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학교에서 왕기철이 동화는 내 친구 84
백하나 지음, 한지선 그림 / 논장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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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어린이 책을 너무 등한시 했나 보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쓴 작가 이름이 낯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 소개에서 함께 썼다는 책을 검색해 보니 품절이거나 절판이다. 게다가 그 책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다. 심지어 백하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절판된 책의 서지정보는 없고 그나마 품절도서인 <엄마 없어서 슬펐니> 의 저자 소개로 미루어 '농사 짓는 예비 동화작가 백경원'이 바로 이 책의 저자와 동일인이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작가의 첫 어린이 책이라는 말이므로 기억해둬야겠다. 

 

도깨비가 인간과 어울려 살기 시작한 지 백 년이 되는 어느 날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어린이 책 소재로 도깨비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조력자의 역할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한다. 도깨비 왕기철은 누가 봐도 딱 도깨비처럼 생겼다. 게다가 어찌나 말썽을 부리는지 선생님도 '네가 그 유명한 도깨비 왕기철'이냐고 물어볼 정도다. 물론 누가 뭐래도 기 죽을 왕기철이 아니다. 또한 대개의 말썽쟁이 아이들이 그렇듯이 왕기철도 학교 가는 걸 무지 싫어한다. 꼬마 도깨비들이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이므로 왕기철도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다닌다. 그런 왕기철이 학교를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르겠으나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횡당보도 줄이 평소엔 9개지만 10개가 되는 날은 신기한 일이 벌어진단다. 비록 말썽쟁이이긴 해도 순진한 왕기철은 매일 횡단보도 줄을 센다. 물론 그러면서 학교도 꼬박꼬박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줄이 10개로 변했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학교로 간 날, 새로 오신 선생님과의 첫 대면부터 범상치 않다. 칠판에 선생님에 대한 소문대로 그리다 보니 괴물이 되었고 그 괴물이 살아나 왕기철을 잡아먹으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횡당보도 줄이 10개로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도 일어날 법한 사건인 듯 싶다. 아이들이 그림이 살아난 것에 놀라는 게 아니라 왕기철이 잡아먹힐까봐 놀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칠판 괴물 사건을 대충 수습한 선생님이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인 토괭이를 데리고 온다. 절대로 물을 주면 안 된다는 다짐과 함께. 물론 아이들에게 '절대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묘하게도 '꼭 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법이다. 거기서 또 나서는 것은 당연히 왕기철이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왕기철을 말리지만 나중에는 대개의 아이들이 왕기철과 한 배를 탈 것이라는 점은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토괭이가 물을 먹고 괴물로 변해서 책까지 모두 먹어치워 버리자 나타난 선생님의 대처가 더 재미있다. 아니 아이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선생님의 질문법에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야? 토괭이한테 물 준 사람."

왕기철이 손을 번쩍 들었어요.

"전데요. 전 딱 한 잔밖에 안 줬는데요."

"주지 말라면 주지 말아야지. 토괭이는 물을 마시면 잠들어 버려. 너무 많이 마시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토괭이가 죽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뭐, 그런데 정말 한 잔만 줬어?"

"네."

왕기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빙글거리며 대답했어요.

"그럴 리가. 그럼, 음, 물 한 잔만 준 사람 손들어 봐!"

(중략)

아이들은 서로를 곁눈질로 흘끔흘끔 바라보다 슬금슬금 손을 올렸어요. 여기에서 쑥, 저기에서 쑥, 마치 새싹이 올라오듯 쑥쑥 손이 올라왔어요.

(54~55쪽)

 

왕기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한 잔만 줬으니까. 그렇게 한 잔만 준 아이들이 많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만약 선생님이 "또 누가 물 줬어? 물 준 사람 손들어 봐."라고 했다면 너무 평범한 선생님의 모습이라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아이들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으며 아이들을 진정 이해하는 선생님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졌고, 그래서 뒷부분에서 선생님의 모습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기철은 어떨까. 괴물로 변한 토괭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먹었던 책을 똥으로 싸 놓자 선생님이 왕기철에게 결자해지 차원에서 뒷정리를 시킨다. 똥을 치우는 건데 왕기철은 "예!"라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대개의 아이들 같으면 똥을 치우는 일에 이처럼 시원하게 대답할 리가 없다. 이것만 봐도 왕기철은 적어도 자기가 벌인 일을 남에게 전가하는 치사한 도깨비는 아닌 듯하다. 이쯤에서 독자는 두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왕기철이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저렇게 쉽게 대답하는 걸까와 책임감이 강한 아이구나라고. 결론은 둘 다이다. 처음부터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책임감이 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똥 속에서 건진 책을 제대로 씻어서 가져왔다면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작가가 동심천사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셈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부분이 많이 엿보인다. 내면의 모습과 외면의 모습이라던가, 소문에 대한 자세라던가, 사람이 되기 위해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저학년 동화를 읽으며 밑줄 긋고 싶어진 적은 처음이다. 또한 판타지적 요소가 잔뜩 들어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곰으로 변한 왕기철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 버렸던 책을 씻는 장면에서도 만약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책을 물에 씻으면 다 망가지므로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왕기철이 사는 시대의 책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모처럼 재미있고 의미있는 저학년 동화를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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