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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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케이스 하나.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중산층 부부 씨민(여)과 나데르(남)는 별거를 시작한다. 별거가 시작되면서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 테르메를 돌보기 위해 가사 도우미 라지에를 집에 들이는데, 얼마 뒤 일이 벌어진다. 라지에가 아버지 손을 침대에 묶어두고 무단으로 외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더군다나 라지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이 없어진 것. 이에 화가난 나데르는 라지에와 언쟁을 벌이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라지에를 집밖으로 밀쳐내다가 그만 라지에가 계단에서 구르게 된다. 그리고 라지에는 4개월간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더 책임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아마도 주의깊은 누군가는 이 진술만 가지고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위의 진술만 놓고 보면, 몇 가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지에는 과연 무슨 일로 외출했는가, 그것이 정말 어떤 시급한 일이었는가, 라지에가 그 돈을 가져간 것이 맞는가, 나데르가 과연 심한 고의성을 가지고 라지에를 밀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등등 세부적인 확인을 요하는 사실은 많다. 그러나 과연 이 정도 사실들만 확인된다면,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이어지는 몇 가지 질문들. 라지에의 갑작스런 외출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 때 우리는 그 외출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데르가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격분하여 그 사실을 망각하고 행동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느 정도까지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등등

씨민과 나데르의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별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수많은 문제들과 얽혀 있다. 여기에는 씨민과 나데르라는 성별의 문제가 있고, 중산층 부부인 씨민과 나데르 부부와 그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라지에와 히잣부부라는 경제계층적인 문제가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란 사회를 둘러싼 종교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거짓과 양심의 공방을 둘러싼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있다. 또 동시에 테르메와 소마예라는 양가의 딸들을 등장시켜 가족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며, 각 개인에게는 사건에 있어서의 판단 방식과 대응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계속적으로 등장인물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가치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물론 영화의 큰 축은 위에 진술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곁가지에서 등장인물들은 지속적으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것은 꽤 커다란 사건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볼 때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인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당신이 여성 가사도우미인데 치매 남성이 실수로 옷에 변을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편 외 다른 이성의 벗은 몸을 보아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영화는 거의 매순간 등장인물들을 어떤 딜레마 속에 빠뜨리며,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들이 단지 등장인물들에만 던져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우리는 이혼법정에 나와있는 씨민과 나데르를 마주하게 된다. 이 장면이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심사관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심사관의 시선과 동일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에는 각자의 입장을 항변하는 씨민과 나데르만 있을 뿐, 심사관은 카메라 자체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카메라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은 심사관이 된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심사관이 되어 씨민과 나데르의 진술을 듣고 판단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 입장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결국 제한된 각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명확한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진실은, 혹은 사실은, 이 두 사람의 각자의 입장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표명하는 사실은 사실 이 두 사람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은 분명 있지만,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진술을 들으며, 나름 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러한 제한된 진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자세를 영화의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의도적인 추리극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흔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를 보다보면은 결국 우리는 어떤 제한된 진술과 부정확한 사실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된다(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추리극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하다). 이 사건을 밝혀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번인가 영화를 다시 되돌려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초반의 어떤 사소해 보이는 사건과 동작들이 이 영화 속 사건의 판단을 내리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봐도 그 장면의 진실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반의 어떤 장면들에서 중요한 몇가지는 감독에 의해서 숨겨졌음을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감독의 편집장난에 놀아난 것일까. 그렇게 단정짓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그순간 영화는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것을 미리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서, 당신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질문을 바꾸어도 좋다.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당신은 그만큼 다른 어떤 것을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어떤 것들을 당신은 감수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과도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딸 테르메를 앞에 두고 심사관은 묻는다. 이혼을 앞둔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너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너는 누구를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딜레마란 결국, 무엇인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물론 모든 선택이란 게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딜레마는 그로인해 선택한 것 외에 나머지 하나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좀 다른 얘기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드 중에 <24>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매력을 스케일이 큰 액션, 배신과 역배신이 넘쳐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스피디한 사건 전개 등 여러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넘쳐나는 딜레마들이 그것들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의 잭 형님은 거의 매 에피소드에서 딜레마에 처하며, 그 딜레마의 강도는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국가반역자로 몰려 평생 도망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삶을 감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목숨을 다른 어떤 것과 맞바꾸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 선택들은 때로 매우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고, 해서는 안될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가 이 딜레마적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결국 지지하게 되는 것은 그 선택이 두렵고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최악의 결과 - 아마도 잭의 죽음을 포함한 - 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딜레마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무서운 점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의 마지막과도 조금은 통한다. 딸 테르메는 사실 이 영화에서 의외로 가장 정확한 관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중간에 세탁기를 놓고 하는 말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가서도 그 관찰력은 그 위력을 어느정도 발휘한다. 그 테르메가 나중에 가지는 선택의 태도. 심사관은 반복하여 확인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분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너는 답을 가지고 있느냐고. 테르메는 망설이지 않고 명확하게 대답한다. 답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답을 가지려 하는 태도 말이다. 아마도 딜레마로 가득한 하나의 영화를 놓고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선택은, 나는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다 공감하며,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그 윤리와 도덕의 질문들을 나는 피해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누가 했던 말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영화가 그냥 당신을 쑥 뚫고 지나간 것이 되므로. 아마도 좋은 영화란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얹혀있는 영화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냥 뻥뚫고 지나가는 까스활명수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100자평에 "영화로 치르는 윤리론 시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어쩌면 상당한 악평일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영화관 같은 곳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을 바란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실 어쩌면 다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거짓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는 결국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된다. 만약 우리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겨우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선택 뿐이며, 그 선택이란 그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리 각자가 가진 세계관이라는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24>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우리가 잭 형님에 열광하는 것은 물론 잭 형님이 각 딜레마에서 빠르고 화끈한 선택을 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잭 형님이 가진 대원칙, 즉 그의 세계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어 <24>의 세계라면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아야한다는 세계관이다.  배나온 중년남 잭 형님이 그래도 조금은 섹시해 보이는 것은 그 원칙을 가지고 딜레마를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애정남'이 아니지만, <24>를 보는 잭 형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이 애매한 것이 가득한 사건에 어떤 판결을 내려보려 한다(이 판결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것은, 물론 나의 윤리관이 그 정도 깜냥밖에 안되는 까닭이다). "할아버지의 치매 악화 및 부상과 원고 라지에의 유산의 경중을 놓고 봤을 때 원고 라지에의 유산이 훨씬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후 정황을 놓고 봤을 때 피고 나데르와 그의 가족들에게 아기 유산에 대한 일정 정도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고 라지에가 본인의 일부분의 과실을 인정하고 있고, 대가 없는 보상금을 원치 않으므로, 라지에에게 가사 도우미 일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맡기되, 기존 일당의 10배를 보수로 지급할 것을 명한다. 땅땅땅."



덧.
접근성도 좋고, 영사시설도 좋고, 친절한 'KU시네마테크(건국대)'에서 왜 이렇게 관객이 없는지 의아함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달랑 3명의 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그 3명의 관객 중의 한 명은 무려 홍상수 감독(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건대에 재직중이다). 영화가 끝난 후 텅빈 영화관 로비에서 마주보는 행운(?)을 누렸으나, 타고난 소심증으로 싸인도 못 받았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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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이 영화의 번역 제목에 대해서..separation을 단지 '별거'로만 한정짓는 것은 조금은 아쉽다.

네오 2012-01-3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님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각자의 진술과 선택의 딜레마 ㅋㅋㅋㅋ 이 영화보면서 내내 도대체 끝을 어떻게 만들까라는 생각때문에 앞장면을 상기하면서 봤네요~ 좋은 영화예요^^

맥거핀 2012-01-31 21:56   좋아요 0 | URL
음..그러고보니 홍상수 감독이 좋아했을 법도 하네요. 잘알지도 못하면서..ㅋㅋ 영화가 끝난 후 홍감독님과 로비에서 딱 마주쳤을 때 아..그럼 이 영화를 보고 느낌이 어떠셨어요?하고 물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아쉬워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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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정의란 무엇인가'. 혹은, 영화로 치르는 윤리론 시험. 당신이 누구의 입장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가가 당신의 내면에 숨겨진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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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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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있는 악마를 대하는 몇 가지의 선택지들. 악마를 불러내 놀거나, 악마에게 다른 이름을 덧씌우거나, 악마보다 먼저 다른 것에 자신을 넘기거나, 그 악마에게 맞서 대항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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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3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종교적 메시지는 없이 훨씬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인데, 괜히 특정의 종교적 도그마가 있는 척한다. 그 이유가 뭘까.
 
컨테이젼 - Conta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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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다보면, 이 영화는 미래의 묵시록일까, 아니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현재의 진실일까,라는 물음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구제역 파동, 밀림들의 파괴, 대형 제약사들의 농간, WHO와 CDC의 음모, 사스와 신종플루의 창궐 등에 관한 몇 개의 뉴스릴을 재주껏 조합하면 아마도 이런 영화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김혜리 씨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가 농담삼아 말했던, 이 영화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뉴스들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라는 말이 어쩌면 아주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이 영화는 드라마를 거의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드라마를 만들고자 작정하고 마음먹었다면, 몇 개의 눈물나는 드라마를 여기서 쭉쭉 뽑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양상'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작정하고 '시사매거진 2580'이나, '추적60분'에 나올 법듯한 배경음악들을 삽입하고, 수천만달러 짜리 배우를 극 초반에 죽여 기꺼이 머리가죽을 벗겨낸다. 그는 자칫 드라마에 빠져 관객이 다른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묘하게 드라마가 살아있다. 그것은 물론 이것이 결국 뉴스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소더버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처럼도 보인다. 어떤 리뷰들의 농담들처럼, 단순히 그 메시지란 '손을 철저하게 잘 씻자'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첫 희생자인 베스(기네스 펠트로)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좇는다. 그녀가 물잔을 들고, 카드를 집어들고, 어딘가를 스치듯이 만지고 하는 등의 동작들. 물론 이것의 주 목적은 그녀의 동작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들 사이로 유유히 유영하는 바이러스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여러 사람들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도 영화는 비슷하게 잡아낸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 시작은 접촉(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contagion)들을 잡아내기는 하되, 그 접촉은 대체로 사람과 사물의 접촉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반 상식이 가르쳐주는대로, 당연하게도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물이 접촉했을 때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직접 접촉, 예를 들어 악수나 포옹 등에서 바이러스는 더욱 신나게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그 장면들을 왠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해답처럼 보이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된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자신이 일하는 센터 직원의 아들에게 개발된 백신을 놓아주며, 악수를 하고, 악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다. 악수라는 것의 의미는 내 오른손에 무기가 없음을, 즉 내가 당신에게 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이 장면이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점은 소더버그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잉여를 조금도 용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필요하게도 악수의 참의미까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결국 어떤 잉여를 감수하고라도 이 위치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 의미란 결국 소더버그가 담고 싶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베스의 딸이 남자친구와 춤을 추며 유투의 노래가 깔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메시지란 결국 영화를 뒤집어보는 데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의 창궐에 의한 파국을 막는 방법은 결국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접촉이 제로가 된다면, 결국 바이러스에 인간은 패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립된 채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누가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인가. 그러므로 결국 최종적인 극복은 인간들간의 연대로 가능한 것이라는 소더버그 식의 믿음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소더버그 식의 연대는 한편으로 조금은 특이해보이는 점도 있는데, 그 연대는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소셜미디어적인 연대,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버스에서 쓰러진 남자를 구해줄 생각없이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들도 그렇고, 블로거 저널리스트(주드 로)를 영화에서 처리하는 뉘앙스에서도 느껴지지만, 소더버그는 이러한 방식의 연대, 혹은 관계에 별로 신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공포의 전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공포심 그 자체'이며, 그것은 도리어 이런 바이러스의 확대보다도 인간 자신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심각한 문제란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이러스의 근본적 퇴치 방법인 '긍정적인 연대'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연대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데, 그 이성이란 공포에 잠식되지 않았을 때만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맷 데이먼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인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블로거 저널리스트가 살아남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왠지 영화 <링>을 연상하게끔 하기도 한다. 영화 <링>에서 가장 무서운 씬은 아마도 사다코가 TV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씬이 아니라, 마지막에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여자의 굳은 얼굴일 것이다. 사다코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여 전파시키는 자에게 남은 삶이라는 상(혹은 벌)을 내려주었다. 어쩌면 이 <컨테이젼>에서의 바이러스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블로거 저널리스트는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포의 확산'의 매개체로서 그것의 전파에 큰 공헌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영화 속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그려져야만 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링>의 사다코 바이러스는 이 <컨테이젼>의 바이러스보다는 조금은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사다코 바이러스는 누구나에게 찾아간다는 점.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위를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축구로 치자면 전술과 전략에 능하기보다는 선수들의 적재적소의 배치와 교체에 능한 감독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효율적인 장면 구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는 숏의 낭비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들의 이미지의 낭비 또한 원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영화가 한편으로 뉴스릴들의 조합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왜냐하면 뉴스란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가장 필수적인 숏들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것이 뉴스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 또한 잘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한편으로는 누구나 척 하면 알 수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등장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이 영화를 거의 정말 뉴스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영화의 캐스팅된 배우들은 표정만으로도 짧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를 거의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단 한 두 장면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잘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잘 갈고닦은 장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솜씨이다. 흥행에 개의치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한 그의 결단력과 능력에 경탄을.  

 

 

 

 

덧.  

아..이 영화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너무 멋있다.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위 사람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아참... 나도 이제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얼굴은 그만 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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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0-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두 편이나 봤어요. 일본영화,터키영화
일본영화는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근데 왜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지 기억하는 건 영화내용이 아주 강렬했다는 것과 친구 덕에 소수만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거의 침대 수준의 쇼파에서 편안하게 봤다는 사실이지요...^^
내년 쯤에 영화비평이나 공부해볼까 하는데...^^
영화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맥거핀 님처럼 비평을 쓰지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맥거핀 2011-10-20 00:58   좋아요 0 | URL
하기는 사실 저도 공부 좀 하고 뭔가 쓰더라도 써야하는데, 야매로 아무 이야기나 쓰니 아직 잡설에 가깝구요. 비평을 쓰고 싶기는 한데, '비'는 없고, 어설픈 '평'만 있으니..

그건 그렇고 아주 좋은 친구분을 두셨네요.^^ 영화제 후기 글들만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편이나 국내 극장들에 걸릴지 모르겠네요. 인상적인 일본영화라..어떤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이번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영화가 꽤 괜찮았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그 영화는 아닌지..아무튼 부러워요~!!
 
비우티풀 - Bi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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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utiful [형.] beautiful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그에 가깝게 다가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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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결코 뷰티풀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 다르덴적 세계에서 그렇게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그 뷰티풀에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가깝게 다가가려고 한다. 그 종착역이 결국 '뷰티풀'이 아닌 '비우티풀'이라도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참한 자신과 마주쳐 후회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그 참혹함을 맞서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에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글쎄.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영화내내 얼굴을 찌푸릴지도 모르고,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고,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고, 영화관을 벗어나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뒤돌아설 것인가, 참혹함에 고개를 돌릴 것인가.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결국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가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절망을 어떻게든 마주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 십분의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백이십분의 절망을 버텨내야 하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마지막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뷰티풀'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그럼에도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우티풀'인 것.

맥거핀 2011-10-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이후경 기자는 단평에서 '그런데 죄지은 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권과 부권을 둘 다 지닌 욱스발에게만 면죄부가 주어질 때, 영화는 거짓 휴머니즘에 빠진다. 그의 가족이 가부장주의적 환영의 비호를 받는 동안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은 끝끝내 외면당한다.'라고 썼다.

글쎄..몇 가지 진술에 대해서 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시민권은 모르겠지만, 부권은 욱스발에게만 주어진것도 아니다. 또 무엇보다도 욱스발에게 과연 면죄부가 주어진걸까. 그는 그의 책임을 부인할 생각이 없으며, 관객 역시도 그 책임을 알고 있다. 가부장주의적 비호라고 했는데, 그것은 영화상으로 볼 때 어떤 비호나 죄사함보다는 일종의 심판에 가까웠다. 한편으로 영화가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을 다른 식으로 다루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거짓 휴머니즘이 되지 않을까.

맥거핀 2011-10-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수정. 4개->5개.
이 영화의 몇 씬이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머리 속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