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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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국어를 참 어려워했다. 우선 왜 정답처럼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남이 해석해 놓은 것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예 글을 쪼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어쨌든 국어를 못했고 국어가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처럼 책을 읽는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청소년기에 책을 안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기억하기로는 책을 읽으면 독서록을 쓰곤 했던 기억이 있는데(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렇다면 책을 수동적으로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처럼 다양한 분야의 책과 고전을 열심히 읽었다면 국어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물론 책이라는 것을 시험을 잘 보기 위한 도구로 삼아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이가 청소년이 된 지금 내가 이렇게 고전을 열심히 읽지는 않을 테니까.

 

  카프카의 <변신>은 전에도 읽었으나 나머지 단편들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지인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어렵다고 하던데 카프카의 단편에 비하면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문학도인 내겐 카프카의 작품들이 난해했다. 뒷부분의 해설에 나오는 것처럼 혹시 그레고르가 나중에 극적인 방법으로 다시 변신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심지어 그레고르가 죽자 온 가족이 홀가분하게 나들이를 떠나는 장면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이 될 때만 가족이라면 그것인 진정한 가족일까. 그런데 그레고르는 다른 가족에게 그런 존재나 다름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는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자 무관심해지고 급기야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니 말이다. 카프카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의 인간성 상실을 이런 식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언제나 유효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례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는 대우받지만 그 역할에서 물러났을 때 홀대받는 가장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격적으로 존중받기보다는 경제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도 좋은 예가 되겠다. 아들이 돈을 벌어 올 때는 힘없고 무기력한 가장이었지만 그레고르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후부터 오히려 생기가 돌고 가족도 그레고르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씁쓸하지만 카프카가 지적한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안타까운 현실만 확인했다.

 

  다섯 편의 단편 중 그나마 <변신>은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결말이긴 하지만 비교적 쉬운 작품에 속한다. <시골 의사>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경우 마치 앞이나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중간 부분만 덜렁 보여줄 때의 그런 모호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공부 잘하는 모범샘보다는 말썽만 부리는 학생이 더 기억에 남는 선생님처럼 말이다. 카프카는 참 불친절한 작가다. 시골 의사가 왜 그랬는지, 당시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이 그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판결>은 또 어떻고.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이야기할 게 분명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참으로 매정하게 끝내버린다. 작가란 그 시대의 모습을, 문제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카프카는 거기에 충실한 작가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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