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망한)능력자들 - The Men Who Stare at Go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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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칭 초능력 제다이인 빌 장고(제프 브리지스)와 린 캐서디(조지 클루니), 그리고 이들을 취재하는 기자인 밥 월튼(이완 맥그리거)이 낭창낭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벌이는 일련의 바보짓(?)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동들을 보니, 영화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들과 별개로 슬며시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나, 살육, 학살, 고문, 테러 등의 단어들의 반대편에 이성이라는 단어를 놓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에 전쟁이나 학살이 존재하고 있다는 흔한 믿음이다. 그 흔한 믿음의 범주 안에서 전쟁이나 학살은 광기, 반이성과 같은 단어들과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전쟁영화들을 보면, 그러한 믿음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대체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희번덕이며,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욕구로 적에게 그리고 때로는 아군에게도 총알을 날린다. 그러나 어쩌면 이 믿음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혹은 누군가가 주입한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하나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성으로 가득찬 문명의 미로 끝의 숨겨진 방에 어쩌면 전쟁이라는 괴물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나 학살과 고문 같은 것은 사실 우리의 차가운 이성으로 깔끔하게 수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린이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고, 빌이 심리고문을 당하고 있던 이라크인들을 풀어주고, 병사들이 마약에 취해 동네에서 자전거 끌고 마실가는 것처럼 신나게 탱크를 몰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갈 때 그런 생각들이 든다. 인간의 이성이란 때로는 얼마나 차갑고, 무자비한 것인가. 그 이성이 무장해제될 때 작동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뿐인가.

물론 이러한 '흔한 믿음에 대한 반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큰 반문화, 반문명 운동이 일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한 반문명의 기원은 여러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전쟁과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베트남전 등으로부터 촉발된 문명에 대한 회의(懷疑)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단적으로 말해서, 한나 아렌트 등이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의 건설과 그것의 작동에는 아주 차가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 그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던 배경에는 단지 히틀러의 광기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한 많은 이성적인 두뇌들의 의사와 행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아니 그간의 믿음에 반하게도, 악은 광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악은 도리어 차갑고 매끈한 이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반작용으로 이성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행동을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바보같은 옷을 입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LSD에 취해 바보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그에 더 나아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우거진 수풀 속에서 아주 이성적인 방법으로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영화 <초(민망한)능력자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빌 장고의 각성은 베트남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에서 신병이 조준사격을 하는 비율은 생각 이상으로 낮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에 그들은 거의 일부러 적을 맞추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으로 총알을 날려 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전쟁터에서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그들은 살인기계가 된다. 베트남전에서 환상을 본 빌 장고는 그 이후 히피 문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신지구군, 혹은 제다이 기사들을 양성할 계획을 꿈꾼다. 영화 속에 반복하여 외쳐지는 신지구군의 강령은 히피들의 강령을 닮았다. 생명의 존중, 연대, 감성의 공유를 외치는 그것은 반이성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동시에 초(超)이성적이다. 따라서 그 신지구군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초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단지 농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빌과 린 등의 어설픈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바보스럽지만,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밑바탕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질문, 또는 조롱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의 하나는 린과 마흐무드(무하마드?)가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린이 자신이 차로 칠 뻔했던 것과 미국이 이라크에 벌인 행동들에 대해 사과하자, 마흐무드는 린이 이라크인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여기에 린의 대답이 압권이다. 뭐 미국에도 납치범은 있으니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학살과 고문에는 몇 십년 전 베트남에서 그런 것처럼 가장 깔끔한 이성과 필요들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9-11 테러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를 내세웠지만, 그 전쟁의 내부에는 이성에 의한, 석유 자원에 대한 계산적인 필요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만, 초능력자이자 자칭 제다이 기사인, (우리가 볼 때에 바보같은) 린은 그것을 사과한다. 그 사과는 그 코믹스러움과 별개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린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납득한다. 그것은 어쩌면 암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래리(케빈 스페이시)에게 당한 이른바 '죽음의 터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은 염소에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한 업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린은 마지막에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나의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린의 생각에는 진정한 무도인의 길, 아니 진정한 초능력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수입사의 제목 테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원제는 그 원제에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아마도 그 함의 중에 하나는 '염소'라는 것이 가지는 이 영화(소설)에서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러나 <초(민망한)능력자들>이라는 이 제목은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 제목을 지은 분이시야말로 일단 본인부터 좀 민망해하셔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영화의 관객들과 함께) 그들의 초능력을 계속 반신반의하던 밥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초능력을 긍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갇혀 있던 심리고문당하는 이라크인을 풀어주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염소들을 풀어주는 그 행동이야말로, 바로 파괴적인 이성에 반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들이 결국 자신의 초능력을 확인하는 이 결말은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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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7-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제목을 '코엔 형제의 뼈있는 농담들'이라고 달려다가, 코엔 형제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꽃도둑 2011-07-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 민망한 초능력자들이 보여준 일이, 염소 풀어주기, 이라크인 풀어주기였군요...ㅎㅎ
이성의 막을 찟고 보여준 초능력 맞네요.,,^^
장르가 코미디인가요?.. 왠지 역설과 숨겨진 욕설이,..맥거핀 님 말대로 뼈있는 농담과 은유가 들어 있을 거 같네요.

맥거핀 2011-07-22 00:41   좋아요 0 | URL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을 초능력이라 한다면, 이들이 결국 벌여낸 일들은 초능력이라 봐야겠지요. 코미디이긴 한데, 조금 온도차가 있는 코미디라고 할까요. 코엔 형제 식의 유머를 좋아하신다면, 꽤나 즐기실만한 영화일 겁니다.
날씨가 너무 덥네요. 이런 날씨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아이스커피 마시면서 영화보면 참 좋은데..건강 챙기셔요~^^
 
인어베러월드 - In a Bette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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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그 성찰의 질문은 이 제목이 담고 있는대로 "과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질문이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게 보복(복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이다. 인간은 결국 본성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의 한 가지에는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어떤 공격이나 위해를 당하고, 그것에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당한대로 되갚아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것은 오랜기간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고래(古來)의 법전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곧 그러한 사적 복수에 의해 발생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방식의 제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른바 공권력에 의한 제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권력에 의한 제재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며, 그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혹은, 현재의 공권력에도 여전히 보복(복수)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공권력에 의해서 거대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이 바로 그러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안톤(엘리아스의 아버지)이 봉사활동을 벌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은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혹은 공권력이 해체되어,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이 작은 사투를 벌이는 학교는 공권력이 있지만, 그 공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또한 안톤이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공권력이 개입할 틈이 없는, 혹은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독이 인간사에서 그러한 공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권력으로의 해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영화로 행하는 '정의론' 혹은 '도덕교과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힘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드러나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문명 체계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는 것은 힘의 법칙이며, 그것은 학교짱이 오로지 힘의 법칙으로 군림하는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엮음은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른들의 싸움이건, 종족간의 싸움이건, 국가간의 싸움이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롱말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크리스티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른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보복에 기초한 공격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영화가 나아가는 것은 공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다른 방향의 모색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공권력은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악수를 시키는 교장의 태도(전혀 효과도 없는)와 같은 것이며, 안톤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안톤이 말했듯이 안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한 라스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그 폭력에 의한 방법 외에는 작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 폭력의 힘으로만 겨우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폭력의 힘이라는 가치가 사라지자, 곧 부하들에게도 버려진다. 즉 이 폭력이라는 것으로 유지되는 지배력은 아주 위태로운 것이며(학교에서 '학교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은 단한번의 '맞짱'의 패배로도 바로 승리자에게 모두 넘겨진다), 일정 정도의 자장을 벗어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시의 다음은 그런 폭력의 순환, 보복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는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가. 내가 보복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러한 폭력이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큐식의 '정신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의 몇몇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대장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이제 사라질 것인가. 다시 누군가는 그러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안톤의 경우 라스 앞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보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라스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는지. 또 만약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속임수가 아닐는지. 예를 들어 자동차 정비공인 라스와 의사라는 안톤의 지위가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판단하는 관객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 영화는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가. "공권력도 없고, 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용서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힘의 어느 정도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찰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뷰의 서두에 말했듯이 복수는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사회 역시 상당 부분, 복수의 원칙, 보복의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복수>이다.) 인류사의 상당수의 전쟁이 결국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만 보아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강한 복수심의 유령들이 곳곳을 떠돌고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노들을 때로는 그 당사자에게, 혹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것을 겨우 잠재운다. 최근 화제가 된, 소위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그에 으레 따라붙는 신상털기와 여러 맹렬한 비난들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떤 교육의 문제, 혹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 풍토, 혹은 정책의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어떠한 부분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겨우 그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잠재울 줄 아는 안톤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 가정을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은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이다. 타인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이건, 혹은 다른 욕구이건.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즉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한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시점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지구적인 문제에까지 폭력과 분노와 보복은 왜 그렇게 만연했는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명 사회를 건설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문명 사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문명 이전 처럼 보이는 사회(아프리카)와 문명 이후의 사회(덴마크)가 사실은 거의 같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다른 방식의 해결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성찰 말이다.

영화 중간에도 그렇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인간이 없는, 너른 자연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은 이다지도 평화로운데, 인간은 왜 그렇게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가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결국 100년도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는 점. (안톤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겨우 장막 하나로 가리워져 있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보다는 그 넓은 대지가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분노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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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추천~ 정성일이 추천하던 영화라서 트레일어를 봤는데 볼만한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던군요~첫 줄만 읽었어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이 부분만요 ㅋㅋ

맥거핀 2011-06-30 01:22   좋아요 0 | URL
아...정성일 씨가 이 영화를 추천했군요. 아직 안 보셨으면 저도 추천영화에 한표 던집니다.^^

꽃도둑 2011-07-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간의 고귀함보다도 오만하고 하찮음에,,어쩔 수 없음에 더 마음이 쓰입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라는 말은 인간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거죠,,,인간은 절대로 완벽해질 수가 없을 거예요. 보편적인 본성도 상황에 따라 변하기 일쑤고 인간이 왜 악에 굴복하는지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잖아요...
복수 아니면 용서 그 어느것도 충족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상대적일 것 같아요.
용서도 복수도 다 내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인 것 같아요. 나의 복수가 나의 용서가 과연 상대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파급을 줄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복수한다고 해서, 용서 한다고해서 정화될까요? 그건 오로지 내안에서만 가능할 것 같아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맥거핀 2011-07-02 01:16   좋아요 0 | URL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 신형철, '문학은 우리를 아름답게 할까' <한겨레 21> 865호'

이런 영화를 아무리 보아도 아마도 저도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못할 겁니다. 분명히 나중에 언젠가는 무슨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뭔가 보복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느끼고, 어쩌면 실행을 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반성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말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명제를 무한정 긍정한다면 결코 변하는 것은 없겠지요. 그렇게 안될 것(인간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노력해보는 것, 혹은 스스로의 노력을 믿어보는 것, 그것이 아마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네요.^^;

꽃도둑 2011-07-02 10:45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거죠.
파악하기 위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맥거핀 님 말대로 알면서도 노력해보는 것, 그게 중요한거지만 노력도 하지도 않고 파악도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문제인거죠.
그런 사람들이 뒤에서 칼을 꽂고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같은 짓을 하는 거겠죠?.. 인간의 하찮음은 거기서 비롯되는 거 같아요. 파악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거....노력도 전혀 해볼 의사가 없다는 거.,,

맥거핀 2011-07-02 16:55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글에는 소설가 김연수씨가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중략)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도무지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생각하면서 어렵게 살 필요는 없겠지요. 일단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상한 문장이네요). 그래서 어쩌면 리뷰니 뭐니 자꾸 쓸데없는 것을 적어보는 게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처럼요. 혹은 일종의 보호막처럼요. 나중에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에, 그래 언젠가 리뷰에 노력해보겠다고 썼는데, 그런 선택을 하면 안되겠지..하고 느낄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김연수 씨 말대로 뭔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쓰다보면은 자기가 한 말들이 생각나서라도, 혹은 부끄러워져서라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굿바이 2011-07-0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대로 읽고 싶은데,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라고 하셔서
아무래도 주말에 영화를 보고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맥거핀 2011-07-08 00:57   좋아요 0 | URL
네..영화를 보시고 꼭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상당히 볼만한 괜찮은 영화거든요.
 
슈퍼 에이트 - Sup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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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느끼던 영화라는 것의, 극장이라는 곳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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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팬더2 - Kung Fu Pand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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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 팬더에게 올해의 표정연기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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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올해의 지구수호상도 같이요~

맥거핀 2011-06-30 01:2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런데 쿵푸팬더 보다는 타이그리스가 훨 멋있음^^
 
써니 - 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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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식의 결말은 긍정해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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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망 동의동의~

맥거핀 2011-06-30 01:2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 리뷰를 몇 가지 읽었는데, 결말 뿐 아니라, 다른 부분의 여러 관점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 있더라구요.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그 리뷰들을 읽고나니 어쩌면 이 결말은 필연적이었다는 생각도 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