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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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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일야화와 이 책을 비교한 문단은 참 절묘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2-07-24 23: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일개미님. 다 쓰고 다른분들 리뷰를 읽어봤는데(물론 일개미님 글 포함해서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코멘트를 남기지 못하겠더라구요.^^) 천일야화 얘기는 가연님이 먼저 하셨더라구요.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거 재밌네요. 리뷰.. 좀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더우니까 눈팅도 힘들지만 일단 읽은 티를 낼려고(!) 댓글 먼저 쓰고ㅎㅎ 인문쪽 책은 왜 이렇게 다들 학자 같은 책만 되지.. 담번엔 정치얘기 쏟아져나온 정치인들책이나 사회학쪽 책이 됐음 좋겠어요. 리뷰가 버거워요ㅜㅜ

맥거핀님 <공산당 선언> 읽으셨어요? 저 그저께 멘붕 왔거든요. 저는 그게..그런 건줄 전혀 몰랐어요. 어쨌거나 어렵더라도 읽으면 이해는 가겠지 했는데..그게 아니..


근데 [제노사이드]는 진짜 재밌어요! (주말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기분)

맥거핀 2012-07-26 02:32   좋아요 0 | URL
아..콩사탕 선언...그거 머 저도 잘 모르지만, 선배들과 토론하면서 억지로 좀 보기는 했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닌데도, 그에 대해서 관련하여 공부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거의 반포기했지요. (선배들에게 이상한 뻘질문도 많이 하구요.) 특히 경제학 쪽을 상당히 공부하지 않는한 거의 피상적인 이해밖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근데 한편으로 보면 또 그건 '선언'이니까요. 그 내용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진 못해도, 그 대의에 동의할 수는 있죠. (뭐 우리가 언제는 자본주의에 대해 잘 이해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 책도 선정이 이미 되었는데, 많은 분들의 추천을 받은 책이 아니라, 의외의 책이 되었더군요. 하나는 상당히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긴 한데, 하나는 의외로 뱀파이어 이야기..저는 사실 왜 뱀파이어 따위에 그렇게 열광하지,가 의문인 사람이라 책을 읽으면 뭔가 해답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제노사이드>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일단 보관함에 담아둘께요.^^

Shining 2012-07-2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처음 본 건 지난번 다녀온 국제도서전에서였어요. 자음과모음 출판사 섹션에서 봤는데 제목이 강렬해서 기억이 나요. 훨씬 규모도 크고 인지도도 높은 어느 출판사보다 이 출판사가 훨씬 좋은, 다양한 책을 가져왔다는 생각에 이 섹션 유심히 봤습니다.

근데 전 이 책 소개 읽어도 당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_- 그래서 오기 생겨서 읽고 싶어집니다ㅎㅎ

저 내일 <도둑들> 보러 갑니다!!

맥거핀 2012-07-30 22:51   좋아요 0 | URL
아..자음과 모음 출판사였군요. 어디 출판사인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요즘에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도 그렇고, 계간지 내는 것도 그렇고, 나름 의미있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뭐 아무튼 무슨 내용이신지 잘 모르겠는건, 다 제 글이 번다한 탓. 저자는 명쾌한 편이니까요, 이 리뷰를 읽으시는 것 보다 책을 직접 보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아..<도둑들>은 그래서 잘 보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이미 봤어요. 감상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할 게 없어서..(그 얘기는 뭐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문, 김일란, 홍지유, 2012.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것이 일주일도 더 넘었는데, 여전히 몇 개의 단상들이 머리속을 떠돌고 있다. 여전히 주저되지만,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 하다.

 

1.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 용산참사의 본질이 국가폭력이며, 일종의 '본보기'로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제시되는 몇 개의 근거들이 있다. 이 용산 사건의 경우 다른 시위나 농성의 경우와 다르게 점거 25시간만에 경찰, 그것도 특공대의 투입이 실시되었고, 이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나중에 경찰의 주장대로라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화염병을 사용하는 등의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특공대 투입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점거 현장에 화염병이 등장하기 2시간 전에 이미 전화로 특공대의 투입이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러한 폭력을 유도한 정황에 대해서도 영화는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그토록 신속하고 위험한 작전이었음에도, 경찰은 건물에 몇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기는 커녕, 건물의 내부구조도 모르는 상황에서 투입이 결정되고 시행되었다는 점, 즉 건물안 사람들의 안전은 둘째치고, 그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기이한 작전이었다는 점. (이는 이 영화의 제목 '두 개의 문'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의 배경에는 MB의 '불관용 원칙'이 있다. 폭력시위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던 그 이야기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MB 정부는 이 사건을 하나의 본보기로 쓰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부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일종의 '경고'선일 것이다. 즉 원했던 것은 신속한 진압으로 앞으로 이어질 다른 수많은 (재개발 등의) 사례에서 일종의 겁을 주려던 것이지, 수많은 죽음들까지 원했던 것일 리는 없다. 물론 그러한 죽음들을 결코 원치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MB 정부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는 정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가 그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할 경우 정권 유지에 큰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법부의 태도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보여진 대로 결국 중요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사건에 대한 진술들도 한쪽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만약 최소한도의 상식이 있는 사법부라면 백번양보하여, 경찰과 철거민의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떻게 결론이 지어졌는가.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부여되었으며, 당시 경찰 책임자는 그 이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고, 판단을 내려준 사법부는 영전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2.

다만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조금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있다. 먼저 영화의 감독이 새롭게 찍은 어떤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화면들을 재구성하는 이 다큐의 방식에 대해 논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씨네 21> 859호에서 한국 다큐씬에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홍형숙 감독과 김동원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놓고 벌이는 논쟁들도 그러한 부분과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동원 감독은 "기록의 힘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개의 문>은 노력을 안 하고 만든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발가락으로 찍었어도 찍어야 할 장면을 찍었다면 거기서 엄청난 가치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원 감독의 지적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힘이 도리어 거기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화면보다 도리어 화질이 나쁘고 흐릿하고 흔들리는 화면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TV 뉴스를 믿는가, 몰카를 믿는가. 요즘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편집으로 만들어진 몰카에 대해서 단박에 알아차린다. 이거 홍보네.) 이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찍히는 피사체가 이것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촬영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자꾸 일종의 '만들어진 이미지' 그러니까 '거짓에 가까운 이미지'라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의도를 가지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다른 의도로 촬영된 화면(예를 들어 이 영화라면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요즘 관객들의 정보수집의 자세와 더 비슷한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즉 요즘은 어떻게 보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중요한 결정적인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여러 정보의 재배열이다. 즉 최근의 관객들은 하나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열하려 하고, 그 어딘가에 진실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 <두 개의 문>은 그런 관객들의 정보배열 형식을 닮아 있다. 칼라TV, 사자후TV 등 인터넷 매체에서 촬영한 화면, 경찰의 채증 영상, 법정진술, 인터뷰, 재연 화면 등이 어지러이 얽혀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중 어느 하나의 '결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정보의 재배열'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조심할 점 중의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판단의 권한, 정보의 재배열의 권한을 관객에게 넘겨준다는 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화를 봄으로써 정보를 재배열하는 누군가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3.

그보다는 도리어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쪽이다.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이 영화의 어떤 비어있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시사인> 248호에서 김세윤은 이 영화가 다른 여러 다큐들처럼 피해자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간극장'이 아니라 진실을 쫓는 '그것이 알고싶다'라고 말하며 "냉정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범죄의 재구성'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의아한 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형식을 취하기에는 이 영화가 한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몇 가지가 이 사건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영화도 끝내 그것을 찾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라진 3천쪽에 달하는 초동 수사 기록(후반에 부분적으로 나오기는 한다)과 사라진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이 영화는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중요한 순간에 다다라서는 한 불친절한 메시지와 만나게 된다. 'No Signal',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채증 영상. 이는 과연 정말 촬영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주장을 설혹 인정한다고 해도, 이 순간을 알지 못하고도 우리는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씨네 21> 862호에서 정한석이 훌륭한 글로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덧붙일 말은 특별히 없다. 정한석에 따르면, <두 개의 문>이 원했던 것 혹은 그것의 운명은 결국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였다. 이는 정한석이 글에서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다시 재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즉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사건의 경우로 말하자면, 결정적인 증거가 그것을 가졌던 측(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용산에서 국가폭력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를 사법부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된다. 여러 정황 증거들, 그리고 여러 경찰의 증언들이 이 참사가 모두 철거민이 잘못임을 증거하지 않는데, 왜 모든 책임이 철거민들에게만 부여되었는가. 그 정황 증거들과 경찰 증언들과 최종적인 사법부의 판단 사이에 있는 빈공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빈공간, 그 초반의 여러 증거들에서 최종의 판단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연결고리가 비어있음을 보여주는 '이 공백들'은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미하고 있는가.

 

4.

다른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금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을 느낀다. 위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인간극장'이 아니라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화의 주제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TV에서 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경우 상당수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시작부분에 가장 충격적인 영상을 제시하고, 보는 이에게 그 이유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배경에서부터 차례로 그 뒤를 밟아나가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초반부의 그 영상, 그러니까 보는 이가 기다리고 있던 결정적인 사건에 이른다. 이 영화도 비슷한 형식이다. 처음에 우리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즉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아침과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MB 정부의 불관용 선언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화는 점증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영화는 배경에서 시작하여 그 전날, 그 밤, 그 새벽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가 일어났던 아침에 이르며, 우리는 그것을 스릴러 영화에서 많이 활용되는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보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화재 발생 2분전'이라는 자막과 만나 그 2분이라는 시간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즉 처음의 그 사건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 구조. 그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두근두근 버텨야하는 시간들과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사건. (여기에 효과를 더하는 것은 그 재연이다. 방송에서 사건사고를 다루는 다큐들이 가장 흔히 활용하는 부분인 바로 그 재연말이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경찰들의 증언을 바로 영상으로 눈앞에서 리플레이하며 보게 된다. 이는 물론 관객들에게 사건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들을 낳게 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윤리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남는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쾌감을 (때로는) 느낀다. 그러나 이 다큐에서마저 뭔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예를 들어 이것을 이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큐 <아르마딜로> 같은 것에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 그러니까 전투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이다. <두 개의 문>이 이와 다른 점은 <두 개의 문>은 그 결정적인 영상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정한석이 위의 글에서 영화 <쇼아>를 놓고 말한 대로 이를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르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경찰의 'No Signal' 때문에, 혹은 파란 슬레이트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과연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는 그 영상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가 그런 구조, 일종의 점증의 구조를 택했을까, 택하지 않았을까.)

 

5.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를 소비하는 방식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를 둘러싼 어떤 기이한 현상을 보며 느끼는 우려에 대해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물음이 올라오는 경우들이 있다. 가장 레전드 편이 뭔가요? 여기에서 레전드라는 것은 자극적인 측면, 미스테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가장 재미있게, 혹은 공포스럽게 볼 수 있는 편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이 프로그램은 그 요구들에 발맞추듯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보다는 특정의 사건, 예를 들어 자극적인 살인사건들로 소재가 미묘하게 달라져가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는 실제의 사건, 누군가의 죽음을 일종의 자극, 재미, 미스테리적인 일종의 장르물로서 소비하게 되는 것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되는가,라는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가지게 되는 것은 공포 혹은 분노에 가깝지 않을까. 즉 우리도 저런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다시 말해서 하나의 '본보기'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위의 '본보기'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와 그 사건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양산되게 된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그 '분노'를 어느정도 즐긴다.

 

<두 개의 문>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용산의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이었으며, 바로 지금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이며, 아들이었다. (실제로 그 건물 안에는 한 부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수감되었다. 즉 경찰의 논리대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그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영화에서 말한대로 철거민과 경찰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분노일까. 예를 들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것처럼 괴물을 점점 걸러내게 하는 것, 그에 대한 분노에 매주 에너지를 쏟아붓게 만드는 것만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왜냐하면 이 용산 사건에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두 가지의 문제, 즉 욕망과 폭력의 구조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먼저 발전과 재개발의 욕망,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욕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무엇인가를 부수고, 새롭게 지으려는 욕망, 그것이 국가의 발전이고, 개인의 발전이라고 믿었고, 그 발전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 정부에 표를 주었고(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재개발을 내심 반겼고), 그 욕망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재개발의 욕망, 철거의 문화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국가폭력을 방조해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폭력에 깊숙이 동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폭력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에 둔감해진 사회에서 작은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것, 혹은 그 작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결국에는 국가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 사태에서의 진압을 보며, 쌍용차는 회생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게시판에서 말하는 것, 그것과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의 방패는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쉽게 대응하는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방식대로 자꾸만 괴물을 양산하는 것이다. 혹은 무엇인가를 자꾸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위 진보정권 때도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자. 실제로 대추리나 기륭전자의 예에서 보듯이 진보정권에도 국가폭력의 양상들이 있었다. 여기에 쉽게 말하는 것은 그 정권이 가짜 진보, 잘못된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진보의 탈을 쓴 다른 무엇인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있다고 해도, 이 대답이 무엇인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여기에는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아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들을 가짜라고 규정지음으로서 남게 되는 '진짜 나, 선한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선한 나는 여기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해자, 즉 현장에 투입된 경찰도 또 하나의 피해자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넘어선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넘어섰는지는 의문이 든다. 영화 속에서 여전히 적은 어딘가(예를 들어 출동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전화기 바깥)에 있다고 믿어지며,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을 영화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포와 분노보다는, (자기반성과 맞닿아 있는) 성찰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재미와 자극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해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공포와 분노의 지점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국가폭력의 역사성을 파고들었던 문정현의 <용산>이나, 현장의 자료화면이나 사진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관련자들의 회상만으로 영화를 이끌며 관객을 결국 현재라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김응수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 등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또 한편으로는 철거의 문제를 오랜시간 그 철거의 공간에 살아온 사람들을 비추는(그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정재훈의 <호수길>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성찰이란 결국은 관객의 몫이며, 강제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저절로, 혹은 영화적 처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최종의 판단은 결국 관객이 하는 것이며, 영화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두 개의 문일뿐. 그 문으로 한걸음 들어설 수 있게 하는 자는 문을 만든 자가 아니라, 그 문 앞에 선 오로지 자신일 뿐이다.

 

 

 

 

덧.

몇 개의 단상들과 몇 개의 질문들이 어지러이 떠도는 탓에 하나의 글이 되지 못하고, 조각보같은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몇 개의 질문들은 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특히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저 잘 기억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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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7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2-07-1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두개의 문>을 읽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맥거핀 2012-07-18 21:43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글 읽어주셔서 고맙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지루한 내용인데..

감은빛 2012-07-1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만, 말씀하신 부분들에 대해 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2-07-18 21:4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감상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여름은 많은 것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독서의 계절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그렇건 아니건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고, 내 책상은 읽지도 않은 책들과 반쯤 읽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과 각종 주간지가 누적 각축을 벌이고 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월초가 돌아왔으며, 나는 새로운 책들을 추천해야만 한다. 6월 인문/사회/과학/예술 추천도서들.

 

 

 

학살, 그 이후 -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인류학 / 권헌익 / 아카이브

 

이 책은 1968년 베트남전 당시 하미와 미라이에서 외국군에 의해 이루어졌던 민간인 학살과 그 이후의 일들을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본 기록이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권헌익은 이 책의 집필 동기를 '동일한 지정학적 양극화에 사로잡힌 다른 사회의 파괴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룬 냉전 사회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 시절을 둘러싸고 도덕적 궁지에 몰린 개인적인 경험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도덕적 궁지'에 어떤 우리도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넘버 미스터리 / 마커스 드 사토이 / 승산

 

지난 번 서평단 활동에서 이 저자의 <대칭>이라는 책을 보며, 어려운 이야기를 참 쉽게 풀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이번에는 일상의 사소한 여러 일들에 내재된 수학을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클레이 수학 연구소가 제시한 수학의 21세기 미해결 7대 문제에까지 우리를 이끈다.

 

 

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 / 월터 르윈 / 김영사

 

우리 대장님 추천도서를 밀어드리는 차원에서 그 중 한 권 골라서 선정....은 반농담이고, 이번 달에 물리학을 쉽게 풀어쓴 책들이 <물리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 <보이지 않는 세계> 등 여럿 출간되었는데 그 중 나아보여서 선정. (<진화심리학>을 밀어드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이 책은 서평단 용으로 후다닥 읽기는 아닌 것 같아서 이 책을 밀어드린다.)

 

 

전쟁과 인민 -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 / 한성훈 / 돌베개

 

요즘 '종북주의 까기'가 대세인데, 막상 그 중심에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리는 흐릿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북한에 대한 이해는 '통일전망대'식의 체제선전을 뒤집어보는 내용들과 보수신문들의 선정적, 호전적 보도에 기반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이 (권력과 군사력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사회의 형성과 그 안의 인민들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떠한 관계인가? / 토마스 엘새서, 말테 하게너 / 커뮤니케이션북스

 

많은 영화이론서들이 단지 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으로 머물고 있지만,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인간의 감각과 영화이론을 연결지으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의 목차는 눈으로서의 영화, 피부와 접촉으로서의 영화, 귀로서의 영화, 뇌로서의 영화 등으로 이어진다.) 무릇 영화란 눈으로 보고 귀로서 듣는 것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지각하고 육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덧.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것의 계절이기도 한데, 그 중의 하나는 락페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락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올해 펜타포트의 헤드라이너가 매닉스라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 아, 나도 '당신이 이를 참는다면, 당신의 아이들이 다음 제물들이 될 거야'라고 떼창하고 싶다.

 

Manic Street Preachers -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

(Glastonbur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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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이론, 관심 가네요. 락페는 가보고 싶지만 제겐 너무 멀어요.^^
딸은 갈 거라고 친구들이랑 논의중이더라구요.ㅎㅎ

맥거핀 2012-07-07 12:09   좋아요 0 | URL
저도 가볼 계획을 세우고 있기는 한데, 과연 실현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락페 같은데 가면 망가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 망가질 각오가.^^
그래도 매닉스는 가줘야하기는 하는데..

주말 잘 보내세요.^^

노이에자이트 2012-07-0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이나 북한은 독서시장에서 별 재미를 못보는 분야죠.저런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더군다나 하미는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곳이라서...

맥거핀 2012-07-07 12: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하미가 그랬군요. 근데 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군이 또 다른 곳에서도 못할 짓을 많이 했겠죠. 참 우리 역사로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입니다만, 뭐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권헌익 선생의 책이 제목에서 얘기한대로 추모의 논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정 안되더라도 읽어봐야겠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아이리시스 2012-07-12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물리학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거예요? 과학이랑은 당최 거리가 멀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사촌동생(걔도 저를 좋아해요ㅋㅋ)이 포항공대 물리학과거든요. 가까운 사람 중에 제일 공부를 잘하는 동생이죠. 동생 중에는... 걔는 정말로 물리학이 재밌다고 했어요. 이런 게 진정한 멘붕....( '')

뭐 걔와 저의 길은 다르니까요ㅜㅜ 다른 책은 전부 제 관심사도 돼요! 이번에도 보편적 인문분야 책들은 아닌 것 같아요.하하.

맥거핀 2012-07-14 16:13   좋아요 0 | URL
사람이 읽을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 내용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준 위와 같은 책이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고딩 때 과학 분야를 잘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중 물리가 좋았어요. 화학은 젤 싫었고. 화학은 그 화학식이 너무 짜증나서..ㅋ 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죠.ㅋ

뭐 항상 마이웨이를 지향합니다. 근데 위에 저 책들 다 진짜 괜찮은 거 같은데. 아..내가 찍어서 그러나..

2012-07-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의 책을 진짜 여름에 읽을 수 있다는 겁니까?!
헉. 책상 위에 저 책들이 있으면 왠지 숨이 막혀올 것 같아요..ㅎ

그나마 물리학 특강이 젤 떙기네요. (아이님과는 달리 아직 자기 능력 파악을 못한...) 과학에 대한 숨은 로망이 있어서요..ㅎㅎ

맥거핀 2012-07-14 16:17   좋아요 0 | URL
네..그래도 저 정도면 읽을만 하지 않을까요. 이번달 무시무시한 책이 선정될 거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 같은 거 말이죠. 여러 많은 분들이 추천한 책이라 좋은 책임은 확실한 듯 한데, 그 두께도 두께려니와 내용이 그리 휘리릭 읽을 책은 아닌 것 같은데..)

뭐 하긴 인문학 독서라는 게 요새 뭐 말랑한 인문학을 많이 추구하는 듯 싶습니다만, 사실 치열한 자기반성과 깨달음이 병행되(어야 하)는 일이죠.
 

 

 

 

 

화차, 변영주, 2012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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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7-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영주가 8년만에 작정한 영화치곤 조금은 시시하군요 ㅋ

맥거핀 2012-07-05 13:38   좋아요 0 | URL
아..<발레교습소> 이후에 8년만인가요..뭐 저는 <발레교습소>도 괜찮았고, 이 영화도 괜찮았어요.

이진 2012-07-0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화차>를 보며 단 한번도 웃은 적이, 실소를 지은 적도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입니다. 영화 <화차>는 매우 신선하고 과장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이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다." 은교와 화차 두 작품 모두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차례로 읽었는데요, 은교는 소설의 퀄리티가 훠얼씬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반면 화차는 소설과 영화의 퀄리티 갭이 거의 없다고 봐요. 아니 소설 영화 따지는 것 필요없이 소설과 영화는 거의 다른 이야기. 어쨌든 배우들의 연기보다 영화 자체가 좋았달까요. 그렇다면 변영주 감독이 좋은 거군요. ^__^

한 가지 제 시점에서 아쉬운점을 꼽자면 영화를 다 보고나서 생각해보건대 개인 파산의 이야기가 홀라당 해 버린거 같아요. 내가 놓친건가...음.

맥거핀 2012-07-05 13:46   좋아요 0 | URL
저는 위 글에 쓴대로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은 어떤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뭐 아무튼 그렇게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있겠죠. 당연히 어느 정도 퀄리티도 될테고..변영주 감독은 방송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나, 여러 참여하는 활동들을 봐도 상당히 사회적 의식이 강한 감독이지요. (가끔 그런게 도리어 창작활동에는 독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저는 변영주 감독이 그런 것에서 약간 깎아먹는 게 있기는 하지만, 능력이 기본적으로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리뷰에 보니 경선에게 너무 가혹한 지위를 부여한 것, 차라리 선영같은 정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더군요. 확실히 경선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니까. 연민은 되지만, 또 쉽게 공감이 가기 어려운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죠. 개인 파산과 관련된 기본소설의 메시지와도 상당히 달라지는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 같고..

프레이야 2012-07-0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화차의 영어제목이 와닿네요. 잘 지은 것 같아요.
원작과 내용상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전, 원작의 결말이 좀 더 마음에 들었어요. ^^
변영주가 고른 여주인공은 역할에 잘 맞는다는 느낌도 들었구요.
맥거핀님의 리뷰는 늘 참 좋습니다. 다시 영화와 원작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맥거핀 2012-07-05 13:53   좋아요 0 | URL
원작은 더 모호한 결말이라고 하죠? 저도 사족이라고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이런건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은데..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있었어요. 그러나 용산역 시퀀스만큼은 꽤 전체 구축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에서 끊어버린 것도 좋았구요. 파토스가 기본적으로 꽤 센 영화입니다만, 그 파토스의 강도를 그렇게 한 것은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희는 조금 한계가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그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잘 맞으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배우라고 봅니다.(그런 면에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시나리오에서 잘 고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번 영화에서의 연기를 폄하할 이유는 없구요. 용산역 장면들은 김민희 커리어 최고의 연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에스컬레이터씬 같은 것은 정말 좋았어요.

Shining 2012-07-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차>는 제가 처음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었어요. 그때는 지금만큼은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죠(물론 자국에서야 이미 입지가 굳었지만 국내시장에서는 아직). 놀랍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어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문학적) 장녀라고 부르는 부분이 맞구나 싶은 놀라움과 문학적으로도 글을 잘 쓰는구나 싶은 감탄 말이죠. 게다가 이 책의 출간년도가 90년대 후반인 것에 가장 그랬죠.

그래서 변영주 감독이 이 책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지레 염려와 불안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화차>가 감독님이 여태껏 만든 영화 다 합친 것보다 더 흥행이 잘 됐다고 하니ㅎㅎ 아직은 볼 계획이 없지만 언젠가는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이선균의 근래작이 분명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연기 커리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주관적 생각... 이건 사족입니다^^;

2012-07-08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09 18:35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말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있지만, 왠지 끌리지 않는달까..아님, 제가 아직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약간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어요. 이 소설 국내출간이 90년대 후반이던가요? 그럼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그런 신용사회가 구축된 것이겠군요. IMF 이후니까.

뭐 상당수의 리뷰들을 보면 원작보다 못하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만, 돌이켜보면 볼수록 뭔가 안타까운 이야기인것 만큼은 틀림이 없어요. (뭐 현실에는 더한 케이스들도 있겠지만.)

이선균에 대한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012-07-09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07-10 11:24   좋아요 0 | URL
90년대 후반, 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롭고 그런데 변영주 감독이 그 이야기를 '지금에야' 하겠다는 점에서 좀 의아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이건 시대를 안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작금의 현실에선 이정도 이야기 혹은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익숙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말이죠. 때문에 원작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관객들은 이런 일들에 대해 아니까요. 불이해와 연민, 어느 정도의 공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저 영화도 안 봐놓고 말은 참 잘하네요^^

2012-07-10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11 23:06   좋아요 0 | URL
아마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사회가 그 정도의 사회겠죠. 좀 다른 얘기겠습니다만, 최근의 한국영화들의 어떤 가혹함, 혹은 적당한 체념 같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정치적인 인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MB정권 5년간의 한국영화들을 분석해보면 재밌는 양상이 나올 것 같아요.) 근데 이것이 일본의 2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은 어찌보면 좀 슬프네요.

<다크나이즈 라이즈>는 저도 보고싶기는 한데, 초반에 너무 열기가 엄청나다보니 괜히 반감이 생기네요. (이상심리) 천천히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7-1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성하 아저씨 원래 되게 좋은데..성균관 스캔들에서도..영화는 기억이 안나요! 예전에 아침연속극을 본 적 있는데 저는 그때 첨 알아서 드라마에서만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근데 맥거핀님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쓰니까 어쩐지 맥거핀님이 심기는 것 같..(죄송해요, 아침부터ㅋㅋㅋ 빨리 아침을 먹어야겠어요!)

근데 질문!
저 비밀 댓글 속엔 뭐가 있는 겁니까? 연애합니까?ㅋㅋㅋ

맥거핀 2012-07-14 16:04   좋아요 0 | URL
아..아이리시스님 도대체 잠수했다고, 빨리 안오신다고 험담중이었습니다.ㅋ 조성하씨는 성균관스캔들은 아니고 다른 독립영화에서 처음봤었는데요. 이상하게 예전부터 특유의 발성이 약간 거시기했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몸에 잘맞는 배역을 만난듯한 느낌. 이분은 꽃중년 이런 거 말고, 이렇게 꾸질꾸질한 배역을 맡아야..

맥거핀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맥거핀이라고 말하는 게 맥거핀이죠.^^

2012-07-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여씬들이 미스터리보다 정서를 지향한다는 해석에 끄덕끄덕.
저ㅡㄴ <발레교습소> 보고 좀 시시해졌다, 이랬는데, 이 영화 보고 우왕~ 역시 변감독님~! ㅇ.ㅇ 이렇게 눈이 바꼈죠. 원작 이하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던데, 저는 이 영화 참 좋았어요.
그리고 이 글은 대체로 아, 맞아. 이러면서 읽었네요.

그나저나 늦게도 보셨구만요. 극장에서 보셨어야 진짠데, 그러셨을라나?!

맥거핀 2012-07-14 16:08   좋아요 0 | URL
집에서 뒹굴뒹굴 보기 시작했습니다만, 보다가 보니 괜찮아서 나중에 자세를 고쳐앉고는 열심히 봤어요.

변영주 감독이 오랫동안 안찍기는 했지만, 이번 영화는 좋더군요. 특히 마지막 용산씬 같은 것은 영화의 주제를 공간과 잘 합치시킨, 최근 메이저 한국영화중 좋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2012.

 

 

 

(글 중간중간에 영화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상당수의 다른 프랜차이즈 시리즈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편의 성공과 그보다 나은 2편, 그리고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유산들을 모아 가까스로 선방을 해낸 3편, 그리고 만들지 않았던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는 4편, 그리고 시리즈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감독들이 시리즈를 이끌어나갔을 때 그나마 적용되는 것이다. 2편부터 망가진 시리즈들이 얼마나 많던가.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하는데, 1편은 리들리 스콧, 2편은 제임스 카메론, 3편은 데이빗 핀처, 4편은 장 피에르 주네이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올해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 즉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종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나왔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이야기하였듯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프리퀄이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프로메테우스>의 느슨한 서사, 빈공간이 뻥뻥 뚫린듯한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 논쟁들을 낳고 있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혹은 <인셉션>)나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제시하는 꽉 짜여진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데터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제외하더라도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 자체가 이미 헐거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게시판들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서로가 자신이 맞는 답이고, 다른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어지게 될 몇 개의 이야기를 놓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이는 낚인 물고기들이 바구니에 담겨서는 내 떡밥이 더 맛있었다, 혹은 네 떡밥이 더 맛있었다며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는 구멍이 많은 서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만큼은 사실이고, 설혹 프리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괴하고 끈적끈적하고 음울한 분위기만은 잘 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나 미술적인 부분, 혹은 캐릭터의 활용(아마도 많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들은 이 <프로메테우스>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당할지 쉽게 예상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의 큰 줄기를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왔다. 그 하나는 여전사 리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숍으로 상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화론의 세계와 창조론의 세계. 진화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생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창조에는 그러한 생식의 과정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생식 혹은 임신(수태)에 대한 상징 혹은 이미지들인데, 여성 전사 리플리, 인간(숙주)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형상, 2편에서 리플리와 소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생물체 에이리언 역시도 그러한 번식과 관련된 부분들이 계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이리언도 번식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프랜차이즈인 영화 <주라기공원>에서 가장 섬뜩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섬의 공룡들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창조된 안드로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흔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생식과 관계된 부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이라는 것은 생식 혹은 번식과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가장 비통한 괴성이 터져나왔던 장면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퀸 에이리언이 자신의 알을 불지르는 리플리를 보고 내뱉은 괴성이었다.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파스빈더)이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꾸는 꿈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왜 그는 이 꿈을 보는가.)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는 외부의 괴물말고도 이 창조된 안드로이드를 보는 (생식하는) 인간의 섬뜩한 감정이 내내 지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한편으로는 밖의 괴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안드로이드에게도 해당된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장점은 마이클 파스빈더가 이 섬뜩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식은 아비가 죽기를 바란다."고 대사를 할 때를 보라.) 그리고 그 섬뜩한 기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안드로이드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결국은 진화론 쪽이었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여전사 리플리였으니까.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단지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밖에는 여전히 에이리언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이리언은 그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니까.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일종의 헤테로, 그것이 에이리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그것을 조금 더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에이리언이라는 괴물은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쇼 박사의 임신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다시 그것이 엔지니어(스페이스 자키)와 결합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최초의 에이리언은 인간의 정자, 그리고 불임의 수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이한 역설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창조되었지만, 생식의 과정으로 이 세상에 기어나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의 탄생에도 단지 진화만이 아닌 창조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창조에는 외부의 손길, 외계인들의 어떤 작용이 개입되었다는 것. 즉 이는 일종의 변형된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론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어떤 외부의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놓고보면 인간은 에이리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에이리언이 처음 엔지니어들의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가, 우연히 진화의 과정(영화 속 쇼 박사의 임신의 형태)을 거쳐 탄생된 것처럼, 인간도 결국 엔지니어들이 먼 옛날 뿌려둔 씨앗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 무엇이 된다. 즉 그 태생적 뿌리는 인간이나 에이리언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에이리언이 괴물이라면 인간도 괴물이 아닌가. 에이리언의 행동들은 결국 번식을 향한 본능이고 생존본능이다. 'Alien'이라는 것은 '외계의', '이질적인'이라는 뜻일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이 에이리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이리언과 같은 지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발버둥이 생기며 창조론의 오래된 믿음 저편에 있는 것, 그러니까 신이 등장하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창조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론에는 한 가지 뿌리깊은 믿음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에 의해 자신과 닮은 어떠한 것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믿음이다. 즉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겨우 원숭이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적어도 완벽의 시작지점에 있는 어떠한 것, 그것이 인간이 되려면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그 창조의 시점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러한 믿음에 몇 가지 불길한 가설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을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하지 못한, 자신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불사(不死)를 향한 웨이랜드 회장의 믿음과 그것의 깨어짐은 이미 엔지니어들의 죽음이 발견된 처음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야 말로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들여다보고 있는 쇼 박사의 꿈을 생각해보라. 그 장례식 장면. 생과 사에 대한 동경.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은하철도 999>에서 <블레이드 러너>까지.) 아니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어떤 형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간을 독수리에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듯이, 처음 지구에 남겨진 엔지니어는 마치 사약을 받는 죄수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의 반대편에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영화 초반부 데이빗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몇 번 따라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불을 잡을 수 있지?" "뜨겁지 않다고 믿으면 되지." 영국인으로서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이 영화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대사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 이는 마치 인간에 대한 데이빗의 조롱처럼 보인다. 웨이랜드 회장은 데이빗을 인간들에게 소개하며 말한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그러나 데이빗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편으로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이 보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불을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내 데이빗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섬뜩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단지 잘못 창조된 존재로 점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박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쇼 박사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이 이 와중에 그것을 하고 싶냐고 조롱하지만) 데이빗이 벗겨낸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 목걸이는 인간이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창조주)과 닮은 형상의 어떤 것이라는 믿음. 그녀는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두 명의 생식기능이 없는 존재, 즉 불임의 쇼 박사(그리고 이를 전시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이제 생겨났다)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주들의 별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SF 영화의 팬들은 어떤 장면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장면. "내가 네 아버지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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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지트윈스 덕분에 탄생된 글..아하하 져도 좋으니 멘붕이나 안오게 해주세요...-_-

Shining 2012-06-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메테우스>가 <에일리언>의 프리퀄이었어요?; 전 SF, 판타지, 신화(타이탄 같은)는 영 못 보는 이상한 성격이라; 이 영화도 완벽한 무관심이었는데_- 궁금해지네요.

그런데요 맥거핀님, 맥거핀님은 영화에 늦게 입문(??) 하셨다면서 왜 이렇게 분석을 면밀히 잘 하시는겁니까! 사람 기죽게! 맥거핀님 때문에 전 영화글 더 이상 못 쓰겠어요, 흑.

맥거핀 2012-06-30 14:48   좋아요 0 | URL
저도 판타지나 신화물은 잘 안보지만, SF는 꽤 봅니다. SF는 모든 소년들의 로망들의 아니겠어요. 특히 에이리언 시리즈는 나름 애착이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구요. 제 기준에서는 이 영화 꽤 괜찮았어요. 에이리언 시리즈는 특유의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잘 살려냈더라구요.

어..역시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곱습니다. 하하.

아이리시스 2012-06-2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네오님 리뷰 보고나서 스콧인데 제끼기로..어차피 제가 모든 영화를 다 본 건 아니니까요 맘 편히ㅋㅋㅋ 저는 SF, 판타지는 모르겠고 '타이탄'류의 신화물은 쭉 좋아해왔는데 이 영화는 공부해야겠네요. 궁금하지만 공부 안하면 보이는 게 없을 것 같아요 -_-

저 리뷰 좀 빌려주세요. 본 영화가 없어서 이번달에는 영화리뷰 네 편을 못 채우게 생겼네요. 한 편 썼는데 푸하하(3개월만에 나가떨어질지도 모르는 파워리뷰어)

맥거핀 2012-06-30 14:52   좋아요 0 | URL
아니..스콧이면 이 영화를 봐야죠.^^ 리들리 스콧하면 사실 화면빨..(리들리 스콧이 <블레이드 러너> 덕분인지 철학적인 어떤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런 거 별로 없다고 생각...)

뭐 마음 같아서는 빌려드렸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 숫자 채우는 거 되게 짜증나죠! (적극 공감)

2012-06-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리언 시리즈를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 프로메테우스도 패쓰~입니다. 이 글 읽어보니 조금쯤 흥미도 생깁니다만.. 그러나 은영전 시리즈 어디 재미없어서 안 보겠습니까? 다만 인생이 짧아서이지요.ㅎㅎ
아, 쇼 박사가 무얼 만날지 1편도 안 본 내가 2편이 궁금해지는 것은 이 글을 성실히 읽은 증거인 겁니다..^^

맥거핀 2012-06-30 14:57   좋아요 0 | URL
네..저도 여기 알라딘 분들이 무슨 소설 시리즈 얘기할 때 과감히 패스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별개의 영화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에이리언 시리즈를 좀 봐야만 여러가지로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담번에 쇼 박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면 얘기를 전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