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터웨이 - The Get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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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10분간의 장면은 왜 이 영화가 걸작인지를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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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1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세가 감독님이 샘 페킨파를 좋아하는줄은 전혀 몰랐어여,,

맥거핀 2011-02-11 17:31   좋아요 0 | URL
이명세 감독에게 페킨파가 접목되면 아주 괜찮을 것 같아요.
 
글러브 - G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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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조금)




이 영화 <글러브>에 대해서는 <씨네 21> 789호 '전영객잔'에 실린 안시환의 평에 대체로 동의한다. 안시환의 평은 이 영화가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려는 혐의가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간의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적인 감동 강조류 스포츠 영화들에 나왔던 거의 모든 클리셰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단 하나만은 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 빠져있는 것은 선수들 개개인의 개인사를 의식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선수들 개인의 여러가지 힘든 개인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에서 감동의 눈물을 짜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인사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은 투수인 명재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야수들은 그 흔한 아버지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편집과정에서의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간에 팀을 떠나는 선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이 어린 선수에게 카메라는 비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공동체를 버렸을 뿐이고, 공동체도 그를 버렸을 뿐이다. 이것에는 안시환의 평대로 확실히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우석의 최근의 다른 영화들도 (익히 분석되었듯이) 비슷한 혐의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미도>, <공공의 적> 시리즈, 최근작 <이끼>까지도.

안시환 평론가가 '전영객잔'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해버렸으므로,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그저 나름의 생각을 조금 더 붙여본다. <글러브>는 따뜻한 감동스토리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걸까..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위의 공동체주의 같은 부분들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강우석이 그려왔던 세계들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무서운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물어뜯는 무서운 사회이다. <실미도>나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의 적>의 아주 차갑거나, 아주 뜨거운 지옥의 세계, 그리고 <이끼>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글러브>는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선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의 분신같은 캐릭터인 김상남(정재영)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에게 주자가 무릎을 아작내겠다(?)라는 기세로 달려들라고 가르치는 부분 같은 것. 김상남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김상남에게 야구는 이겨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기는가는 그에게 그렇게 크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하게도, 왜 이겨야하는가, 혹은 이기는 것이 왜 필요한가는 아주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못된다(즉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는 사실). 아니면 다른 부분,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성심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라고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음악과 편집의 효과로 김상남이 매우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처리되지만, 나는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저것이 옳은 것인가. 약자를 동정하는 것, 약자를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될 일인가.

물론 이 장면은 여러 효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마치 이들을 놀리듯이 성의없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이 장면이 처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배제하고 보면, 이 장면은 확실히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지만, 약자를 조금이나마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심의 선수들은 청각장애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를 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점이라고 말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고.

강우석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손을 든다. 김상남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비장애인의 세계, 이들에게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라는 나교사(유선)의 시각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혀서 가슴 속 울분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기도 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의 무릎을 날려버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김상남은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석 감독의 태도는 다른 몇몇 곁가지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상남 본인과 관련된 부분들. 김상남이 야구계를 떠나게 된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러 사고를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야구계에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즉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한국야구의 엄청난 스타였다면 그가 버려졌을까. 어떻게든, 그는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김상남의 매니저는 항변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우석의 항변이기도 하면서 그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퇴물이 되면 버려지는 것,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길러야 한다. 마찬가지.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 세계에 뛰어들어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강우석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인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그런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야. 이 세계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 그러니 그저 중요한 것은 네가 강해지는 것 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것 뿐이야.

그러므로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일종의 '희망'에 의문이 생긴다. 그 희망은 어떻게든 이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투에 의해서밖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인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시스템으로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에 의지해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각 개인의 처절한 고투와 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안시환의 지적대로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이다. 대표적인 장면. 투수인 명재의 어머니는 명재가 성심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장애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재에게 항변한다. 너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 수 있어. 걔네들과 달라. 이렇게 말하는 명재의 어머니와 강우석 감독의 논리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장애인을 점차 비장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영화는 이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는다. 즉 이상하게도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 어머니에게는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그것은 강우석 감독이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만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강우석의 '희망'에 대한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을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의 세계는 여전하구나. 그 세계는 가장 아이러니컬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가 주어지는 세계다. 혹은 승리했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여전한 '그 세계'다.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예를 들어 <실미도>의 그들에게는 어떠한 마지막이 결국 주어졌는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끼>의 류해국은 어떤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세계에서 최소한(이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한다. 그들이 힘을 길렀을 때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의 박수는 결코 그들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궁금해진다. 시스템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스템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채 벌어지는 별개의 사투들, 유리된 희망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덧.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글이 (조금은) 길어졌다. 그러나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아무튼 강우석 감독은 스트레이트하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른 부분들까지 너무 스트레이트한 것이 (꽤나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트레이트한 것은 때로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은 거의 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야기에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즉,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던진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의 단점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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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0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으로는 강우석 감독 마음에 드는 작품이 이끼였던것 같아여,,그의 초기작들을 더 좋아하는편이지 만여..달콤한 신부들, 행복은 성적순, 누가 용의 발톱을(강제규 각본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강제규가 영화감독하지말고 차라리 각본을 더썼으면 거의 폴슈레이더급인데 ㅎㅎ) 그런반면 한반도 너무 손발을 오글거리게 만들더군여~

맥거핀 2011-02-09 22:24   좋아요 0 | URL
강우석 감독의 초기작 얘기를 하시니, 예전에 학생 때 친구랑 <미스터 맘마> 같이 보러갔던 기억이 나네요(왜 그 영화를 보러 갔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강우석 감독을 보면, 기획력이나 관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은 잘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물론 미장센을 중시하는 씨네필들에게는 거의 무시당하기는 하지만요. (일반관객과 시네필이 뭐가 다르냐는 질문이 여기에 필수적으로 뒤따르겠지만..)
가끔 특정 분야만 했으면 하는 감독들이 있지요. 감독하지 말고...시나리오는 직접 안 썼으면 좋겠다 싶은 감독도 있구요. (방금 전에 故 최고은 씨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던데,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들이 많아지는 추세도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참..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녹색광선 - The Green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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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카메라로 보는 고정될 수 없는 미묘한 심리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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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살의 - Intentions Of Mu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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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작 미니시리즈를 압축한 느낌. 이 여자, 웃기고도, 안타깝고도,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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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1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봤습니다..단 한번의 줌인에 그냥 쓰러졌습니다..심리 스릴러 서스펜스라면 이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여? :)

맥거핀 2011-02-14 21:42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에 하나네요. 지금까지 이번 영화제에서 본 작품 중 가장 좋아요.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작들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명불허전이더군요.
 
카페 느와르 - Café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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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들어있지만, 스포일러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중의 하나지만, 이 장면은 낯설어 보인다. 낯설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공간과 시간, 그 자체이다. 먼저 공간의 문제. 이 장면은 피사체를 아주 가깝게 당겨 찍고 있으며, 렌즈의 사용으로 소녀와 소녀 뒤의 공간은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은, 소녀 뒤의 배경이다. 아무도 없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으세요? 소녀가 앉은 햄버거집에는 아무도 손님이 없다. 그리고 저 뒤에서 종업원들만 바쁘게 움직인다. 글쎄. 십년을 넘게 패스트푸드점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이지만, 낯설게 왜곡되어 있는 이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시간. 당신이 소녀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용을 영화에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소녀가 햄버거를 물어뜯는 단 하나의 컷만 집어넣을 수 있다. 또는 햄버거집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부감숏으로 보여주는 컷 뒤에, 바로 소녀가 휴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즉 굳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또는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6개의 쇼트로 나누어- 정성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6개의 쇼트를 나눈 어떤 영화를 말하며, 왜 아무도 그 장면의 이상함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장면의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일은 소녀가 햄버거의 종이껍데기를 벗기고, 햄버거를 꾸역꾸역 다 먹기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있다. 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시간. 이 장면의 의미는 아마도, 소녀는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고 긴 시간들을.

그러므로 이 영화 <카페 느와르>의 시작부분에 관객과 맞닥뜨리는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일종의 정성일 식 선전포고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 두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공간의 문제부터. 이 영화는 많이 알려진 대로,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일단 먼저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서울은 사대문 안의 공간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옛날 지도를 삽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도 하고, 굳이 그 지도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몇 년간 살아온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빌딩숲으로 도배되어 버린 강남의 복제된 세계는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영화 속 남산타워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남산타워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디서나 우리를 굽어보는 남산타워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한 장면. 영수(신하균)와 관계를 맺은 미연(문정희)의 남편(이성민)은 차창 밖으로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본 후 조금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고는 운전대를 꺾는다. 여기에 첨언할 수 있는 것. 남산타워는 1969년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굳건하던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다는 사소한 사실.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방법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청계천 - 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고 썼던데,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화 속 청계천은 위험한 공간으로 보여짐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다리 아래의 청계천은 선화(정유미)가 이상한 남자에게 쫓김을 당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복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등불을 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에 흐르는 청계천의 트래킹 숏으로도 말해진다. 이것은 통상적인 청계천의 역방향 트래킹이기도 하려니와, 이 장면에서 청계천 다리 아래로 끝끝내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청계천 위의 여러 오래된 상점과 건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이 때의 카메라는 청계천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된다면,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영화 속에서 청계천이 등장할 때 내뱉어지는 첫 대사는 무려 "나쁜 새끼"이다. (물론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다른 미연(김혜나)이 영수에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욱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시간은 상당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장면은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장면일 것이다. 영수가 망치를 내려치려 할 때 멈춰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층계참에 멈춰선 아이들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동시에 TV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멈춰버린 것 같으나, 사실은 멈추지 않은 시간,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영수의 주관적인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속에서 미연(문정희)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영수에게 전하는 또다른 미연(김혜나). 그러나 우리는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미연이 멀쩡하게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글쎄.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여러 개월이 지난 것으로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라져 버린 여러 개월의 시간들 - 그것 역시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장면은 어떨까. 청계천의 24시간을 빠르게 돌려서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날림으로 지어진 청계천.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물론 영화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시간들은 영수가 사경을 헤매는 며칠이다. 이 며칠은 다시 현실의 시간들과 대응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이다(이 시작은 흑백으로 시작하여, 칼라로 돌아왔다가 다시 흑백으로 끝난다). 영수는 사경 속에서 크리스마스날 선화를 만나고(그는 거기에서 동방박사들을 본다), 동지(冬至)에 선화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하며(밤이 가장 긴 날), 그것을 이룬 후에 결국 숨을 거둔다. 그리고 2009년이 오고, 보신각에서 KBS가 숨긴 사운드를 이 영화는 복원하여 보여준다. 즉 2009년을 상징하는 이 장면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이것은 현실의 시간이라는 말이며,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시간과 이 시간을 대응하여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 시간들을 현실의 시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정성일은 다른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영수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즉 그는 아마도 가능했다면, 이 며칠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관객은 3시간 18분을 앉아있는 것조차 거의 임사체험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현실의 시간과 그대로 대응함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동진 씨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다른 어떤 것들로 물화(物化)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들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숨어들어가 있지 않고, 앞에 툭 튀어 나와 자꾸만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자주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거의 시간과 공간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때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백야>에서 나온 대사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19세기에 쓰여진 말들을 21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내뱉을 때의 이 시간의 교호작용들. 이것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리듬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리듬은 때로 영화의 장면들이 거의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런 영화의 리듬은 이 영화가 다른 수많은 영화들의 일종의 메타 텍스트가 되어버린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에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올드보이> 등등의 여러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격자처럼 수놓아져 있다(정성일 감독은 시네마톡에서 혹시 이 영화의 DVD를 발매하게 되면, 영화의 중간에 영향을 받은 장면들의 본래의 영화 제목과 그 장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부가기능을 넣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많은 영화들의 특정의 장면들, 혹은 특정의 느낌을 이 영화에서 살려내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리듬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나름의 리듬이 있고, 리듬을 제거한 그 장면이란 이미 '그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만이 강조되고, 스토리와 리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대신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간과 공간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장면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햄버거를 먹게 하는가. 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고 있는가. 해답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녀 뱃속의 아기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신하균의 죽음을 어떻게든 유예시키려는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은 정성일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예를 들어 다음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할 때 실제 죽이지는 않지만, 피 대신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와인, 혹은 미연의 얼굴에 뿌려지는 붉은 피와 같은 것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영수의 죽음이 유예되어야 하지만, 그가 끝내 죽어야 하는 이유. 청계천에서 영수를 극도로 증오한 후, 차에 치일 뻔한 다른 미연(김혜나)의 모습.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를 예수의 수난극에서 묻는 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대하는 정성일의 태도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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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잡설, 또는 의문을 덧붙인다.

1.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에서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하는 대로, 누구보다도 가장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인 것처럼 보여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대비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남성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지 못하다. 남성들은 청계천에서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따라가거나, 동물원에서 쓸데없이 말을 걸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거나(이 장면은 또한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은근슬쩍 담고 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나간 사건을 한탄하거나, 아니면..딸을 욕망한다. 반면, 여성들은 대체로 긍정적인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연대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미연의 딸과 친구의 대화, 그리고 은하(요조)와 미연(김혜나)의 멋진 오토바이 터널 씬,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소녀들의 연대.

2.
이 영화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연의 남편이 한 때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장면. 변절한 사회주의자, 또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거세된 사회주의자는 때로 어떤 것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박쥐>를 오마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박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영화니까.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신하균 때문이다. <박쥐>에서 수장된 후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하균은 이 영화에서도 물에 빠지고 나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신하균이 물에 젖은 몸으로 서점을 돌아다닐때 나오는 그 음악과 그 장면의 숨막히는 공포감, 그리고 '카페느와르'라는 제목이 나타날 때의 그 압박감은 압도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견뎌야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3시간 18분의 물리성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정말 무섭다.

4.
이 영화의 텍스트의 활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종종 소설의 텍스트가 손글씨로 등장하는데, 이 때 지속적으로 사운드가 텍스트와 불일치한다. 즉, 목소리는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음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유일하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은 마지막 한 번 뿐이다). 동시에 텍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은 그저 이해 없이,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는 안된다. 마치 이는 이 텍스트를 절대 읽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글씨를 그저 모양만으로만, 고유의 느낌으로만 이해하라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미연(김혜나)이 다른 미연(문정희)의 남편에게 보내는 육성 편지는 화면을 암전해버림으로써 주목하여 들으라는 듯이 느껴지는 반면에, 이를 이렇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좋은 반응들과 함께, 예상대로 개봉 후 몇몇 신랄한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가 물론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편으로 정성일의 위치에서 비롯된 문제가 개입된 것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정성일이 잘나가는 영화평론가이자, 이미 일종의 권력이 된 것도 그 하나의 이유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말실수 때문인가. 그는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영화에 별점 5개 만점 중 몇 개를 주겠는가라는 질문에 5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것이 왜 공격받아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리어 자신의 영화에 3개나 4개를 주는 감독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그것을 잘 알면서 5개 짜리 영화를 만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가장 좋다(물론 나도 그렇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일기조차 스스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빈정을 담아 말했다. 정성일 씨가 어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고. 글쎄. 자신만의 방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굳이 그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을까. 방의 보호벽이 없는 그 세계에 굳이 나와 이전투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정성일은 시네마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 것이 뻔하지만, 이 영화는 나와 영화적 피를 나눈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방에 들어오라고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만의 영화들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영화에는 있다. 선화가 택한 그 남자는 바로 앞에서 영수와 미연이 본 영화 속의 남자, <극장전>의 김상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성일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네마톡에서 말했다. "통상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는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극장전>을 삽입할 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즉,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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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1-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에서 놀라운 통찰력을 보게 되었습니다..본문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잡설에서 1번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번은 신동일의 나의 친구,그의 아내에서 장현성과 겹치며, 3번은 많이 놀랐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며, 저는 단지 박찬욱이 비발디를 재발견했다면, 정성일은 재배열을 통한 영화듣기를 시도했다라는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흑흑, 4번은 저도 대단히 흥미롭게 봤습니다.진짜로 그 텍스트를 외울때까지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싶어지더군여, 그리고 김혜나의 암전이 3번이더가여?, 저는 그 부분이 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저의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마음의 육성이었습니다. 5번은 음, 저는 적극적인 정성일 지지자지만, 그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비판도 어는정도 수용합니다. 어는 정도,,글 잘봤습니다..그리고 이번달 페이퍼의 선정되신것을 축하드립니다.(음악, 영화 베스트 선정 아직 유효한가요?^^)

맥거핀 2011-01-12 19:09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을 못했네요. 그 사회주의자 아버지 캐릭터는 장현성 캐릭터를 연상시킨다는 점을요. 정성일이 재배열을 통한 영화듣기를 시도했다는 것은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그러니 기회가 되면 글을 써주세요.)
텍스트의 활용에 대해서는 영화 종료후 시네마톡 시간에 묻고 싶었는데, 저까지 질문 기회가 오지를 않더라구요. 저도 그 텍스트를 다시 한 번 보고싶어요. 어떤 내용이었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조차 잘 안나지만. 김혜나의 암전된 육성 편지는 아마 3-4째쯤 나왔던 것 같아요.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기호로만 된 말들이라고 할까요. 아마 그 편지를 듣는 그 남자도 암흑 속에서 자기 마음 속 깊은 동공을 봤겠지요.
저 역시도 정성일의 영화를 비판하는 목소리 자체는 존중합니다. 다만, 요즘에는 왜 그렇게 빈정대며 글을 쓰는 경향들이 많은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글을 쓰다보면 빈정대는 표현이 들어갈 수는 있겠지요. 제가 쓴 어느 글들에도 있을 것이구요. 인간이니까요. 다만, 글들 내내 빈정대는 것으로만 일관하는 글들을 보면, 저까지 불쾌해지고는 합니다. 그건 이미 견해의 문제가 아니지요.
이달의 페이퍼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 글 중에서 하필이면 정성일 님의 말들을 그대로 옮긴 글이라, 민망하네요. 상당히.) 저는 최근에는 옛날 음악들(90년대 중후반)만 들어서 요즘 음악은 베스트를 할 만큼 많이 알지 못해요. 네오님이 혹시 좋은 요즘 음악들을 아신다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네오 2011-01-13 12:30   좋아요 0 | URL
아~ 빈정대는 글들이 많나요?? 참,,저도 종종 카페느와르를 블로그들이 어떻게 쓰나하고 웹핑을 합니다만,,일관적으로 빈정대는 글을 발견하지는 못했네요,,음,,카페느와르(를 방어하는) 글 반드시 쓰겠습니다..아직은 마구 생각중이라서요TT, 음악 제가 너무 보채는게 아닌지 걱정이네요^^; 지송여,,음악와 영화베스트10 선정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음악선정 대단히 신중해야 겠네여,,참고로 지금생각나는대로 에미넘과 카인웨스트, 벨앤세바스찬, 뱀파이어 위크랜드, 그리고 아케이드 파이어가 베스트5요)

맥거핀 2011-01-13 23:33   좋아요 0 | URL
몇몇 글들을 봤는데, 그런 방식의 글들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그런 방식들의 리뷰가 요즘 대세인것 같지만). 아무래도 저는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네오님의 후속작 글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카페 느와르에 대한 연작글을 쓰신다는 말씀 아직 유효한 거겠지요?
말씀해주신 밴드들과 뮤지션들은 대부분 낯익은데, 뱀파이어 위크랜드는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좋은 앨범 추천해 주시면 꼭 들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다른 음악들이 듣고 싶던 참이었어요.

2011-01-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2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6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