연재중인) <창천수호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 단문같은 호흡을 연구해 보려고요. 평생 이렇게,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겠죠.


유명한 고전일수록 볼때마다 계속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만화가로 산다는 것은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거에요. 신문연재나 웹툰 연재를 하는 건 전쟁이잖아요. 필요한 정보를 위한 책이 아니면 거의 책을 못 읽어요. 그래서 제가 만약 20대의 청년 이현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명작, 고전을 완역본으로 읽고 싶어요.
대부분 우리가 고전을 어릴 때 떼버리잖아요. 다이제스트해서 보는 건데, 이런 작가가 있고, 이런 이야기였다라고 정보로서 받아들이는 건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아라비안 나이트>있죠? 다들 어릴 때 ‘신밧드’로 보면 끝이잖아요. 하지만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에요.제가 보기엔 유명한 작품일수록 다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고전일수록 볼 때마다 계속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동화도 지금 다시 읽으면, 동화 속에서도 다른 걸 찾아낼 수 있죠. 그 당시 중세의 제도적 모순이랄지, 왜 이렇게 씌여졌을지, 자신의 머리로서 분석해보면 아마 상당수의 분들이 중세 유럽의 민담을 접근해 봐야겠다, 싶을 수 있을 거에요. 새로운 세계가 또 그렇게 열리는 거죠. 그래서 창작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일수록 젊었을 때 고전을 더 많이 읽어놔야 해요.




앞으로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자기가 자기를 알아가는 작업이 곧 삶인 것 같아요. 잘 알고, 그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60대가 되면 명퇴 이후 외로움, 중년의 갈등을 그리는 것이 절실하고 정확하겠죠. 요즘 고민인데, 70대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70에는 동화를 그리는 할아버지라면 멋있지 않을까요. 그때 되면 수염을 길러도 멋있을 것 같아요. 여전히 욕심히 많죠. 죽을 때까지 작가 생활을 한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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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도구가 있는 막장입니다




여기는 내 서재라기보다는 막장이에요. 막장. 광부가 탄광 맨 끝까지 들어간 데를 막장이라고 그러잖아요. 광부는 갱도의 가장 깊은 자리인 막장에서 곡괭이를 휘둘러서 석탄을 캐지요. 저는 서재에 책이 별로 없어요. 필요한 책만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신간 서적의 표지나 목차를 보면, 읽어야 될 책인지 아닌지, 시급히 읽어야 할 책인지 미뤄두었다 두어 달 후에 읽어야 할 책인지 판단할 수가 있지요. 이런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어요. 그래서 많은 책을 점을 찍어놓고 모아두었다 한꺼번에 읽고, 그 읽은 책의 대부분을 버리는 것이지요.
특별한 애착을 갖고 그 책들을 쌓아놓거나 분류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책은 자료나 사전, 일종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에요. 광부의 장비가 곡괭이나 삽, 플래시 그런 것이듯 이 방에는 나의 도구들이 있어요. 여기 있는 책은 몇 번인지 모르겠는데 많이 읽어서, 찾고 싶은 대목은 힘들이지 않고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김훈의 도구, 사전


저는 각종 언어 영어, 독일어, 한문, 국어사전과 우리나라의 여러 법전을 가지고 있지요. 한문 사전을 주로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여가가 있을 때는 한자의 글자를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책과 밀착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문장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쓰려면 외국어, 특히 한문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합리적, 과학적이라고는 하지만 독어나 영어, 한문이 갖는 개념적 명석성은 갖추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의 문장도 좋은 문장이지요.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고독은 독어로 Einsamkeit 에요. <홀로 있다>라는 수리적 개념이지. 우리말로 '고독'이라면, '쓸쓸해요'라는 정서가 개입되지만, 독어는 정서가 개입하지 않지. 단독자의 모습을 딱 보여주는 거야. 이것은 한국어와는 참 다른 부분이이에요.



독서가 아닌 놀이


또 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은 이런 거에요. <소방서>...... 타는 불길 안에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 들어가서 불을 끄고 데리고 나와야 하잖아요. 그게 인간 사회의 마땅한 도리지요. 소방서에는 불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써 놓은 거에요. 이런 책들은 아무도 안보겠지, 나만 보겠지. 중장비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에 관한 책도 결국은 기계가 이렇게 맞물려서 인간의 노동하는 육체가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써놓은 것이에요.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법이죠. 항해술도 있고, 항공기 조정술은 봐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는 이게 독서가 아니고, 그냥 놀이야 놀이. 소설 쓰는 사람이 말이야……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자꾸만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 책을 읽으라 하잖아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근사록>이라는 책을 보면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 다독이냐 정독이냐, 일 년에 몇 권을 읽느냐, 이런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이지요. 책을 읽는다는 것보다도 그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나 자신을 어떻게 개조시키느냐는 게 훨씬 더 중요한 문제죠. 책에 의해서 자기 생각이 바뀌거나 개조될 수 없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 없는 거죠.
책은, 우리가 모든 세상과 직접 관계해서 터득하고 경험의 결과를 얻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보조적인 수단으로 필요한 것이에요. 세상을 아는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인 것이지요.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그러는데, 내가 보니까 책 속에는 길이 없어요. 길은 세상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책을 읽더라도, 책 속에 있다는 그 길을 세상의 길과 연결을 시켜서, 책 속의 길을 세상의 길로 뻗어 나오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 독서는 무의미한 거라고 생각해요.


책과 그림,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독서의 가치를 폄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제가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럴 거에요. 나는 책을 매우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 내 또래 사람들은 책을 지금 젊은이보다 많이 읽었을 거에요.
그때는 영화도 시원한 게 없고. 컴퓨터도 없었죠. 음악도 뽕짝과 군가가 전부였어요. 그 시대는 가난하고 참 빈곤하고 지금처럼 다양하지 못한 시대였는데, 지금보다 훨씬 좋은 점도 있었어요. 책과 그림(미술) 이외에는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책과 그림으로 문화와 미의식을 받아들였어요. 이것은 상당히 고급인 인문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우리들의 바탕이 되었다고 봅니다.


<논어>를 읽는 여생




앞으로는 자꾸 새 것을 읽지를 말고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으려고 그래요.
<장자>, <논어>, <사기> 같은 것을 다시 읽어야 해요. 왜냐하면 내가 여생이 얼마 안 남았잖아. 새 책을 따라가기보다는 고전을 읽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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