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만난 개, 프라이데이
힐러리 매케이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오승민 그림 / 시공주니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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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경험위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경험이란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지협적인 것이어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런 우를 범한다. 이 또한 내가 경험한 바를 기초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도 일반화의 오류를 종종 범한다는 얘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면서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큰아이는 여자아이고 어렸을 때부터 워낙 책을 좋아했고 잘 읽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녀가 책을 안 읽어서 걱정이라고 하소연 할 때 '엄마가 책을 읽어줘라' 내지는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라' 등의 뻔한 조언을 했다. 내가 그렇게 해서 우리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둘째는 그닥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이론과 현실은 항상 함께 간다는 보장이 없으며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말이 증명되는 셈이다.

  또한, 큰아이는 책을 한번 읽으면 그것이 재미있든 없든 끝까지 읽기를 고집한다. 그런데 책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별로 재미없다가도 마지막에 책장을 덮을 즈음 감동이 밀려오거나 때로는 아예 책을 읽고 한참이 지난 후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런 책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거나 밋밋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재미있어 진다는 얘기다. 이 책 <금요일에 만난 개, 프라이데이>도 그런 책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헌데 이곳 학교 아이들은, 책을 많이 접하지 못하는 환경 탓인지 아니면 빨리 변하고 자극적인 대중매체 탓인지 처음에 조금만 지루하면 읽다고 그만 두는 경향이 강하다. 내가 아무리 책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진정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아이들에게 책은 당장 그 시간을 즐기는 도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참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이들이 종종 와서 묻는다. 재미있는 책 좀 추천해 달라고. 그런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가 추천해 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아이가 별로 없다. (오히려 주변의 선생님들이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추천해 준 책이 재미있었다고 말할 때 힘이 나는 반면 별로 재미없었다고 하면 머리속에서는 다른 회로가 돌아간다. 이 아이에게는 이런 종류의 책이 안 맞는 것일까 등등. 그러다 물어본다. 끝까지 읽었느냐고. 그러면 모두 조금 읽다가 재미없어서 안 읽었단다. 바로 이것이다. 처음부터 재미있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 말이다. 허나 이 또한 아이들의 특징일 수 있으니 그것만 갖고 비난할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이들에게 선뜻 추천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행간을 읽어야 웃을 수 있는 재치와 위트를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싶은 우려도 있다. 아무래도 지역적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개에게 물리고 나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가 있던 로빈이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아주 유쾌하게 그려진다. 소극적이고 조용한 로빈은 왈가닥 이웃이 이사오면서 조금씩 바뀐다. 자동차 사고로 아빠를 잃고 나서 친구들이 로빈을 위한답시고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로빈은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나중에는 로빈에게 금지어였던 아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극복한다. 아픔은 무조건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 또한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빈이 개에게 물려서 개를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개를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이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개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로빈 주변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을 따라가며 웃다 보면 어느새 로빈의 상처가 아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인물들의 성격이 재미있다. 로빈의 엄마는 비록 외아들을 키우지만 아들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어느 부모인들 안 그렇겠냐만)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자신의 기분을 솔직히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로빈은 엄마의 눈치를 보며 감정을 숨겨서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이 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가장 요주의 인물이자 매력적인 인물인 옆집의 쌍둥이와 선댄스. 그들의 행동은 어떤 일이든 요절복통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문득 걔네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하다. 제 삼자야 웃으면서 아이들이 독창적이고 재미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모든 행동이 결국 말썽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특히 지나치게 똑똑해서 비정상적인 선댄스의 말과 행동은, 웃음 그 자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행간에 의미를 숨겨 놓았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재미있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댄은 잠깐 마음이 끌렸다가 이내 자기가 적과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140쪽) 라는 것으로 비록 미워하지만 함께 놀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식이다. 만약 여기서 '댄은 놀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적이었던 아이들과 놀 수는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모르긴해도 그냥 평범한 문장에 대한 평범한 느낌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문장으로 인해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느끼는 묘미란.

  "그래도 앤트가 생각 깊게 부모님의 자명종을 들고 와서 아이들이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지는 않았다."(174쪽)를 읽을 즈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자명종을 가지고 온 것이 왜 생각 깊은 것인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뒤집어지게 웃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며 혼자 어찌나 킬킬대며 웃었던지 둘째가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민주주의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명종, 그러나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다음 행동도 예측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작가는 어떠한 문제든 아무렇지도 않게 시침 뚝 떼고 이야기하니 독자는 더 웃을 수밖에 없다. 로빈이 개를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선댄스의 마음을 나타내는 부분도 그렇다.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기껏 낭떠러지에서 올려보내줬더니 댄이 전화할까봐 꼼짝않고 기다리는 부분을 묘사한 장면도 그렇다. 댄의 모습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으니 독자는 당연히 선댄스가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댄의 물음에 대답하는 선댄스라니.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사람들을 부르러 가지 않은 이유를 말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상황파악 못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댄스는 그 전의 행동으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에 잠을 자다 갑자기 일어나서 울었던 이유까지 알 수 있다. 더불어 이 사건으로 인해 댄은 이들과 친구가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일은 어른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벼랑에서 떨어지려는 댄을 구해준 것도 결국 아이들이고(이 상황에서도 선댄스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고 오히려 댄을 구해줬다고 착각한다. 또한 로빈은 선댄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둔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자세한 상황을 모른 채 사건의 결과만 알 뿐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전혀 어색하다거나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어른의 역할이 잘 드러났다고나 할까.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선댄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만약 선댄스가 우리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니, 그보다 선댄스와 같은 혹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그리는 우리 동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 있긴 있을 텐데 선뜻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처럼 유쾌하게 그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개 그 가족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 안에서도 성장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사회 문화적 차이겠지.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책 읽기의 재미는, 글쎄. 진지하고 가라앉은 동화도 좋지만 이젠 유쾌하고 발랄하며 위트있는(그러나 톡톡 쏘는 듯한 요즘의 문체와는 약간 다른, 그야말로 행간에 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 동화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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