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영화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오프닝은 이 영화를 읽는 하나의 방향지시등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관객을 다짜고짜 시민과 나데르의 이혼법정의 심사관으로 앉혔다. 관객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불충분한 정보들을 놓고, 미심쩍은 판단을 해야만 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공항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마중나온 여자. 이들은 분명히 서로 잘 아는 사이인듯 하나, 그 관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감돌고, 그들은 무엇인가 대화하려고 애쓰지만 유리창에 막혀 대화가 전달되지 않거나, 대화하지만 그 대화는 빗소리에 가려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조금 이상한 말이겠으나,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그들은 대화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화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서 우리가 내내 불충분한 정보들에 둘러싸여 불충분한 판단밖에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우리는 대화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들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무엇인가를 판단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이 아쉬가르 파라디가 파놓은 덫이다.

 

즉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에서 말들은 계속 쌓인다. 우리가 처음 알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계속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면, 통상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태는 전혀 다르게 보이며, 판단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영화가 영화적 속임수를 써서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에 따른 최선의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내가 등장인물이라도 비슷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당사자들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어떤 진실이 있지만, 작가나 감독의 속임수에 의해 그 핵심의 진실이 감춰진 (보통의) 추리극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사건의 핵심인 라지에의 유산이 무엇으로 인해 벌어진 것인지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감독이 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당사자들도 그 사건에 대해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라지에를 밀친 나데르는 자신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라지에 역시 유산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데르 때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진실, 즉 사미르(타하 라힘) 부인의 자살 이유도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자살 시도의 장면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설혹 그녀가 죽으려고 한 날 그녀의 행적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몇몇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야기는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즉 문제는 무엇이 답이고, 진실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무엇을 믿을 것이며, 그 믿음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는 그 어떤 답도 확실한 근거를 가진 확실한 답이 아니며, 어떤 선택이든 불확실한 무엇인가가, 즉 그 불확실함이 가져다주는 미심쩍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라디의 영화는 전작과 조금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전작에서 한 걸음 나아간 선택을 한다. 전작에서는 마지막에 우리는 다시 어떤 판단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파라디는 그 선택의 한가운데에서 어떠한 조망이나 믿음도 주지 않고 영화를 끝냈다. 그런데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마지막은 조금 흥미로운데, 아내의 병원에 간 사미르는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날지 모르는 아내를 놔둔채 병원을 돌아나오려고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영화를 끝낸다면 이는 전작과 동일한 끝맺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미르는 별안간 다시 뒤돌아 병실로 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으며 향수냄새에 그녀의 손이 반응하는지를 살핀다. 이 끝맺음, 그러니까 아내의 손과 맞잡은 사미르의 손을 오랫동안 비추며(방금 말한 이 일련의 장면들은 롱테이크로 찍혔다)  끝내는 이 마지막은 우리에게 다시 믿음의 문제를 상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미르의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독이 제안하는 우리의 믿음 작동 요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손이 사미르의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그 손은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손일까(내가 여기에서 떠올린 것은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이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나, 혹은 보지 못했나). 양쪽의 두 가지의 믿음. 그러나 어떻게 믿든 간에 사미르의 그 꼭 쥔 손은 단순한 진실게임이 아닌 그가 이제 감내해야하는 나머지 것들을 말해준다(딸 루시가 말한 진실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 마리(베레니스 베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굳이 다시 나가서 딸을 데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파라디의 이 새로운 유형의 믿음의 게임, 혹은 도덕극은 지금의 세계에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세계. 이와 달리 예를 들어 중세의 도덕극(morality play)에서는 거대하고 확실한 저편의 세계가 있고, 등장인물들은 매우 성스럽거나, 매우 어리석거나, 혹은 매우 악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유형화되고, 유형화된 인물들은 결국 어리석은 주인공, 그러니까 우리 인간을 선의 길로 이끈다. 그러나 아쉬가르 파라디의 세계에서는 모든 인물들은 비도덕적인 면이 있으나 대체로 도덕적이다. 똑똑하고 도덕적인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놓여진 공백이다. 그 괄호로 이루어진 공백들, 바로 이러한 오늘의 세계에 당신을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답을 적어낼 것인가. 혹은 그 공백을 비워둔채, 고통을 감내할 각오를 가지고 '답없음' 혹은 '모두정답'을 기꺼이 선택할 것인가. 나는 지난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리뷰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영화로 치르는 윤리학 시험'이라고 썼었는데, 이 시험은 어쩌면 모든 답이 정답이거나, 모든 답이 오답인 것 같다.

 


덧.
이 수입사의 번역제목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적극적인 제목을 굳이 달았는지 모르겠다. 이 제목이 아쉬운 것은 앞서 말한 오프닝 때문이기도 한데, 차에 탄 그들이 뒤에서 부딪힌 'Le Passe(과거)'라는 이 영화의 원제를 와이퍼가 지워버리는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감독이라면 상당히 짜증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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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1-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제가 많이많이 보낼게요 :)

맥거핀 2014-01-10 00:14   좋아요 0 | URL
응..고마워요. 아이리시스님. 새해 복많이 받아요. 제가 요즘 알라딘에 자주 못와서 늦었어요. 흑흑.

희선 2014-01-23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가 많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알아내기 어렵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읽지 않았지만 온다 리쿠 소설 에는 어떤 사건에 대해 여러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르답니다 이런 일은 흔히 있기도 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9   좋아요 0 | URL
네..그런데 아무리 정보를 그러모아도 결국 알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런 문제를 놓고 싸우지만요. 그리고 쉽게 단지 그건 우리가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정보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 때야말로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말 '그 때'인가, 즉 이것이 믿음을 작동시켜야 할 때인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먼저 답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리뷰를 쓰는 것보다도) 수많은 책 중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내는 일이다. 한참 동안이나 이 책이 좋을까, 저 책이 좋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사실 모든 책이 좋아보이거나, 아니면 모든 책이 다 문제가 많은 책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읽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단지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골라낸다는 것의 민망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리뷰를 쓸 때보다도 이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할 때가 늘 시간이 더 걸리곤 해서 아유, 이런 추천리스트 같은 것은 이제 더 안했으면 싶었는데, 막상 마지막 추천도서를 쓸 때가 되고보니 시원함보다는 여전히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자면 또 저번 서평단 마지막 추천글의 ctrl+V가 될 것 같고, 어서 몇 권의 책을 내밀며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 듯 싶다.

 

이대로 책만 읽고 있어도 좋은걸까, 하는 시간들 속에서 골라낸 몇 권의 책들.

 

 

 

사물 판독기 / 반이정 / 세미콜론

 

<씨네21>에 실렸던 반이정의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커다란 사진과 같이 실린 그의 (대체로) 짤막한 글들은 때로 사진 에세이 같기도 하고, 혹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나 단지 농담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 종잡을 수 없는 웅얼거림들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도리어 문득 세상을 보는 (나의) 무감한 시선들이 느껴지곤 했다. 그가 내미는 하얀 토끼를 따라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로 들어가 보자.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 민음사

 

이상한 사물을 보았으니 이제 이상한 공간을 읽을 차례이다. 문학비평가인 류신의 이 책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 복잡한 도시 서울을 벤야민 식으로 읽어낸다고 하는데, 뭐 사실 누구 식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거의 대부분 무감하게 지나치는 이 공간들을 기어코 다시 '돌아본다'는 것에 있을 것인데, 새로운 필터를 거친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하얀 토끼를 따라 들어간 앨리스는 이제 여왕이 지배하는 기이한 공간들을 보게 된다.

 

 

시인을 체포하라 / 로버트 단턴 / 문학과지성사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 전경목 / 휴머니스트

 

기이한 공간들을 보는 것은 현재의 공간들을 뒤집어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공간들이 어땠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역사책에 실린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무대로서만의 공간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던 일상적인 공간 그 자체를 보려는 미시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고양이 대학살>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이름인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세기 중엽의 파리와 당시의 구어적 의사소통망을 특유의 흥미로운 서술 방식을 통해서 재구성해낸다. 전경목의 책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는 낡고 빛바랜 종이일 뿐이었던 고문서를 입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생활상을 복원해내고, 우리에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면의 일상사를 엿보게 해준다. 고문서 연구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저자의 이력을 한번 믿어보자. 

 

 

세상물정의 사회학 / 노명우 / 사계절출판사

 

이상한 사물들과 이상한 나라를 본 앨리스는 이제 과거의 앨리스가 아니다. 이야기 속의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났지만, 현실의 앨리스들에는 꿈에서 깬 이후의 삶이 남아있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에 감춰져있던 리얼리티를 보는 것일텐데, 사회학자 노명우는 이 책에서 우리 세속의 풍경들에 감춰져 있던 의미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취미, 섹스, 개인, 가족, 노동, 기억, 상식과 같은 풍경들에 담긴 것들인데, 우리는 이 당연한 키워드들 속에서 어떤 냉혹한 현실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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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0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4-01-05 14:42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도 추천도서 쓰시면서 많이 고민하셨던 모양이네요. 파트장님 추천목록도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가연 2014-01-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ㅎ 너무 늦게 이렇게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저도 빨리 추천목록을 만들어야하는데...

맥거핀 2014-01-05 14:43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연님 추천목록도 보러 가겠습니다. 이번달에도 과학책이 한 권은 들어있겠죠?

비의딸 2014-01-1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물정의 사회학..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맥거핀 2014-01-15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이 책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서평단도 별로 안남았네요. (댓글이 조금 늦었네요. 제가 요새 잘 못 들어와서..;)
 

 

2013년 좋았던 영화 10편 (무순)

 

 
설국열차, 봉준호

후쿠시마의 잔해 제거를 위해 노숙인들이 헐값에 투입되었다는 세밑의 기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설국열차에서 그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들어가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윌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가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세계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때 봉준호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칸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집단의 서사를 개인의 서사로 능숙하게 압축시킨 다음,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보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 각자의 비어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든다.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과 코맥 맥카시는 관객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다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차가운 성찰을 요구한다. 올해 최고의 공포물. 리들리 스콧의 의외의 간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가 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편으로 리듬의 조절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절한 포인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종종 멈춰서서 관객을 차분히 성찰하도록 내버려둔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타비아니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고대 로마와 그것을 연기하는 재소자들의 과거와 그들이 보여주는 현재의 무대.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시저'는 누구인가.

 


스토커, 박찬욱

단 한 숏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는다. 박찬욱은 늘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번에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한 세계를 마감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홍상수의 명계(冥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홍상수의 줌은 누군가를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그 명계에서 해원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집요한 도덕극이자 말(言)이 만들어내는 환영들의 향연. 전작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롭게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의 스릴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블러드 브라더, 스티브 후버

진짜 기적이 있는지 늘 의심하는 나와 같은 자들은, 진짜 기적을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EIDF에서 만난 단연 올해의 다큐.

 


일대종사, 왕가위

모든 것이 쇠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으며, 한껏 자신만만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소한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왕가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경의를 보낸다.
 



2013년 보았어야 할 영화 10편 (무순)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잠 못 드는 밤, 장건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풍경, 장률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제로 다크 서티, 캐서린 비글로우

가족의 나라, 양영희

필름 소셜리즘, 장 뤽 고다르

비념, 임흥순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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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대종사, 풍경,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언급된 것 중 보았어야 한다고 (특히) 생각하는 영화 3편이에요. 아 아쉽다!
2. 영화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모두 고개 끄덕이게 하는...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거핀 2014-01-03 20:35   좋아요 0 | URL
아..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러서 인사해주시고..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경은 저도 아직 못봤지만(사람이 너무 없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일대종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강추할 수 있습니다.^^ 아..아직 개봉하고 있는 영화중에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영화도 참 좋아요.

2014-01-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알면서도 그 영화 못 보고 있어요.ㅠㅜ 심지어 동네 극장에서 하는 월터..도 못 보고 있는!! 이대로 출국 2월초 귀국하면 봤어야 할 영화에 월터와 아델이 떠억하니 오르겠죠. 넘흐 보고 싶었던 이무지치의 사계마저도 1월에 내한 공연!!!!!!!! 뭡니까.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왜!!!!! 난 너희 나라에 지금 갈 건데! 진짜 저주받은 타이밍요...ㅠㅜㅜㅜ /아 풍경....ㅠㅠ 장률 감독 GV도 기회 있었는데 못 가보고...

맥거핀 2014-01-03 21:07   좋아요 0 | URL
아..저 사실은 월터..도 봤어요,라고 염장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건 뭐 염장을 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섬님인듯..이태리요? 저는 이 팍팍한 서울에 갇혀서 TV속에서 그네 언니 얼굴이나 보고 있는데..

저는 영화 같은 건 안봐도 좋으니..(;;) 어디나 좀 갔으면 싶은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디 갈 일이 없어요. 매일매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 속의 공허함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요(라고 하지만, 사실 술도 좋..).

2014-01-0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안 달려고 했는데 우껴서.. 그네 언니야 트윗 탐라 조정하듯이 인생에서 편집해 주시고, 사실 술이 좋다고 괄호 속에다 부끄럽게 고백하셨으니 행복 인증이네요. 알콜은 어디서나 손닿는 곳에 있어주시니.. 일상 속 찰랑이는 행복...후후후 근데 이건 어떻슴까? 전 이딸리아에서 싸고 맛있는 와인, 좋은 친구로 날밤을 보낼 거라는... (월터, 그래도 제게 염장입니다.ㅋ 휴~)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어제 저도 조촐한 신년회가 있어서 와인 마셨어요.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와인 정도는 안되겠지만, 뭐 그래도 많이 먹었으니..질보다 양으로다가..(정신승리중. ㅋ)

근데 월터씨는 좀 별로였어요. 그거 아시죠? 남들 다 웃을 때, 하나도 안 웃겨서 소외되는 기분..개인적으로는 왜 우리나라에서 평들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외국에서는 평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탈리아 잘 다녀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가연 2014-01-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본 영화가 하나도 없... ㅋㅋㅋ 정말 삭막한 작년을 보낸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다 안타깝네요. 뭐 그런데 가연님은 그 이상으로 좋은 책 많이 보시니까.^^

Shining 2014-01-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를 뒤늦게 봤어요. 덕분에 제 페이퍼에선 언급도 안 된;;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작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최고작일줄 알았는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한 컷도 낭비하지 않은 철저함과(편집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이라죠) 그러나 넘치는 서정과 설정숏도.

새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구정을 찾을 거에요, 그래서 아직 나이를 먹지 않은 거라 믿고 그래서 인사도 안 하는 겁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실은 연말연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들어오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건강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맥거핀 2014-01-06 18:43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 시간이라는 것의 무게를 관객에게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 영화입니다.

사실 위의 BEST10은 마지막에 두 개의 좋은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기 때문에 나온 글입니다. 그 두 개의 영화를 연말에 못 만났으면 리스트 같은 것은 안 썼을 거예요.ㅋ

저도 연말에 이웃분들에게 다 인사를 쓸까, 아니면 다 하지 말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죠. 뭐.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받으니 참 민망하네요. 저야말로 Shining님의 좋은 글을 잘 읽고 있으니,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해야겠군요. 어디 도망가지 마세요.하하.

아..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희선 2014-01-2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말(글말)을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졌군요 저는 영화는 한편도 못 봤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데 한번도 안 가봤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사람이 학교에 더 자주 늦기도 하잖아요 꿈 이야기가 나오는 책에 영화는 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저는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는 보는 것(듣기)이니까 더 생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희선님. 그렇군요. 영화를 안 보셨군요. 사실 제 서재의 상당수의 글들이 영화에 대한 글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래서 한편으로 여러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서재에서 영화란 맥거핀입니다(그러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놓고 늘 그것과 어쩌면 관계가 없을지 모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제 희망입니다만, 솔직히 아직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그거야말로 어쩌면 대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뭐 아무튼 저는 그럴 능력이 턱없이 안됩니다.^^

영화관에 있다가 나오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 같은 영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운이 나쁘면 가끔 진짜 꿈을 꾸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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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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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s)는 경제적 권력, 그리고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경제사회구조의 최상위층을 지칭하는 말로, 이들은 여러가지 비슷한(그러나 매우 다른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부자(rich) 혹은 '특권계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의 다른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엘리트, 혹은 '1퍼센트'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사실 많은 것은 이름이 좌우하는 법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음험한 기운을 풍기지만, 조금 돌려서 '사모펀드'라고 하면 왠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자가 굳이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일단 무엇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중립적인 서술'과 같은 용어를 쓸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이 책은 결국 '플루토크라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플루토크라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조금은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들을 묘사한 영화나 책들이 보여주는 어떤 일반적인 이미지들, 혹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99%, 혹은 99.9%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떤 믿음들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은 매우 부유하지만, 가정은 온갖 불화로 가득차 있으며, 성격은 괴팍하나 내 여자에게는 따듯하고, 돈이 많아 허구헌날 빈둥거리며(드라마의 재벌가 아들들은 도대체 일은 언제하는가), 정신적으로 어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어떤 이미지, 혹은 믿음들 말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농부와 불행한 백만장자'의 패러독스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저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불행할 거야, 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확신이 없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이들에 비해 더 똑똑하고, 더 신념을 가졌으며, 더 일을 많이 하고, 어쩌면 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더 행복하며, 심지어는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도덕을 기부액으로만 판단한다면 말이다).
 
즉 이 시대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예전의 부자들처럼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인 자들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도금 시대(Gilded Age), 즉 산업혁명의 수혜를 받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급속도로 나타나던 시대만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들과 기존의 왕가, 귀족 세력이 뒤섞여 있었으나, 지금의 쌍둥이 도금 시대, 즉 세계화와 기술혁명과 워싱턴 컨센서스(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등의 친기업 정책)의 혼합으로 탄생한 신흥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이며, 그들은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급여 소득, 그러니까 일해서 받는 돈으로 플루토크라트가 된다. 즉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부동산 등에서 나온 임대소득과 정치적 권력을 적절히 조합하는 등의 방식, 혹은 단지 자본을 축적하여 '돈으로 돈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버드의 금융관련 학과를 졸업하여 일찌기 월스트리트에 들어선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와 당대의 기술혁신을 적절히 조합하여 결국 투자회사의 CEO에 오르거나, 자신만의 벤처회사를 여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 중의 상당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당대의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새로운 분야를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남들보다 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신흥 시장들을 적절히 공략하며, 세계화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즉 이들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된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이 책의 하나의 관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질문, 혹은 잔상이 따른다. 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일단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비슷한 생활방식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플루토크라트가 된 이유 자체는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위에 든 월스트리트의 루트나 벤처기업의 루트도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 시장전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 아닌, 지대 추구(rent-seeking)와 같이 단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가 된 사람들도 있고, 권력층에 깊숙이 밀착하고, 보다 착취적인 방식이나 혹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플루토크라트들이 있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의 공통점은 사실 이것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것이란, 이들은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한 놓치지 않으려 했으며, 그들에게는 동시에 (아주 큰) 운이 따랐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다면, 이들을 일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들은 어떤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처럼 악마나 악인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영웅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플루토크라트들이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이 시스템은 이들에게 쉽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려한다. 예를 들어 카네기, 록펠러 같은 이들이 위인의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라면, 백만장자가 지구를 구원하는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이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이들의 착취보다 이들의 기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플루토크라트들의 상당수는 기부와 자선에 큰 뜻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기부를 하지만, 왜 그 기부가 필요한 이들이 탄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주교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빵 한덩이를 주면 훌륭한 성직자가 되지만, 그들에게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알려고 하면 빨갱이가 될 뿐이다.) 이들은 단지 그 나머지 사람들 모두와 동일하게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의 인간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즉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플루토크라트들은 누가 제어하는가, 즉 CEO의 월급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혹은 배트맨, 당신은 도대체 누가 감시하지,라는 조커의 질문.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이들을 제어할 어떠한 안전장치도 튼튼하지가 않다. 영화 속 배트맨은 너무나도 착해서, 혹은 너무나도 초인적이어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었지만(영화 <다크나이트>는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현실의 배트맨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통의 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즉 그들이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보다 튼튼한 안전장치, 보다 튼튼한 자물쇠가 필요하고, 그것은 보다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정부의 정책, 혹은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스위스에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의 임금이 그 회사의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1대12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가 결국 부결되었다. 그 부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위스의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을 자유롭게 이동시키고 있으며, 한 국가 내에서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플루토크라트의 관점에서 보면) 더할 데 없는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즉 플루토크라트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그 번영을 누린다면,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세계 시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다시 말해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의 호소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실패를 보여준 지금에도,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이 극도의 불평등이 완화되었던 도금시대와 쌍둥이 도금시대의 사이에는 강력한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재산을 기꺼이 나누도록 자극했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던 것이다. 볼셰비키 선봉대가 권력을 장악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노동 계급에게 정치적 발언권과 사회적 안전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p.425)"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덧.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예를 들어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칭송을 보면서 이 책의 어떤 '중립적인 서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좌파 진영의 몇몇 비평가들과 달리, 프릴랜드는 부자들을 헐뜯지 않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서술 방식은 이 책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렵게 한다. - <USA 투데이>"  중립적인 서술이란 늘 위험하고, 동시에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늘 되묻게 만든다. 그것은 물론 책을 읽는 우리들이 대체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내 관점에서는 이런 중립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프린스의 해고는 타당했다. 그가 리더로 있는 동안 시티그룹은 서브프라임 시장에 대한 노출 수위를 높였고, 기존 스와프 상품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규 신용부도스와프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중략) 물론 음악이 나올 때는 춤을 춰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멈췄을 때,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패배자이다. (p.263)" 이 대목은 혁명(여기서의 혁명이란 흔히 말하는 혁명이 아니라, 돈을 벌 기회로서의 '혁명'이다)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리더들의 실패를 조명하며 2007년 시티그룹의 CEO였던 척 프린스의 실패를 그 하나의 예로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돈을 벌 기회를 놓친 실패자, 혹은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실패와 패배의 이야기로 끝날 부분인가. 그 신용부도스와프는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앉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었는가.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저 이들을 실패나 패배로 규정지을 뿐이고, 이 패배자 이면의 고통받는 피해자들, 그러니까 이들 때문에 큰 고난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문제는 이들의 패배나 실패가 아니라,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온 고든 게코의 말처럼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다 쓴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이 책은 몇몇 부분에서 이 영화 <월스트리트>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 뉘앙스를 보면 약간 조롱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으로부터 돈을 더 벌 기회를 놓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관점은 곳곳에서 나오는데, 예를 들어 253 페이지에서도 중국의 라이창싱이나 러시아의 호도르콥스키 같은 비리로 얼룩진 갑부들의 예를 들며, 이것을 단지 '최상류층의 불안정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이 단지 그런 언급으로 끝날 문제인가(물론 이 사건들이 일종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거나, 일종의 권력다툼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경력이나 이력으로 볼 때 이 서술들에서 어떤 중립을 찾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로벌 포럼에서 사회를 맡고,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각각의 등장하는 플루토크라트들의 이력을 빼놓지 않고 적절히 인간미를 담아 소개하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포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하고, <파이낸셜 타임스>와 <글로브 앤 메일>의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의 이력이야말로, 아마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마셜 효과(일종의 낙수효과. 즉 플루토크라트의 근처에 있으면 콩고물을 얻어먹게 된다는 말. 그러나 콩고물이 묻으려면 그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의 한 예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뉴욕의 한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학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공비결은 기업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고 한다. (p403.)"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이 책도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그리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런 칼럼을 가끔 싣는 잡지이다. 이렇게 충실하게 재인용을 해주는 '조선'의 친절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 출신의 저자의 책이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개그인가?

 

중간에 2장부터 5장까지가 거의 지루한 나열(플루토크라트 영웅전)로 채워지고 있다는 단점(개인적으로는 책의 시작과 끝, 즉 1장과 6장만 읽어도 이 책을 이해하는데 거의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은 넘어가더라도 이 얘기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이 책은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자체적인 문장부호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어 따온 말은 홑낫표(「」)를, 그 안에서 다시 따온 말은 꺾은 괄호(<>)를 쓰는 등의 표기법이 그러하다(또 그 안에서 강조하는 말은 두 겹 꺾은 괄호(《》)를 쓰고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영화 제목을 꺾은 괄호로 쓰고, 출판물이나 잡지를 홑낫표로 쓰는 등의 기존표기법과 맞물려 글을 상당히 어지럽게 만든다. 왜 '열린책들'만 이런 표기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여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일러두기' 등을 통해 간단한 설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덧 2.
이번 서평단의 두 책 <일베의 사상>과 <플루토크라트>는 내가 관심이 없던 세계, 혹은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솔직히 <일베의 사상>을 이 책보다 더 열심히 읽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책의 흥미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플루토크라트가 될 수 없지만, 대신 당장 오늘밤에라도 일베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상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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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2-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충 되지 마요, 맙시다, 될 수도 있긴 있겠지만. <플루토크라트>는 읽으려고 했으나 읽지 않은 책인데 별이 두 개라니.. '1대12법' 좋은 방법 같아서 우왕, 하고 있는데 그런 반전이 있구나, 에잇. 세상에 쉬운 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재벌남과 가난한 캔디녀의 달콤한 로맨스 후에는 반드시 경제서 한 권 흡입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혀 하고있진 않지만.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한달에 두 개쯤 '다큐' 리뷰코너를 만들까 생각중인데..(우선 남몰래 함 해볼게요)

이 부분 특히 맘에 안들어요,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이거 정떨어진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걸 누군가에게 숟가락 얹어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특히 '과시'적인 사회가 된 것 같아서요. 심지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렇고.

맥거핀 2013-12-29 21:56   좋아요 0 | URL
아..답글이 많이 늦었어요. 벌써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그렇다고 주말에 뭐 특별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저는 애매한 별점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면 그저 호불호를 밝혀주는 게 낫다고 봐요. 제 별점은 업 앤 다운 정도로 생각해주세요.ㅋ 업이 아니라 다운 쪽인 건 제 생각에는 아무리 이 책을 읽어도 그들에 대해서 결국 알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보통의 인간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는데, 인간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다들 탐욕도 부리고, 나쁜 짓도 하고, 가끔은 선의도 보여주고 그러는거죠. 물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기는 하지만요.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브레이크 걸기 어렵잖아요?

아무튼 그 1대12법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결국 부결되었지만, 그래도 저 곳은 우리사회보다 참 여러모로 성숙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저런 비슷한 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익히 짐작이 가잖아요. 그래도 적어도 저 사회는 토론을 거쳐 그것을 투표에 부치기까지 하니까. 지금도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최소한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죠. 참 답답합니다. 후..

아..그리고 '다큐'리뷰 쓴다고 약속한겁니까? 어디다 몰래쓰면 내가 꼭 찾아내야지. 익명으로 악플달리면 저인줄 아십셔.ㅋㅋ 저는 반대로 판타지가 많이 모자라요. 어떻게든 판타지를 좀 채워야 하는데..

 

 

 

 

 

 

 

 

 

 

 

변호인, 양우석, 2013

 

 

(영화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긴 글을 쓰기는 생각이 짧아 어려울 것 같고, 짧은 글로 대신하고 싶다. 영화 <변호인>은 굳이 따지자면 사건 중심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중심에는 변호인 송우석(송강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영화 <변호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캐릭터를 양분하여 전후반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 송우석이 정겨운, 밉지 않은 속물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애를 써서 영화의 전반부에 캐릭터를 구축한 다음, 영화는 후반부에 그 애써 구축된 캐릭터를 이제 지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것은 대중영화의 공식에 그렇게 크게 어긋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내 유지되는 캐릭터들도 있지만, 이렇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일 경우 중간에 캐릭터가 탈바꿈하는 것은 흔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에 비하여 탈바꿈의 고리가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 송우석이 변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이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가능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들의 포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식의 접근. 그래서 그는 고교동창 기자(이성민)와 싸울 때에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냉소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노력하기 싫으니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약한 태도일 뿐이지,같은 식의 말들. 이렇게 어떤 태도와 정치적인 스탠스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모습에서 그 태도는 여전히 후반부에도 남아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자세는 어떻게든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무죄방면 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뀌었는데(혹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생겼는데), 이는 어쩌면 앞의 질문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태도는 바뀔 수 없어도,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뀔, 혹은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 혹은 상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을 고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치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것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것은 도리어 어떤 태도에 가까운 것이고, 송우석이 눈을 뜨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도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송우석은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각성에 가깝고, 그런 각성은 통상 느린 것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런 각성은 (기본 상식을 갖춘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끈덕지게 물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영화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변하는(각성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제는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에는 당연히 준비된 대답이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영화가 아니예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거든요. 그런데 이 준비된 대답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가 의도한(혹은 의도하지 않은) 이차적인 질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인간 노무현을 환기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즉 영화의 2부를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끝, 그러니까 99명의 변호인이 변호해 준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만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일종의 자기기만이나 자기위안에 가깝다. 우리가 노무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나머지에 대한 씁쓸함을 견딜 각오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니, 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송우석이 박종철 군의 죽음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추모는 원래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그의 말과는 달리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99명의 변호사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한명 일어설 때,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이야기하던, 아무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조금은 우회해서 찾고 싶은데, 예를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어 악질적인 고문 경찰 차동영(곽도원)이나 건설사 대표의 아들(류수영)과 같은 도리어 어떤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무서워보이는 캐릭터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송우석의 앞과 뒤만을 보고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 그러니까 빨갱이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차동영은 과거만을 보고 있고, 민주주의를 하고 싶지만, 현재는 아직 그 역량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건설사 대표 아들은 미래만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얽혀 있거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현재의 인간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국가의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혹은 미래의 무엇 때문에 현재의 국민은 희생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왜곡된) 국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우석은 일갈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가는 국민입니다! 현재 눈 앞에 있는 이 푸른 수의를 입은 국민을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만족을 위해, 노무현이라는 실제의 기표를 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일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씌워야만 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내가 포함된, 그가 수장이었던 우리의 정부는 무엇이라고 답했나. 비디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를 보았나, 보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쓸씁해진다. 국가가 국민이라고 답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이것은 단지 영화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씨네 21>에 실렸던 이 영화 <변호인>에 대한 정한석의 글은 노무현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왜 그것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한석은 말한다. "<26년>과 <그때 그사람들>은 저들이 반드시 전두환과 박정희라는 인물 자체로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변호인>은 영화 안에는 송우석이 있고 그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요한 건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물과 바깥의 인물.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보는 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떠넘긴다(예를 들어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허구입니다."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그 간극을 극도로 줄여 현실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응축시킬 것이고, 누군가는 그 씁쓸함에 괴로워하며 소주 한 잔을 들이킬 것이고, 누군가는 비웃으면서 평점 1점의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간극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이고,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다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이 씁쓸함에 맞서는 작은 내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간극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혹시 각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뜻 보면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결국 각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라는 송우석의, 혹은 노무현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쩌면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태도가 그의 비극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간 포기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답은 어렵고, 짧은 글을 쓰겠다고 했으니 이제 글을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저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변해버린 자기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환멸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이든, 자신에 대한 환멸이든(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영화의 처음을 생각한다. 선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박카스를 하나 꺼내 꿀꺽 마시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나중에 그에게도 다른 의미에서의 박카스가 필요했다).


덧.
짧은 글로 대신하겠다,고 처음에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뒷 부분은 그저 씁쓸함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여두자면 이 영화가 올해 조금만 더 빨리 개봉했더라면 상당수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어쩔 수 없이 또 송강호에게 줘야만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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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설적이게도....일배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의 무지막지한 별점테러가 이 영화를 살려주는 역작용을 하고 있어 보이더군요...^^

맥거핀 2013-12-20 13:55   좋아요 0 | URL
예전에도 말씀드린적이 있지만, 본 사람들이 그러는 거에 대해서는 전혀 뭐라고 할 마음이 없습니다만, 왜 안본 사람들이 그러는지..(뭐 보았다고 해도 '감성팔이'니 뭐니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지만요. 뭐 그 친구들에게 영화란 원래 감성을 파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먹겠죠.)

프레이야 2013-12-2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성에 대한 영화군요. 그분을 연상시키는 영화라 꼭 보자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잖아도 볼 생각이었지만 맥거핀님의 리뷰가 또 더욱 부추깁니다

맥거핀 2013-12-23 14:39   좋아요 0 | URL
누구의 이야기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영화 자체적으로도 그렇게 흠잡을 만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쯤 볼만한 영화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