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

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

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