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여동생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1
펑슈에쥔 지음, 펑팅 그림, 유소영 옮김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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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의 아동문학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듯이 중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중일 3국 중 그나마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사실 우리의 아동문학을 이야기할 때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 안 그렇겠나. 1930년대의 작품속 아이들이 지금의 아이들 모습과 다른 것은 자명한 것을. 특히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굴곡이 질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작품을 평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했듯이 중국도 문화혁명을 겪으며 많이 변한 것으로 안다.

 

  여하튼 중국의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에 따라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동화를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당시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도 일정 부분 노동에 동원되고 '간부 댁 따님'이라도 그런 노동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해 어린이들도 돌 깨는 일을 하는 것과 묘족의 장례풍습을 볼 수 있는 것 등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네 일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위 공무원인 엄마와 아빠가 묘족마을로 잠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랴오벤의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묘족이라면 흔히 몽족이라고 하는 그 민족이다. 우리 학교 원어민 선생님도 몽족이던데. <총, 균, 쇠>에 의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상당히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라지.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읽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묘족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일 뿐 특별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아타오네보다 훨씬 여유있고 지식인층인 주인공의 서술 방식은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동화다. 그러나 자전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읽는 동안 주인공 자매의 생활에 동화되기 보다는 아타오네와 동네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더 눈이 갔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아슈 할머니나 동생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싼타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랴오벤을 귀찮은 동생쯤으로 생각하다 아타오의 막내 동생을 보며 자신의 동생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변화 과정을 보며 가슴 뭉클해진다. 그럴 때는 대개 우리 아이들도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겠지만. 여하튼 이런 책은 문학작품을 통해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마치 <압록강은 흐른다>나 <지로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문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그저 느낌만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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