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강을 기억하다
강제욱 외 사진, 이미지프레시안 기획 / 아카이브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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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의 사진만 봐도, '아..이명박 XXX'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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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여기서의 XXX는 당연히(!) '대통령'입니다. 지도자의 호칭을 함부로 쓰지 않는 고래(古來)의 전통을 따랐을 뿐입니다.

네오 2011-03-29 21:45   좋아요 0 | URL
허걱 이런 깊은 뜻이~
주여~ 우리 위대하신 이명박 xxx 무슨행동을 하는지 (아호)예전에(譽前恚)이명박 xxx도 모릅니다^^

맥거핀 2011-03-30 01:19   좋아요 0 | URL
정말 우리 명박님은 XXX입니다. 본인 대에서 망가뜨리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앞으로 최소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은 영향을 줄 일들을 하고 있군요..참 맨날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 한나라당인데, 우리는 앞으로 몇 년을 잃어버려야 할지..

네오 2011-03-30 08:22   좋아요 0 | URL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인디 타큐멘타리 페스티발에서 <꿈의 공장>을 봤어요~
콜텍노동자들의 투쟁도 자기대에서 끝나지 않을거란 불길한 운명을 예언하시더라구여~ 버티는자가 이겨내는자라고 하지만은 몇 백년까지 간다면 흠~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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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만한 말이 용서될 수 있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도스또예프스끼에 드는 솔직한 감상은 '연민'이다. 물론 이 대작가의 삶에 내가 이러한 감상을 말한다는 것의 근저에 있는 여러가지를 모두 고려한다면, 이런 말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E. H. 카의 몇몇 문장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도리가 없다. "극단적인 쾌활함과 극단적인 침울, 익살맞은 허풍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자기 비하가 거듭되는 이러한 그의 정신적 증세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바보스러운 행위를 범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행위의 근저를 눈치채고, 그 어리석은 행위와 거의 동시에 후회를 하게 되는,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p.42)""도스또예프스끼의 비애는 자신이 자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찬가지의 명석함을 가지고 그 원인도 분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p.43)"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위의 문장들에서 보여지듯이, 일견 차가워보인다.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시종일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에 대해 공정한 기술을 하기 위해 애쓴다. 여러 자료들은 조심스럽게 취사선택되고, 몇몇 의심스러운 자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시도한다. 또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이 책의 어떤 야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평전이 가지는 야심 또는 함의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것을 넘는다. 저자의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이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에 담긴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문학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카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국인으로써)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대변하는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카는 러시아인들의 어떤 특질을 잘 나타내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라는 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나 그의 사상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나 당시의 어떤 분위기를 때로 필요 이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은 카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도스또예프스끼는 카에 있어서는 러시아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현미경이었고, 카는 그 현미경이 가지는 특징적인 왜곡에 휘둘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평전의 약간은 독특한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제목들을 살펴보면 이 책이 가지는 어떤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 평전은 크게 네 개의 구분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나누고 있다.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 제목들에 드러나듯이 이것은 그의 문학을 염두에 둔 구분이다. 즉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라는 이 제목들은 그의 삶의 성장이나 어떤 힘들었던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을 염두에 둔 구분이 아니라, 그의 문학이 성숙되는 시기, 흔들리는 시기, 꽃피우는 시기, 그리고 가장 문학적 최고의 정점에 오른 시기의 구분이다. 일례로 성장기와 격동기를 가르는 구분을 들 수 있다. 그의 삶으로 보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하는 시기는 그의 삶의 격동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의 문학을 중심에 둔 구분으로 보면, 이는 그의 문학의 기반을 성장시켜 준 성장기에 해당한다. 그의 문학적 격동기는 (카의 구분대로라면) 시베리아 유형이 끝나고 저널리즘에 몰두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했던 <죄와 벌> 집필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즉 이 네 가지의 챕터는 그의 삶의 흐름보다는 그의 문학의 어떤 흐름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문학적 삶은 초기의 급격한 문학적 성장에 뒤이어, 일종의 침체기를 겪다가 폭발적인 창조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그것의 최정점에서 그는 급작스럽게 운명을 다하였다. 이런 문학 중심적인 평전의 구조를 반영하듯이, 평전의 구성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에 대해 각각 하나의 챕터를 할애하여 거의 평론에 가까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이 평론은 한편으로는 너무 인물중심적인 비평으로 흐르고 있어, 온전한 비평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그 외의 챕터들도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기 보다는 특징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각각의 챕터들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으며, 그 중심적인 이미지들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 시기에 대한 특징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 평전을 읽고나면,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어떤 불안정하고도 복잡한 면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그에 따르는 일종의 연민 혹은 안타까움이라는 복잡한 인상을 가지게 되지만, 그의 문학과 그 기저에 깔린 것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죄와 벌>에서 윤리의 이상, 정치를 다루는 <백치>, <악령>으로의 발전, 그리고 죄와 수난이라는 종교적 도그마를 담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까지 궁극적으로 이르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사상적 흐름과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깔린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대표적인 것들이란 이 책에서 러시아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그것에서 나타날 어떤 실제적인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p. 228)""우리는 감정과 의견에는 관대하지만 행위에는 관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늦게 회개하는 탕자의 방탕이 큰아들의 질투보다 왜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며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이 죄짓지 않은 99명의 존경받는 시민들보다 더 격려받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묵상하는 마리아가 식사를 차리는 마르따보다 더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에 치중하고 행위에 냉담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며, 미쉬낀은 바로 이 정신의 체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규율에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p.253)"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에 깔린 이러한 러시아적인 것은 뚜르게네프나 똘스또이, 그리고 그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고골에서 보여지는 러시아성과 다른 그만의 특징적인 것이다. 마지막 챕터 '에필로그'에서 카는 이러한 도스또예프스끼 문학만이 갖는 특질을 소설의 등장인물이 전형을 벗어나는 것,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묘사,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그러므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천착, 그러면서도 거기에 내재된 신학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전세대나 동시대 문학들의 특징을 뛰어넘는 것이며. 그 후의 전세계의 작가들에 크게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뿌쉬낀의 생애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은 그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 표지해 주었다.(p.374)" 즉 그는 기꺼이 한 시기를 닫았고, 새로운 시기의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의 많은 소설들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인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고,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간, 혹은 이반 까라마조프 같은 인간은 일종의 원형이 되었다.

카는 마지막에 어떤 예언을 덧붙인다. 앞으로 백년 후(이 책의 출간년도는 1931년이다)가 되어서만이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20세기 초의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후세대만이 그 예술의 전모를 생각할 것이라는 점. 이 예언은 맞을까. 20세기의 혼돈을 넘어, 21세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세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카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제는 받아들였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하였다(혹은 거부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마지막에 러시아정교의 세계로 달려갔지만, 우리가 달려갈 곳은 없다. 거의 모든 종교는 해체되거나, 혹은 자체의 모순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고, 현대인은 내재된 분열과 이중성을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견딘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위안은 우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일종의 심리적 치유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카의 예언은 이어진다. "현대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도와준다기보다 오히려 훼방한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예술적으로는 부적절한 쪽으로 기울게 하고, 흔히 우리의 예술적 인식을 왜곡시킨다.(p.385)"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을 새롭게 읽어봐야겠다. 분열을 견디며. 예술적으로 생각하도록 애쓰면서.

리뷰에 인용한 부분 외에 흥미를 끈 문장들.

   
  안티테제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진테제에 도달할 수 없다. 죄악감을 없애 버리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p.307)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든다>라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한 인물은 말한다.(p.77)

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 불모성, 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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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의 이름은 그의 삶 만큼이나 꽤나 복잡하다. 시프트를 3번이나 눌러야 한다...그건 그렇고 이 책의 번역은 약간 미심쩍다. 어딘지모르게 종종 이상한 문장이 있다. 오타도 좀 있는 편이고...

꽃도둑 2011-03-2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쓰셨네요...아직 다 읽지 못한 저로서는 기한안에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카가 쓴 평전을 읽어내기가 조금 까다롭더군요. 뭐랄까, 집중을 해서 읽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자꾸 문맥의 뜻을 놓치곤 했거든요.
그의 업적과 일생을 기리는 사실보다 거의 평론에 가까운 글쓰기여서 그런걸까요? 역사가다운!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1-03-26 21:14   좋아요 0 | URL
저는 <대칭>을 지금 아주 조금밖에 읽지 못해서, 기한 내에 리뷰를 올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뭐 꼭 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러시아 사람들 이름이 너무 복잡해요. 읽다보면 자꾸 어지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참 안타까웠어요. 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대목을 읽다보면 더 그렇구요. 카의 글쓰기는 전체적으로 싸늘해보이는 면도 있지만, 대작가에 대한 경의를 끝내 놓지 않는 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꽃도둑 님의 리뷰도 올라오면 읽으러 갈께요.

cyrus 2011-03-2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죄와 벌><백치><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사실 소설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의 내용을 읽는데 힘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책의 서술 자체도 딱딱한데 말이죠,, 리처드 에번스라는 사학자가 말하기를
E.H. 카가 연구한 역사적 주제가 독자들의 관심이 끌기에 충분한 흥미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장 자제는 무미건조하다고 평가할 정도죠.

그리고 맥거핀님의 말씀대로 인쇄상 실수로 인한 오타도 있었구요,, ^^;;

맥거핀 2011-03-29 01:42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 책들 중에서 딱 한 권만 봤습니다. 그것도 고딩 때. 그러니 지금 읽으면 그 때와는 확실히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되겠지요.
카는 참 재미있는 문장들을 많이 쓰더군요. 문장 자체가 유머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느껴지는 유머랄까요. 즉, 본인은 전혀 웃길 의도가 없는데, 읽는 이는 쓴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문장들.
꽤나 딱딱할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네오 2011-03-2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의 이름은 그의 삶 만큼이나 꽤나 복잡하다'라는 대목을 읽고 ㅋㅋ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의 네가지의 스텝이 있군여~ 전 그냥 계속 이분 생각하면 그냥 격동기만 생각나는데요ㅠㅠ 연민스러운 도스트예프스키의 삶은 그래도 지금은 생생하게 살아있으니 부럽네요^^

맥거핀 2011-03-29 22:55   좋아요 0 | URL
그게 바로 작가의 좋은(혹은 나쁜) 점이겠지요. 작가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으니까요.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으로만 보면, 그의 삶이 격동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듯 싶어요. 물론 그 격동의 상당 부분은 본인이 자초한 것이지만..

꽃도둑 2011-04-2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이달의 당선작이라....드뎌 결실을 보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맥거핀 2011-04-26 15: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레드 라이딩 후드 - Red Riding 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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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크게 관계없는 새로운 빨간망토 이야기. 추리물로써 나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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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3-2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과 다루군여~ 원작소설도 이미 출판되거 하며 이 영화 홍보 많이 하더라구여~

맥거핀 2011-03-29 22:56   좋아요 0 | URL
네..거의 하이틴 로맨스물입니다. 뭐 그래도 머리 비우고 보니까, 나름 재미는 있던데요. 캐서린 하드윅이 그래도 옛날 가락이 좀 남아 있는듯..

네오 2011-03-30 08:23   좋아요 0 | URL
캐서린 하드윅~ 배우인줄 알았다는 ㅠㅠ(검색해서 알았져ㅋㅋ)
<트와일라잇> 전 재미있게 봤어요~ 극장에서 본 건 아니구요(이런 영화가 있는줄 잘 몰라서요) 케이블 방송할때 봤어요~ 그다음 크리스틴 스튜어드 팬 됐습니다~ 모든게 착하잖아요^^

맥거핀 2011-03-30 18:23   좋아요 0 | URL
옛날에 홀리 헌터 나오는 13살의 어쩌구인가 하는 영화는 좋았어요. 지금은 거의 판타지 하이틴 로맨스 전문 감독(?)이 되었지만..
 
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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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가끔씩,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마다, 어떤 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주인공의 대사에 맞장구만 쳐주던 조연들, 인상적인 한 장면을 보여줬던 엑스트라, 악인이 죽고난 후, 그 악인의 나름 충성스러웠던 부하들. 이른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증후군. 영화 <블랙스완>을 본 후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이야기를 찾아보고서 정작 궁금해진 것은 백조 오데트보다는 흑조 오딜이다. 비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호수에 뛰어들어 죽고난 후, 그리고 희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하늘로 승천한 이후, 오딜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오딜의 그 뒷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오데트와 오딜을 한 무용수가 공연한다는 이유가 그것. 마지막에 오데트의 장엄한 최후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오딜 같은 것을 보여줄 틈이 있겠나.

사실 여기에는, 묘한 모순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는 오딜과 오데트가 겹쳐서 등장하는 장면이 없다. 물론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 무용수가 두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일종의 거울상이다. 한쪽이 선하다면, 한쪽은 악하다. 한쪽이 욕망을 제어당한다면, 한쪽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한다. 거울 이편과 거울 저편의 존재. 그러므로 두 존재가 한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 둘이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상정하려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거울을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관례적인지 아니면 특정의 공연에서만 그러는지는 발레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오데트와 오딜을 한 명의 무용수가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분열, 혹은 일종의 착란 증세는 거의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거울 속 이편의 존재와 저편의 존재를 모두 완벽하게 담아내려고 하는 거울은, 아니 자아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가 왜곡을 피하는 방법은, 그 둘을 느슨하게 병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필요에 따라 그 둘 중의 한 가지를 적당하게 억압하는 것이다. 혹은 강제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다. 영화 속 니나의 경우라면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작동한다기 보다는, 어머니(바바라 허쉬)에 의해 수행된다. 어머니는 니나의 욕망하는 자아를 억압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니나를 어린아이로 묶어두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백조 안에 묶어둔다는 <백조의 호수>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로 니나의 욕망은 제어되어, 니나는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어린아이에 머문다. 니나의 방안에는 인형이 가득하고, 방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니나의 그림 속에 니나 자신은 박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니나가 그림을 찢고, 인형을 내버리는 것으로 그 억압을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감시의 체제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니나에게는 이미 내면화되어 있으며,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것으로 추동된다. 예를 들어, 니나가 자신의 몸(어깨)을 긁어대는 것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체 변형 서사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려는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날개(욕망)가 자라나는 것을 막는 것, 어른이 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의 종착점과도 관련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전작 <더 레슬러>에서도 그러했듯이 나이들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발레단에서 스타는 한 명 뿐이고, 그 스타는 나이가 들고, 아름다움의 강도가 덜해지면, 다른 스타로 대체된다. 발레단의 외부에서 보여지는 공연은 화려하지만, 그 내부에는 위험하고 필사적인 사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한편으로는 백조를 닮았다. 물 위에서는 화려하지만, 물 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야 하는 백조의 숙명.) 이것은 물론 권력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투라고 볼 수도 있다. 발레단의 스타였던, 이제는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병실에 찾아간 니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다"라는 베스의 고백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러므로 니나는 완벽해지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완벽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며, 완벽의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다시는 복제되지 않을, 단 한 번의 최고의 공연. 그러므로 마지막에 니나는 "완벽함을 느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니나가 마지막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가들은 죽어가는 순간에 최고로 아름다운,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는 어떤 '결여'를 그들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점들이 그 이야기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어떤 얼굴이 매혹적이라고 말할 때, 그 얼굴은 완벽한 좌우 대칭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아니, 인간의 얼굴에 완벽한 좌우대칭이 있을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완벽한 좌우대칭에 가까운' 얼굴이다. 도리어 우리는 완벽한 대칭(로봇의 얼굴)에 때로는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완벽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때로 그것에 매혹당하기 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우리가 매혹당하는 것은 도리어 결여의 순간이다.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결여가 내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의 미스테리한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레슬러>에서 랜디 램(미키 루크)이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지고 날아오를 때, 그 결여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혹당한다. 그리고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죽어가면서 공연을 펼칠 때 그 공연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 된다. 더구나 이제 그 공연은 다시는 재생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이상 완벽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덧.
이 영화 <블랙스완>이 꿈꾸는 것은, 영화에서 니나가 꿈꾸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영화로서 완벽해지는 것.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조탁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영화의 관점을 완전히 흩뜨려 놓고, 관객에게 니나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사실 이 영화에서 니나가 실제로 본 것과 그녀의 환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력은 독보적인 것이다. 예전에 <레퀴엠>을 보러갔다가, 영화를 도저히 끝까지 견뎌서 보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못 본 부분이 궁금하여 나머지를 찾아서, 참아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꽤나 무시무시하다. 다만, 나는 이 영화 <블랙스완>을 보다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심리적 타격의 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아니 오히려 이번이 더 강력해진 것 같은데, 나는 견딜만해졌다. 견딜만해졌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졌다는 뜻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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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강력한 이미지의 영화에, '이미지 준비중입니다'는 왠말이냐.

2011-03-10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1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미지 준비중이라는 말에 빵터졌습니다~ 진짜 뭐져~ 그런데 '레퀴엠'을 처음봤을때 끝까지 안보셨군여,,사실 이 영화는 나의 은밀한 일기장에 첫번째로 자리잡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여~ 처음나왔을깨 당시 비디오천국에서 힙합몽타쥬라고하며 신세대감각이다 라고 신나게 홍보를 해서 궁금해서 보긴봤는데 휠씬 좋았던걸로 그때 그 당시에 생각되여~ 지금도 가끔보닙다. 그리고 블랙스완을 보고 나서 후덜덜 했져~ 블랙스완이라고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금용서도 있는데,예전에는 이책이 유명했는데 이제는 검색어치면 이 영화가 일순위가 되있더라구여 ㅎㅎ

맥거핀 2011-03-16 00:12   좋아요 0 | URL
그때 막 천재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이러면서 홍보가 나왔던 때라, 영화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보러 갔습니다만, 마치 내가 마약을 한 것처럼 속이 울렁울렁거려서 나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젊은 천재라고 불렸던, 대런 아로노프스키나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모두 참 지금 재능을 빵빵 터뜨리고 있네요. 일반적인 평판은 놀란에 조금 더 무게중심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아로노프스키를 더 위에 놓고 싶네요.:)

네오 2011-03-16 00:00   좋아요 0 | URL
"아로노프스키를 더 위에 놓고 싶네요" 이 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D
 
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스포 있음)




<만추>라는 제목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과 시간에 배인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만추. 늦가을. 모든 것의 수확이 끝나버린 때.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겨울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시간. 어떻게든 유예하여야 하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이제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훈(현빈)의 시간. 애나(탕웨이)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

영화 속 애나의 시간과 훈의 시간은 다르다. 애나의 시간은 그녀 자신 안에서 최대한 늦춰지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7년간의 수감 이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72시간만의 귀향을 허락받은 애나에게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잡아두어 천천히 흐르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시간들. 어떻게든 유예시키고 싶은 72시간 후의 막내림. 반면 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훈에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오늘은 이 여자를 만나, 이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고, 내일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다른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애나에게 돈을 빌렸을 때, 훈은 그 대신 기꺼이 시계를 내민다. 그에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 그것은 훈에게는 시계이며, 애나에게는 돈이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다른 시간을 공명시키기 위해 영화적 판타지를 은밀하게 작동시킨다. 서사적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연의 힘을 빌어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난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한 남녀를 만나고, 그 남녀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이 환상은 언뜻 이 두 사람의 시간을 비유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공간 안에서 두 남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앞으로 당겨지고, 다시 시작되고,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형상화되어 차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 장면을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기도 하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훈과 애나에게 반복되며, 그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간을 다시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에 따른 이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안개만큼이나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유령 투어'를 하는 사람들. 이 때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이 시간들이 환기되는 것(물론 흐릿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환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이다. 애나에게는 그녀의 예정된 귀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훈에게는 그에게 이 시간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것(빠른 시간 안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가 더 할 수 없이 흥미로워지는 것, 혹은 더 할 데 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 그 마지막에 있다. 안개 때문에 버스는 정차하고,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훈과 애나의 시간은 역전된다.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였던 훈의 시간은 급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남은 아주 짧은 시간은 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진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훈의 시간 흐름은 지금까지의 애나의 시간 흐름이 된다. 그리고 훈은 그제서야 애나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하는 시간의 의미. 그 일분 일초가 소중한 시간의 의미.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애나에게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애나에게 이번에는 훈의 시간이 전이된다. 애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되었다. 다시 훈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보내야 하는, 아니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애나는 허둥대며, 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은 잠든 애나에게 훈이 둘러주고간 시계 뿐이다. 물론 같은 행동이지만, 이 때의 시계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처음의 시계가 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애나가 훈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견뎌야할 그 많은 시간들을 이해하고 이제 나를 그 시간들에 공명한다는 것. 영화의 그 마지막은 판타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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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1-03-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에 대한 통찰력있는 해석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1-03-03 1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싶어서 한 번 써본 짤막한 글입니다. 마지막 '오랜만이에요'가 참 좋았는데, 그 무엇이 날 흔들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요.^^

2011-03-0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는 애나에게 걸려오는 확인 전화를 말씀하는 건가요? 시간의 역전이라는 흐름과 애나의 시계라는 장치, 너무 와닸네여~

사랑의 다른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마음을 흔드네여

맥거핀 2011-03-03 17:22   좋아요 0 | URL
훈에게 걸려오던 전화 말입니다. 훈은 경고하던 친구가 말한 그 전화의 내용을 거의 믿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거든요. 일종의 특유의 허세일수도 있구요. 근데 사실 나중에 그 옥자 누님의 남편이 나타나는 장면은 좀 이상해보이기도 했어요. 그 남자가 일종의 유령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제 느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