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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간소설 추천. 그러니까 이번 기수 신간평가단으로서 책을 골라내는 것은 마지막이라는 얘기다. 지금 내 손에 들린 4권의 책은, 책을 골라내는 일을 조금 더 신중히 했어야만 했다는 충고의 다른 형태이다(잘못된 선택은 늘 실물로서 돌아온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의 축처진 심리상태를 감안해 볼 때) 이번 마감 기한 안에 리뷰를 제대로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책들 스스로가 이야기의 가속도를 붙여 내 속에서 다그닥다그닥 달려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간평가단으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거짓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쓴 불안한 눈빛의 누군가를 멍하니 보거나, 지난밤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그다지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짜내는 일보다는 손에 들린 소설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소설은 불안하고 말초적인 세계가 아닌 더 넓은 세계로 잠시나마 나를 안내해주고, 과거로 안내하거나 또한 그를 통해 때로 미래를 예언하니까. 예를 들어 지난 번에 읽었던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예를 들어 이번의 메르스 사태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몰래 되뇌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일까.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 그러니 만인은 만인의 일에 신경 끌 것"이라는 책 뒤편의 문구가 여러모로 섬뜩해 고개를 드니, 마스크를 쓰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왠지 더 섬뜩하다. 역시 책이 더 낫다.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읆는다고, 소설평가단 6개월을 하니 이번달에 출간된 소설들만 슬쩍 훑어 보아도, 왠지 어떤 소설이 선정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번에 골라내는 책들은 이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 대세를 따르기보다는 정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야겠지.

 

 

 

맘브루, R. H. 모레노 두란, 문학동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콜롬비아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먼나라에 와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군인들의 목소리를 번갈아 담는 형식이다. 그들 개인 각자의 내밀한 역사를 읽는다는 측면에서도, 또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를 읽는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한국전쟁에 콜롬비아도 참전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느 포수 이야기, 구마가이 다쓰야, 북스피어

 

일본 산간지방 어느 곰 사냥꾼의 이야기. 전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끌린다. 꾸밈이 없는 날 것의 강렬한 이야기일 것 같다.

 

 

길, 저쪽, 정찬, 창비

 

정찬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단편집에서였던가. 정찬 작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사와 개인, 그 속에서 어떤 윤리의 문제를 꾸준히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역사가 만들어낸 골은 여전히 깊고, 소설가는 그 깊은 골짜기 한구석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끌어올리는 존재임을 작가는 몸소 보여준다.

 

 

러시아의 밤,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 을유문화사

 

소설 속에 있는 또다른 소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천일야화와 같은 소설.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이 소설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이야기의 미로가 아름답다면, 굳이 그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겠지.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나도 가고 싶다. 한국이 싫어서.

 

 

덧.

이 소설 추천은 안되겠지요? 4월 30일에 출간된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 신간평가단의 알고리즘(?)상 이렇게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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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0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브루>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재라 흥미롭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는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일본판이면 좋겠다 혼자 맘대로 기대해 봅니다; 김연수 작가도 곰 사냥에 대한 인상적인 단편 썼던 게 생각나네요.
<길,저쪽>, <한국이 싫어서>는 신뢰가는 이웃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시니 안 읽으면 북플간첩될 기세; (좋은 의도의 농담입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은 100% 동감입니다

맥거핀 2015-06-04 13:40   좋아요 1 | URL
다른 책은 몰라도 <맘브루>는 되었으면 좋겠는데..꽤나 흥미로운 책일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서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느 틈에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역시 북플계의 배스, 그러니까 책포식자라는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 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닌가 봅니다.(저도 좋은 의도의 농담입니다.^^)

AgalmA 2015-06-04 15:40   좋아요 0 | URL
북플계의 배스ㅎ; 좋은 책냄새를 맡으면 참을 수가 없잖습니까. 책포식자는 제게 붙을 수식은 아니라고 생각되고요. 북플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니 그리 보이는 거라 생각합니다^^; 좋게 포장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북플 견유자 정도로...

선정이 안 되더라도 위 책들에 대한 맥거핀님의 리뷰는 기대해 봅니다 :)/

맥거핀 2015-06-05 11:54   좋아요 0 | URL
포식자에는 많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방면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평소 서재를 보면 워낙 책, 영화, 음악 등등 다방면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식견을 보여주시니 그런 농담을 붙여봤습니다.^^

저 중에 한두 권은 읽게 될 것 같은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 노력해보겠습니다.^^;

2015-06-07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7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0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익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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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다 밑 조류가   

소곤대며 그의 뼈를 주워올렸다.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다.  

- T. S. 엘리엇, 후카세 모토히로 번역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 p.28

 

두 편의 시가 있다. 작가 조코 코기토가 이른바 '익사 소설'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T. S. 엘리엇의 시와 조코 코기토와 그의 어머니가 같이 쓴 시. 이 시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일종의 화두와 같은 시다. 이 시들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 엘리엇의 시와 코기토 모자가 쓴 시가 모두 다루는 것은 '익사'이다.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라는 시구는 조코의 어머니가 쓴 것인데, 이는 조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로,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나 살아났다 해도 한번 홍수에 떠내려갔던 사람들을 강물결이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연결되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이 두개의 익사는 모두 특이하다. 엘리엇의 익사자는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고 있고, 코기토 모자의 익사자는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노년기부터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익사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과거에 있는 것은 익사와 '익사 소설'이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는 익사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난 날, 그는 어린 조코와 함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싣고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조코를 돌려보내고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가 있다. 그는 왜 어린 조코를 데리고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실은 채로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익사 소설'은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고 이제 나이든 작가 조코가 쓰려고 하는 소설이며, 이 소설 <익사>는 결국 그 '익사 소설'이 소설이 아닌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완수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보이던 시기, 조코의 아버지는 일단의 군인들과 연루되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이른바 '궐기', 그러니까 전쟁에 진 천황과 함께 폭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익사이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은 빈 군데가 많고, 그 '익사'는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망인이 된 조코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겁이나 도망치려다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의 좋은 리뷰대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며, 결국 천황과의 폭사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정치 교재로서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와 그 속에 등장하는 '숲의 왕'의 신화. 숲의 오크 나무를 지키는 인간신(人間神)이 늙고 쇠약해져 생명력이 다하면 세계 또한 같이 멸망하기 때문에 그 인간신의 생명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면 강건한 후계자가 그 전에 그 인간신을 죽여 영혼을 옮겨받아, 세계의 쇠퇴와 파괴를 막는다는 이야기. 이를 어떤 정치적 텍스트로 읽으면, 당시의 군인들과 아버지가 벌이려던 일을 이에 연관지을 수 있다. 즉 전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국가의 위기, 혹은 세계의 쇠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쇠퇴한 인간신, 즉 전쟁이 패배했음에도 죽지 않은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만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연관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친구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가지고 자살하며 그 유서를 화자인 '나'라는 청년에게 남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이것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 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럼 순사(殉死)라도 하지 그래요, 하면서 놀렸습니다. (......) 나는 아내를 향해, 만약 내가 순사를 한다면 메이지 정신을 따라 순사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익사> P.183~184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 불어난 강에 배를 띄운 것은 단지 농담에 그친 군인들과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인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멸되려고 하는 일본 제국과 같이 순사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음>의 '선생님'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버지나 '선생님'은 당 시대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당 시대의 소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새 시대를 이끌 강건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기도 했다. <마음>의 '선생님'은 청년에게 '기억해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한편 아버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이오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가 코기를 배에 태운 순사 시도는,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후계자로 조코를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즉 <마음>의 청년이 원령을 이어받는 빙의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면, <익사>의 코기토는, 혹은 결국 익사를 시도하는 다이오는 아버지의 원령을 이어받는(혹은 이어받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빙의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더욱 거대한 시대정신과 연관이 되는데, 메이지 시대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소멸이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미심쩍음이 남는다. 원령과 빙의자라는 이 기이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혹은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한다는 어떤 극우적인 껄끄러움 말이다. 그것은 이런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빙의자들은, 즉 <마음>의 청년이나, <익사>의 조코 코기토나 다이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가? 사실 다이오나 그의 스승, 즉 조코의 아버지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조코의 아버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정치적 텍스트로 읽도록 권유받았지만, 그것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인물이었으며, 천황과 같이 폭사하자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그 폭사를 위해서 마을의 오래된 숲을 훼손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것은 '다이오'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인데, 그 자신이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지만, 극우적인 청년을 기르는 훈련도장을 이끌기도 하며, 또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조코와 아사 등의 무리와도 관계를 맺고 그를 이해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코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아버지의 익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군국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찬가에 눈물을 흘리거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가 가지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에 겐자부로가 보기에)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바로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반성된 것은 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는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종의 붕괴의 지속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를 조코는 지금까지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즉 붕괴되지 않도록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하여 버텨왔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조코는 깨닫는다. 사실 정확한 해석은 지금도 나는 붕괴 위기에 처해있고, 그 '붕괴라는 양상'이 '글 조각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코는 생각한다(아마도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 거대한 현기증은 그를 엄습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일본의 '현재'이기도 하다. 다가올 붕괴를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바로 그 '붕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즉 붕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위안부 문제), 그리고 지금도 강간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에는 희망이 없을까.

 

소설 속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조코의 여동생 아사라든가, 그의 아내 치카시, 그의 딸 마키, 조코의 이 '익사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알게 된 우나이코와 릿짱과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연극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죽은 개를 던지다' 방식의 연극은 일방통행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실제로 연극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의 일종의 토론극이며, 새로운 형식일 뿐더러 더욱 많은 지지를 얻은 쪽이 승리하는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어떤 특유의 소통방식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연극, 편지, 독백 등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의 소통과 공동체 결성은 위의 남자들의 시도와 대비되는데, 예를 들어 원령과 빙의자라는 으스스하고도 폭력적인 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이 남성 중심의 관계들은 단절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코기토는 익사라는 형식을 통해 단절되어 있으며, 코기토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는 직접적인 소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체의 시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 구체제의 '번'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군'에서 파견된 군대에 대항하여 '메이스케 어머니'와 '환생한 메이스케'가 벌이는 여자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이 봉기(여기에도 다시 이 원령과 빙의자가 등장한다. '메이스케'와 '환생한 메이스케'). 이것은 이 아사, 우나이코, 릿짱, 마키, 치카시 등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여성 공동체의 원형이며, 남성 중심의 부계 사회에 맞선 모계 사회로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는데, 과거에서는 '메이스케 어머니'가 과거 '번'의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면, 현재에서는 우나이코가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남성들은 시대정신이니 시대의 종언이니, 후계자를 세우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번'이 '국가'로 바뀌거나, '쇼와'가 '헤이세이'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국가는 여전히 강간하고 있고, 약자들(물론 이 약자들에 남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카리'와 같은 인물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은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로 바뀌는 정도는 되어야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반복되는 익사를 통해 다이오 혹은 조코의 아버지와 같은 모순적인 중간자적 인물(전쟁에서 패배했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 반성은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과거의 향수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은 시대에서 퇴장하지만(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분신인 코기토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에는 결국 오에 겐자부로 자신과, 더욱 철저한 비판이 기반이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대인 모두를 향한 일종의 자기반성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내용보다 이 소설 <익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치지 않는 묘사이며, 그러한 묘사를 표현하는 이 소설의 특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논픽션 형태로서의 소설 형식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자신의 예전 소설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조코 코기토라고 하는 식의 시도 말이다), 편지글이나 대화글을 어떤 설명 없이 연결짓는 낯선 시도이기도 하며,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적극적인 크로스를 그대로 글에 풀어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은 그 내용을 과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것은 우나이코 등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중학생과 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에 계속 반대를 하고,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이 교육에 관계된 인물(예를 들어 우나이코의 큰아버지가 교육 행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소설의 1부의 제목은 '익사 소설'이며, 그 익사 소설은 결국 소설 속에서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익사 소설'이라는 과거가 결국 다시 쓰여지지 않아야 함을, 그것은 코기토 세대의 종말로 인해 끝나야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여자들이 우위에 서며 가능성이 모색되고(2부의 제목 '여자들이 우위에 서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른다. 그것은 우나이코의 강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와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붕괴가 지속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시로 돌아간다면 조코의 어머니는 조코에게 물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기토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 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아카리와 같은 약한 자들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가 그런 세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작가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러고는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에 고여 생긴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선 채로 익사할 따름(p. 427)"이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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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5-26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여러 결로 읽을 부분이 많은 소설이다. 이 소설 같은 경우에는 서평단 사람들끼리 책을 다 읽은 후 같이 모여서 여러가지로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한 잔도 하고...언젠가 알라딘 서평단도 이렇게 독서 이후에 같이 모여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괜찮지 않을까.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니..

2015-05-27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3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5-30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도하가.. 생각나요. <황금가지>, <마음>도 새삼 담아보고.. `익사`가 다른 익사인 줄 알았더니 그 익사가 맞네요. 하긴 익사에 또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데.. 그나저나 다음도서는 네 권인가요? 맥거핀님, 책 도착했어요? 갈수록 태산..같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부러움.. `맥거핀님 네 권 읽네.. 리뷰 보면 나도 읽은 것 같아..`

맥거핀 2015-06-03 22:56   좋아요 0 | URL
네..다음 도서 네 권 벌써 왔어요. 아직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쌓아두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번 달보다 재미(?)는 더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담번에 평가단 같은 거 같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님이랑 몰래 책 헐뜯기도 하고..쓸 거 없으면 서로 리뷰 살짝 베끼기도 하고..그럼 좋을텐데.

맥거핀 2015-06-03 22:58   좋아요 0 | URL
근데 그나저나 잘 지냅니까..저는 요새 알라딘도 잘 안 오고, 북플도 잘 안들어가고 그러고 있네요. 아무래도 슬럼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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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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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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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4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5-26 16:29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나만을`의 뜻은 이중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처음 이 소설 제목과 표지를 봤을 때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어요. (노란색으로 표지를 한 것은 그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한편으로는 `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소설의 어떤 사건들은 분명히 그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건은 다르지만 그것의 어떤 작동양상을 보면요.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제 생각에는) 결국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를 말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의 목소리라고 봅니다. 현실에서는 그것이 단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으로밖에 나타나고 있지 못하지만요. 세월호 유족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바로 그들도 사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그들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거겠지요.) 어쩌면 약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잡아먹는 세계, 그러니까 <킹스맨>이라든가 <설국열차>의 세계가 이미 공고히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5-05-26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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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신간평가단으로 그간 6권의 소설을 읽었고, 그에 대한 6개의 리뷰를 썼으며, 아직 읽지 않은 2권의 책이 내 손에 들려있다. 그리고 이제 2번, 그러니까 최대 10권의 선택 기회가 남아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렇게 반환점을 돌았다고 느껴질 때가 아마도 중간점검을 한 번 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 새롭게 소설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세운 시답잖은 원칙이랄까,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돌아보면 그 희망은 그렇게 충족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평가단으로서는) 한 권도 읽지 못했고(이번에 구병모 작가의 책이 선정되기는 했지만), SF소설도 아직 한 권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이 전부 별로였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어떤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원하는 분야의 책 위주로 선정을 하겠다,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렇지만...  

 

이번 달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별로 없다. 3월에 나온 소설들은 이 책도 좋아보이고, 저 책도 좋아보여서 책들을 골라내는 데 애를 먹었는데, 이번 달에 나온 소설들은 5권을 채우기도 쉽지가 않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고 투표장에 들어섰지만, 투표 용지에서 물릴대로 물려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이름들만 보았을 때의 맥풀림이랄까(그래도 정동영과 안상수는 좀 너무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도 환멸을 느끼고 투표장을 벗어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중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최선을 고를 수가 없으면, 최악이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빨간색으로 도배된 개표방송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당장의 정국에 대한 답답함이라기보다는 어떤 환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타인들의 환멸을 이야기할 것 없이, 내 안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잡은 내밀한 환멸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을 이겨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든다.

      

물론 신간평가단 책을 골라내는 것은 선거와는 다르고, 예상이 들어맞지 않는 즐거운 배반도 많다(그렇다고 해도 이 신간평가단 책이 선정되는 작은 과정만 해도 잘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그러니 어떻게든 골라보는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희망에 가까운 다섯 권을. 소설 읽기는 내밀한 환멸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집시와 르네상스,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동네

    

항상 유럽사회의 주변인들, 타자들로 여겨지는 집시들의 삶을 묘파하는 안토니오 타부키의 르포 형식의 글이다. 작가로서의 세심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은 소설이 아닌 이러한 글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낭만적인 도시로서만 인식되는 피렌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지만, 지중해에서 일어난 최근의 난민선 전복 사고에서 보듯이 난민 문제는 여전히 유럽 사회의 화두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심상대 외, 예옥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15명의 작가들이 쓴 공동소설집이다. ‘추모’라는 조금은 이른 단어가 걸리기는 하지만, 결국 작가가 이 사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일 터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어니스트 클라인, 에이콘출판

 

어니스트 클라인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다는 소개문구만 믿고 골라본다. 장황한 책 소개와 가득한 여러 추천문구가 살짝 미심쩍게 만들기는 하지만...

 

  

용감한 친구들,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장미셸 게나시아, 문학동네

 

잘 모르지만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소설들. 잘 모를 때는 다른 누군가의 추천을 꼼꼼이 읽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처음 세운 원칙도 다른 분들의 추천에 빚을 지자는 것이었으니 안될 것은 없겠지. 3권만 고르려다가 이렇게 5권을 채운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든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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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3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거 결과 좀 무서워요-_- 별 기대도 안 돼서 일찍 자긴 했는데 역시나였을 때 기분이.. 열다섯 살 때부터 스물 다섯살 때까지만 (내가 뽑지도 못한) 인생에서 최고로 좋았던 대통령의 국가에서 산 게 전부가 될까봐 두려움과 환멸을 많이 느끼죠. 이건 저는 좀 오래됐어요. 공주님이 대통령이 될 때 그래서 많이 무서웠어요. 두려움을 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을 만큼.

우와, 타부키다, 피렌체다, 집시다, 우와...

맥거핀 2015-05-03 16:2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런 결과를 예상못한 바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를 수치로 보니 기분이 뭐랄까 참담하더군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런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다니 도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일반적인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고 흔히 얘기하는 국개론도 이의 답은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조금더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근데 저는 타부키 잘 몰라요.

희선 2015-05-0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반이 지났군요 멀리에서 보는 사람은 새로 시작하고 끝나는구나 합니다 바라는 책을 고르려고 할 때는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 이게 있을 때는 많고, 없을 때는 없기도 하더군요 이건 책만 그런 게 아니기도 하죠 마음에 드는 게 많을 때가 더 좋을지, 적어서 뒤돌아서는 게 좋을지... 둘 다 그렇게 좋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적당하면 좋을 텐데, 이런 일이 자주 없죠

자신이 고른 책이 되면 기쁠 듯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고르기, 안 된다 해도 하는 게 더 좋을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생각해야겠죠 이건 나 하나가 잘한다고 세상이 좋아지겠어, 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럴 때는 달라지는 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죠 좀 엉뚱한 말을 했네요

맥거핀 님이 고른 데서 하나라도 되면 좋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5-03 21:19   좋아요 0 | URL
이번에는 제가 고른 책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일단 신간평가단 같은 경우에는 제 경험을 돌이켜보면 저의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좋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영 이상했던 경우도 많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좋았던 때도 많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책이 좋아보인다,라고 해서 고르는 게 우스운 거잖아요. 책소개들은 대체로 출판사들에서 홍보 목적으로 쓰는 거라서 다 엄청 좋은 것처럼 소개하기는 하죠.

그런데..선거는 다르죠. 나 하나가 고르는 것이 무슨 영향을 미치겠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되는 것이 선거이죠. 선거라는 것이 그런 작은 나 하나들의 뜻을 반영하는 의미로 처음 탄생된 것이기도 하구요. 선거에서 나는 관심없어,라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어떤 피해(...)를 입히는 것이 바로 이 구조이기도 하겠죠. 그러니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네오 2015-05-0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될봐에는 앞으로 장난이라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닙다라고 말하고 마음 편하게 먹으면 될까요? ㅠㅜ

맥거핀 2015-05-03 21:21   좋아요 0 | URL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절망하지 않으려 노력중입니다. 근데 저도 잘 안되네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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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사람이 예전보다 오래 살아서 쉰다섯이라고 하면 많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적지 않군요 그때가 되어도 마음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어쩐지 지금보다 더 우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맥거핀 님이 쉰다섯이 되면 이 책 다시 보실 건가요 쓰기도 하겠다니 그때는 어떻게 쓸지... 여기 나온 사람들과 같은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할까요(그 나이가 아니어도 언젠가 찾아오겠다 하겠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책에 나온 사람도 쉰다섯에서 쉰여섯이 됐습니다 그 사람은,

“쉰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나이를 확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오십 줄에도 완전히 익숙해졌고, 환갑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제가 본 책에 나온 사람과 여기 나온 사람은 나이만 같고 처지는 다르군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서글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벌써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은 자라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앞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런 생각 자주 하지 않고 아주 가끔 합니다 사람은 본래 안 좋은 것보다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살려는 뜻일지도 모르죠

기분 안 좋을 때 차를 한번 마셔봐야겠군요 마음이 가라앉는지 보게...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예전에 ‘아침에 아버지가 내려준 커피를 마셨다면 그날 안 좋은 일이 없었을 거다’ 하는 말을 들은 적 있군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한테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했네요 그건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라는 뜻이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4-29 15:11   좋아요 0 | URL
사람이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내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지금 쉰다섯의 감정을 미리 느끼거나, 혹은 쉰다섯이 되었을 때, 이십대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지금 제가 나의 쉰다섯일 때는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은 있겠지만, 막상 그 때가 되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과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쉰다섯살 때, 내 나이 이십대때에 느꼈던 어떤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지금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쉰다섯살 때라니요. 아무튼 그래서 분명히 쉰다섯 살 때 혹여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느낌이 지금과는 아주 다르겠지요. 그런 경우들 많이 있잖아요. 예전에 분명히 보았거나, 읽은 이야기인데, 지금와서 다시 보았더니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죠. 지금보다 더 풍부하게 느낄지, 더 빈곤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르겠지요.

나이를 먹는게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소리겠지만, 서글픔도 어쩌면 나름 중요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서글픔마저도 망각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그런 멜랑꼴리함이 나중에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확신할 수가 없군요.

네..저도 책을 읽고나서 기분이 안좋을 때 무엇인가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이 그럴 때 좀 안정이 되려나요. 이왕이면 차가운 것보다는 천천히 마실 수 있는 뜨거운 것이 좋겠죠.

아이리시스 2015-04-2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아님.

아놔 맥거핀님, 평가단도서 말고 다른 리뷰도 좀 써달란말입니다 부대에 읽을거리가 없단말입니다 심심해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평가단도서 리뷰도 겨우 쓰고 있어요. 허허허. 아이리시스아님님, 아이리시스님한테 읽을 거리 많은 거 알고 있으니 열심히 읽으시라고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